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루기아에서 배를 타고
Notes
Transcript
제목: 실루기아에서 배를 타고
본문: 사도행전 13:4-5
찬송: 302장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제목: 실루기아에서 배를 타고
본문: 사도행전 13:4-5
찬송: 302장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말씀의 문을 열며>
2천 년 전, 동지중해에서 가장 번화한 실루기아 항구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위용을 자랑하는 이 거대한 항구는 당시 세상의 모든 영광이 집결된 곳이었습니다. 거대한 상선들과 위풍당당한 군함들이 오가는 황제의 자유항이었습니다.
그런 화려한 항구에 세 명의 나그네가 찾아왔습니다. 그중 한 사람은 특히 눈에 띄었습니다. 작은 키에 안짱다리, 맞붙은 두 눈썹, 유난히 큰 코를 가진 초라한 모습이었고, 평생 불치병을 앓아 몸도 쇠약했습니다. 실루기아의 화려함과 거대함에 비한다면, 그는 그저 가장 보잘것없는 존재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 그 위대한 항구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바로 이 보잘것없어 보이는 세 사람의 작은 배 한 척의 출항이었습니다. 세상은 그날 그 작은 배가 세계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을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더라
라고 말합니다.
바울과 그 일행이 실루기아에 서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각자의 실루기아에 서 있습니다. 세상의 부와 권력, 명예와 성공이 집결된 이곳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배를 탈지 고민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할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린 사람>
그런데 놀라운 것은, 실루기아에서 배를 탔던 그 바울도 처음부터 이런 위대한 선택을 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그는 한때 정반대의 길을 가던 사람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200킬로미터나 떨어진 다메섹까지 가서라도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오려 했던 교회의 박해자였습니다. 그런 그를 주님께서는 다메섹 도상에서 친히 만나주셨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러나 놀랍게도 바울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 곧바로 사도로 쓰임받지 않았습니다. 물론 바울도 즉시 주님의 증인이 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의 성격으로 보아 당장이라도 복음을 전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바울을 아라비아 광야로 보내셨습니다. 그곳에서 3년이라는 시간 동안 경건 훈련을 받게 하셨습니다. 광야에서의 3년은 매우 고독하고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은 바울이 온전한 주님의 그릇이 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시여기서이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후입니다. 주님은 바울을 그의 고향 다소로 보내셨습니다. 그곳에서 무려 13년을 보내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마치 실패자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한때 예루살렘에서 촉망받던 젊은이가 이제는 고향에서 잊혀진 사람처럼 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사관학교 입학이 곧 장교가 되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과 같습니다. 누군가가 사관학교에 입학했다면, 그는 장교가 되기 위한 관문을 겨우 통과했음을 의미할 뿐입니다. 필요한 훈련을 거쳐야만 나라와 민족을 위한 장교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다윗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셨을 때, 그날로 다윗을 왕좌에 앉히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골리앗을 물리친 영웅이 되고도 그는 왕이 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사울 왕의 칼날을 피해 근 10년 동안이나 도망 다녀야만 했습니다.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다윗은 진정한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나의 삶이 멈춰 선 것처럼 보이더라도 절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분명한 응답을 받았는데도, 아직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실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훈련을 거친 사람만이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그 기다림의 시간이 결코 버려진 시간이 아닙니다. 광야 같은 시간일지라도, 다소에서의 긴 칩거와 같은 시간일지라도, 그 시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빚어가시는 귀한 때입니다. 내가 뜻한 바와는 전혀 다른 상황 속에 처해 있을지라도, 바로 그 상황 속에서 나를 믿음의 사람으로 훈련시키고 계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리십시오.
다윗과 바울을 택하신 하나님께서 각각 10년과 17년 만에 그들을 주님의 도구로 본격적으로 사용하셨듯이, 하나님의 때가 이르면 우리 역시 반드시 하나님의 본격적인 도구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세상의 항구에서 택한 하늘의 길>
17년이라는 긴 준비의 시간이 지난 후, 마침내 바울은 실루기아 항구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은 그 시대 최고의 항구였습니다. 주전 300년경 셀레우코스 1세가 건설한 이 항구는, 단순한 항구가 아니었습니다. '셀레우코스의 것'이란 의미를 지닌 셀류케이아라는 이름이 말해주듯, 왕의 권력과 영광이 집중된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300년이 지난 후, 이 항구는 로마 제국의 차지가 되어 더욱 확장되었고, 황제의 직속 관할 하에 있는 자유항이 되었습니다. 왕의 항구에서 황제의 항구로 격상된 것입니다.
