복음의 가치(value)로 합력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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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인상(impression)과 가치(value)
서론- 인상(impression)과 가치(value)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생명이 다시 살아나고 죄에서 벗어나 자유를 만끽하는 인생의 스토리들이 나타납니다.
반대편에서는 저항과 핍박 그리고 소동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3차 선교 여행을 살펴 보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여정도 바울과 그 동역자들의 여정과 비견 될만합니다.
이 여정은 멋진 지중해의 풍경을 구경하고
맛있는 그리스 음식을 맛보며 여기 저기 다니는 단순한 패키지 여행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아무 목적 없이 도파민을 자극하는
액티비티나 모험을 찾아 떠나는 여행도 아닙니다.
이 여정은 마치 목숨을 건 전투 같고
한편으로는 풍성하고 충만한 영적 체험으로 가득하고
시시때때로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보호와 인도를 체험하는
천로역정과도 같은 여정입니다.
바울과 그 일행이 닿는 도시 마다
그들이 전하는 복음의 진리와 상반된 가치로 사는 곳들이었습니다.
팍스로마나 라고 불리는 탄탄한 사회구조와
곤고한 신분질서 속에 그야말로 풍요롭고 잘 굴러가는 도시국가들이 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보냈던 팔레스타인이
가난하고 척박한 곳에서 가난과 착취 속에 신음하는 백성들이었다면
바울과 일행들이 만난 사람들은
풍요의 노예요
사회 구조에 순응하고 복종하는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닮아 있는 세상 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때,
심령이 연약하여 지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는
복음이 들어가기 상대적으로 용이하나
그 반대의 경우, 복음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기 어렵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때 필요한 것은 그들의 욕망을 자극 하는 것이 아닌 진정한 가치를 일깨우는 일입니다.
제임스 클레어 라는 뉴욕타임즈 베스트 셀러 작가는
"다른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가치를 제공하는 것에 집중하세요…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일은 다른 사람에게 탁월한 가치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제임스 클레어-
아무 문제 없이 풍족하게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에게 인생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문제를 제기해야 합니다.
복음은 아무 일 없는 인생에 엄청난 일을 벌이는 것입니다.
잘 굴러가는 것처럼 보이는 이세상에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선언하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풍요로운 요즘 시대에 그것이 다가 아니라고 딴지를 거는 것이 복음 입니다.
좋은 인상과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라이프 스타일과
잔잔한 시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고도의 마케팅은
사람의 인생을 옳바르게 바꾸지 못합니다.
복음의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결국 인생은 소동이 없이 편안한가로 평가 할 수 없는
더 깊은 가치를 따라 살아가야 하는 아주 고귀한 인생의 가치를 깨닫는 여정 입니다.
그것을 일깨우고 돌을 던져 파장을 일으키는 것이 우리의 역할 입니다.
2년반 또는 3년 동안 바울이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던
에베소는 로마도시 중에서도 큰 도시였고 아시아 지역의 수도로서 풍요로운 도시 였습니다.
도시의 수호신인 아르테미스 (본문:아데미) 신에게 제사를 올리며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소동을 일으키는 그 도(The way)”
“소동을 일으키는 그 도(The way)”
바울이 에베소에 머무는 시기에 에베소에 큰 소동이 일어납니다.
그 때쯤 되어 이 도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
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은으로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만들어 직공들에게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이 소동의 주동자는 데메드리오 라는 은장색(silver smith) 입니다.
23절 말씀에 의하면 이 소동의 원인을 “그 도” 때문 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도의 내용은 무엇일까?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전 아시아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데메드리오는 아르테미스 여신의 신상 모형을 은으로 세공을 해서 팔아 풍족한 삶을 살던 사람 입니다.
바울이 아덴에 들어 갔을때 가장 충격 받았던 것은 우상숭배가 만연한 모습 이었습니다.
오늘의 주제로 해석 하자면 우상은 비본질적인 인상을 제공 하지만 실질적인 능력이 없는 존재 이고
복음은 본질적인 구원을 주는 가치 공급자 입니다.
