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아시고 나를 사랑하시는 (시13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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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어촌 마을에 아주 아리따운 젊은 여자가 이사를 왔습니다. 여자가 이삿짐 트럭에서 내리는 순간 그 동네 남자라는 남자는 모두 여자의 외모에 깜짝놀랐습니다. 뛰어난 외모 때문에 동네 남자들은 그야말로 정신을 못차리고 있었고, 그런 남자들을 바라보는 동네 여인들은 소심한 질투를 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그 여자 트럭에서 아이 한 명을 데리고 내려서 유모차에 태웠습니다. 이사온 여자에게 소심한 질투를 하던 동네 여인들은 금세 마음을 놓았습니다. “그래 아기 엄만 가봐” “새댁이었구만” 동네 남자들도 아기를 보고나서 놀라서 벌린 입을 다물었습니다.
다음 날 이사 온 여자는 떡을 해서 가게 한 곳에 들렸습니다. “이번에 이사오게 되어서 떡을 좀 했어요” 수줍은 여자의 미소와 함께 김이 모락모락 나는 시루떡 한 접시를 내밀었습니다. 마침 그 곳에 모여있던 동네 여인들이 물었습니다. “이번에 이사와서 여는 가게가 무슨 가게야?” “꽃집이야?” 그러자 여자가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저희집은 꽃집이 아니라, 술집이에요” 술집이라는 말에 약간 당황하던 여인들은 바로 다시 물었습니다. “바깥 양반하고 호프집 같은 거 하는 가봐?” 그러자 여인이 또 말합니다. “아니요. 저 혼자해요. 저 아기를 낳아서 기르는 미혼모예요”
처음에는 외모가 탁월한 아가씨인줄 알았다가 이후에는 아기를 보고 젊은 새댁인줄 알았다가 마침내 이 여자가 미혼모라는 사실을 알게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사람들은 그 여자의 일거수일투족을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괴롭혔습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린 이야기는 여러분 잘 아실 수 있는데, 바로 드라마 동백꽃 필무렵 1화에 나온 내용입니다. 얼굴 예쁜 동백이, 아기가 있는 동백이… 그런데 알고보니 미혼모에 부모도 없었던 동백이… 그런 그녀의 정체를 알게된 동네 사람들은 동백이를 무시하고 괴롭혔습니다. 물론 이 드라마의 끝은 모든 동네 사람들이 동백이를 사랑하게 되고, 멋진 남자도 만나 인생의 기적을 경험하는 결말로 끝이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과연 우리는 서로의 모든 것을 다 알고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요? 동백이의 정체를 모두 알게된 사람들이 처음의 태도와 달리 그녀를 무시했던 것처럼, 사실 우리 삶 가운데서도 서로의 실체를 다 안다면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싶습니다.
이 세상을 사는 사람은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깨끗한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리 점잖은 사람,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의 내면과 외면은 죄로 인한 자국들이 가득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아는 로마서 말씀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로마서 3장 23절 입니다.
로마서 3:23 NKRV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이처럼 모든 사람이 죄 때문에 그 자국이 우리 안에 가득합니다. 우리는 이런 자국을 감추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혹여나 우리 안에 있는 부끄러운 이 자국이 들킬까봐 수많은 노력을 합니다.
우리 스스로도 잘 아는 겁니다. “내 연약함을 누군가가 다 알게 된다면, 누가 나를 사랑하겠는가” 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셔서 한술 더 뜨십니다. “모든 것을 지으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 또한 모두 아신다고 하십니다”
심지어 신약 말씀에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10:30 NKRV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우리를 얼마나 아시는가 했을 때, 그분은 우리 머리카락의 수를 살리실 만큼 아신다고 합니다. 이 표현은 결국 우리에 대해서 모르는게 없다는 겁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이 이처럼 우리를 잘 아신다. 아니 모두 아신다는 사실이 은혜로 다가옵니까? 좀 두렵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이 나를 다 아시면, 정말 나를 사랑하실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과연 하나님은 우리를 다 알고도 우리를 정말 사랑하실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서 그 사실을 살펴보길 원합니다.

