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같은 사람도 변화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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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의 만남
예수님과의 만남
사람은 절대 겉만 봐서는 알 수 없는 존재입니다. 여기 이렇게 보면 우리가 전부 천사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속은 어떤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어떤 사람의 진짜 모습을 보려면 그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은 그 사람의 극히 작은 일부분밖에 안 되고, 가짜일 수도 있습니다. 얼마든지 꾸며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면(마음속)을 같이 보아야 진짜로 어떤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성경에 나오는 신앙의 사람들은 너무 훌륭하고 믿음이 아주 대단해 보입니다. 그렇지만 내면(마음)이라는 관점으로 보면 그들도 우리와 똑같이 갈등했습니다. 또한 똑같이 힘든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덮는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분들은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시각으로 오늘은 사도 요한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요한의 두 가지 별명
1) 보아너게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있는데 그중 하나였던 사람이 요한입니다. 그에게는 별명이 두 개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보아너게”입니다. 이 별명은 영광스럽게도 예수님께서 붙여주신 별명입니다. 그렇지만 좋은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딱 보실 때 ‘너는 바꾸려면 상당히 시간이 오래 걸리겠다’라는 뜻으로 붙여주신 별명입니다.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막 3:17)
예수님은 굉장히 재미있는 분이셨고 별명을 잘 지어주셨습니다. 열두 제자 중 야고보와 요한이 형제였는데 그들에게는 보아너게, 즉 ‘우레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셨습니다.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성격이 불같다는 말입니다. 굉장히 성격이 급하고 시끄러운 사람, 시한폭탄같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사람, 아주 불안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에게 그의 형 야고보와 함께 ‘보아너게’(우레의 아들)라는 별명을 붙여 주셨습니다. ‘번갯불에 콩 구워먹을 녀석들’이라는 뜻입니다. 형제가 둘 다 성격이 불같았다는 말입니다. 이 별명에 어울리는 이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에피소드 두 개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49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 (49-50절)
여기서 요한의 성격이 잘 나타납니다. 요한이 누구입니까? 성경의 요한복음, 요한일서, 이서, 삼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쓴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데 요한의 원래 성격은 이렇게 아주 불같고 강하고 급했다는 겁니다.
요한이 보니까 누군가가 귀신을 내쫓는데, 자기 선생님의 이름으로 하는 겁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나가라.”라고 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자기들과 함께 다니는 자기편이 아니고 예수님과 가까이 있는 제자도 아닌데, 그래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예수님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하니까 귀신을 내쫓을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사람에게서 능력이 나타나는데, 다만 요한이 볼 때는 ‘저 인간은 우리 편이 아니야.’라고 한 겁니다. 그것을 보며 시기와 질투도 느꼈을 것이 분명합니다. ‘아니, 능력의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우리도 귀신을 못 쫓아내는데,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도 않으면서 지가 뭔데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하며 시기심과 질투심이 올라옵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 사람이 그렇게 못하게 막았다는 겁니다. ‘네가 뭔데 우리 선생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하지 마!’라고 한 겁니다.
요한의 성격을 보여주는 바로 이 사건은 요한이 참 유치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요한이 열두 제자 중에 가장 젊은 제자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10대 후반 정도였을 겁니다. 그런데 그는 참 유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성격을 보여주는 또 다른 에피소드가 바로 그다음에 계속 나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북쪽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이 있는 남쪽 유대로 여행하시려면 중간에 사마리아가 있는데, 보통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사이가 안 좋았기 때문에 동쪽으로 삥 돌아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시간도 절약할 겸 그냥 지나가시면서 사마리아인의 촌으로 이제 들르려고 하십니다. 그때 먼저 사람들을 보내십니다.
“51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52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그들이 가서 예수를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 (51-52절)
원래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은 서로를 아주 싫어합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목적지가 자기들의 마을이 아니라 예루살렘이라고 하니까 그들이 삐져서 들어오지 말라고 하며 못 들어오게 한 겁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하는지라” (53절)
그때 열두 제자 중 그 말을 듣고 극도로 흥분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바로 야고보와 요한 형제입니다. 보아너게, 우레의 아들입니다. 그들이 뭐라고 합니까?