이성과 철학의 중심지에 미신과 우상이 난무하던 것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바울이 전한 하나님에 대한 말씀은 헬라지역 전체에 퍼져 있던 우상숭배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 제기 이고 답이었습니다.
데메드리오는 분노 합니다.
우리의 이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 당하게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아데미 여신과 그 신전도 무시 당하게 될 것이고 아시와 천하에 그 위엄도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 합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소동이 일어나고 영적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아데미 신의 이름으로 격분하고
일심으로 모여 복음을 거부하고 공격합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분노가 가득하여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
온 시내가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가는지라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네미여!!”
온 시내가 들썩 들썩하고
바울의 일행을 잡아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갑니다.
경기장 가득 살기가 가득 찹니다.
거대한 스타디움에 모여서 한 목소리로 구호를 외칩니다.
에베소의 야외경지장은 수용인원이 2만 5000명이었다고 합니다.
몇 만명이 그것도 한 목소리로 같은 구호를 외치면
소름이 끼칩니다.
유럽 유명축구 구장에서 선수가 슛을 시도하면 숨죽여 바라보다가 그물을 흔드는 순간 일제히 환호할 때를 상상해보십시오
그 위압감은 대단 합니다.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강력한 인상을 남겼을 것이고 당장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할 것이 없다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이 모임은 무슨 결과를 만들어 냈을까?
결론 부터 말씀 드리자면,
“Nothing!!” 입니다.
오늘 아무 까닭도 없는 이 일에 우리가 소요 사건으로 책망 받을 위험이 있고 우리는 이 불법 집회에 관하여 보고할 자료가 없다 하고
이에 그 모임을 흩어지게 하니라
그렇게 요란하게 몇만명이 모여서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네미여!!” 두시간 동안 외치고 무고한 사람은 괜히 잡아다가 위협하더니
결국 당국의 지도하에 허무하게 그 모임이 흩어지게 됩니다.
몇 몇 사람에 의해서 시작되어서
흥분되고 격분된 감정에 의해서 일어난
이 소동은 결국은 해프닝으로 끝나고 맙니다.
이런 모임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문장이 있습니다.
바로 32절 입니다.
사람들이 외쳐 어떤 이는 이런 말을, 어떤 이는 저런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
의분을 가지고 모이는 것은 좋은데
왜 모인지도 모르고 모인 모임은 결국
아무 성과 없이 흩어지게 됩니다.
표면적으로 데메드리오는 아데미 여신과 신전을 지키기 위해서 분연히 일어난 것 같이 포장하였지만
사실은 이 소동의 근본적인 원인 다른데 있었습니다.
1992년 클린턴이 미국 대통령이 되면서 내세웠던 아주 유명한 슬러건이 있습니다.
“it’s economy, stupid!”
데메드리오와 그의 동료들이 이 소동을 일으킨 이유는 다름 아닌 경제적인 이유였습니다.
25절에서 “우리의 풍족한 생활이 이 생업에 있는데…” 라는 언급이 그의 본심을 보여줍니다.
그의 가치관을 잘 보여주는 구절이 있는데
27절에 “우리의 영업이 천하여질(disrepute) 위험이 있을뿐 아니라…” 라고 말합니다.
영업이 천하여 진다는 것은 여신이 에베소 사람들의 중심에 있지 않으면
그만큼 사람들이 신상을 찾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수입의 하락과 함께 자신들의 직종이 각광 받기 힘들다 라는 말입니다.
물질적 풍요와 사회적 평판을 동일 시 하는 데메드리오의 가치관을 보여줍니다.
이런 생각은 비단 데메드리오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동조했던 많은 사람들은 비슷한 생각을 했고
이 가치관이 에베소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아데미 신전은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과 비교하는 역사적 사료가 있습니다.
아데미와 파르테논 신전의 주인인 아테네 여신은 각각 에베소와 아테네의 수호신이고
그 도시를 대표 합니다.
두 신 모두 여신 입니다.
원래 아르테미스 여신은 사냥의 신이고 처녀 입니다.
