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5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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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언제 필요한가? 이런 질문은 ‘산소’가 언제 필요합니까?라고 묻는 것처럼 어리석다. 그러나 평상시 산소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서 있고 없음이 결정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호흡이 부족해지는 높은 산에서처럼 다양한 상황이 ‘필요’가 찾아온다. 기도 역시 매일 아침 되네이듯 나와 가족 그리고 주변이 안정 속에서 읊조리다 필요가 찾아온다. 본 시편도 ‘십 사람이 사울에게 이르러 말하기를 다윗이 우리가 있는 곳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던 때에’라고 말한다.
다윗은 사울에게 생명을 빼앗길 처지에 사울의 아들 요나단의 보호로 몸을 숨기고 도망갔지만 ‘십 사람’들이 숨은 곳을 사울에게 알려 줄 때이다. 우리는 목숨이 위협 받는다. 저 먼 나라의 전쟁은 어느 순간 떨어질 미사일 때문일 수 있고, 병원과 학교는 더 이상 숨겨질 가치를 상실하고 말았다. 불연듯 찾아온 ‘고통’은 다양한 가면을 쓰고 찾아와 우리의 삶을 뒤 흔다다. 다윗에게 그럴 때가 ‘기도’ 할 때였다.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을 나를 변호하소서’.
욥은 자신의 삶에 대해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맞섰다. ‘죽은 다음에 판단을 받아도 나는 확실해 단련된 금처럼 빛난다’고 할 정도였다. 시편 기자는 고통을 향하여 저주하였다. 자신을 향하여 탄식하였다. 성경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에 ‘모두 주님의 뜻’이라고 말하고 속으로는 문드러져 가도록 하지 않는다. ‘왜 그렇습니까’라고 따지기도 하고,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스스로를 대변하기도 한다.
찬송에 ‘하늘보다 넓고 바다보다 깊다’는 말은 허공을 향해 쏘아 대는 소리도, 바다에 흩뿌려지는 고통의 저주도’ 받아 내는 공간이듯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받아 내신다. 기도자는 ‘주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폭력자는 세상을 없애고 나를 없애고자 한다. 나의 고통을 파멸의 재료로 삼는다. 하지만 기도자는 ‘주의 힘’을 인정하고 ‘나를 구원’하실 분이심을 인정한다.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라는 간청은 폭력자에게 없다. 듣는 자가 없기에 고통을 쏟지 못하는 폭력자이기에 그들은 ‘나를 치고 포악한 자들’이 되는 길로 걸어간다.
우리는 시편을 통해 ‘너는 어떤 길로 갈거야?’라는 질문을 받는다. 다윗이니 그렇게 기도했지? 답을 알고 풀었던 인물이 아니라 답을 몰랐기에 답을 알고 계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자신을 하나님을 향해 던진 것이다. 그렇지 않는 자들을 향해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했다는 평가는 그래서 적절한 것이다. 때론 우리가 스스로를 향해 폭력적이어서 안 된고 하거나 포기하 거나 나를 버리는 것은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이다. 반면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라는 고백은 ‘주께서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와 같은 고백이다. 붙들어 주시기에 더 붙어야 한다.
하나님은 다윗의 원수를 꺽으시기에 우리의 생명을 해하려는 ‘사탄’의 세력을 꺽으신다. 하나님의 계획이 없으시면 시장에서 참새 한 마리가 헐 값이나 덤으로 주는 상인의 마음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성경은 말한다. 이런 기도는 처음에 말했던 것처럼 우리에게는 어쩌다 일어나는 일이지만 하나님께는 ‘성실하게’ 일어나는 우리를 향한 ‘인애’이시다. 그래서 ‘고통 받을 때’ 기도자는 미래를 보고 감사할 수 있다. ‘내가 낙헌제로 주께 제사’할 수 있고 ‘주의 이름에 감사, 주의 이름이 선하심’을 회복할 수 있다고 고백한다.
우리가 언제 하나님의 건지심을 경험할까? 마치 피할 수 없는 망망대해의 파고가 불연듯 내 앞에 나타난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온 길이 태풍을 만나기 위해 온 길이 아니다. 그럼에도 태풍을 지나가야 ‘내 눈이 똑똑히 보게’ 될 하나님의 영광이 있기 때문이다.
신명기 31:6 “6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하고”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