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t에서 멋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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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but에서 멋.
본문: 사도행전 9:26-27
사도행전 9:26–27 (NKRV)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서론
노래하는 트라우마
변성기 자기 목소리가 듣기 싫음.
음치,,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은혜
이런 것을 우리는 트라우마라고 합니다.
우리가 흔히 ptsd와 트라우마를 혼동해서 사용하는데,
사실 ptsd와 트라우마는 다른 개념입니다.
트라우마는 원인이고 ptsd는 질환이에요.
“트라우마를 겪어서 ptsd가 온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네요.
우리가 흔하게 사용하는 트라우마나 ptsd는 우리가 생각하는 무게보다 훨씬 더 무거운 단어에요.
오늘은 트라우마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려고해요.
트라우마를 겪었다고 말할 수 있는 종류에는
재난이나 사고같은 우리의 삶에 극적인 영향을 주거나 심지어 생명이 살고 죽느냐에 관련한 굉장히 큰 트라우마부터
우리의 자존감에 영향을 주는 상대적으로 작은 사이즈의 트라우마까지 다양합니다.
그러나 중요한건 우리가 흔하게 일상생활에서 가볍고 농담처럼 사용하기엔 무거운 주제입니다.
오늘 왜 이런 트라우마라는 무거운 주제로 설교를 시작하느냐?
본론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트라우마를 겪고 있거든요.
그 트라우마의 무게가 가볍지 않고 어마어마하게 무거워요.
바로 ‘사울 트라우마’입니다.
제가 만든 단어에요.
혹시나 누가 이 단어를 사용했을까?
네이버랑 구글에 검색을 해보니까,
없더라구요.
‘서울 트라우마 치료’는 누가 검색을 했는데,
사울 트라우마라는 단어는 기도하다가 하나님이 지혜를 주셔서 깨달은 단어에요.
오늘 본문은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본문이에요.
내가 교회 짬밥이 좀 찼다. 교회를 좀 다녔다.
내가 모태신앙이다! 하면 한번쯤은 들어봤을 말씀이에요.
어떤 내용인가요? 바울의 회개입니다.
그는 우리로 따지만, 금수저로 태어나 서울대를 수석으로 입학하여서 훌륭한 교수님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사회에 모범적인 태도를 보이며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아주 엘리트 코스를 밟은 바울이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런데 바울이 자신이 믿지 않는 예수를 부인하고, 심지어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핍박하는거에요.
잔인하게 살해하고, 박해하고, 핍박하며 그리스도인들을 아주 힘들게 했어요.
그 대표적인 예가 얼마전에 살펴본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이죠.
바울이 스데반집사님의 죽음에 아주 큰 역할을 했어요.
그러니 그리스도인들에게 바울의 이미지가 얼마나 악마같을까요? 살인자죠.
내가 사랑하던 친구가 내가 사랑하던 가족이 죽음을 경험했는데,
그 살인의 장본인이 누구에요? 바울이었던거에요.
바울을 볼때 마다, 바울의 이름이 들릴때마다,
사랑하는 내 가족과 친구들이 끔찍하게 고통받고 죽는 모습이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거에요.
사울 트라우마를 받고, 사울 ptsd가 온거에요.
그러던 어느날,
바울이 이제 본격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더 죽이기 위해
다메섹을 걷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날 아주 역사적인 일이 생깁니다.
다메섹에서 예수님이 바울을 찾아오신거에요.
저는 오늘 말씀을 읽을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해요.
예수님이 우리를 만나주시는 것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
어떤 모습이든 그렇게 중요하지 않구나.
예수님이 우리를 만나주실 때는 그곳이 길 위가 되었든,
가장 힘든 광야가 되었든,
또는 내가 “예수님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고통스럽게 기도하는”
어쩌면 불경건해 보이는 모습이 있더라도,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만나주시는데, 관련이 없구나! 라는 묵상을 해봐요.
바라기는 우리 중등부도 그곳이 어느 곳이든 예수님을 만나기를 축복합니다.
더 나아가 그곳이 어디든간에 예수님을 기억하고 찬양하는 중등부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렇게 오늘 바울은 역사적인 경험을 합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이 날은 잊지 못할 날이에요. 어두웠던 눈과 귀가 열리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 기쁨과 감격이 가슴속에서 차올랐어요.
바울이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 감격과 뜨거움을 가지고,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복음을 전해요!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이 이상한거에요.
사람들이 바울을 피하는거에요. 손가락질 하는거에요.
왜요? 그 사람들은 모두 사울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들이거든요.
그래서 바울을 볼 때마다, 도망가고 싶은거에요.
바울에게 이날은 하나님께 용서받고 회개한 역사적인 날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아니었던거에요. 아직 트라우마가 있던거에요.
여기서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의 중요한 점을 알 수 있어요.
회개는 헬라어로 ‘메타노에오’(μετανοέω)인데, 무슨 뜻이냐? 뒤로 돌아가 생각하다에요.
히브리어로는 ‘슈브’(שׁוּב)인데 무슨 뜻이냐? 돌아가다’는 뜻으로 그릇된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자 그럼, 회개한다는 것은, 돌이키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 끝이아니라,
이제 시작이에요.
돌이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말해요.
그러면 내 맘대로 살다가 지은 죄들이 있을거에요.
누구를 미워했어. 누구를 정죄하고 욕하고 험담했어.
그러면 하나님께 회개했다는 것은,
돌이켜서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그 길에서 누구를 만나는거에요?
내가 잘못했던 사람들, 미워하고 정죄했던 사람들을 만나서 용서를 구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에요.
그게 진정한 회개에요.
내가 그냥 하나님께 용서받았으니까 끝이야! 이게 아니라,
내가 하나님께 용서 받았듯이 남을 용서해주는 것! 그것이 회개입니다.