“54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55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56 함께 다른 마을로 가시니라” (54-56절)
이것을 보면 이들은 두 가지 면에서 상당히 유치합니다. 하나는, 너무 흥분해서 앞뒤 안 가리고 아무렇게나 말했습니다. 사실 자기들이 어떻게 하늘에서 불을 내립니까? 그럴 능력이 있습니까? 그럴 능력도 전혀 없으면서 어떻게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게 한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꾸짖으십니다. 여기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셨다고(55) 나와 있는데 그냥 꾸짖으셨다고 해도 되는데 왜 굳이 “돌아보시며”라는 말을 넣었을까? 그 순간 몇 초가 흐른 겁니다. 누가 황당한 얘기를 하면 우리는 보통 어떻게 합니까? 보통 사람은 대개 기가 막힌 듯 쳐다보지 않습니까? 예수님도 이들이 아주 황당한 얘기를 하니까 이렇게 돌아보시면서 그냥 두라고 하신 겁니다.
여기 꾸짖으셨다는 말에 주(노트)가 달려 있는데, 어떤 고대 사본에는 꾸짖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무슨 정신으로 말하는지 모르는구나 인자는 사람의 생명을 멸망시키러 온 것이 아니요 구원하러 왔노라.” 이것은 ‘지금 내가 사람들을 멸망시키러 온 게 아니고 구원하러 왔는데 무슨 불을 내려서 죽이겠다고 하느냐? 그만두어라.’ 하고 꾸짖으신 겁니다.
또 한 가지는, 자기들을 영접하지 않는다고 해서 극단적으로 다 멸하겠다고 분노하는 것을 볼 때, 이들의 마음이 어떤 상태인 것을 알 수 있습니까? 그들의 내면에 상당히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그러지 않는데 야고보와 요한이 그랬다는 것은, 야고보와 요한이 성격이 아주 편협하고 분노가 많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특히 요한은 이미 49~50절에서 자신의 미성숙한 인격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으니까 못하게 막았습니다. 이때 형은 안 했는데 요한이 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마도 요한이 더 강하고 불같은 성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형과 같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인격적으로 굉장히 미성숙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에게는 다른 사람을 받아줄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사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품어주는 것은 성숙한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라고 요한복음 13장에서 ‘새 계명’을 주셨는데, 그것은 ‘너희도 나와 같이 성숙한 사람이 되어라.’라고 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와 요한이 이런 식으로 나온 것을 보면, 그들은 일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진행되지 않을 때 분노하는 미성숙한 사람들인 것을 보여줍니다. 성숙하지 않으니까 이런 식의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2) 사랑하시는 제자
그런데 이렇게 ‘보아너게’(우레의 아들)라는 별명을 가진 사도 요한이었지만, 또 하나의 별명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놀랍게도 ‘사랑하시는 제자’, 즉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제자였다는 겁니다. 이 ‘사랑하시는 제자’가 누구입니까? 성경에 그것이 요한이라고 나와 있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오직 요한이 쓴 요한복음에만 이 표현이 등장합니다. 다른 데는 안 나옵니다.
감을 잡으셨습니까? 누구라고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그가 누구인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표현이 요한복음에만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 누구겠습니까? 요한입니다. 또 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그 사람이 바로 요한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제자가 요한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한은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제자였습니다. 물론 다 사랑하셨지만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표현하실 정도로 예쁨을 많이 받았습니다. 다른 어떤 표현보다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로 불리고 싶었던 사람, 다른 어떤 것보다 예수님이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에 마음이 가장 많이 움직인 사람이 바로 요한입니다.
