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3:1-6 성령의 권능으로 한계를 넘어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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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권능으로 한계를 넘어서라
행 2, 3
사도행전 3장은 성령이 교회와 성경을 통하여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준다. 성령님은 지금도 우리의 실제 삶에서 그 일들을 하신다. 그 일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세가지 살펴보자.
첫째,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시도를 하게 하신다.
사도행전 3장을 보면 성전 미문에 구걸하는 앉은뱅이가 있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길에서 볼 때 어떻게 하는가? 그냥 지나가거나 아니면 불쌍한 마음에 얼마를 적선해준다. 그를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람도 간혹 있을 것이다.
그 앉은뱅이는 날마다 성전 문에서 구걸했다. 그러므로 베드로와 요한은 그전에도 그를 자주 봤을 것이다. 그들도 그전에는 아마 그냥 지나치거나 적선하거나 아니면 기도해주고 그 옆을 지나갔을 것이다. 그 정도에서 무엇을 더 하겠는가?
그런데 성령 충만하게 되니깐 베드로와 요한의 생각이 달라졌다. 그 앉은뱅이가 돈을 달라고 구걸하는 순간에 그들에게 엄청난 생각이 떠올랐다. 무슨 생각이었는가?
‘이 사람을 일으켜 세워야겠다.’
이렇게 마음먹었다. 얼마나 새로운 발상인가! 얼마나 새로운 시도인가! 하나님의 영께서 역사하시면 사람은 있던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혁명적인 발상을 하게 된다. 보통 사람이 상상도 못한 일을 시도하게 된다. 그래서 베드로는 앉은뱅이를 향해 명령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3:6
그렇게 말하고 앉은뱅이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그의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었다. 그래서 앉은뱅이가 걷기고 하고 뛰기도 하면서 그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미했다.
여기서 베드로는 앉은뱅이를 향해 예수님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명령하는 아주 새로운 시도를 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가? 성령께서 베드로 안에 계셨기 때문이다. 성령님이 임재하시면 사람은 항상 새로운 곳을 향해서 나아가게 되고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된다. 절대로 그 자리에만 머무르지 못한다.
여러분은 지금 안주해 있는가? 밤낮 그 자리에 머무르면서 낙심하고 있는가? “힘들다. 힘들어”라는 말만 하고 있는가? 세상의 모든 짐을 자기 혼자 다 짊어지고 가는 것같이 느끼고 있는가? 그러나 성령님이 임재하시면 그 자리에서 벗어나게 된다. 밤낮 접하던 것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향해서 도전하게 된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 행 1:8
이 말씀을 보라. 예수께서 성령님이 임하시면 우리가 권능을 받고 그것으로 끝이라고 하셨는가? 아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고 하셨다. 권능을 받은 자리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곳을 향해서 나아갈 것이라고 하셨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우리는 새로운 것에 부딪친다. 예루살렘에 부딪치고 유대에 부딪치고 사마리아에 부딪치며 땅 끝에 부딪친다. 새로운 시도를 자꾸하게 된다. 성령님은 개혁과 진보의 영이시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한 자리에 머무르지 못하게 하신다. 이제까지 안 하던 기도와 못했던 시도와 엄두도 못했던 도전을 하게 만드신다.
사도행전 10장을 보라. 베드로는 대단히 보수적인 신앙을 가졌던 것 같다.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하려고 그들 안에만 머물렸다. 그런데 환상 가운데 하늘에서 보자기가 내려오는데 그 안에 유대인들이 더러운 짐승으로 생각해 먹지 않는 동물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잡아먹으라는 음성이 들렸다. 베드로는 이렇게 저항했다.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행10:14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행10:15
이런 깨우침을 주신 후 성령님은 베드로로 하여금 이방인 고넬료를 만나게 하셨다. 베드로가 그전까지 생각해 온 한계 안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게 하신 것이다. 이처럼 성령님은 우리가 갇혀 있지 않게 하신다. 새로운 것을 향해 도전하게 하신다.
모세를 보라. 출애굽기 14장 16절에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리라.”
그런데 사람이 어떻게 홍해를 가르겠다고 손을 뻗는 시도를 할 수 있겠는가? 다 하나님의 영이 마음을 주시니깐 가능하지 않았을까? 성령님은 이렇게 새로운 일을 시도하게 만드신다.
에스겔 선지자도 마찬가지이다. 마른 뼈에게 말씀을 증거하는 사람이 어디있는가? 그런데 그는 이렇게 했다. 마른 뼈를 향하여 “생기야 들어가라” 그러자 마른 뼈가 큰 군대가 되어 변화되는 일이 벌어졌다.
한계와 목표의 차이가 무엇인가? 한계는 좌절의 선이다. 그 이상을 넘어갈 수 없다. 그것은 우리를 묶어두는 선이다. 반면에 목표는 무엇인가? 긍정과 촉진이 선이다. 목표에는 우리를 밀어 올려주는 힘이 있다. 바로 그 목표를 성령님이 우리에게 주신다. 성령님은 한계가 아니라 목표를 주신다.
