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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부터 나는 생명
위로부터 나는 생명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느니라
배경
배경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여러 비유도 나오고, 교훈과 행하신 일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요한복음은 어떤 사건이나 교훈 등을 기록하기 보다는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초점을 맞추어 증언한 것으로 이어집니다. 이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을 요한은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첫번째 목적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는 것이고, 둘째 목적은 그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게 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누구이신지 알게 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유난히 많이 나오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표적’, ‘물’, ‘생명’, ‘위로부터’, ‘믿다’ 등입니다. 예수님은 수 많은 이적을 행하셨는데, 복음서들에서는 기적이라는 단어를 쓰기 보다는 ‘표적’ 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영어로는 sign 입니다. 무엇을 가리키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들을 볼 때,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게 됩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을 볼 때마다, 사람들은 그가 과연 누구신가 궁금해지고 살펴 보게 되었습니다. 2장 끝에 보면,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다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니고데모입니다. 그는 유력한 관원이었고,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성경학자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에게 찾아와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들은 그가 하나님께로 오신 분, 하나님께 능력을 받아 행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증거합니다. 이성의 시대의 서구사회는 자연과학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모든 초자연적인 것들을 부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성경에 나오는 모든 초자연적인 것을 신화라고 여기고 배제하고, 오직 예수님이 가르치신 교훈만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신학이 한 때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병이어의 사건도 한 어린 아이가 나눈 사랑의 마음이 이기적인 어른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어서, 각자 도시락을 싸온 사람들이 서로 나누어 먹으며 모두 배부르게 되었다는 식으로 윤리적인 것으로 만 이해하고, 정작 예수님이 누구신지 가리키는 표적의 의미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성경을 읽으면,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이 무색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어떻게 증거합니까? 그가 행하신 표적 없이 그게 가능합니까? 모든 초자연적인 것을 부인한다구요? 측량할 수 없는 이 우주는 어떻게 생겼습니까? 이 우주와 그 안의 모든 생명체를 유지하는 놀라운 질서는 어떻게 생겼습니까? 철새들이 계절을 따라 대륙을 넘어 자기 갈 길을 가는 그 프로그램은 저절로 생긴 것인가요 아니면 그들 안에 프로그램을 넣어 주신 이가 계신 것인가요? 인체의 세포를 전자현미경적으로 보고 그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살펴 보면, 그 작은 세포 안에 거대한 산업단지 하나가 돌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속에 운송이 있고, 통신도 있고, 놀라운 화학공장이 돌아가고 있고, 정보가 전달되고, 아주 복잡한 컴퓨터 프로그램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저절로 생겼다구요? 우연에 우연이 영원히 반복되면 이런 위대한 것들이 나온다구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초자연적인 것입니다. 어떤 게 더 합리적입니까? 우연에 우연이 겹쳐서 이 세상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말과, 생명의 주께서 이 우주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말 어떤 게 맞습니까? 무에서 유가 나올 수 있습니까? 생명이 없는 것에서 생명이 나올 수 있습니까? 어떤 게 더 합리적입니까? 이 세상을 미혹하는 이 세상의 신에게 더 이상 속지 마십시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고, 창조주 하나님만이 가질 수 있는 표적을 예수님이 행하신 것을 보십시오.
복음서들을 잘 살펴보면, 예수님을 반대하고 죽이려 했던 세력들도 한 번도 그가 행하신 표적을 부인한 적이 없었습니다. 장님의 눈을 뜨게 하신 일, 죽은 자를 살리신 일, 중풍병자를 일어나 걷게 하신 일,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하신 일,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일 중에 어떤 것도 그 사실을 부인한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미워하고 핍박했던 이유는 이런 표적을 안식일에 행한 것 때문에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신 일 때문에 신성모독을 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을 부인한 일은 눈씻고 찾아 보아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행하신 표적을 보았거나 그에게 치유 받은 것 자체가 믿음을 뜻하지는 않았습니다. 표적은 무엇을 가리키지요? 달을 가리켰는데, 사람들이 달은 안 보고 손가락만 보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을 보고 예수님에게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식량을 주시는 잠재적인 왕으로만 주목한다면 표적의 의미가 무색해집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가 행하신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는 첫 걸음을 띠게 되었고, 예수님을 더 알고 싶어 찾아 오게 되었습니다. “그가 대체 누구길래 이런 표적을 행할 수 있는 건가” 하는 관심을 갖고 주목하고 알아 봅니다.
