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2:1-11 첫 표적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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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1-11]
1.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2.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3.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4.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5.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6.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7.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8.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9.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11.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첫 표적의 의미
요즘 티비나 인터넷에 나오는 광고들을 보면, ‘인생을 즐겨라’라는 메시지의 광고 카피들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인생을 더 즐길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인생의 즐거움들과 기쁨들을 더욱 끌어올릴 수 있는가, 무엇을 가져야 내가 인생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남들에게 나타낼 수 있는가. 물론, 세상의 이러한 메시지들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요즘은 더욱 화려하고 그럴듯한 포장으로 ‘인생을 즐겨야한다’는 점을 굉장히 가치 있게 보이도록 하는 기술이, 혹은 그 교묘함이 더 발전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밤 10시 이후에 집중적으로 나오는 맥주 광고와 같은 주류 광고는 이러한 메시지의 정점에 서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광고의 문구들을 좀 찾아봤습니다. 그 중 몇 가지만 말씀드려보면, “짜릿하게 즐겨라,” “시원함의 끝,” “살아있는 이 순간,” “꽂히는 대로 해,” “기분 좋게 UP 깨끗하게 UP” 등, 정말 우리의 갈증을 해소시켜줄 것 같고, 기분을 좋게 해줄 것 같고, 또 시원한 즐거움을 줄 것만 같은 그런 문구들을 내세우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구미를 당기는 매력적인 문구와 함께, 대부분의 주류 광고는 조금 선정적인 장면이 포함되거나, 떠들썩하게 파티와 축제를 즐기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이러한 메시지를 더욱 강렬하게 전달합니다. 특히나 젊은이들에게는 그렇게 즐기는 것이 청춘다운 것이고, 젊은이의 열정이라는 식의 이미지를 불어넣어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자꾸 이러한 것들에 귀 기울이게 하고, 참되고 영원한 것들로부터는 관심을 멀어지게 하는, 또한 거룩에 대해서는 더더욱 무관심하게 만드는 것이 사탄의 전략이고, 세상의 속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실체에 대해서 알아야만 하는 것이죠. 성경의 가르침과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또 믿음의 눈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지혜를 가지고, 우리는 이런 것들을 올바로 분별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보여주는 기쁨, 이 땅에서 누려야만하고 즐겨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들. 그렇지 않으면 그 인생은 불행한 것이라고 속이는, 이 세상이 말하는 이러한 떠들썩함과 즐기는 축제와 같은 것들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앞에서 말씀드린 것과 같은 광고들이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처럼,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행복과 즐거움들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실 실체가 없는 것이며, 헛된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 말은 우리가 그런 것들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도 없고, 우리가 그런 것들을 쫓기 위해 행한 모든 행실들은 하나님 앞에 카운트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아무리 그럴듯해 보이는 행복과 가치들과 힘이라 해도, 영원하신 하나님의 뜻에 합치하지 않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는 없는 것으로 여기십니다. 이사야 40장 17절에 보면, “그의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모든 것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전도서 기자는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전 1:14).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삼아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보라 이것도 헛되도다”(전 2:1)라는 고백들을 하지 않습니까?