그러나 악한 마귀는 우리를 보이지 않는 끈으로 묶으려고 계속 노력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거기까지가 네 한계야, 그 이상은 안 돼! 못해! 못 가! 거기가 너의 한계야!
물고기 중에 ‘피라니아’라는 물고기가 있다. 우리 강에 사는 피라미 와 이름이 비슷한데 족보는 완전히 다르다. 피라니아는 아마존 강에서 사는 이빨이 아주 날카로운 물고기이다. 그 이빨이 얼마나 강한지 아마존 간을 건너던 사람이나 동물을 뼈째 잡아 먹었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그 별명이 ‘물고기 칭기츠칸’이다. 동서양 대륙을 휩쓴 칭기츠칸처럼 먹잇감을 흔적 없이 싹 먹어치우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군가 이 피라니아를 잡아서 수족에 넣고 그 가운데 유리판을 세우는 실험을 했다. 피라니아가 수족 속을 헤엄치다가 유리판에 박치기를 했다. 그러기를 수십번, 수백번 하고 나면 나중에 유리판에 없어져도 피라니아가 그 쪽으로 가지 않는다고 한다.
여기서 유리판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한계이다. 우리는 몇 번 시도하다가 안되면 ‘안 된다’라고 믿어 버린다.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더 이상 시도하지 않는다. 이렇게 포기해버리는 마음은 악한 영이 준 것이다.
우리 가운데 꿈을 포기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어렸을 때는 꿈이 얼마나 컸는가? 나는 장군이 되겠다는 아이는 봤어도 대위는 되겠다는 아이는 못봤다. 모두 다 크고 높을 것을 꿈꾼다.
그런데 그렇게 큰 꿈을 품은 뜨거운 마음이 어느 순간이 되면 식어 버린다. 나이를 먹으면서 현실적이 되는 것이다. 이제는 잘릴 위험이 없는 직장에만 들어가기 바란다. 꿈이 너무 작다. 자기는 그 이상을 못 넘는 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령이 역사하시면 우리는 한계를 뚫고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목표를 향해서 비상하게 된다. 혹시 한계에 묶여 있는가?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한다. 성령의 역사가 있으면 절대 묶이지 않는다. 나이에도 환경에도 자기 조건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자기 능력에는 결코 묶이지 않게 된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6
둘째로 성령님이 우리 삶 가운데 벌어지는 많은 일들을 해석해 주신다. 그 일들의 의미를 우리에게 알려 주신다.
사도행전 3장에서 앉은뱅이였다가 나은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았다.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행3:11
그는 왜 사도들을 붙잡았는가? 이런 것이 아닐까? “지금 제가 분명히 병에서 나았습니다. 일어섰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일어선 건가요?”
이 땅을 살아가면서 많은 일들이 벌어진다. 그런데 그것들이 다 해석이 되는가? 해석이 안된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냥 무시하거나 자기 머리로 판단하거나 아무 사람한테서 말을 듣고 엉터리로 해석을 한다. 그래서 인생이 저속해 진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기 삶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이 앉은뱅이였다가 나은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해석을 구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성령님께 해석을 구해야 한다.
이제 베드로는 뭐라고 이야기하는가? 앉은뱅이를 걷게 한 것은 자기가 한 일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 누가 하셨는가? 베드로는 이렇게 말한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행3:13-16
요지가 무엇인가? 앉은뱅이가 나은 거을 많은 사람들이 부인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예수님의 이름 덕분이라는 것이다. 즉 그를 낫게 한 것은 자기들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베드로는 그러니 자기들을 주목하지 말고 하나님을 주목하라는 거시다. 능력이 십자가에 있음을 밝힘으로써 앉은뱅이의 삶 가운데 벌어진 일을 해석해 주었다.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면서 어떤 대는 평탄하고 어떤 때는 고난을 당한다. 그런데 왜 그렇게 되는지 해석이 안 된다는 게 문제이다. 해석이 안 되니깐 평탄하면 썩어 버리고 고난당하면 좌절한다. 다른 사람보다 더 가졌다면 사명자이다. 그는 그 복을 나누어야 한다. 그런데 복을 왜 받았는지 해석을 못하니깐 허랑방탕하게 산다. 성령의 탕자와 다를 것이 없다. 아픔이 많은 자도 사명자이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헤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기 삶에 임한 고난이 자기를 좌절시키고 넘어뜨리는 것인 줄 아니깐 의미없게 산다. 어떻게 하면 자기 삶의 평탄함과 고난의 의미를 알 수 있는가? 성령이 깨우침을 주셔야만 한다. 하나님의 영께서 해석해 주셔야만 한다.
사도 바울에게도 그런 일이 있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의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12:7
이 말에서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사도 바울은 육체의 가시 즉 질병이 있었다. 그래서 “왜 저는 이렇게 아픕니까?” 하면서 하나님께 해석을 구했다. 그랬더니 그가 받은 계시가 너무 많기 때문에 교만해질까봐 ‘가시’를 주신 것이라고 응답을 받았다.