나중에 아시아의 풍요와 다산의 신과 결합하여 아데미 여신은 기히한 모습으로 변질 됩니다.
보시다 시피, 18-24개의 유방을 가지고 있고 온갖 동물과 열매들로 장식 된 모습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흉물스러운 아데미 여신의 모습은 인간의 풍요를 향한 갈망을 투영하고 있다고 해석 할 수도 있습니다.
언제나 이상이 순수할 때,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물질에 오염되면서 타락하고 기이하게 변질 됩니다.
우리의 신앙도 처음에는 순수하게 예수님만 바라보고 시작하였다가
내가 바라는 것들을 하나 둘씩 갖다 붙이면서
나의 욕망과 야망이 덕지 덕지붙은 흉직한 모습으로 변질되는 가련한 성도들을 보면 가슴이 찢어집니다.
그 순수했던 성도가 세속에 물들어 헤메는 모습을 주님이 보신 다면 얼마나 안타까워 하시고 아파하실까요?
우리는 데메드리오와 그의 동료들을 욕할 수 없습니다.
논 크리스챤이 그런 가치관으로 인생을 세속적 욕망에 휩싸여 사는 것은 어쩌면 당연 합니다.
더욱 슬픈 것은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이들이 세속의 욕망에 끌려
주의 이름으로 악을 행하고 풍요의 전쟁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예수를 모르고 교회를 무시하고 돈과 명예만 쫓는 삶을 산다면,
자식 공부 잘 시켜서 의사 판사 만들어서 나의 면류관으로 만들어 뭐 할것입니까?
비현실적인 이야기 같습니까?
향후 10년에서 15년 내외로 우리에게 닥칠 미래의 실제적인 이야기 입니다.
데메드리오와 에베소 사람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비본질적이고 순간의 감명이나 짧은 감동을 주는 성공스토리와
나의 욕망을 자극하는 라이프 스타일을 향해 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 일생을 좌우할 나아가 내 영혼을 구원할 복음의 가치와 삶의 방식을, “그 도” (The way)를 추구하고 있습니까?
“그 도”(The way)를 따르는 가치 중심의 삶
“그 도”(The way)를 따르는 가치 중심의 삶
오늘 본문 초반에는 조금은 동떨어진 내용이 나옵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마 동안 더 있으니라
단원의 주제는 “에베소에서 일어난 소동”인데,
뜬금 없이 바울이 앞으로의 선교 계획을 제시 합니다.
마치, 앞으로 있을 큰 소동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말입니다.
이미, 에베소에서의 사역은 게임이 끝난 상태였습니다.
이제 다음 스텝을 준비해야 할 때였습니다.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흥왕하고 또 세력 까지 얻은 상태 입니다.
에베소에서의 소동은 바울과 동역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그들의 눈은 이미 메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최종적으로 그 시대의 중심지인 로마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도를 따르는 삶은
에베소에 흥분한 군중들의 급조된 모임과는 전혀 다른
목적의식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비전과 사명에 붙잡힌 자들은
잠시 머무르는 세상의 삶에 소망을 두지 않습니다.
해야 할 일과 가야 할 곳을 정확히 알았고
그 주변에는 믿음직한 동역자들이 즐비 했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와 디모데, 아볼로와 에라스도 가이오와 아리스다고 등과 그외에 수많은 이름 없는 성도들이 주변을 에워싸고
복음을 전하고 전하는 일을 돕기 위해 한 팀으로 뭉쳐 있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바울을 섬기는 것도 아니고
개인적인 유익을 얻기 위함도 아니었습니다.
누군가 바울보다 앞서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가야 한다면
순종하여 먼저 그곳에 가서 본진이 올 길을 예비하며 복음을 전합니다.
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마 동안 더 있으니라
누군가는 그 선교를 위해 물질로 시간으로 헌신 합니다.
누군가는 에베소의 극장으로 들어가 변론하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자기 집을 공개하여 교회로 사용 합니다.
누군가는 재무를 담당합니다.
