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 1:1-5 예배의 목마름을 회복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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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의 목마름을 회복하자!
룻기 1장 1-5절
평택에서 맛있는 떡집이 어디입니까? 가장 맛있는 떡집이 있습니다. 그런데 떡집에 떡이 있다고 해서 손님들이 찾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떡이 맛있어야 손님들이 떡집에 오게 되어 있습니다. 떡이 없는 떡집에 손님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떡이 있어도 맛이 없다면 그 역시 찾는 손님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나오미의 남편은 먹을 식량이 없게 되자 가족들을 데리고 먹을 것을 찾아서 모압 지방으로 떠납니다. 베들레헴이라는 말은 원래 떡집이라는 뜻입니다. 떡을 찾아서 모압 지방으로 떠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라고 하는 떡 집에도 비슷한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떡집에 떡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교회를 나가기 시작합니다. 떡은 있지만 떡 맛에 싫증을 느끼고 실망한 사람들이 더 맛있는 떡을 찾아서 떠나고 있습니다.
베들레헴이라고 하는 교회를 떠나서 모압이라고 하는 세상을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떡 때문에 찾아간 모압에서도 생활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나오미는 모압에 가서 약간의 떡은 얻었을지 모르지만 남편이 죽고 두 아들이 마저 죽게 되는 비극을 맞았습니다. 오늘날 더 맛있는 떡을 찾아서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세상 가운데서 더 큰 슬픔과 아픔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모압에서 영원히 살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고향인 베들레헴에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려 한다.” 6절에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식량이 없던 베들레헴에 먹을 것이 생기니깐 사람들이 돌아옵니다. 떡이 없던 떡집에 떡이 생기면 사람들이 다시 찾게 되어 있습니다. 떡은 있어도 맛없는 떡이라서 찾는 이가 없던 떡집에도, 이제 맛있는 떡을 만든다는 소문이 나면 사람들은 줄지어 찾아와서 그 떡을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간구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십년 동안 기근에 시달리면서 식량이 없었던 베들레헴에 풍년이 든 이유를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라고 기록하고 있다. 개역한글 성경에는 “하나님의 권고하심” 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이 무엇인가? 권고하심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하나님의 임재를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십 세가 되도록 자식을 낳지 못하는 사라를 권고하셔서 아들을 낳게 하셨듯이,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기근이 있는 땅에도 양식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흐르던 홍해가 갈라지면 길을 만들어 내고,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요단강물이 말라서 건널 수 있는 대로가 생깁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옥문이 열리는 역사가 일어나고,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아픔이 떠나갑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귀신들린 자들이 자유롭게 되고, 병든 자들이 치유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일 수 있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여호수아 10장에서는 이스라엘이 전쟁을 할 때 태양이 멈추고 달이 멈추어 서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우리 교회와 우리 삶에도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문제는 베들레헴이라는 떡집에 떡이 없는 것과 같이 교회에 하나님의 임재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데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예배당을 떠나고 있습니다. 예배에 은혜와 감동이 없는데 사람들이 모여들 리가 없습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은 냉랭한 마음으로 아무런 기대도 없이 예배를 드립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기쁨이 없고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감동과 은혜가 없습니다. 심지어 예배를 드리는 시간이 지루하게만 느껴집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배 분위기를 재미있게 바꾸고 사람들을 즐겁게 합니다.
심지어 전문기획사들이 의해 예배가 콘서트와 쇼로 전략합니다. 화려한 조명과 무대장치, 그리고 고가의 음향 장비들을 동원해서 예배의 감동과 은혜를 추구해 보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예배가 아니라 사람들을 위한 예배입니다. 예배는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예배로 변질되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와 아세라 선지자 450명과 싸울 때, 어떻게 물리쳤습니까?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이 아침부터 한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렀지만 바알은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바알의 선지자들은 자신들이 만든 제단을 돌면서 춤을 추고 자신들의 의식에 따라 칼과 창으로 몸에 상처를 내서 피까지 흘렸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습니다. 이때 엘리야가 백성들을 허물어진 주님의 제단 주변으로 모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단을 고치고 열두 개의 돌을 모아서 주님께 예배할 제단을 다시 쌓고 제단 주위에는 곡식 두 가마가 들어갈 정도의 도량을 팠습니다. 그 다음 송아지를 잡고 그 위에 올려놓고 물을 네 동이나 가득 채워서 번제물과 장식에 쏟아 부었습니다. 세 번이나 그렇게 하자 물이 제단 위로 흘러넘치고 옆 도랑에도 물이 가득찼습니다. 그렇게 하고 나서 엘리야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응답하소서. 이 백성으로 하여금 주님이 하나님이시며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시는 주님임을 알게 하소서.” 왕상 18:37
열왕기상 18장에 보면 엘리야는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불로 임재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주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응답을 받아 하나님의 불이 떨어집니다. 그 불은 제물과 나무단과 불과 흙을 모두 태우고 도랑의 물도 모두 말라 버리게 했습니다.
이제 교회는 방황하는 백성들을 불러 모아서 하나님의 살아 역사하심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쇼를 보여주고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엘리야가 기도했던 것처럼 “하나님 응답해 주십시오. 하나님, 불로 임재하여 주십시오”하고 부르짖는 간절함이 필요합니다. 그 간절함이 하늘문을 열고 그 간절함이 하늘로부터 불이 임하게 하는 것입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갈급한 심정으로 우리 영혼도 주님의 임재를 간절히 원해야 합니다.
예배는 무엇입니까?
2. 하나님을 사모하라.