니고데모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가장 관심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하게 되며, 자기 생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볼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이 사건 약 2천년 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자식이 없던 75세 된 노인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명령하시고 그가 큰 민족이 될 것이며, 모든 족속이 그를 통하여 복을 얻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또 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찌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 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후에 아브라함의 자손은 이집트에 이주하여 살다가 그들에게 노예로 혹독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는데, 하나님이 한 사람 모세를 세워서 그들을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해방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신 지 약 430년 후의 일입니다. 그들이 해방되던 날 밤을 기억하는 날이 유월절이고, 그들이 급히 나오느라 누룩을 넣지 않은 떡을 먹었던 그때를 기억하면서 유월절에 이어서 무교절을 일 주일간 가졌습니다.
혹독한 광야에서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받아 살았던 40년의 세월을 기억하는 것이 초막절입니다. 요한복음은 이스라엘의 해방과 가나안 땅 정복에 이르는 과정에 있었던 일을 기념하는 여러 명절들에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을 연결시켜 그 영적 의미를 설명합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해방되던 날 저녁에 양을 잡아 그 피를 인방과 문설주에 바르고 집 안에서 양고기를 구워 먹고 있었을 때, 밖의 이집트 사람들의 집집마다 하나님의 심판의 천사가 방문하여 장자들을 죽였으나, 양의 피를 바른 집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 심판을 면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에 갑자기 그들은 노예상태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기념하는 유월절의 어린 양은 장차 오실 메시야가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실 것을 예표한 것이라는 것을 요한복음은 우리에게 깨우쳐 줍니다.
광야에서 식량이 다 떨어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아침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온 떡을 주셨던 일이 사실은 하늘에서 온 산 떡이신 예수님을 예표한 것이었다는 것을 사람들은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과 같이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의 인도하에 가나안 땅을 정복하였고, 다윗 때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자기의 남편을 두고 다른 남자 즉 거짓 신들을 숭배하는 일을 하면서 이스라엘을 점점 타락하여 하나님이 도저히 볼 수 없는 지경까지 타락하여, 북왕국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 당하였고, 후에 남왕국도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 당하고 모든 백성이 이방 땅으로 추방 당하였습니다.
페르시아 제국 시기에 일부 유대인들이 돌아와서 예루살렘을 재건하고 성전을 재건하였습니다. 이후에 그리스에게 정복을 당하였고, 후에 로마제국에 정복 당했습니다. 모든 유대인들의 소망은 다윗 때의 왕국을 되찾는 것이었습니다. 장차 메시야가 오면 이방인들을 다 몰아내고 다윗왕국을 재건할 수 있을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소망도 그랬습니다. 예수님에게 이런 소망을 기대하는 니고데모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느니라
여기서 ‘거듭’ 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 ‘아노텐’은 ‘다시’ 라는 뜻으로도 사용되지만, ‘위로부터’ 라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다시 번역하면, “사람이 위로부터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입니다. 아래 31절에서 이 단어가 다시 나옵니다.
