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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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 교회는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어려움이 많이 보여서 여러 어려움을 지적할 때 가장 먼저 무엇보다 말씀하십니까? 보통은 가장 힘든 문제를 먼저 지적하고 시작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하면서 가장 먼저 시작하는 것이 분당, 파당의 문제입니다. 고린도전서 1: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에 분쟁이 있는데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는 말로서 고린도 교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교회의 대부분의 문제는 마음이 나뉘는 데 있습니다. 원어로 보면 아주 재미있는 단어입니다. 같은 마음과 같은 뜻이란 무엇을 말할까요? 물론 이 단어는 대부분의 번역본들이 같은 이라는 단어로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왜 같은 마음이냐면 그와 같은 마음, 또는 그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뒤에 그의 뜻도 동일합니다. 그의 뜻, 한 사람의 뜻입니다. 과연 같은 마음이란 어떤 마음일까요? 같은 뜻은 우리의 모든 사람들의 뜻일까요?
오늘 본문의 배경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고린도교회와 우리 시대의 지금 시대의 큰사랑교회 상황과는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헷갈리지 않도록 먼저 살펴보고 넘어가겠습니다.
본문에서 우리와 다른 점이 두 가지가 있는데 먼저는 성찬을 배부를 정도로 많이 먹었다는 사실입니다. 34절에 사도 바울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고 오던가 마치고 먹으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당시 상황이 유월절 식사에서 예수님이 제정하신 성찬의 시대로 넘어가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과 같은 성찬으로 자리잡지 않았고 유월절 식사와 성찬을 겸하여 진행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벌어진 것입니다. 유월절 식사처럼 집에서 음식을 가져옵니다. 물론 부자는 많이 가져오고 가난한 자들은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충분히 식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성찬을 같이 진행한 것입니다.
두 번째 다른 점은 성찬 시간이 정확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당시에는 시계가 없었죠. 해질 녘에 만나요 하면 해가 지려고 할 때인지 해가 지고 나서 바로인지, 정확하지 않고 시간 차이가 있습니다. 유월절 식사는 밤에 지켰다고 할 때 그 밤이 언제인지 정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성찬을 몇시에 지키라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가 발생합니다. 오늘날 우리처럼 오전 예배 시간에 합니다 하고 한 주 전에 광고하고 시행하지 않았기에 이런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고린도교회가 오늘 본문에서 발생한 문제점과 그에 대한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잘못된 성찬 시행에 대해 먼저 살펴보고 두 번째로 제대로 된 성찬을 위한 지침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잘못된 성찬입니다. 삳호 바울이 17절에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칭찬할 것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잘못이라는 뜻입니다.
18절에 보시면 “먼저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하고 말합니다. 이 말이 참 어렵습니다. 조금 더 직역해 보면 무엇보다 먼저 너희가 교회로 모일 때에 입니다. 이미 고린도교회가 있는데 그렇다면 교회로 모일 때에 라고 말하면 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냥 모일 때에 라고 말하지 않고 너희가 교회로 모일 때에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큰사랑교회가 모일 때 목적이 있다는 말입니다. 너희 중에 몇 사람만 모인다면 교회일까요 아닐까요? 여러분 각자가 삶으로 흩어지면 여러분은 교회입니까 아닙니까? 우리가 보통 이렇게 배웠습니다. 각자의 마음에 예수님을 모시고 있으니 예수님이 계신 곳이 성전이니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성전입니다. 교회입니다. 맞습니까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한 사람이 큰사랑교회를 드러낼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우리가 교회로 모인다는 것은 교회됨을 성도들이 모여서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모임 자체가 교회로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큰사랑교회가 주 중에는 흩어져 있지요. 흩어져 있는 동안에는 교회로서의 모습이 약화됩니다. 그러니 모이는 것 자체가 교회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왜 모여야 합니까? 