이런 말을 들으면, 우리는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즐거움조차 누리며 살 수 없는 자들이란 말인가?’ ‘우리는 행복을 추구할 생각 따위는 버려야 하는가?’ 또, ‘그렇다면 과연 헛되지 않은 무엇이란 말인가?’ ‘대체 어쩌란 말인가?’ 그러나, 그런 고민은 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이 땅에서 부질없고 헛된 행복과 즐거움들만을 쫓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참된 행복과 참된 기쁨과 영원한 복락을 알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가 뭐래도 죄의 비참함 가운데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었고, 또 어둠 가운데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었는데, 그 어둠을 밝혀주시는 빛 되신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이죠. 그래서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빛 되신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1장 4절에,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9절에서도,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요한복음 8장 12절 말씀은 함께 읽어봅시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이와 같이, 무지와 영적인 죽음이라는 어둠 가운데 있던 우리들에게, 주님께서는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빛 되신 주님께서 친히 우리가운데 오셔서, 우리의 생명이 되어주시고, 소망이 되어주시고, 길과 진리가 되어주시기 전에, 우리가 쫓던 세상의 모든 행복과 욕망과 즐거움들은 당장에는 있는 것 같지만 사라질 것들입니다. 지금은 온 땅에 가득한 것 같고, 온통 여기저기서 그러한 즐거움들을 위해 살아가고, 그러한 쾌락들이 즐비한 것 같지만, 사실 그것은 실체가 없는 것이며, 결국은 다 없어질 것들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떨어져버린 포도주는 바로 이것을 상징합니다. 혼인 잔치라는 떠들썩한 축제 가운데서, 즐거워야하는 혼인잔치에서, 그 잔치의 기쁨을 보장하는 포도주가 떨어진 것이죠. 당시 유대인의 문화에 있어서, 혼인잔치는 일주일 정도 계속되는 큰 잔치였고, 이 잔치의 모든 책임은 신랑 측에 있었습니다. 혼인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진다는 것은 당시에 하객들이나 신부 측에서 신랑 측을 고소할 수도 있는 그런 정도의 일이었습니다. 실제 그렇게 소송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냥 ‘포도주 떨어졌으니 다른 걸 마시면 되겠지’라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큰 곤경에 처한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이야기는 단순히 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뭐 술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씀드리지만, ‘술을 마셔도 되는지 마시면 안 되는지’ 하는 정도 수준의 이야기를 여기서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예수님께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을 보고 큰 위안을 얻으시는 분도 계실 거예요. 그러나 지금 본문은 결코, 술을 먹는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구실을 만들어주시고자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지금 여기서 술이 상징하는 것은 기쁨이며, 이것은 먼저는 기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이 보여주고 약속하는 그 기쁨은 결국 사라진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없는 죄인들의 진짜 문제는 그 잔치가 끊어지는 날이 반드시 오게 된다는 거예요. 그들이 기쁨으로 삼는 그 포도주가 떨어지는 날이 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많은 잔치들이 있고, 즐거움들이 있는 것 같지만, 결코 영원히 계속되는 잔치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상황을 통해 성경이 말하는 것은, 결국 우리 인생은 언젠가 포도주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 삶이라는 거예요.
그것이 죄인들의 상태입니다. 지금 당장은 그것을 모르고 살아가지만, 하나님이 없는 삶은 결국 기쁨이 끊기는 때, 즉 큰 곤경에 처할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때를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정적인 문제인 것이죠. 분명 인간은 기쁨을 추구하고, 행복을 좇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죄인 된 우리들은 그 기쁨과 그 행복을, 소진되고 사라져버릴 것들로부터 찾는 다는 거예요. 헛되고 허망한 것들로부터 행복을 찾으려 하는 존재들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그 모든 것이 사라지는 그 날 결정적인 큰 곤경에 처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참된 행복과 기쁨을 찾지도 누리지도 못하며, 궁극적으로는 고소를 당하고 심판을 당할 수밖에 없는 비참한 죄인의 삶을 본문은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져서, 예수님께서 포도주 만들어주신 걸 가지고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빗대어 설명할 필요가 있는가?’ 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단순한 기적을 보여주시고, 예수님의 능력을 증명해내신 정도의 사건이 아닙니다. 성경은 가나 혼인잔치에서의 이 사건에 대해, 11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이것이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서의 첫 표적이었다는 것이죠. 여러분, 성경에서 말하는 표적이라는 것은 ‘세메이온 σημεῖον’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기적(뒤나미스 δύναμις)’이라는 말과는 구별되는 단어입니다. 기적이란 어떤 초자연적인 사건이나 초자연적인 능력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표적이란 것은, 물론 초자연적인 사건이지만, 그것이 일어난 사건이 상징하는 깊은 영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육신의 눈으로도 기적이 일어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실제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전파를 위해 기적을 많이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표적이라는 것은 영적인 눈으로, 믿음의 눈으로 볼 때만 그 배후에 있는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기적을 보고 모여든 사람들은 많았지만, 정말 예수님을 믿고 끝까지 따른 이들은 적었던 것 역시, 예수님께서 보이신 표적의 참된 의미를 모르는 이들이 많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 신앙생활도 그런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 되겠죠.