John 3:31 (KRV)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예수님은 위로부터 오신 분이십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하늘로서 오신 분이십니다. 하늘에서 오신 분만이 하늘로부터 오는 생명을 주실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사건은 예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하늘로부터 오는 떡을 주신 분이시며, 그가 하늘로부터 온 산 떡이심을 나타내는 표적입니다. 모세 때에 하늘로부터 온 떡을 멸시하였던 것처럼, 이 시대에도 하늘로부터 온 산 떡이신 예수님을 무시하였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Numbers 21:4–9 (KRV)
백성이 호르산에서 진행하여 홍해 길로 좇아 에돔 땅을 둘러 행하려 하였다가 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다르게 표현하면, “우리 마음이 이 형편없는 음식을 뱀을 싫어하는 것처럼 싫어한다” 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거저 주신 음식을 이토록 경멸하였을 때, 그들의 말대로 불뱀들이 일어나 그들을 물게 하셨습니다. 사실 우리는 불뱀에 물린 자와 다를 바 없습니다. 에덴동산에서 뱀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에게 반역을 하여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어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들이 죽게 되었을 때, 죄를 뉘우치고 모세에게 자기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해 달라고 했을 때, 하나님은 어떤 해결책을 주셨습니까? 구리로 불뱀 모양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고 누구든지 그 장대에 달린 놋뱀을 바라보면 낫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아, 그거 너무 쉬운데, 난 그런 것 안 믿어!” 라고 한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죽었겠지요. 오늘날도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세요. 예수님을 믿으면 죄 용서함을 받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라고 하면,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아, 그럴 리가 없어. 그거 너무 쉽잖아! 사람이 공적을 쌓아야 죄를 보상하지 어떻게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어? 그런 소리 하지 마!” 그러지요. 참 안타까운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예수 믿고 구원 받으라고 하면, “너나 믿어라. 나한테 하나님 보여주면 믿을게” 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전혀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내가 볼때에 그 발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가장 가까이 있었던 요한도 예수님의 실제 모습을 보았을 때 그 발 앞에 죽은 자 같이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천사를 만난 사람들도 다 두려워 떨며 엎드렸습니다. 천사만 봐도 두려워서 죽을 것 같은데 하나님을 직접 뵈는 일은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그들은 하나님 앞에 범죄한 직후부터 자신을 가리는 장치를 만들기 시작했고, 하나님의 낮을 피하여 숨었습니다. 죄인은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없습니다. 또 하나님은 죄인을 눈앞에 두실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여러분 텔레비전이나 유튜브 동영상을 보시다가 너무 잔인한 장면,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장면, 너무 무책임한 행동들을 보게 되면 차마 보고 있을 수 없어 채널을 돌리거나 끄게 되지 않습니까? 평범한 우리도 악을 차마 볼 수 없어 채널을 돌리거나 꺼버리게 되는데, 지극히 순결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악을 그냥 보고 계실 수 있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죄인에게 얼굴을 향하는 것은 너무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아담 안에서 하나님께 반역한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과 멀어졌습니다. 이 원수된 관계를 하나님은 어떻게 해결하셨습니까?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이 오시기 약 1400년 전에 광야에서 놋뱀을 든 사건은 불뱀에 물린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 속하실 것을 예표한 사건입니다. 모세가 뱀을 든 것 같이 예수님이 나무에 즉 십자가에 달려야 하는데, 그 목적은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는데 있습니다. 그 원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대신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우리가 연약하여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켜 의에 이를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우리 죄를 담당하게 하셨고, 또 그가 온전히 이루신 의를 우리의 의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기 아들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사 우리로 하여금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의의 전가’ 라고 합니다. 전가의 교리에는 죄의 전가가 있고, 또 의의 전가가 있습니다. 앞의 구절에서 이 두 가지를 다 설명합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예수님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이 죄의 전가이고, 그 결과로 우리가 하나님의 의가 되었습니다. 아담이 범죄한 그 죄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우리도 죄인된 것도 죄의 전가입니다.