하나님이 세우신 큰사랑교회서의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 모이는 것입니다. 모이지 않으면 교회됨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큰사랑교회로 모였다, 지금 이 모임 자체가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집에 혼자 앉아서 나도 큰사랑교회다 아니라는 것입니다. 집에 혼자 앉아서 큰사랑교회됨을 드러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일차적으로 우리가 교회에 오는 것은 은혜 받으러 아닙니다. 개인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아닙니다. 교회로 모이는 것은 한 몸된 성도들과 함께 한 몸으로서 교회를 드러내는 것이 목적입니다. 우리가 한 몸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교회로 모이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고 했습니다. 그러니 한 몸이 모이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가 주일에 교회로 모이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임을 드러내는 것이요 우리가 교회임을 구현하는 것이요, 우리가 교회로 모이는 것은 하나님과 세상 앞에서 이미 능력으로 임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드러내고 증거하기 위해 교회로 모입니다. 교회 모임의 기적은 교회를 구성하는 죄인과 보잘것 없는 사람들이 단순히 모인 집합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신실하게 이룬다는데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교회로 모인 것은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세상에 외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임 자체로 큰사랑교회가 세상 가운데 모든 사람 가운데 밝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고 말합니다. 여기서 모이기를 폐하는 사람은 사랑방 모임 안 가거나 남여 전도회 모임을 소홀히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일 공적인 모임을 말합니다. 교회됨을 드러내는 주일 공적인 모임에 참석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 교회됨을 드러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교회라는 것을, 우리가 함께 모여 교회를 이룬다는 것을,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임 가운데 거하신다는 것을 얼마나 자주 잊어버립니까? 우리가 함께 모여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다, 우리가 함께 모여서 큰사랑교회를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자랑으로 드러낸다는 것을 명심하고 또 명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너희가 교회로 모일 때에. 교회로 모이는 목적이 있습니다. 20절입니다. 모인다는 동일한 단어를 사용해서 모이는 목적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로 교회됨을 드러내고 성찬을 행하기 위해서 모입니다. 굉장히 충격적인 말입니다. 교회됨을 드러내는 것은 우리의 모이는 것이요, 우리가 모이는 이유는 성찬을 행하기 위함입니다. 성찬이 우리 모임의 주 된 이유가 됩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교회가 모일 때 성찬이 빠지면 진정한 예배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성찬을 매주 시행하면 됩니다. 성찬을 일 년에 몇 번 하느냐? 매 주 하면 가장 좋습니다. 그러나 형편에 따라 한 달에 한 번 해도 됩니다. 저희 교회는 한 달에 한 번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이 모인다는 단어가 고린도전서에 11장과 14장에 등장하는 모이는 목적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14:23절과 26절에 나오는 예배입니다. 우리가 교회로 모이는 이유는 교회됨을 드러내고 성찬을 행하고 예배를 행하기 위함입니다.
이를 통해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진정한 교회됨은, 진정한 그리스도의 몸 됨은 한 마음으로 모이고, 예배를 드리고, 성찬을 시행함으로 진정한 교회됨을 드러냅니다. 세 가지가 하나의 묶음으로 같이 작용해야 합니다. 각자 따로 노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 가지가 잘 실현될 때 진정한 교회, 진정한 예배, 진정한 성찬이 됩니다. 따라서 교회 밖에서, 선교단체에서, 교회 회원 몇 사람만 모여서는 성찬을 행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알렉산더 슈메만이라는 동방신학자에 의하면 고대 교회에서는 합당한 이유 없이 성찬에 참여하지 않으면 교회에서 제명했다고 합니다. 성찬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은 예배와 성찬예식에서 드러나는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된 연합으로부터 자신을 끊은 자로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에 나아오고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성찬에 제대로 참여하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찬을 제대로 시행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니 성찬은 시행하는데 분쟁과 파당으로 인해 성찬의 의미가 제대로 표현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가 한 몸임을 드러내기 위해 성찬을 시행합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누구는 빨리 오고 누구는 늦게 오고 그러면 주로 가난한 자가 늦게 왔습니다. 