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발은 땅에, 두 눈은 하늘에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62 views

굿

Notes
Transcript

<서론>
〈낭독의 발견〉이라는 오래된 TV 프로그램에서 원재훈 시인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작년 가을에 잠자리 한 마리가 사무실로 날아왔었다. 사무실에는 아홉 개나 되는 창문이 있었다. 그런데 잠자리가 나가지를 못하는 것이었다. 잠자리는 겹눈, 홑눈 합해서 만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만 개의 눈이 다 필요 없었다. 창밖으로 나갈 수 있는 한 개의 눈만 있으면 되는데, 그 한 개의 눈이 없었던 것이다. 그것을 보고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난 지금 만 개의 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 개가 필요한데….’”
저는 이 원재훈 시인의 말이 세상 사는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자세라고 봅니다. 사람들은 지혜와 지식을 찾고 이 정보화시대에서 남들보다 많은 정보를 가진 사람, 남들보다 많이 알고 배운 사람이 성공한다고 믿습니다.
2000년대 초부터 융합인재교육이라고 해서 초등학생 정도 되는 나이의 자녀들을 태권도, 피아노, 미술학원 등등 이것저것 배워보게 하는 열풍이 불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죠. 한때 태글리쉬라고 해서 태권도와 영어를 같이 가르치는 것이 도장의 트렌드가 되었고, 피아노 학원에서도 영어를 가르쳐주기도 했습니다.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수 있다는 말은 부모들의 발걸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습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개 지식이 많을수록 좋습니다. 만 개의 지식, 우리에겐 필요하죠. 많은 지식을 싫어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지혜자는 말하기를 “내가 지혜롭고 슬기로운 일이 무엇인지 온 마음을 다 쏟아 살펴 보았지만, 그것도 다 헛되다.” 또 2장에서는 “지혜가 어리석음보다야 낫지만, 지혜로운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모두 똑같이 무덤 속으로 직행하는데 지혜를 얻기 위해 힘쓰고 애쓸 일이 대체 뭐냐?” 답답해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얘기하나요? 물론 여러분은 이미 전도서의 결론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말씀드리자면, “만 가지가 아닌 단 한 가지 지혜면 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 그 한 가지가 진정한 지혜이자 지식이다.”
성도 여러분, 세상의 지식을 다 섭렵하고도 사춘기 자녀의 마음 하나 알아주지 못하는 부모도 있고, 정치, 경제, 사회 세상 돌아가는 원리를 다 섭렵해 놓고도 같이 사는 배우자의 마음 하나 모르는 사람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만 개의 눈도 필요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눈을 제대로 가진다면 그 하나의 눈을 통해 만 개의 눈을 가질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말씀을 함께 보시면서 전도자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며,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나누겠습니다.
<본론>
1) 그럼 먼저 우리 전 1:12-13을 읽겠습니다.
전도서 1:12–13 NKRV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그리고 전 1 18 도 읽겠습니다.
전도서 1:18 NKRV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전도서를 쓴 솔로몬이 내린 결론치고는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전무후무한 지혜를 가진 사람이 기껏 한다는 말이 “지혜가 많을수록 괴롭다”라니 아리송합니다. 왜 해 아래 지혜가 많을수록 괴로운 것일까요?
역사 속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인류의 문명과 과학이 발달하고, 사상과 철학이 발전하면서 사람들이 곧바로 한 일은 무엇입니까? “아 세상은 신이 만든 게 아니라. 과학적 이론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보이는 것만 믿을 수 있다.” 신의 존재를 뇌리에서 지우는 작업을 했습니다.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으로 유명한 리처드 도킨스 교수는 “신을 믿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교의 석좌교수였습니다. 유서 깊은 세계 최상위권 대학에서 교수를 한 사람이죠. 그는 자신의 지식을 이용해 열심히 기독교를 비판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펜타닐이라는 진통제를 아십니까? 원래는 극심한 고통을 겪는 말기 암환자나 대형 수술 환자용 진통제로 사용하기 위해 개발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약물의 효과가 강력해서 마약으로 악용되고 있지 않습니까? 미국에서 이와 같은 약물로 사망하는 사람이 매년 7~8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당장 멀리 가지 않아도 우리는 성경의 바벨탑 사건에서 이런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기술로 높은 탑을 쌓는 게 식은 죽 먹기도 아니고, 온갖 기술들, 기하학, 수학, 운반기술, 벽돌 굽는 일 같은 건축기술 등을 동원해야 가능한 일 아니었겠습니까? 갖고 있는 모든 지혜와 지식을 싹싹 긁어 모아야 가능한 일이었겠죠. 그런데 이 모든 지혜의 목적, 이 모든 지혜의 방향이 무엇이었나요? 창 11 4
창세기 11:4 NKRV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다시 말해 하나님처럼 높아지자. 우리 이름 좀 날려보자.
