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 9 회복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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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9장
성경에는 많은 기도문이 나오는데 그 중에서 가장 긴 기도문은 느헤미야 9장이다. 그 핵심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가 무릎을 꿇는 것이다. 여기서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의 흥망성쇠를 조명하며 기도하고 있다. 9장의 기도는 8장의 수문 앞 광장에서 선포된 말씀의 결과이기도 하다. 말씀에 투영된 자는 자신을 보면서 저절로 무릎을 꿇게 되고 자복의 기도가 나올 수 밖에 없다.
말씀이 기도의 원천이 되었기 때문이다. 말씀이 기도의 원천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영적 균형 감각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기도도 많이 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고, 은혜가 넘치는 사람으로 소문난 사람이지만, 말씀의 균형을 잃어버리면 어느 순간에는 자신도 모르게 어긋나는 것을 볼 때가 있다.
그렇다면 왜 말씀을 통한 기도에 능력이 있을까?
복음주의 신학자 달라스 윌라드는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책이서 이렇게 표현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모든 잘못된 것들을 밀어내고 바꾸는 새 창조를 통해 우리를 이 땅에서 독특한 자리에 서게 해 준다. 말씀을 들을 때 마치 물과 세제가 옷을 올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듯 말씀은 우리의 성품의 구석구석 파고든다” 지금 수문 앞 광장에서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말씀이 그들의 영혼의 구석구석을 씻긴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들은 말씀에 씻겨 마음이 변화를 받아 회개의 기도에 이른 사람들이었다. 수문 앞 광장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말씀을 통해 우리의 영혼이 날마다 씻겨지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한다.
느헤미야 기도의 핵심이 무엇인가? 1-2절에 나와있다. “그 달 스무나흗 날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옷을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8장에서 수문 앞 광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크게 기뻐했다. 그런데 갑자기 분위기가 반전된다. 잔칫집이 돌연 초상집이 된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슬피 울며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상황이 된 것이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그들의 죄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죄를 자복했다. 그들의 죄 뿐 아니라, 열조의 죄 때문에 슬퍼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 자신과 조상의 죄 때문에 울며 금식하고 베옷을 입고 티끌을 뒤집어 썼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통회했던 데는 또 하나의 이유는 “주를 섬기지 아니하며 악행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가 오늘날 종이 되었는데”(9:35-36) 이스라엘 백성들은 악행을 그치지 않고 죄의 노예로 살아왔다. 그렇게 죄의 근성에 속박당하는 것이 그들로서는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이러한 아픔을 오늘날 우리도 느껴야 한다. 사실 우리도 죄의 노예의 사슬을 끊을 길 없어 신음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다. 왜 우리는 원치 않는 죄에 끌려가거나 죄의 종이 되는 것인가? 달라스 윌라드는 자신의 책 <영적 훈련>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죄는 평범한 인간의 삶을 험오스러운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죄의 즐거움에 빠지면 평범한 삶이 하찮은 것으로, 무의미한 것으로, 심지어 험오스러운 것으로 보이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복과 찬양의 기도를 하게 하심으로 그들의 죄 짐을 벗게 하신 것이다.
4절에서 ‘부르짖다’ 는 것은 자복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깐 지금 한 무리는 자복하고 있고 다른 한 무리는 송축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금식하고 티끌을 뒤집어쓰며 주님 앞에 엎드렸을 때, 레위 사람들이 앞에 나와서 그들 중 한 무리는 죄를 자복했고, 또 한 무리는 하나님을 찬양했다. 이렇게 ‘자복’ 과 ‘송축’의 장문의 기도가 9장인 것이다.
찬양하는 기도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성신들과 그리고 땅과 땅 위에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9:6) 하나님께 송축하고 있는 찬양하는 기도를 할 때 첫 번째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지으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셨다는 것은 내가 내 생명의 보존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삶을 내가 통제하지 않고 창조주 하나님이 나를 통제하심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나도 모르게 저절로 찬양하게 될 수 있다. 하나님을 송축하고 찬양하는 기도를 할 때 기억해야 할 두 번째는 “우리가 택함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주는 하나님 여호와시라 옛적에 아브람을 택하시고 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주시고”(9:7)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고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워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찬양할 때 하나님이 나를 택하셔서 인도하시고 구원하심을 감사드려야 한다. 그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이어서 느헤미야는 아브라함의 부르심과 출애굽으로부터 시작되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재진술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왜 하나님을 찬양하는가? 뒤에는 애굽 군대가 쫓아오고 앞은 홍해가 가로막힌 그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그들을 구하셨을 뿐 아니라 광야 생활 중에도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길을 비춰주셨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택하시고 인도하신 그들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함으로 그 은혜를 깊이 깨닫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하나님을 제대로 찬양하고 싶은가? 그러면 우리를 인도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재조명하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신 것처럼 오늘 우리도 그렇게 인도하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의 삶의 여정을 인도해 주셨다. 누가 뭐라고 하든 내 삶은 나 스스로 이끌어 온 역사가 아니라 홍해를 가르는 이적과 기사를 베푸신 하나님의 역사임을 확인하라. 스페인 철학자 조지 산타냐나는 “과거를 잊는 자는 그것을 되풀이할 운명이 될 수 밖에 없다” 고 했다. 이것은 영적으로도 그렇다.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교훈을 잊고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여 죄의 노예 자리로 가면 우리도 이와 똑같이 되는 것이다.