또 우리의 죄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 전가되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주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십자가에서 당하셨습니다. 성경은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받은 자라고 하는데, 예수님이 친히 나무에 달리셔서 하나님께 저주 받은 자가 되셨습니다.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죄인으로 심판을 받으실 때, 정오부터 세 시간 동안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할 정도로 하나님은 죄인으로 처형당하는 예수님을 외면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외치실 정도로 하나님은 그 얼굴을 그에게서 돌리셨습니다. 그로 죄를 삼으셨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죄인으로 보시고 하나님이 그 얼굴을 그에게서 돌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던 중요한 이유가, 하나님이 그 얼굴을 돌리시는 것, 버리시는 것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그의 땀방울이 핏방울 같이 떨어지기까지 그것을 피하기 위해 기도 하셨다고 해석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렇게 하나님의 독생자를 내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을 바울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하나님이 어느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다구요? 독생자를 내어 주셨을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선의를 베푸셨는데 그 호의를 거절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여러분 계속 어둠 속에 숨어 주님의 얼굴을 피하시겠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숨은 것 같이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빛으로 나아와 “하나님 저는 진리를 좇아 빛으로 나아갑니다. 저의 죄를 예수님의 대속의 피로 깨끗이 씻어 주시고, 저로 하여금 빛 가운데 행하게 하옵소서” 하겠습니까? 여러분 하늘로부터 오신 이가 주시는 하늘로부터 온 생명을 얻으십시오.
John 1:9–13 (KRV)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신 하나님의 아들에게서 끊어진 사람들은 모두 나무에서 꺽인 장미 같은 존재입니다. 꺽인 장미끼리 아무리 그 아름다움을 자랑해도 이미 죽은 장미나 마찬가지 이듯이, 여러분이 가진 모든 의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의가 더러운 옷 같다고 합니다. 피와 분비물이 묻은 속옷 같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의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여러분 생명의 주시요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여러분의 주로 영접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십시오.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하거나 망설이지 마십시오. “나 같은 자가 감히 어떻게…” 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내가 좀 더 나아진 다음에 와야지” 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초청을 모욕하는 일입니다. 지금 당장 주님을 영접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얻으십시오.
“그거 너무 쉬운 것 아니야?” 라고 하지 마십시오. 애초에 여러분 안에는 해결 능력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냥 하나님의 선물을 받으십시오. 값을 먼저 내겠다는 생각 아예 하지 마십시오. 값을 치르고 싶다면 구원을 받고, 새 신분을 얻은 후에 주께 감사를 드리는 삶을 살면 됩니다. 좀 더 준비된 다음에 이 기회를 취하겠다고 하지 마십시오. 북에서 탈출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것 저것 재다가 기회를 놓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 15년 전에 그때 떠날 걸…” 하며 후회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밭에 심은 감자 때문에 떠나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돈 조금 더 벌겠다고 기회를 놓친 사람도 있습니다. 그 시간을 늦출수록 손해보는 것입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냐고요? 있습니다. 탈북한 분들 보세요. 그들이 대한민국에 기여한 것 아무 것도 없어도 다 살 수 있게 해주지 않습니까? 스스로 할 수 있는 형편이었으면 그렇게 해 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값없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마찬가지 입니다. 여러분 스스로에게는 아무 해결능력이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의 호의를 그 선물을 그냥 받으십시오.
하나님이 한심하게 여기시는 것이 ‘자기 의’ 입니다. 여러분이 이루고자 하는 의, 이제까지 이룬 의는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치 북한에서 열심히 재산을 모아 가지고 나가려는 것과 같습니다. 그 재산 아무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십 년을 모은 것, 대한민국에서 일 주일 임금도 안되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스스로 내세울 만한 의를 만들고자 하는 것 하나님 앞에서 아무 가치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의 호의 앞에 그냥 나오세요. 자기 스스로 만든 의 그거 아무 것도 아닙니다.
더 이상 이 세상의 신에게 속지 마시고, 우리의 참되신 왕에게 나아오세요. 악한 북의 통치자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노예와 다를 바 없이 살다가 이 나라 백성이 된 분들에게서 교훈을 얻으십시오. 영원한 왕, 의로우신 왕, 사랑으로 충만하신 왕, 여러분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주신 왕에게 나아오십시오. 하나님의 나라 시민권을 얻으면, 어둠의 나라의 왕의 손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