성도 여러분, 솔로몬이 지혜를 찾고 찾아 발견한 것은 결국 무엇이었습니까? “아, 언제든지 이 지혜가, 이 지식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간의 목적과 생각에 따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걸 발견한 것입니다. 지혜와 지식의 목적이 나를 위한 것이라면, 사람들의 박수를 받을 수는 있어도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는 위험한 도구가 된다.
그러니까 솔로몬이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되는 거예요? 전 1 14-15
전도서 1:14–15 NKRV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구부러진 것도 곧게 할 수 없고 모자란 것도 셀 수 없도다
해 아래에서 열심 지식과 지혜를 쌓는 사람들의 모습이 마치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대요.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바람을 잡는다”가 하나의 단어입니다. 원래는 “노력”이라는 뜻이에요. 어떻게 하면 사업을 번창하게 할까? 어떻게 하면 자녀의 입시를 성공시킬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성공적인 노후를 보낼 수 있을까? 어떤 우량주에 장기투자를 할까? 지혜를 찾아다닌다는 사람들의 노력이 어때요? 많은 이들에겐 현명해 보일 수 있어도 전도자의 눈에는 그저 헛된 노력으로밖에 안 보인다는 겁니다.
또 어떻습니까? 인간이 아무리 지혜가 많아도 구부러진 것을 곧게 할 수 없대요. 개혁을 부르짖던 정치인과 혁명가들이 역사 속에 얼마나 많이 있었습니까? 법학과 철학을 공부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를 공산주의가 대체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계급이 사라지고, 진정한 자유와 평등이 도래하는 세상이 올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그 결과는 소련과 지금의 북한이죠. 구부러진 것이 펴지기는커녕 더 굽어졌습니다. 공정한 세상을 만들겠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권력을 잡으면 어떻게 변질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자란 것도 셀 수 없대요. 새번역 성경을 보면 “없는 것은 셀 수 없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원문에선 “세다”가 수동태 동사인데요, “없는 것, 모자란 것은 측량될 수 없다. 세어질 수 없다”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눈에 보이는 것만, 당장 눈 앞에 있는 것만 헤아릴 수 있고, 측량할 수 있고, 계산할 수 있다는 겁니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게 전부예요. 그래서 세상이 말하는 지혜라는 게 기껏 잘 먹고, 잘 살고, 문제를 해결해주는 차원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우리가 자주 듣는 말도 있죠. “보여주면 믿겠다” 그게 세상 지혜라 그렇습니다. 보이는 것만 셀 수 있는 세상 지혜의 한계입니다.
3) 그렇기 때문에 만 가지 지혜를 갖고 있어도 헛될 뿐입니다. 전도서는 지혜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헛됨은 ‘허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어로 ‘헤벨’이라고 하는데 우리 성경에는 ‘헛됨’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만, 원래 뜻은 ‘숨결, 입김, 수증기’입니다. 겨울철 숨을 내쉬면 입김이 눈에 보이지만, 잡을 수 없고, 잠깐 눈에 보였다 곧바로 사라집니다. 그렇기에 헛됨은 곧, ‘짧음’을 가리킵니다. 이 헤벨이라는 단어는 사람의 이름으로도 등장합니다. 바로 아벨이죠. 헤벨과 아벨은 그 어원이 같습니다. 아벨의 삶을 보십시오. 이 땅에서 잠깐 살다가 형에게 살해당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헤벨의 삶을 산 아벨을 통해 우리는 인생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습니다. “짧다”는 것이지요. 야고보서에도 나옵니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이런 우리의 운명, 우리의 이 인생을 가리켜 “해 아래”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헤벨’과 정반대 되는 단어가 전도서에 등장합니다. 우리 함께 읽겠습니다. 전 3 11
전도서 3:11 NKRV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해 아래 입김과 같은 짧은 헤벨의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무엇을 주셨습니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영원을 히브리어로는 ‘올람’이라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전도서에는 두 가지 세계가 나옵니다. 하나는 해 아래 인생. 해 아래에 있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해가 뜨고 지는 시간의 흐름 속에 있다는 뜻입니다. 영원한 것 없이 시간이 흐릅니다. 헤벨의 세상에서는 누구든지 시간에 올라탔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을 따라 청년과 중년 그리고 노년의 때를 거쳐 허무하게 죽게 됩니다.