여기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결국 그의 마음은 그토록 사랑에 민감했다는 뜻입니다. 그토록 사랑을 갈구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2. 요한의 잘못된 마음 상태와 그 후의 변화
그렇다면 ‘보아너게’라고 불릴 정도로 급하고 불같고 편협하고 미성숙한 성격과, 또한 사랑받는 자로 불리고 싶고 사랑에 민감했던 모습을 종합해 보면 어떤 결론이 나옵니까? 요한은 마음속에 해결되지 않은 내적 상처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버림받은 것, 즉 거절감의 상처가 있었습니다. 또 그로 인하여 나오는 굶주림의 상처가 있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요한은 권위의 존재로부터 버림받은 상처와 그에 따른 굶주림의 상처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꾸 사랑을 갈구하며 사랑받고 싶어 한 겁니다. 인정받고 싶고 받아들여지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일이 잘 안되면 자기가 앞에 나가서 큰소리치며 황당한 말을 하고 불같이 펄펄 뛴 겁니다.
보아너게인 야고보와 요한 형제와 맞먹는 사람이 또 하나 있는데, 열두 제자의 나머지 10명 중에 오히려 그들을 능가할 수도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베드로입니다. 원래 시몬인데,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사람을 항상 따로 데리고 다니신 것을 봅니다. 높은 산에 올라가서 변화되실 때도 이 세 사람을 따로 데려가시고, 나중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도 제자들을 데리고 가서 나머지는 놓아두고 이 세 사람은 더 깊이 데리고 들어가셨습니다.
그걸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사람을 너무 편애하셨다.’라고 말합니다.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도 열두 제자 중에 있었는데, 야고보와 요한 형제와 베드로만 거기에 더해서 데리고 가시고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는 안 데려가셨으니 이 세 명을 편애하신 것이라고 해석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편애하신 게 아닙니다. 그것이 무엇을 보여주는가 하면, 이 세 명이 최고 문제아였다는 것입니다. 그냥 놓아두면 어디로 튈지, 무슨 짓을 벌일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데려가신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냥 놓아두어도 괜찮으니까 두고, 이 세 사람은 요주의인물이기 때문에 데리고 다니신 겁니다. 딴짓 못하도록.
보십시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고 나오자마자 바로 무엇을 했습니까? 베드로가 칼로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잘라 버리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따로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삶이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못 견딘다는 겁니다. 그때마다 분노합니다. 마음이 치유되지 않아서, 상처를 치유받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당시 요한의 내적 상태, 마음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성경과 교회사가 알려주는 것처럼, 사도 요한은 어떤 사람입니까? ‘사랑의 사도’입니다. 보아너게로서 그토록 불같고 쉽게 분노하고 상처가 많았던 그가, 정말 놀랍게도 사랑의 사도로 변화된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가 기록한 요한일서를 죽 읽어보십시오. 그는 누구보다 사랑에 대해 많이 말하며 사랑을 강조합니다. 그가 파악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이신 하나님입니다. 그가 이해한 복음도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6)
그가 이해한 복음은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가 알고 있는 제자로서 삶의 원리도 역시 사랑이었습니다.
“15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누구나 살인하는 사람입니다. 살인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속에 영원한 생명이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은 압니다. 16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자매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요일 3:15-16, 새번역)
그가 받은 은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먼저 사랑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사랑은 이 사실에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보내어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요일 4:10, 새번역)
우리가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니까 아들을 보내서 죄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그가 이해하고 경험한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결단하고 순종한 헌신이 바로 그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형제자매들에게도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신 이 새 계명을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았으니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라고 한 것입니다.