보통 요한복음에 7개의 표적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는데, 이 모든 표적들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자신의 능력을 보이시기 위해 행하신 일들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그것이 가리키는 더 깊은 실체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중 첫 번째가 바로 오늘 우리가 살펴본 가나 혼인 잔치에서의 사건인데, 이렇게 단지 어떤 기적만을 위한 사건이 아니기 때문에 본문에서 예수님과 그의 어머니 사이에 독특한 대화가 오가는 것입니다.
3절에 보시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보고, 예수님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 이 곤경을 해결할 수 있는 어떤 능력이 있으심을 기대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또 대부분의 학자들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이 좀 일찍 죽었다고 추정하기 때문에,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마리아가 자연스레 장자인 예수님을 의지해 왔을 것이고, 지금 이 말도 그런 자연스런 의존적 반응에서 나온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4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성경은 의도적으로 지금 이런 대화가 있었음을 기록한 뒤에, 예수님의 보이신 놀라운 사건을 기록합니다. 분명, 예수님의 이 반응만 놓고 볼 때는, 그분이 어떤 일을 행하시지 않겠다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또 말씀은 그렇게 하시고 실제 포도주는 만들어 주셨습니다.
여기서,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는 말은 ‘포도주가 떨어진 일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는 말 같지만, 원문으로 보면 이것은 ‘여자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좀 더 이해가 가기 쉽게 예수님의 의도를 담아 바꿔보자면, ‘어머니, 당신께서 육신의 모친으로서 저와 가지는 인간적 관계로 인해, 제가 이 일을 이루는 것이 아님을 아십시오’라는 말입니다. 즉, 이것은 인간관계의 차원에서 이루시는 일이 아니며, 또 마리아의 요청대로 그저 당장의 곤경을 벗어나도록 하기 위한 수준에서 행하시는 일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관계가 아니라, 이제 하나님과의 관계의 차원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이것이 그분의 공생애 사역의 첫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그 목적, 하나님의 뜻대로만 행하시는 그분의 공적인 사역의 시작이며, 이 첫 표적뿐만 아니라 앞으로 그분이 행하실 모든 이적들을 통해, 그 목적을 점점 선명하게 보여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시고, 믿는 자들에게는 영적인 놀라운 가르침들을 주시는 그런 일임을 지금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어떤 이적과 기사와 표적을 보이실 때, 혹은 어떤 권능을 보이실 때, 그 일의 목적이 그저 그 기적 자체인 경우는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을 고치시고, 혹은 오병이어 사건처럼 많은 사람들을 먹이실 때. 그 각각의 사건의 일차적 목적이 단지 그렇게 먹게 하는 것, 병이 낫게 하는 것, 귀신을 쫓아내는 것, 그렇게 순간의 곤경에서 벗어나게 하시기 위한 그런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도 그 목적이 단순히 이 땅에서 살아가며 겪는 어떤 곤경들을 벗어나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보이신 그 모든 것들은 전체가 연결되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다양하고 아름답고 선명하게 보여주기 위함이고, 십자가의 길로 가시는 그분의 생애에 있어서 그 길의 의미를 보여주시는 것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단지 각각의 기적에만 초점을 두어서도 안 되고, 그저 그런 기적을 바라기만 하는 신앙생활을 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단지 기적을 바라며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그 이적 너머에 있는 참 하나님의 뜻과 영적인 실체를 발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이죠.