그러나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 영원한 세계 곧, 올람의 세계가 있습니다. 해 위의 인생이 있습니다. 그곳은 영원합니다. 시간의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우리가 해 아래 이 땅에서 기쁜 일이 생겨도 하루이틀 시간이 지나면 첫날 같은 기쁨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해 위의 세상은 영원해서 시간이 흐르지 않기 때문에 시들시들해지거나 익숙해지거나 하지 않고 처음 기쁨이 영원한 곳입니다. 해 아래에서 짧은 인생을 살아갈 때 시간이 흐르다보면 첫사랑도 잊게 되고, 구원의 감격도 익숙해지고, 매일 듣던 말씀에 감흥이 사라져도 저 영원한 해 위의 인생은 보고 싶은 예수님 직접 만나게 될 때의 그 감격과 기쁨이 영원할 것입니다.
결국 전도자가 하는 말이 무엇인가요? 저와 여러분은 헤벨의 세상을 살아가지만 다시 말해, 두 발은 이 땅을 딛고 서 있지만, 우리의 두 눈은 해 위의 인생을 향해라. 영원한 인생을 바라보며 살아라. 기독교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해 아래 살지만, 해 위의 것을 위해 사는 사람. 결국, 진정한 한 가지 지식이자 지혜는 무엇입니까? 무엇이 해 아래 인생이며, 무엇이 해 위의 인생인지를 아는 것. 전도서는 헤벨이 뭔지, 영원이 뭔지를 가르쳐주면서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앞으로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헤벨을 위해 살텐가? 올람을 위해 살텐가? 성도 여러분, 전도서 말씀을 통해 비록 지금은 땅을 벗하며 살지만, 영원을 위해 살아가는 삶을 살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4)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의 지혜는 유한하고, 한계가 있기 때문에 도무지 이 영원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무한대의 개념을 알지 못합니다. “천국에 가면 매일 예배드린다고? 그것 참 지루하겠군” 겨우 이 정도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영원, 무한함을 경험해 본 적도 없고, 어떻게 생각해야 할 지조차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죠. 해 아래에서 도저히 해 위의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인간을 위해 해 위에 계신 분이 해 아래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성경은 아주 아름다운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 1 14
요한복음 1:14 NKRV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아멘! 올람의 세상에서 헤벨의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직접 내려오신 분, 바로 예수 그리스도. 영원하신 분이 시간이 흐르는 세상 속으로 내려오셨습니다. 무한하신 분이 인간의 그 작은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은 이제 영원한 삶을 위해 이 땅을 살 수 있습니다.
순교자 짐 엘리엇 선교사가 선교를 떠나기 전 이런 고백을 남겼지요.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 영원하지 않은 것을 포기하는 자는 결코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는 짧은 헛된 인생에 목숨을 걸지 않습니다. 헤벨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인생의 남은 순간을 오직 영원을 위해 살게 됩니다.
5) 그렇다면 이 짧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면 될까요? 입김처럼 사라지는 짧은 세상을 소중하게 여기면서 사랑하고, 기뻐하고, 감사하고, 용서하고, 오늘을 사랑하며 사는 삶. 전도서는 이것을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세부적인 내용들을 전부 말씀드릴 수 없기에 오늘 주제 안에서 우리가 한 가지를 기억했으면 하는데요, 바로 성공자와 승리자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성공과 승리는 그 결과가 다릅니다. 성공은 어떻습니까? 추구하고 얻을수록 더욱 갈망하게 됩니다. 해 아래 성공은 금방 지나가는 것이어서 아무리 많이 누리고 소유해도 만족은 잠시뿐 그 뒤에는 허무가 찾아옵니다. 성공하면 내가 그 기쁨을 소유한 것 같지만, 바람처럼 잡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공하면 인생이 편안해질 수는 있어도 평안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성공한 사람은 자신의 노하우를 간증할 순 있어도 시편의 말씀처럼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는 간증은 못합니다. 억만금을 가진 사람을 향해 성공했다고 할 순 있어도, 승리했다고 말하진 못합니다. 왜냐하면 성공해서 승리를 얻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승리는 예수님이 주셔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요한복음 16:33 NKRV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서 성공했노라”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성공하신 분이라 승리하신 분이며, 해 위의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도 성공을 이룬 사람이 아닌 승리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승리하셨습니다. 이 땅에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승리를 이루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승리를 우리가 믿는다면 우리도 승리한 자입니다. 내가 이룬 것은 없지만, 그분의 승리가 나의 승리가 됩니다.