요한은 사랑으로 하나님을 알았고, 사랑으로 복음을 이해했고, 사랑으로 은혜를 깨달았고, 사랑으로 사역을 감당하며 평생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원래 누구보다 사랑에 굶주렸던 사람이었는데, 참된 사랑을 이해하고 나니까 그 사랑을 실천하는 아름답고 성숙한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원래 “하늘에서 불을 내려서 그냥 다 태워 죽여 버릴까요?” 이랬던 불같은 사람이었는데, “사랑하자. 사랑하자.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하는 사랑의 사도로 변화되었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11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요일 4:11, 새번역)
요한 자신의 마음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채워지면서 자기가 은혜를 받고 변화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으니까 이제 그 사랑을 같이 나누자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교회에서 추구하는 바입니다. 우리가 함께 하나님을 이렇게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서로 목장에서 또 삶 속에서 다른 성도들과 이 사랑을 함께 나누자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도 바로 그러한 은혜를, 아니 그보다 더한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요한은 원래 거절감의 상처가 있는 사람입니다. 요한이 어떻게 자랐는지 우린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자라면서 뭔가 거절감의 상처가 있었고, 그래서 사랑이 결핍된 사람이었고, 사랑에 굶주린 사람이었고, 항상 사랑을 찾아다니는 사람이었고, 항상 인정받고 싶어 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일이 있을 때 다른 제자들은 가만히 있어도 “하늘에서 불을 내려 다 태워 버릴까요?”라고 하며 나서고, 또 귀신을 쫓아내는데 못하게 막으며 앞에 나서서 인정받고 싶었던 겁니다. 그리고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 금방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지니까 그때부터 그는 말할 때마다 다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부어졌다.”라고 말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이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는데 어떻게 그렇게 받았는지 방법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그는 그런 사랑을 받았습니까? 우리도 그걸 알아야 변화될 수 있습니다. 여기 우리 중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겉으로는 다 멀쩡해 보이지만, 사실은 속으로 고민과 상처를 안고 살아가지 않습니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거절감의 상처도 있고 굶주림의 상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없어도 괜찮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없어도 얼마든지 잘살 수 있다는 사림이 누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받아주시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요한이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다면 우리도 그 방법을 알아야 그 사랑을 똑같이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방법을 보여주는 것이, 아주 직접적으로는 아니지만 간접적으로 다음 구절에 나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고, 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완성된 것입니다.” (요일 4:12, 새번역)
결국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흘러넘쳐서 이웃에게로 흘러 나가고, 그 사랑을 함께 나누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이 마음의 상처를 해결하고 치유 받는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상처를 치유 받고 문제를 해결 받는 비결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배하고 말씀 읽고 묵상하는데 다 혼자 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렇게 해도 혼자 할 때 해결되지 않습니다. 물론 혼자 하나님을 만날 때도 은혜를 주시고 이렇게 같이 있을 때도 은혜를 주십니다. 그런데 그 받은 은혜를 그냥 가지고 혼자 사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때, 그것이 흘러 나가게 할 때 상처가 해결됩니다. 혼자만 있어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도 이 사랑을 경험할 때 요한과 같이 변화되어 사랑의 사도가 될 수 있습니다. 그 비결은 바로 이 사랑을 이웃에게 흘러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새 계명’으로 주신 것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해라.”입니다. 귀찮고 힘든데 억지로 하라고 하신 게 아니라, 우리를 살리시기 위한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이 예배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자리입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나가 목장에서 마음을 나누며 서로를 위해 기도해 줄 때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고,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나눌 때 우리가 치유되고 변화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러분, 혹시라도 삶 속에 분노의 문제가 있습니까? 조금 더 들어가 보면 거절감의 상처가 있기 때문은 아닙니까? 어떤 굶주림의 상처가 있기 때문은 아닙니까? 그런데 내 뜻대로 잘되지 않으니까 분노하고 그러는 건 아닙니까?
바로 이 사랑으로 나오십시오.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제대로 세워져 있지 않기 때문에 수시로 폭발하고 분노하고 관계가 어려워지고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하나님 앞에 나오고, 그 사랑을 경험하고, 그 사랑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과 형제자매들에게 이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그토록 불같던 요한이 변화되었다면, 우리도 변화될 수 있습니다. 보아너게였던 요한이 사랑의 사도가 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놀랍게 변화되어 이 사랑을 삶 가운데 실천하는 사랑의 사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