바로 여기에 참 신자와 거짓 신자 혹은, 불신자와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처음 마리아가 이것을 요구할 때의 그 시각으로 이 사건을 보는 것과,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바대로 이것을 보는 것은 그런 차이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차이를 알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어머니에게 이 이야기를 먼저 하신 것이죠.
그러면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께서 보이시고자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이 사건이 단순히 주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심을 나타내기 위함도 아니고, 혼인잔치를 망칠 뻔 한일을 모면하게 하시기 위한 것도 아니라면, 우리가 이 첫 표적을 통해 깨달아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이 일을 행하셨는지를 살펴봄으로써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실 때, 그분은 ‘일단 아무 통에나 물을 한 번 채워 보거라’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6절에 보면,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라고 되어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생각해보면, 분명 포도주가 떨어졌으니까, 그 포도주를 담았던 통이 어딘가 있었을 텐데, 예수님께서는 ‘포도주 담았던 통을 가져오라’고 하시지 않고, 그 정결 예식을 위한 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유대인의 정결 예식’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그들은 물로 씻어 정결하게 된다고 생각하여 철저하게 물로 씻는 전통과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7장 3-4절을 보면,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어 손을 잘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아니하며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물을 뿌리지 않고서는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그러니까 유대인은 식사를 하기 전 꼭 정결예식을 했던 것입니다. 혹시 집 밖에서 묻어 올 수도 있는 자신도 모르는 부정함으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죠.
그런데 여러분, 물로 씻어 우리의 죄를 정결하게 할 수 있습니까? 정말 우리의 인간적인 어떤 노력이나, 의식을 통해 철저하게 종교적 행위를 하면,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의 행위를 보고, 우리 죄를 깨끗하게 해주시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다른 통이 아닌, 정결 예식을 위한 물을 담는 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시는 것은, 이것이 단순히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는 능력만 보여주시기 위한 일이 아님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제 더 이상 그러한 전통으로, 혹은 율법적으로 죄 씻음을 얻는 것이 아님을 깨닫도록 이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겉만 깨끗하게 한다고 우리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자꾸만 그렇게 겉으로 종교적 외형만을 갖추려하는 우리의 뿌리 깊은 본성적 문제를 주님은 여기서 다루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우리의 죄를 씻음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전까지 물이라는 율법적인 그림자가 가리키는 그 실체가 이제 그리스도로 인해 성취될 것을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율법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결례를 행하기 위해, 물로 옷을 빨고, 물로 손을 씻고, 물로 몸을 씻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의 부정을 씻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렇게 물로 씻을 것을 규례로 정하신 것은, 정말로 물로 씻으면 그들의 부정함과 더러운 죄악이 씻겨내지는 효과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마치 구약에서 죄를 속하기 위한 모든 피의 제사가 결국엔, 오실 그리스도의 보혈을 가리키는 것처럼. 물로 씻는 정결예식 역시도,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가리키는 것이며 그 믿음 안에서 행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그 어떤 행동도, 인간의 그 어떤 종교적 행위도 그러한 능력을 그 자체로서 가지고 있는 것은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이런 착각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죠. 자꾸만 우리의 어떤 섬김이나 헌신들을 대단한 것인 양 생각하고, 내가 남보다 좀 더 무언가를 많이 했다고 여겨지면 내가 더 신실하고 의로운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남들을 정죄하는 자리에 있게 되는... 그런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지극히 인간적이고, 인간이 만들어낸 종교들과 같은 모습으로 기독교를 오해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 은혜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믿는다는 것은, 내 행위나 내 자격은 믿지 않는다는 것과도 같은 것이죠. 왜 그렇습니까? 은혜라는 것 자체가 ‘자격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며, 로마서 4장 4절에서 표현하는 것처럼 은혜는 어떤 행한 것에 대한 ‘삯’이나 ‘보수’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내가 열심히 해서 획득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에요, 오직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거예요. 