그래서 그 과정은 쉽지 않아요.
나를 내려놓아야하고, 나 스스로도 용서해야하며,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해요. 그 과정이 생각보다 쉽지 않을 수 있어요. 생각보다 오래걸릴 수도 있어요.
그건 비단 내가 누군가를 용서하는 문제뿐 아니라,
내가 하나님께 용서받는 것도 시간이 필요할 수있어요. 쉽지 않을 수 있어요.
내가 용서받아도 될까? 나도 용서받을 수 있다고? 믿어지지 않을 수 있어요.
하지만 그 과정이 하나님께 나의 트라우마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 흔히 트라우마를 극복한다고 표현해요.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볼게요.
이 ‘트라우마’라는 단어는 사실 그리스어에서 파생되었는데,
원어적 뜻이 무엇이냐면, ‘상처’에요.
그래서 우리가 트라우마를 받았다는 것은, 상처를 받았다는 것이에요.
그렇다면 우리가 상처를 극복한다고 표현하나요?
상처를 회복하고 치료받는다고 이야기하죠.
어쩌면 우리의 트라우마는 극복해야 될 문제라기보다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회복받고 치료받아야할 문제라는거에요.
오늘 바울은 사람들에게 잊을 수 없는 트라우마를 줬어요.
어쩌면 이 트라우마를 치료받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시간과 에너지가 소비될 수 있어요.
결론 (반주부탁)
이미 바울과 사람들간에 멀어진 그 간격을 다시 좁히는데 얼마나 큰 힘이 들겠어요.
사람들이 모두가 바울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손가락질하고 욕할 때,
27절에서 한 사람이 등장해요.
오늘 본문 26절과 2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사도행전 9:26–27 (NKRV)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모두가 바울을 적대시 할 때,
위로의 사람 바나바가 등장합니다.
이 바나바는 사실 별명이죠. 본명은 요셉인데, 이 사람이 함께하면 위로가 되고 힘이 되기 때문에, 사람들이 위로의 사람이라는 뜻의 바나바라고 불렀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 27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보면 이렇게 시작해요.
사도행전 9:26–27 (NKSV)
사울이 예루살렘에 이르러서, 거기에 있는 제자들과 어울리려고 하였으나, 그들은 사울이 제자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어서, 모두들 그를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바나바는 사울을 맞아들여, 사도들에게로 데려가서, 사울이 길에서 주님을 본 일과,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사울이 다마스쿠스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한 일을,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NIV성경에서는 27절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But!
모두가 바울을 배척하고 미워할 때, 그러나의 인생을 사는 사람!
그러나 용서해주는 사람, 그러나 믿어주는 사람, 그러나 사랑해주는 사람.
여러분, 사랑하기 때문에 믿어주는 것이고, 사랑하기 때문에 잘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오늘 바나바는 위로의 사람 답게 바울을 믿어줘요.
그리고 어떻게 합니까?
but, 그러나 바나바는 사울을 맞아들여, 사도들에게로 데려가서
여러분 여기서 사울을 맞아들인다는 것은
그냥 바울이 왔으니까 받아준다의 소극적인 표현이 아니에요.
원어적으로 보면 잡다, 붙들다의 적극적인 표현이에요.
즉 무슨말이에요?
그들은 사울이 제자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어서, 모두들 그를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바나바는 사울을 붙잡고 사도들에게 데려가서,
멀어졌던 바울과 사람들의 거리를 좁혀주는 것입니다.
무엇이 되는겁니까? 벗! 다시 주님 안에서 친구가 되고, 가족이 되는 것이죠.
트라우마의 회복이죠. 트라우마의 치료를 하나님께서 바나바를 통해 하시는 것입니다.
바나바가 바울과 사람들의 다리의 역할을 하는거죠.
위로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중등부가 바나바와 같이 다리가 되어주기를 소망합니다.
관계를 중간에서 깨뜨리고 어그러뜨리는 인생이 아니라,
멀어져 있는 관계를 회복시켜주고, 이어주는 다리의 역할
트라우마를 남겨주는 인생이 아니라,
트라우마를 회복시키고 치료해주는 인생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의 담임목사님께서 늘 강조하시는게 있어요.
be the bridge (하늘과 땅의 다리가 되는 사람)
이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중등부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위로의 사람되기를 축복합니다.
왜요?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적극적인 사랑으로 붙잡아주셔서 하나님과 우리의 다리가 되어주셨고,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울이 살인자였지만, 길가에서 예수님을 만난것 처럼,
우리가 어디에 있든, 어떤 모습이든 간에 상관하지 않고 우리를 만나주시고 사랑해주시는 예수님이 계시기에,
오늘도 우리가
“그러나”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의 인생을 사는 사람을 하늘과 땅의 “벗”이 되게 하구요.
사람과 사람들간에 관계를 끊는 것이 아니라, 이어주는 “벗”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가야할 그리스도인의 “멋”입니다.
다른게 멋있는게 아니라
그러나의 결단을 통해 벗을 만들어주는 모습이 멋있는거에요.
정리
말씀을 정리합니다.
바울은 사람들에게 어마어마한 트라우마를 남겨주었어요.
그 트라우마를 치료받고 회복하기 위해서는 큰 에너지와 시간이 소요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민을 한번에 해결해준 하나님의 사람 위로의 사람 바나바가 등장합니다.
바나바는 사람들의 트라우마를 치료해주고, 멀어졌던 관계에 다리가 되어 벗이 되게 합니다.
어떻게요?
먼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적극적인 사랑으로,
우리의 모습과 형편과 상관없이 만나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과 은혜가 있기에 우리도
그러나의 인생 벗이 되어주는 인생 살아가는 멋있는 중등부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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