부자는 자유인이요 오고 가는 것이 비교적 자유했습니다. 그러나 종이나 노예들은 교회 오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굉장히 부드럽게 말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엄청나게 질책하는 것입니다. 20절에 성찬을 시행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성찬은 주님이 세우신 것인데 사도 바울이 너희들이 하는 것은 성찬이 아니야 하고 굉장히 강력하게 질책하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분쟁, 파당의 문제가 있는데 해결하지 않고는 주의 만찬에 참여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먼저 지적합니다. 성찬 잘못 하고 있어라고 말하는데 문제가 뭐냐? 파당과 분쟁입니다. 고린도전서 1: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고 사도 바울은 반문합니다. 분쟁과 파당은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닙니다. 분쟁과 파당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기본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런 문제가 있는데 교회가 자라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이런 문제가 있는데 교회가 건강하게 서 갈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바울의 평가는 냉혹합니다. 어떤 면에서 반감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입니다. 분쟁과 파당이 있는데 어떻게 하나됨을 이루는 성찬이 가능할까요? 누군가를 미워하고 누군가를 싫어하고 누군가와는 성찬을 같이 하고 싶어하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됨을 이루는 성찬이 가능할까요? 하나님의 말씀이 그거 성찬아니야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에게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분당 파당이 잘못이야 성찬 아니야 까지 하면 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한 마디를 덧붙입니다. 22절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 여기고” 여러분 바울이 왜 이 말까지 하는 것일까요? 분쟁과 파당을 일삼고 성찬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교회를 업신여기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그냥 방관하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너희가 교회로 모이는데, 교회로 모이긴 하는데 그리스도의 하나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교회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분쟁과 파당을 일삼는 사람들은 교회를 업신여기고 하나님의 교회를 세상의 단체로 만드는 것입니다.
분당과 파당. 비슷한 표현입니다. 너는 누구 편이냐? 나는 이 편이다 나는 저편이다 하고 당을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찬을 왜곡하면 우리가 분당, 파당을 만들면 결국 교회를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분당을 일삼는 고린도교회 파당을 일삼는 고린도교회 사람들에게 경고하고 계십니다. 27절부터 보세요. 그렇게 분당을 일삼하고 파당을 일삼하는 사람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는 사람이야 하고 말합니다.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결과 고린도교회 성도 중에 어떤 사람은 약해 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병에 걸렸습니다. 적은 숫자가 아닙니다. 많은 숫자가 병에 걸렸습니다.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성경에서 잔다는 말은 죽었다는 뜻입니다. 지옥 갔다는 말이 아닙니다. 징계를 받아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적은 숫자가 아니라고 합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오늘날은 하나님이 이런 방식으로 징계하지 않습니다. 이런 방식은 성경이 완성되기 전의 시대의 징계방식입니다. 오늘날은 어떻게 징계하실까요? 약하다는 말은 무엇이 약해지는 것일까요? 신앙생활에 힘이 떨어지고 영적무력감에 빠지고 교회 생활이 즐겁지 않고 괴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서 뭐좀 봉사하라 하면 귀찮고 싫고 이런 마음이 점점 생깁니다. 병드는 것은 영적으로 병드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기도 싫고 옛날에는 앞뒤 가리지 않고 봉사하고 섬기고 성도들을 위해 봉사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교회가기 싫고 봉사하기 싫고 재미가 없어지고 교제하는 것이 귀찮고 부담스러워 지는 것입니다. 징계입니다.