나와 온 교회를 돌보아 주는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하고 이 성의 재무관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어떤 이는 로마로 가서 바울과 함께 투옥 됩니다.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이들은 막무가네식의 열정이 아닌
정확하고 동일한 목적을 공유하고 있었고
동일한 가치관으로 움직이는 한 팀이었습니다.
이들을 통해 하나님은 교회를 세우시고
수 많은 사람의 영혼을 구원 하십니다.
이것이 복음의 힘 입니다.
이것이 에베소의 군중과 다른
십자가의 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모습 입니다.
결론
결론
어떤 기독교인 두명이서 대화를 하는데,
한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인생이 뭔줄 아냐고 묻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것 다 누리다가 죽기 직전에 예수 믿고 천국 가는 인생이다’
최근에 들은 얘기 중에 가장 슬프면서 가증하고 내 속에 무엇인가 불끈 하고 올라오게 했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복음을 왜곡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홀히 여기는 말이 있을까? 통탄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의 도가 천국만 가면 되는 사람들에게는 미련한 삶의 방식 입니다.
평생을 밀알처럼 희생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려고 애쓰고 몸부림 치는 사람들의 모습이
멸망하는 세속의 사람들 눈에는 미련하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따르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불필요한 일을 사서 하는 미련한 사람들 입니다.
제가 만났던 어떤 목사님 부부는 퀸즈랜드의 아웃백과 농장들을 무대로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은 한 명이든 두명이든 예배드리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전도 대상자가 있다면 400km 든 600km 든 달려 간다고 합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 하신 예수님 말씀을 사명으로 받고 그렇게 하신다고 합니다.
등록교인 0명의 그 교회를 목회하는 그분들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미련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더 후원해드리지 못해 참 안타까운 마음을 갖고 있는 선교사 두 가정도 마찬 가지 입니다.
이탈리아에서 그 어렵다는 음악 공부를 해서 정처 없이 떠돌아 다니는 집시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는 모습과
호주에서 부모님 모시고 편안한 삶을 살아도 되는데 굳이 튀르키에 라는 이슬람 나라에서 한 명이라도 복음 전하겠다고 몸부림 치는 선교사님 이나
모두 십자가의 도를 걷고 있는 것인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에베소에 살고 있는 바울과 같은 사람들 입니다.
풍요의 여신을 숭배하며 풍요롭게 안정되게 살면 되지만 굳이 바울처럼 복음 전하며 소동을 일으키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입니다.
한 가지 더 생각 해봅시다.
우리 주변에 복음을 몰라서 십자가의 예수 사랑을 몰라 데메드리오와 에베소 사람 처럼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비기독교인들을 생각 합시다
우리는 언제 부터 논 크리스챤과 우리를 나누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도 예수 몰랐을때, 저들과 같았고
저들은 겉으로는 풍요롭지만
생계의 압박과 가난의 공포 속에서
사주고 싶은 것을 사주지 못하여 슬퍼하고
눈물 값과 생명값을 오늘의 일당과 등가교환하며
그 날의 고됨을 소주 한잔으로 풀며
이게 인생이지 인생 뭐 있어 하며
하루 하루를 견디며 살아가는 인생들을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주님은 지금도 우리가 우리 주변의 데메드리오를 향해 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들에게 따뜻한 교제와 복음의 가치를 전하기를 원하십니다.
비록 뾰족한 가시로 찌르고 날선 말로 상처 주고
우리를 대적하여 위협하여도 말입니다.
너무나 귀한 생명을 아무 가치 없는 돈을 위해 버리고 때론 스스로 목숨을 끊기 까지 하는 논 가련한 인생들을
우리 아버지께서는 끊는 원통함으로 타는 간절함으로 구하길 원하십니다.
복음은 힘이 있습니다.
복음은 인생을 변화시키는 가치를 줍니다.
인상적인 인생이 아닌
아버지의 타는 마음을 알고
나를 던져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삽시다
우리는 우리 삶 속에서 복음 전달자로
가치 전달자로 삶의 선교사로 살 수 있습니다.
죽어 가는 영혼을 살릴 수 있습니다.
그런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복음의 가치를 알고 십자가의 도를 묵묵히 걷는
복된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찬양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