우리의 구원은 내가 공적을 쌓고, 섬김과 헌신들을 쌓아, 그것을 통해 도달하게 되는 어떤 것도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 믿음을 통해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헌신과 순종과 섬김은 그렇게 은혜로 구원받은 자의 증거로 나타나는 거예요. 구원이라는 것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이기에 존재적으로 완전히 다른 자가 되었다는 증거가 그 삶에서 열매로써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믿는 복음과 진리가 이것이라면, 우리는 결코 우리의 어떤 행위를 자신의 의로 삼거나, 자랑으로 삼거나, 남을 비판하는 도구로 삼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이 우리가 받은 은혜의 증거로 나타나는 것일 뿐임을 믿기 때문이고, 내 것이 아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때는 신앙생활 잘 하는 것 같지만, 또 어떤 때는 금세 실패하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만약 내 것이라면, 한 번 잘한 것 끝까지 잘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아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고, 우리가 아무리 훌륭한 일을 하더라도, 그것은 내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선하심이요, 은혜인 것입니다. 내 행위를 자랑하고, 내 섬김을 기억하고 공로를 내세우려 하지 마시고, 그것들을 의지하지 마시고, 오직 은혜를 기억하고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물로 우리의 더러움과 부정함을 씻으시고, 피 흘려 우리 죄의 형벌을 대신 당하신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요한 1서 5장 6절에서는,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는 이렇게 물과 피로 임하신 분이십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물과 피로만 죄 씻음과 죄 용서를 받게 되는 것이며, 온전히 그분이 이루셔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에게 주신 것은, 정결예식의 물보다 더 나은 것이며,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완전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8장 6절이 말하는 것처럼,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이시며, 히브리서 7장 22절의 표현처럼,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만드신 포도주를 맛본 사람들이 10절에서처럼, ‘더 좋은 포도주를 이제야 준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측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단순히 ‘예수님이 만드시면 포도주도 더 맛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에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 새 언약, 그분의 피로 세우신 그 새 언약은 이전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더 좋고, 더 나은, 완전한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 새 언약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세워진 것이기에, 주님은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는 표적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단지 술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성찬에서와 같이 이 포도주가 주님의 보혈을 상징하기 때문에 이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그분의 십자가의 길을 보여주시기 위해, 공생애 사역의 첫 걸음, 그 첫 표적으로써 이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앞으로 그분이 행하실 모든 일들이 바로 이 일을 위한 것임을 주님은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자꾸만 이 땅에서 인간을 위해 만들어낸 기쁨을 찾고, 세상에서의 즐거움에 취하고 싶어 하는 자들입니다. 심지어 그것이 분명히 참된 것이 아니라는 것, 잔치가 끊어지고, 포도주가 떨어지는 날이 올 것임을 알면서도, 그 날에는 분명 곤경에 처할 것임을 알면서도, 그것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참으로, 죄의 비참함 가운데 있는, 소망 없는 존재들이 우리들이에요. 심지어 신앙생활 속에서 조차, 무언가를 좀 했다 생각하면 금세 자기의 의를 내세우려하고, 자기 행위를 드러내려하고, 또 겉치레로 종교의 형식을 잘 갖추려고만 하는 것이 우리들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바로 내 모습임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주님께서 바꿔주신 새 포도주를 맛볼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그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끊어지지 않고 소진되지 않는, 참되고 영원한 기쁨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그 어떤 종교적 행위나 인간적 노력으로는 될 수 없는 죄 씻음과 구원의 문제를 그분께서 이루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이 속삭이는 허무한 즐거움과 이 세상이 약속하는 사라져버릴 행복이라는 것에 속지 마시고, 오직 그리스도께서 새롭게 하신, 그분이 이루신,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충만한 기쁨을 사모하며 누리십시오. 그러기 위해 이전 것들을 내어버리고, 세상의 즐거움들에 귀 기울이지 않고, 그리스도를 가까이 하고 그분 가신 길을 따라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그분을 믿는 믿음 안에, 내 의로움과 내 자격이 아닌 은혜 가운데, 우리 심령이 새롭게 되는 역사가 있기를 진심으로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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