2. 자복하는 기도
이것은 통회하는 기도요, 회개의 기도이다. 이에 관한 내용이 9장 16-28절에 나온다. 그들은 무엇을 자복했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옛날의 악습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것을 자복했다. 우리의 죄의 본성은 잘못된 옛날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한때 빠졌던 죄의 습성으로 돌아가 다시 휘청거리려는 것이다. 주님을 섬기고 헌신하기로 결심한 다음에도 수많은 유혹을 이겨 내지 못하여 옛날의 부끄러운 모습으로 돌아가는 경우들을 우리는 종종 보게된다.
우리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보는 것은 반복되는 죄의 악습이다. 17절 말씀처럼 “종 되었던 땅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문자적으로는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고난을 피하고자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려는 것이지만, 이것은 사실 우리의 생각이나 몸과 마음이 조금만 기회가 주어지면 옛날의 습성으로 돌아가려는 것을 말한다. 한 마디로 악의 중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악의 중력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게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것이다. 누구든지 의의 고난보다는 죄의 쾌락을 탐하기 마련인데, 이것은 죄성을 가진 인간에게 죄의 중력이 강하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왠만해서는 이러한 죄성을 끊어내기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신앙의 삶에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세속의 모든 죄악된 중력을 압도하는 은혜가 주어지길 기도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스라엘 역사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자복했다. 17-18절은 시내산에서의 역사이고 22-26절은 가나안에서의 역사이며 나머지는 사사기까지의 역사이다. 그들은 이러한 역사적 장면들을 보면서 자복하였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복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반역의 역사는 한마디로 믿음의 금도를 넘었기 때문에 일어난 것들이었다.
시내산에서 금송아리를 만들어 하나님을 배신하였던 것을 자복하였다. 하나님을 모독한 것을 회개한 것이다. 가나안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족속을 쳐서 그 자손에게 들어갈 땅을 차지하게 해 주시고, 견고한 성읍들을 정복하게 해 주셨고 기름진 땅에서 배불러 먹게 해 주셨음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은혜를 저버리고 하나님을 거역하며 율법을 등졌고 하나님의 선지자를 죽이는 죄를 지었다. 하나님에게서 그 어느 민족보다도 많은 은혜를 받아 누린 이스라엘 민족이 불순종하고 그분의 율법을 저버렸던 것이다. 지금 느헤미야와 백성들은 바로 그 죄를 자복하고 있다. 우리도 그동안 베푸신 은혜와 축복을 다시 한번 돌아보며 은혜를 저버렸던 죄를 자복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사사 시대의 죄를 자복하고 있다. 사사 시대는 죄의 악순환이 반복된 시기이다. 사사기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범죄하고 난 다음 죽을 지경이 되어서야 겨우 하나님 앞에서 자복했다. 그러면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시고 그들을 구원해 주시고 죄에서 돌이키게 해 주셨다. 그런데 얼마 지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은혜를 잊고 또다시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었다. 그러면 또 어려움을 겪고 힘들어 하다가 결국 회개하는 악순환을 거듭했다. 우리 하나님은 인간이 지치지 않는 범죄행위에 매를 대시지만 조금이라도 머리를 하나님을 향해 들면 그저 용서하시고 받아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왜 하나님은 인간의 못된 근성을 받아주신는 것인가?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를 기다리시되 한이 없이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죄악의 못된 버릇으로 똘똘 뭉친 우리를 길들이시는 방법이다. 우리가 자발적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도 살아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광야길에서도 사사시대에도 백성들에게 자주 징계를 하셨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 경계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말씀을 듣지 않았다. 그래서 이후 바벨론의 포로가 되고 여러 가지 수난을 겪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자비의 손을 놓지 않으시고 참으시고 사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셨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이것이 복음이다.
자복의 기도를 드려라. 우리의 발은 날마디 씻지 않으면 냄새가 나게 되어있다. 우리는 천국 가는 그날까지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받지 않으면 한날 한시도 살 수 없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날마다 하나님께 자복하고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드려라.
특히 오늘 본문에서 32-35절을 보면, 그전까지는 ‘그들’ , ‘열조’ , ‘조상’이라는 3인칭을 많이 썼는데 여기에서는 ‘우리 하나님이여’ , ‘우리에 대해서’, ‘우리 열왕과’ , ‘우리는’ , ‘우리가 어떻게’ 라는 말을 여러번 반복했다. 이는 다른 누구의 죄가 아닌 자기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악을 행하였사옵니다” 라고 말함으로써 민족의 죄도 바로 자신의 죄라고 고백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이와 같이 민족의 죄를 내 죄로 알고 “주님 내가 범죄하였습니다. 이것은 남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입니다”라고 고백하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기를 소원한다. 민족의 고난과 어려움을 내 문제로 여기고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무릎 꿇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이적과 표적과 기사의 주인공으로 삼아 주실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