2. 본론: 나를 잘 아시는 여호와 하나님

본문의 말씀은 다윗의 시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참혹한 죄를 범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함께 1절의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시편 139:1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을 ‘살펴 보셨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그냥 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다윗 살펴보셨다는 말은 원어적으로 볼 때, “분석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마치 본질적인 특징이나 의미를 찾아내듯 그렇게 꼼꼼하게 하나님이 다윗 자신을 보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이 다윗을 “아신다”고 합니다.
세상을 지으시고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인간 다윗을 샅샅히 보셨고, 완전한 의미에서 그를 아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은 인간 다윗의 탁월한 신앙만 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를 샅샅히 보시고 아심으로 그의 연약함, 죄악, 불완전함에 대해서도 다 아셨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심에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대충아시는 분이 절대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를 꿰뚫고 있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가진 것들로 마치 문신자국과 같은 우리 죄의 자국을 감추려해도 하나님은 우리의 죄와 연약함의 자국을 모두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가에 대해서도 잘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거짓을 고하며, 위선을 행할 수 있습니까? 불가능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어느 정도 꿰둟고 계실까요? 함께 2-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시편 139:2–4 NKRV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그분은 우리의 앉고 일어섬을 아십니다. 이 말은 우리의 행동을 모두 감찰하신다는 겁니다. 구체적으로 보면, 우리의 앉는 것, 곧 사적인 행동가 우리가 일어서는 것, 곧 공적인 행동까지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공적인 행동을 할 때, 우리 이미지 관리를 합니다. 소위 좀 있어보이려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공적인 행동 가운데서도 우리 행동을 모두 파악하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분은 멀리서도 우리의 생각을 밝히 아십니다. 그분은 하늘 보좌에 계시면서도 다윗 성에 앉아있는 다윗의 마음을 꿰뚫고 계셨고, 오늘 각자 삶의 자리에 있는 우리 생각도 다 밝히 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가 가는 모든 길, 그리고 모든 행위도 아십니다. 심지어 우리가 어떤 말을 하기전에도 우리가 할 말과 생각을 꿰뚫고 계시는 분이라는 겁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 참 섬뜩합니다. 하나님이 이정도로 나를 아신다면, 제 생각, 제 판단, 제 기준에는 사랑은 커녕 관심도 주지 않을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하나님 앞에 누가 자기를 자랑할 수 있습니까? 저는 아담과 하와가 바위 뒤에 숨은게 이해가 갑니다. 이렇게 잘 아시는데, 어떻게 숨지 않습니까?
다윗의 시 내용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모두 아신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를 두렵게하는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제까지 하나님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모두 아신다는 것을 말했다가 이어지는 5절에서는 우리의 두려움을 모두 뒤집을 만한 내용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함께 5절을 보겠습니다.
시편 139:5 NKRV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앞뒤를 둘러싸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둘러싸시고'라는 표현은 ‘막으시고’라고 표현해도 원어적으로 무방합니다. 우리를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막으셨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은 우리로 도망가지 못하게 하여 반드시 벌을 주시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와 같이 죄 많고 연약한 우리가 하나님 품을 이탈하지 못하다록 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이 우리 상황을 막으심을 경험할 떄가 있습니다. 그럴 때 참 답답합니다. 나는 차고 나가기로 맘을 먹었는데, 하나님이 막으시면 차고 나갈 길이 없기 막막하기 떄문입니다. 그런데 그럴 때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을 감싸심은 그리고 우리를 막으심은 우리를 답답하게 하고, 우리를 벌로 가두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보호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나를 아시는 하나님은 나의 죄와 더러움을 보시고, 나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오히려 다윗의 고백처럼 우리의 앞뒤를 감싸 안으시며, 우리를 보호히시고 그분의 손을 우리에게 얹어 축복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정말 말도 안되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나를 다 알고서도 아니 우리를 다 알고서도 우리를 이토록 사랑할 수 있을까요?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데” “내가 얼마나 나밖에 모르는 사람인데”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셨지만, 당신의 자녀된 우리의 죄는 당신의 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심으로 해결하여 주시고 다시는 생각하지 않기로 하셨습니다. 히10:17
히브리서 10:17 NKRV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 세상에 나를 아는 사람은 나를 결코 사랑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어느 누구보다 잘아심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십니다.
분명히 내 안에는 여전히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고, 우리 죄는 기억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한 없는 사랑으로 사랑해주십니다.
죄에 대한 분노보다,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이 훨씬 크시기에, 그분은 그렇게 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나를 모두 알 되,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음을 우리가 알 수 있기를 원합니다.

결론: 들은 말씀을 살고 누리는 방법!

말씀의 결론을 맺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누구도 우리를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꼬집어 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우리를 감싸안으시고 우리를 보호하시며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 사랑을 알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는 이 은혜와 사랑으로 충만해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형제 자매를 바라볼 때, 이런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겁니다.
우리는 주변의 지체들을 오랫동안 보면 그 사람의 연약한 부분도 모두 알게 됩니다. 그순간 우리는 아주 빠른 속도로 그 사람을 판단하게 되고, 심지어 정죄할 때도 많습니다.
“아이고 저런 사람이 목사야?”
“아이고 저런 사람이 중직이야?”
“아이고 저런 양반이 봉사를 한다고?”
우리가 이런 마음이 들때, 오늘 말씀을 기억해서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어떤 사랑과 은혜를 받았는지 기억하고, 우리 곁에 지체들에게도 똑같은 사랑의 시선을 주기를 원합니다.
비록 우리가 그 사람의 잘못된 부분까지 모두 알지만, 분노보다 더 큰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들을 용서하고 이해해주길 원합니다.
그리고 이런 잣대는 자기 자신에게도 동일하게 계속 적용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면, 마귀는 계속해서 우리를 고소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살아가려고 하면, 마귀는 끊임없이 “하나님은 너의 연약한 죄를 다 안다”고 하며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가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그럴 때, 나를 가장 잘 아시며, 가장 많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신 말씀 붙잡고, 마땅히 이런 은혜의 주인공으로서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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