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 11 돌아온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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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11장
이제 예루살렘 성벽이 다 지어졌다. 그런데 이 성에는 사람들이 별로 살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직 그 성에 사람이 살 수 있는 여건이 갖춰져 있기 않았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성은 160여년 동안 성벽이 없어서 폐허처럼 되어 버린 성이었다. 그래서 이 성은 어떻게 보면 거대한 쓰레기더미 같았고 사람들이 살 곳이 못 되었다. 성벽을 짓기 전에는 외적이 침입해 와도 막을 수 없어 사람들이 살지 않았다. 그러니 성벽을 다 지었다고 해도 사람들이 선뜻 들어와 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백성들은 제비를 뽑아 10%는 성안에 살도록 하고 나머지는 성밖에 흩어져 살았다. 자원해서 예루살렘에 거하는 사람들을 분류해 보니 베레스 자손들이 468명이었다. 또 베냐민 지파는 928명이었다. 베냐민 지파는 큰지파가 아닌데도 베레스 자손들보다도 두 배가 많았다. 베레스 지파와 베냐민 지파는 뜻이 있어서 하나님이 쓰신 사람들이다.
베레스는 믿음의 영웅으로 성경에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그는 본래 믿음의 영웅으로 불릴 만큼 신앙 배경이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의 출생은 창세기 38장에 나온다. 베레스의 아버지는 유다이다. 유다가 성을 거닐다가 어떤 여인과 관계를 맺었는데 그 여인은 유다의 며느리였다. 몰론 알고 그런 것은 아니지만, 부끄러운 기록이다. 며느리 다말은 시아버지와 동침한 후 쌍둥이를 낳았다. 먼저 한 아이의 팔이 나오자 이를 표시하기 위해 분홍색 실을 감았다. 그런데 아이가 나오지 못하고 다시 들어갔다. 두 번째 아이의 기가 더 쎄서 먼저 나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번째 아이의 이름을 떠뜨렸다는 뜻으로 베레스로 지은 것이다. 어쨌든 별로 아름다운 내력을 지닌 것이 아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초라한 집안 사람이라도 하나님나라의 영웅으로 써주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이다.
또 다른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의 큰 지파가 아니었다. 사사기 20-21장을 보면 동성애가 극치를 이루고 사람의 시체를 조각 내어 소포로 보내는 끔찍한 장면이 나온다. 이렇게 못된 일을 자행했던 지파가 베냐민 지파이다. 사람들은 이를 보다 못해 베냐민 지파를 거의 멸문 시켰고 극소수의 사람만 살아남았다. 그런데 이런 지파를 하나님은 다시 세우셨다. 끝이 좋지 않았지만 이스라엘의 첫 왕이었던 사울이 베냐민 출신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은 차별이 없으심을 알게 해준다.
하나님이 느헤미야를 통해서 선택했던 새 예루살렘에서 일하고 거하게 하신 사람들의 출신 배경은 신약의 정신과도 통한다. 예수님은 죄인과 창기와 세리와도 가까이하셨다. 하나님은 내가 과거에 어떤 인격이었든지 또 내가 얼마나 누추한 사람이며 얼마나 비천한 출신인지를 따지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누추한 사람들을 깨끗하게 하시고 약한 자를 통해 강하게 하시는 분이심을 믿어라. 이와같이 주님은 자발적 징집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예루살렘으로 모으시고 초라한 인생이 하나님 때문에 역전되게 하시며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일들을 감당하게 하신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이 시대의 베레스의 자손들, 이 시대의 베냐민의 자손들을 통해 일하신다.
예루살렘 성에 거주하게 된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졌다. 하나는 제사장 그룹이고 다른 하나는 레위 그룹이다. 제사장 그룹에는 다시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제사장 그룹에 속한 1,192명이 예루살렘 성에서 거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전에서 일하는 822명은 통상적으로 제사장 업무를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요즘말로 하면 구원의 진리나 교리등을 통하여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영적인 은혜를 깨닫도록 말씀을 전하는 그룹이다.
족장 그룹 242명은 제사장 가족들의 문제나 어려운 일들을 다루었다. 교회 식구들 가운데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겪는 사람들과 함께 짐을 지며 일하는 셀장들과 같은 사람이다. 11장 14절에의 용사들은 제사장들이었지만 외적이 침입할 때 방어하는 역할을 감당하였다. 이들은 기도의 용사들로 교회르 기도로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자들이다.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은 각각 나름대로 역할을 맡아 은사대로 하나님의 일을 했다. 그 다음에는 레위 그룹 284명이 나온다. 이들은 또 다시 세그룹으로 나뉜다. 이중 한 부류는 성전의 바깥일을 맡았다. 오늘날로 말하면 주차봉사하는 역할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성경에서 찬양으로 유명한 아삽과 여두둔의 이름과 더불어 그들의 자손인 맛다냐와 압다가 나왔다. 맛다냐는 기도할때에 감사하는 말씀을 인도하였다. 이들은 찬송을 지휘하고 그 찬송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힘을 얻고 능력을 갖게 하는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그리고 172명의 성 문지기가 나온다. 이들도 오늘날 교회 관리나 안내 사역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왕의 수하에서 백성을 일을 다스리는 사람들이 나오는데 이들은 공동체 안에 문제가 생기면 도와주는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은 이처럼 사람들은 부름받은 것이 다르고 은사가 다르지만 모두 함께 모여서 일하도록 만들어 주셨다.
우리 역시 그렇지 않은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독불장군 식으로 혼자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함께 같이 해야 한다. 하나님이 연출하는 드라마에는 그의 자녀들 중 한 사람도 빠짐없이 배역이 맡겨져 있다. 그러나 우리의 둔함과 게으름 때문에 찾지 못할 뿐이다.
그 다음 12장 22-26절에는 엘리아십, 요야다, 요하난, 얏두야 드으이 이름이 나오고 “레위 사람의 족장이 모두 책에 기록되었고 바사왕 다리오 때에 제사장도 책에기록되었고 레위 자손의 족장들은 엘리아십의 아들 요하난 때까지 역대지략에 기록되었으며”(22-23)
책에 기록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 영적인 사기에 기록되었다는 뜻이다. 이것은 막연한 전설이 아니라 확실한 역사적 기록과 사실에 근거한다.
역사적 기독교과 복음적 기독교는 다르지 않다. 이것은 마치 신앙과 삶이 다르지 않은 이치와 같다. 교회를 다닌다는 사람 중에 종교적 상징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만 믿는 경우들이 많다. 예를 들어 마하트마 간디는 예수의 자기 희생적이고 겸손한 모습을 좋아하고 본받기는 했지만 역사적인 그리스도는 믿지 않았다. 기독교는 상징이 아니다. 기독교는 역사적 사실을 근거한다. 예수님의 생애와 부활이 만일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면 그분의 삶이 주는 의미는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