죽는 것은요? 출교입니다. 이전에는 육체를 징계로 죽이셨다면 이제는 육체가 죽는 것과 다르지 않는 교회에서 쫓아내 버립니다. 징계입니다. 징계를 징계로 모르는 것이 문제겠지요. 오늘날에도 주님께서 경고하시고 징계하십니다. 그러면 내가 그런 상태에 있으면 교회에 그런 일이 일어나면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바짝 엎드려야 합니다. 우리교회가 위기에 빠졌다고 긴장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 이런 영적으로 병들고 약해지는 일이 있고 출교를 당할 만큼의 죄악이 있다면 반드시 두 가지를 점검하셔야 합니다. 첫째는 우리 안에 파당이 없는지 살펴야 합니다. 둘째는 은혜의 방편이 훼손되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할 때 마다 팅겨져 나오고 말씀을 들으면 나하고는 상관없이 그냥 버려 버리고, 말씀이 들리지 않아도 별 이상없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항상 같이 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파당이 없습니까? 우리 안에는 분당이 없습니까? 아닙니다. 실질적인 파당이 우리 안에도 있습니다. 어떤 성도와는 일주일에 다섯 번 여섯 번 만나면서 어떤 성도와는 일년이 가도록 한 번도 만나지 않고 교제하지 않고, 실질적 파당입니다. 교회로 모이는 것은 하나로 모이는 것인데 우리 안에 모르는 사람이 있고 대화 한 번 해보지 않는 사람이 있고 인사 한 번 하지 않는 사람, 365일이 가도록 대화 한 번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실질적인 파당입니다. 혹 우리 교회에 이런 모습이 있다면 정신차려야 합니다. 아니면 우리 안에 약한 병든 자 출교당하는 자가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돌이켜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병든 고린도 교회에 어떤 해결책을 제시합니까? 지난 주와 거의 동일합니다. 고린도전서 11: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라고 말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인데 하고 다시 성찬을 받은 배경, 성찬을 받은 원리를 다시 설명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이 제정하신 원래대로 돌아가서 가르침 받은 대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해결책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원래대로 행하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문제 없는 교회 없습니다. 교회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문제는 항상 있습니다. 제 눈에 안 보일 뿐이죠. 우리 교회 성도님들도 분명 이런 저런 문제를 안고 살아갑니다. 해결이 되는 날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님의 방법대로 주님의 원리대로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해결책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복음으로 문제를 계속해서 해결해 나가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방법, 세속적인 방버이 나오면 그 방법으로 교회는 계속 병들어 가는 것입니다. 문제가 커지는 것입니다. 다른 지혜 다른 방법 없습니다. 가장 탁월하시고 가장 지혜로우신 주님께서 주신 방법이 성찬을 원리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주님이 주신 원리대로 시행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우리의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교회를 분당이 없고 업신여기지 않고 성찬을 제대로 시행하는 것은 주님이 가르치신 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신 원리가 무엇입니까? 떡과 잔입니다. 떡과 잔은 둘 다 단수입니다. 하나입니다. 지난 주에 우리가 살펴본 고린도전서 10:16–17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에 분명히 나타납니다. 우리는 하나로 부름받았습니다. 한 떡에 참여하고 한 잔에 참여합니다. 그러니 부자들은 기다려야 합니다. 가난한 자를 기다려야 합니다. 많이 가진 자가 많이 나누어야 합니다. 33절처럼 서로 기다려주어야 합니다. 시간이 걸리겠지요. 서로 변하고 하나 되는데 시간이 걸리겠지요. 그러나 그냥 기다리지 말고 적극적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실제적인 적용을 해 보겠습니다. 성찬을 시행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여러분 오늘 말씀 듣고 그냥 좋았다, 성찬은 이런 의미구나 하고 넘어가면 아무 변화가 없습니다. 여기서 멈추면 우리는 알고도 행하지 않는 외식하는 바리새인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한 떡에 참여한다 한 잔에 참여한다고 말함으로써 한 몸에 참여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 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방법을 고민해야 합니다.