제이워십이 부른 <승리자>라는 찬양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시험당할 때 승리자도 고뇌하며 괴로워하지만, 그 때에도 물러서지 않네. 시험당할 때 승리자도 상처받고 괴로워하지만, 그 때에도 앞을 향해 가네” 우리는 크게 성공할 수도 있고 작게 성공할 수도 있고, 비교적 덜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감사함으로 받고 누릴 수도 있어야겠지만, 없다고 비관하거나 열등감에 빠지는 것은 이미 승리한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해 위의 삶을 경험한 사람은 해 아래의 삶을 누릴 수도 있지만 굳이 없더라고 실족하지 않습니다.
함께 빌립보서를 읽겠습니다. 빌 4 11-13
빌립보서 4:11–13 NKRV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바울은 풍족함을 잘 누릴 줄도 알았고 감옥에 갇힐 정도로 궁핍해졌을 때도 좌절하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할 줄 알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족함 때로는 궁핍함을 경험할 때,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의 승리로 말미암아 나 역시 변함없는 승리자임을 기억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진정한 승리자인 줄로 믿습니다. 누군가에겐 발 뻗고 자는 휴식시간을 여러분은 예배로, 식당 봉사와 성가대, 여러 직분과 교사와 기관 모임 등으로 하나님 앞에 헌납하는 사람입니다. 이미 해 위의 인생, 올람의 인생을 맛본 사람만이 가능한 일인 줄로 믿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궁핍한 상황에 처해 통장의 잔고를 확인해야 할 때도 있지만, 승리를 향해 나아가는 줄로 믿습니다. 승리자가 가는 해 위의 세상은 돈으로도 못 가는 나라이며, 승리의 상징은 이 땅에서 얼마만큼의 성공을 거두었나가 아니라 얼마만큼 해 위의 삶을 살았는가이기 때문입니다.
[강남중앙침례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계시는 최병락 목사님은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해 위를 본 사람은 해 아래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 올람을 경험한 사람은 헤벨에 아까운 시간을 쏟아붓지 않습니다. 해 아래에서 일어나는 큰일도 해 위로 올라가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맑은 날씨에 비행기가 이륙하는데 갑자기 검은 구름이 끼고 비가 오기 시작하며, 번개가 치며, 금방이라도 비행기가 추락할 것 같고, 기체가 흔들리고 천둥소리가 창문을 두드린다. 그러나 비행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비상해서 구름 위로 날아오르면,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이것이 해 아래 인생과 해 위 인생의 차이다.]
<결론>
일본에서 잠시 목회를 하셨던 목사님이 있었는데, 그분이 경험한 일화를 함께 나누면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이 목사님이 일본 도쿄에서 목회를 하고 있을 때, 한번은 도쿄의 한 교회에 초청을 받아 설교를 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예배시간에 특송 순서가 있었는데 남자 세 분이 나오더니 찬양을 하더랍니다. 그런데 이 세 남자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저기서 걸어오는 모습이 큰 체구하며, 걸어나오는 자세하며, 팔과 다리에 보이는 커다란 문신들하며... 소위 말하는 야쿠자였던 거죠. 이분들이 앞으로 나와 아주 아름다운 찬양을 부릅니다. 찬양이 끝나고나서 그 중 한 분이 짧은 간증을 합니다. “여러분 우리 세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 모두 야쿠자 출신들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아내들이 다 한국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라고 말하면서 세 사람이 동시에 왼손을 쫙 펼쳐보이는데 그 왼손 새끼손가락이 다 없는 겁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일본 사람들은 다 알았기 때문에 분위기가 숙연해졌습니다.
손가락 하나가 없는 사연은 이랬습니다. 이 세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나서 하나님의 사랑, 그 구원의 은혜가 너무 감격스러우니까 더 이상 야쿠자 생활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두목을 찾아갔대요. “이 조직을 떠나겠다” 처음에는 두목이 농담하는 줄 알았다가 진담이라는 걸 알고 나서는 모든 조직원들을 다 불러모으게 했습니다. 부하들이 다 모이자 탁자 앞에 칼을 하나 꽃더랍니다. 무슨 뜻이에요? 나갈 거면 손가락 하나 자르고 나가라 그래서 이 세 사람이 식탁에 꽂혀있던 칼을 빼서 자신들의 손가락을 절단하고 조직을 떠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 간증을 마치고나서 숙연해진 교인들을 향해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무엇을 잘라내셨습니까”
성도 여러분, 영원을 사는 사람은 유한한 것으로 나를 채우려는 사람이 아니라, 잘라낼 줄 아는 사람이고, 잠깐 눈에 보이는 수많은 것들을 포기할 줄 아는 사람이라 믿습니다. 유한한 것을 얻어 성공자가 되기보단 영원한 것을 위해 영원하지 않은 것을 포기할 줄 아는 승리자, 두 발은 땅을 디디며 살아가지만, 두 눈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해 위의 인생을 살아가는 승리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