바로 그 항구에서 바울은 자신의 인생이란 배를 출항시켰습니다. 그의 모습은 너무나 초라했습니다. 불치의 병을 앓는 몸이었고, 시원찮은 언변에 보잘것없는 외모였습니다. 그 거대하고 화려한 실루기아 항구에서 그는 가장 하찮은 존재였을 것입니다. 누구 하나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며, 그가 탄 작은 배 한 척이 무슨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2천 년이 지난 오늘, 모든 것이 뒤바뀌었습니다. 셀레우코스 왕조를 세운 셀레우코스 1세도, 그 땅을 정복한 로마 황제도, 그들이 건설하고 확장했던 실루기아 항구도 모두 사라져버렸습니다. 오늘날 터키의 작은 어촌 체브릭이라 불리며 그곳에는 폐허만이 남아 인간 영광의 덧없음을 증언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날 가장 보잘것없어 보였던 바울, 그는 오늘도 영원 속에 살아있습니다. 세계 역사는 거대한 로마 황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 초라한 몰골의 바울에 의해 새로워졌고, 또 새로워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새로워질 것입니다.
왜 이런 극적인 반전이 일어났을까요? 그것은 바로 선택의 차이 때문이었습니다. 실루기아 항구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욕망의 바다를 향해 자기 욕망의 배를 출항시켰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달랐습니다. 그는 주님의 사랑과 생명을 세상으로 흘려보내는 통로가 되기로 결단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결국엔 허무와 폐허로 끝날 세상의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사랑과 생명이었습니다. 그가 선택한 것은 세상의 영광이 아닌 영원한 생명이었고, 황제의 권세가 아닌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실루기아의 이러한 운명은 우리에게 거울이 됩니다.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도 우리의 실루기아 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우리에게 더 큰 배를 타라고, 더 안전한 배를 타라고, 더 화려한 배를 타라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의 배들은 결국 폐허로 끝날 것이라는 사실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실루기아에서…>
오늘날 실루기아의 폐허를 보면서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가 바로 우리의 실루기아가 아닐까요? 우리의 일터에서, 우리의 가정에서, 우리의 마을에서 등 매 순간이 우리에게는 실루기아와 같은 곳입니다. 마치 실루기아 항구에서 어떤 배를 탈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던 바울처럼 말입니다.
때로는 세상의 배가 훨씬 더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이번만 눈감아 주면 다음엔 더 좋은 기회가 올 거예요", "이 정도는 다들 하는 거예요", "요즘 세상에 너무 깨끗하면 살아남기 힘들어요" 라는 달콤한 속삭임을 들을 때, 우리는 고민합니다. 그것이 마치 황제의 호화로운 배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한 성도님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분은 작은 병원을 운영하시는 의사 선생님이었습니다. 주변의 많은 병원들이 보험료를 더 받기 위해 진료 내역을 부풀리는 것이 관행처럼 되어있었지만, 이 성도님은 늘 정직하게 진료하고 청구했습니다. 어느 날 건강보험공단에서 정기 감사가 나왔을 때, 감사를 마친 직원이 "원장님, 제가 여러 병원을 다녔어도 부당 청구가 없는 병원은 이번이 처음입니다."라고 말하며 놀랍게도 그 감사 담당자는 오히려 성도님께 식사 대접을 했다고 합니다. 정직하게 걸어온 그 걸음이 세상 속에서 빛이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각자의 실루기아에서 선택해야 합니다. 당장은 보잘것없어 보이는 순종의 배를 탈 것인가, 아니면 화려해 보이는 세상의 배를 탈 것인가? 2천 년 전 그날, 실루기아의 모든 화려한 배들은 사라졌지만, 바울의 작은 배가 만들어낸 복음의 물결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선택이 세상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결단이 당장은 손해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가장 지혜로운 선택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항해를 시작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사공 되어 주실 예수님을 바라보며, 이제 인생의 닻을 올리는 우리 중앙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참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서 있는 자리가 바로 실루기아임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세상의 거대한 물결 앞에서 우리의 작은 결단이 때론 초라해 보이고, 우리의 순종이 어리석어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을 통해 보여주신 것처럼, 주님께서는 보잘것없어 보이는 우리의 순종을 통해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 가심을 믿습니다.