바울은 이 가시가 없어지게 해달라고 건강을 달라고 세 번이나 구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뭐라고 응답하시는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고후12:9
이 말은 “그 가시 때문에 너는 너 스스로의 힘의 악함을 알고 나를 철저히 의지할 것이다. 나를 의지하는 자에게 내가 강함을 역사한다. 그것이 너에게 복이 될 것이다.”
그의 질병의 이유와 의미를 해석해 주셨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오히려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고 하나님을 찬송했다. 세상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면 그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좌절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오히려 고난에서 힘을 얻는다. 하나님께서 고난의 의미를 알려주시기 때문이다.
헨리 나우웬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상처 입은 치유자다.” 우리 자신이 입은 상처에 다른 사람을 위한 치료자로 우리를 세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깊은 뜻이 담겨져 있다. 우리가 그 뜻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성령님이 해석해 주시면 알 수 있다.
우리에게는 고난만 있는게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셨다. 그렇다면 가진 것이 많은 우리는 다른 사람을 섬기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아야 한다. 이것 또한 누가 깨우쳐 주시는가? 성령님이시다.
여러분은 날마다 성령님의 해석해 주시는 능력을 체험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허랑방탕하고 박력없이 사는게 아니라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뚜렷한 목표에 집중하고 자기 삶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간증하며 살아가기를 바란다.
셋째, 성령님은 예수의 이름을 통해서 지금 이곳에서 일하시고 계신다. 성령님이 함께하시면 예수님의 권능이 우리에게 임한다.
베드로는 앉은뱅이가 나은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그 이름을 믿음으로... 너희 보고 아는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행3:16
나중에 공회에서도 이렇게 말한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아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행4:16
베드로가 계속 강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예수의 이름이다. 예수님이 낫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예수 이름에 권능이 있다는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요14:13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함이라.”요20:31
“누구든지 주 이름을 부르는 자는...”행2:21
성령님께서 우리가 예수의 이름을 부르게 하신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 어떤일이 벌어지는가? 구원을 얻는다. 우리가 어느 곳에 있든지 절박한 상황에 놓였든지 간에 “예수님” 부르면 구원이 임한다. 이것을 믿는가? 이것을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베드로는 지금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외쳤더니 능력이 나타났다.
그러므로 교회가 할 일이 무엇인가? 예수님의 이름을 붙들고 의지해서 지금 이 시간 이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보이는 것이다. 교회는 치유의 역사 생명의 역사 변화의 역사 악한 마귀를 멸하는 역사를 보아야 한다.
왜 우리 삶이 무력한가? 예수 이름의 권능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그 이름의 능력을 주셨는데 우리는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하고 그 권능을 사용하기를 원하신다. 그 이름을 사용할 때 “2000년 전 초대교회는 이랬다”라고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 임하는 권능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다.
사람을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서 행동이 달라진다. 권력을 믿으면 권력을 잡으려고 발버둥친다. 재력을 믿으면 돈 벌려고 몸부림친다. 건강의 힘을 믿으면 건강해지기 위해 피나 오줌 마시는 해괴망측한 일도 서숨없이 한다. 사람은 자기가 믿는 능력을 추구하는 일에 목숨을 건다.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 예수 이름의 권능을 믿는 존재이다. 그렇게 때문에 예수 이름만 외치면 그 이름으로 모든 일을 다 한다. 우리가 의할 것은 오직 예수님 이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능을 의지해서 나아가라. 우리 자신만 바라봐서는 연약해 보인다. 마치 종이 한 장처럼 연약하다. 종이 한 장을 손가락으로 뚫으면 뚫린다. 그런데 그 종이 뒤에 벽돌이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종이가 뚫리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이 부러진다.
예수 이름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은 무력감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자기 수준에만 머무른다. 그러나 예수 이름의 능력을 의지하고 나아가는 사람은 예수의 권능만큼 자기 삶 가운데 능력을 받게 된다.
혹시 무력감에 빠지는가? 예수 이름을 활용하라. 성령님은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 바로 지금 이곳에서 예수 이름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우리 삶 가운데 능력의 열매가 나타나기를 원하신다. 예수 이름을 활용하라.
성령님이 임하시면 우리에게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가? 우선 절대도 한 자리에 머무르지 않게 된다. 새로운 시도를 하고 새로운 곳을 향해 간다. 혹시 여러분이 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가? 자꾸만 안주하려하는가? “나는 안 된다.” 라며 한계 안에 갇혀 있는가? 성령의 은혜를 돌파하라. 한계를 뚫어라.
우리는 성령의 임재 없이는 자기 삶의 평탄함과 고난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결국 실패하게 되는 것이다. 오직 성령의 임재가 있어야만 자기 삶의 의미를 정확하게 해석하게 된다. 그래서 형통할 때도 썩지 않고 고난 당할 때도 좌절하지 않게 된다.
성령님은 우리가 예수의 권능을 의지해서 지금 이곳에서 능력 있는 삶을 살기 원하신다. 예수 이름을 의지해서 악한 마귀를 멸하고 삶 속에서 기적을 일으키게 되기를 바란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자기 삶의 의미를 바르게 해석하며 지금 이곳에 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의 권능을 체험할 수 있기를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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