예배를 드리는 우리의 간절한 소망과 기도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불이 임해서 내 옛 사람을 태우고, 옛 성품을 태우고, 나의 죄성을 모두 태우는 역사를 기대하며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불이 임해야 우리를 묶고 있는 악한 영들이 떠나가고 하나님의 불이 임해야 병든 영혼과 육체가 치유됩니다. 기도 안에서 나의 모든 죄악을 태우는 역사를 열망하는 간절함이 있어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먼발치에서라도 보기를 소원하며 나무 위로 올라갔던 삭개오의 열심히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면 내 삶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마음 둘 곳을 몰라 방황하고 있다면, 반복적이고 순간적인 죄로 고민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임재를 소원해야 합니다. 사람 만나는 것을 그리워하지 말고, 사람에게 매달리지 말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나를 태우고 나를 만족시키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면 주님만이 나의 힘이요, 방패요, 주님만이 나의 소망이라는 고백이 내 안에서 증거가 됩니다. 그 어떤 소원보다도 하나님의 임재를 소원하는 간절함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시편 143편 6절의 말씀과 같이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라고 하는 간절한 고백이 있을 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배 드리러 갈 때 여러분의 간절한 소원과 기도는 무엇입니까?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갈 때처럼 설렘과 기대가 여러분 안에 있는지, 며칠 동안 물을 먹지 못해 갈증에 허덕이며 물을 찾아 헤매는 그 심정이 내 안에 있는지, 몇 날을 굶고 배를 움켜쥔 채 먹을 것을 찾으러 다니는 그 간절함이 지금 우리 안에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심각한 영적 기근에 빠져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먹을 양식이 풍부하고 마실 물도 풍부하지만 우리의 내면은 기근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는 영적 기근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문제는 우리가 지금 얼마나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한지를 스스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입으로 나는 부족한 것이 없다고, 다 만족 한다고 떠들면서 자신의 불쌍한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그들은 참으로 비참하고 가난한 영혼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불로 연단한 금을 사야 합니다. 흰 옷을 사서 입어야 합니다. 안약을 사서 발라야 눈을 떠서 볼 수 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로 연단한 금은 세상에서 살 수 없는 것들입니다. 나의 부끄러움을 감쌀 수 있는 흰옷은 시장이나 백화점에서 살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내 눈이 멀었는데 이것을 치료할 수 있는 안약은 약국이나 안과에서 파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하나님께 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만 주실 수 있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값을 치르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차디찬 지하 감옥에 갇혀서 나갈 곳이 보이지 않는 절망 가운데 있다면 하나님의 임재를 소원하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바울과 실라가 그러했던 것처럼 하나님께 기도하며 찬송하며 예배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임재로 지하 옥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찬송만 한다고 옥문이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만 한다고 옥문이 열리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찬송과 기도가 하나님의 임재를 만들어야 내야 합니다. 이런 간절함이 우리가 가운데 있기를 소원합니다.
3. 예배는 희생이 있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의 예배에는 희생이 없습니다. 진정으로 예배 가운데 주님의 임재를 보기 원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가장 비싼 옥합을 깨뜨리는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귀하고 값진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던 마리아의 희생은 오늘날 우리교회에서 찾기 어렵습니다. 대신 왜 이렇게 비싼 것을 낭비하느냐고 비난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만이 예배당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시간을 아까워하고 예배시간이 조금만 길어져도 시계를 보면서 이렇게 귀한 시간을 허비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화를 냅니다.
자녀들이 예배당에 가지 않고 학원에 가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공부하는 시간은 귀하고 예배하는 시간은 아깝다고 생각합니다. 예배 중에 시계를 들여다보고 예배가 마무리되기도 전에 예배당을 빠져 나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내가 기도할 것 다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받을 것을 다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과 물질을 그렇게 아까워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예배는 희생입니다. 희생이 있어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고 가장 값진 것을 주님 앞에 드리기 시작할 때 우리의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명의 문둥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열 명 중 단 명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 한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병을 고치고도 돌아오지 않는 아홉 명의 문둥병 환자들이 바로 나 자신은 아닙니까? 심각한 문제가 있을 때만, 하나님을 찾고 내 문제가 해결되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바로 우리들이 아닙니까?
내가 병들고 집안에 문제가 생기고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기도가 열렬해지고 찬양이 뜨거워집니다.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의 임재를 간구하며 애타게 기도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해결되고 나서 감사를 잊고 더 이상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배가 희생이라면, 예배는 또한 감사의 제사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가인의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예배는 받지 않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듣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를 드린 아벨의 예배가 바로 믿음의 예배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가 아니라, 자기가 원하고 자기가 생각하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예배를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 입맛에 맞는 예배, 내가 기뻐하는 가인의 예배만을 찾아 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에서 나의 기분, 나의 기쁨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내 마음이 슬프든 기쁘든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 예배드릴 때는 결정을 해야 합니다. 내 마음이 안 좋아도, 내 안에 슬픔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으셔야 합니다.
내가 기분이 좋고, 기쁠 때만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감정이 어떻든 나의 의지로 예배를 결정하고 손을 들어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진신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면서, 엘리야의 기도로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바알의 450명 선지자들을 다 파했던 것처럼, 그러한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길 소원합니다.
말씀이 선포될 때, 수 천명이 회개하는 초대 교회의 역사가 오늘날에는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말씀 전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그 주님의 임재를 소원한다면 동일한 역사가 오늘 이 시대에도 일어 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예배에 목마른 삶은 어디서나 기도합니다. 교회에서 예배하고 또 집에 가서도 혼자 예배 합니다. 예배하는 장소는 그 곳이 어디든 거룩한 곳이 되고 하나님은 어느 곳에나 임재하십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향한 예배는 목말라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예배는 늘 배고파야 합니다, 그래서 드려지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경험하기를 소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