하나되기 위해서 모르는 분들을 찾아가십시오. 그리고 차를 한 잔 하십시오. 자주 만나는 분들보다는 그동안 보지 못한 분들을 만나십시오. 그리고 성도들을 집에 초대하십시오. 식사를 대접하고 차를 대접하십시오. 함께 먹고 마시겠다고 결심하고 실행하셔야 합니다. 먼저 찾아가는 것 부끄럽고 힘듭니다. 재정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해야 합니다. 식사를 대접하고 초대해서 차를 마시는 것 힘듭니다. 시간을 내어야 합니다. 돈을 들여야 합니다. 불편을 감수해야 합니다. 이런 수고와 노력 없이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저는 이런 교회를 꿈꿉니다. 우리 앞뒤에 앉아 있는 친구들과 대화가 대십니까? 무슨 걱정이 있는지 어떤 기도 제목이 있는지 아십니까? 몰라도 됩니까? 청년들은 청년들끼리 모여야 합니까? 그럼 어떻게 청년들과 하나됨을 이루시겠습니까? 실제로 기도 제목도 알고 걱정도 알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되는 것입니다. 또 청년들은 젊은 사람들은 어르신들이 외롭지 않은지, 집에 젊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치 않은지, 기도제목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비슷한 연령대의 사람들과 교제하고 시간을 보내면 네 교회가 든든해 질 수 있습니다. 필요합니다. 그러나 어린 학생과 나이 많은 어르신이 대화하고 교제하고 기도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해야 합니다. 없을 수 없습니다. 함께 모여 기도하고 도와주고 기도제목을 묻고 보살펴 주는 것 그것이 교회가 하나 되는 것이요 진정한 성찬을 행하는 것입니다. 어른들과 손주뻘인 청년이나 학생들과 한 자리에 앉아서 교제하는 것도 중요하고 반드시 필요합니다. 교제에 있어서 나이차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한 뒷담화를 멈추셔야 합니다. 문제없는 교회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를 키우는 것이 뒷담화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저하고 장로님하고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제가 박목사님을 찾아가서 장로님이 이러쿵 저러쿵 하면서 저의 좋지 않은 감정들을 토해 냅니다. 그러면 박목사님이 어떻게 할까요? 맞나 그래 내가 장로님 받는데 그런 경향이 좀 있으시더라, 또 그랬는갑네. 자 문제입니다. 저, 박목사님, 장로님 이 중에 누가 가장 잘못했습니까? 박목사님입니다. 받아주면 안 됩니다. 내가 장로님과 껄끄러운 문제가 생기면 당사자가 만나서 풀게 해야 합니다. 동조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저와 장로님 사이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박목사님은 모릅니다. 모르는데 받아주면 큰일납니다. 두 사람이 만나서 해결하라고 꾸짖어야 합니다. 이게 마18장의 원리입니다. 누가 나한테 와서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도록 놔두면 안 됩니다. 화해해야 합니다. 당사자끼리 먼저 만나서 해소해야 합니다. 그래도 대화가 안되면 직분자들을 증인으로 요청해서 오해를 해소해야 합니다. 한국교회 어디를 가봐도 이렇게 하는 교회가 잘 없습니다. 그런데 목사들이 겪는 대부분의 교회 문제는 이 지점입니다. 끼리끼리입니다. 뒷담화입니다. 교회가 하나되는데, 교회가 성장해 가는데, 교회가 주님의 교회로 세워져 가는데 최고의 걸림돌이 뒷담화와 끼리끼리입니다. 끼리끼리를 방치하면 반드시 뒷담화로 갑니다. 그러면 결과가 어떻게 될까요? 교회가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 가는데 두렵고 무섭고 어떤 사람이 신경쓰여서, 아니 무서워서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을 수가 없습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5장 5항입니다. “하늘 아래 가장 순수한 교회라 할지라도혼합과 오류로 떨어질 수 있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어떤 교회는 너무 타락하여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 사탄의 회당이 되기도 한다.”고 경고합니다. 큰사랑교회가 하늘 아래 가장 순수한 교회입니까?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도 항상 혼합과 오류가 우리에게 없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지금 이대로 우리 교회가 괜찮으니 앞으로도 괜찮을거야 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이를 위해서 가장 먼저 끼리끼리와 뒷담화를 멀리하고 혼합과 오류에서 벗어나도록 하나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명하신 성찬이 이 사실을 전제하지 않고는 도저히 진행할 수 없는 일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피흘려 세우신 이 큰사랑교회가 혼합과 오류가 아니라 순수한 복음과 정당한 성례로 그리스도의 교회로 순수하게 세워져가길 바랍니다. 모두 기대합니다. 우리 교회가 조금 더 좋아지길, 우리 교회가 조금 더 아름다워지길, 우리 교회가 부흥하길 기대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순수한 복음과 정당한 성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아니 힘을 쏟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다른 방법을 말하지 않고 복음으로 하나되는 성찬을 해법책으로 제시합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시선과 우리의 마음을 성경과 성찬으로 돌립시다. 우리의 지혜보다 탁월한 그리스도의 방법을 믿고 신뢰하며 온 마음과 온 힘을 다해 복음을 듣고 나누고 성찬을 통해 하나되기를 누구보다 힘쓰고 노력하고 어떤 죄악도 용납하지 않고 사랑으로 품으려는 교회가 되길 간절히 바랍시다. 그리하여 사탄의 회당이 아니라 여기가 참 그리스도의 교회요 우리 교회를 방문하는 모든 사람이 여기가 천국이다는 고백이 터져나오도록 함께 아름다운 교회로 세워갑시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