주님,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때를 신뢰하며 기다리게 하옵소서. 광야 같은 시간도, 고향 다소에서의 긴 시간도 우리를 빚어가시는 주님의 손길임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주어진 이 시간이 결코 버려진 시간이 아님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바른 선택을 하게 하옵소서. 일터에서, 가정에서,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세상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방식을 선택하게 하옵소서. 당장은 손해보는 것 같고, 뒤처지는 것 같아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세상의 화려한 항구는 결국 폐허가 되었어도, 주님의 사랑과 생명을 전한 바울의 작은 순종은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열매 맺고 있음을 기억합니다. 우리의 작은 순종이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역사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인생이란 배를 온전히 주님께 맡깁니다. 성령님께서 친히 우리의 사공이 되어 주옵소서. 우리를 통해 주님의 사랑과 생명이 이 땅 가운데 흘러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우리의 실루기아에서…> 25분 설교할 시 사용
세계 역사는 거대한 로마 황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 초라한 몰골의 바울에 의해 새로워졌고, 또 새로워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새로워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오늘날 실루기아의 폐허를 보면서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가 바로 우리의 실루기아가 아닐까요? 우리의 일터에서, 우리의 가정에서, 우리의 마을에서 등 매 순간이 우리에게는 실루기아와 같은 곳입니다. 마치 셀류케이아 항구에서 어떤 배를 탈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던 바울처럼 말입니다.
때로는 세상의 배가 훨씬 더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이번만 눈감아 주면 다음엔 더 좋은 기회가 올 거예요", "이 정도는 다들 하는 거예요", "요즘 세상에 너무 깨끗하면 살아남기 힘들어요"라는 달콤한 속삭임을 들을 때, 우리는 고민합니다. 그것이 마치 황제의 호화로운 배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이 약속하는 그 모든 것들이 결국에는 실루기아의 운명을 피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늘날 터키의 작은 어촌에 남은 폐허처럼, 세상의 영광은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습니다.
반면 작은 순종의 걸음은 영원한 열매를 맺습니다. 주일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의 헌신이, 찬양대에서 드리는 겸손한 예배가, 이웃을 위한 조용한 봉사가, 정직하게 지켜낸 작은 결단이... 이런 것들이 바로 우리가 탈 수 있는 '바울의 배'입니다.
혹시 지금 여러분 중에 이런 고민을 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내가 선택한 이 작은 순종의 길이 과연 바른 걸까?" "세상의 방식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방식을 선택한 것이 어리석은 걸까?"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바울의 작은 배가 세계 역사를 바꾸었듯이, 우리의 작은 순종도 하나님 나라의 역사가 될 것입니다.
제가 아는 한 성도님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분은 작은 병원을 운영하시는 의사 선생님이었습니다. 주변의 많은 병원들이 보험료를 더 받기 위해 진료 내역을 부풀리는 것이 관행처럼 되어있었지만, 이 성도님은 늘 정직하게 진료하고 청구했습니다.
어느 날 건강보험공단에서 정기 감사가 나왔습니다. 모든 서류를 꼼꼼히 살피던 감사 담당자의 표정이 점점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감사를 마친 그 직원이 성도님께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제가 여러 병원을 다녔어도 부당 청구도 없고, 실수도 없는 병원은 처음입니다. 이렇게 바르게 병원을 운영하시는 의사 선생님은 처음 뵙네요."
놀랍게도 그 감사 담당자는 오히려 성도님께 식사 대접을 했다고 합니다. 정직하게 걸어온 그 걸음이 세상 속에서 빛이 된 것입니다. 그분의 작은 순종이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각자의 실루기아에서 선택해야 합니다. 당장은 보잘것없어 보이는 순종의 배를 탈 것인가, 아니면 화려해 보이는 세상의 배를 탈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진정한 영광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길에 있다는 것을. 비록 그 길이 좁고 험할지라도, 그 끝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역사가 기다리고 있음을 믿습니다.
<말씀의 문을 닫으며>
이제 도전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배를 주님의 뜻대로 출항시킬 때입니다. 어떤 배를 띄우시겠습니까?
세상은 여전히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더 큰 배를 타라. 더 안전한 배를 타라. 더 화려한 배를 타라.'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2천 년 전 그 날, 실루기아의 모든 화려한 배들은 사라졌지만, 바울의 작은 배가 만들어낸 복음의 물결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선택이 세상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결단이 당장은 손해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가장 지혜로운 결정이 될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도 바울처럼 인생의 배를 출항시키는 거룩한 결단을 내립시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우리의 작은 순종이,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흘러갈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의 물결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배를 타십시오.
우리의 항해를 시작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사공 되어 주실 예수님을 바라보며, 이제 인생의 닻을 올리는 우리 중앙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