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1: 15 믿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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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어라.
막 1장 15절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하는 많은 단어가 사실은 매우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을 아는가? 한 종교가 어느 사회의 중심 사상이나 중심 종교로 자리잡게 되면 그 종교는 곧 제도화하는 성향이 있다. 제도화 된 종교는 그 종교가 지니고 있는 아주 핵심적인 사상들은 알맹이는 다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는다. 알맹이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사회에 있는 기존 가치관과 섞여서 원래 사상을 잃어버리거나 변질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많이 쓰는 죄, 은혜, 영접, 교회, 목사, 장로, 사랑 같은 많은 단어가 성경에서 가르치는 내용과 약간 다르게 사용되고 있다. 완전히 다른 것은 아니지만 성경이 이야기하는 그대로가 아니라 한 부분은 성경에 걸쳐 있고 다른 부분은 세속 사상이 들어와서 같이 섞여 있는 경우들이 아주 많다. 사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힘을 발휘 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럼, 오늘날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헷갈리는 단어가 무엇일까?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교회에서, 많은 목회자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이라는 단어를 잘못 설명하고 잘못 가르쳐서 잘못 이용하기 때문에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혼돈스러워하고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믿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믿기지 않아서 못 믿겠다” 또는 “믿기지 않아서 힘들다고” 말한다. ‘내가 정말 말로 믿고 기도했더니 이루어졌다. 그렇게 열심히 믿고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내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셨다’고 말한다. 심지어 어떤 청년들은 ‘하나님께서 좋은 배우자를 주실 줄 알고 10년 동안 기도했는데, 배우자를 만나지 못했다며 고통 스러워하는’ 청년들도 있다. 마음 깊은 곳에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실망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주님, 믿는 자는 능치 못함이 없다고 했는데,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들도 있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가? 도대체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믿음에 대해 생각하기 전에 잘못된 믿음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잘못된 믿음 1 –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가르친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이다. 사실 ‘믿어진다’라는 말 뒤에는 이런 생각들이 깔려 있다. 어떤 사람은 별로 한 것도 없는데 갑자기 믿어졌다고 한다. ‘하나님이 믿음을 주셨기 때문인데 왜 나에게는 이런 믿음을 주시지 않느냐’며 답답해하며 실망스러워한다. 그런데 마가복음 1장 15절에 보면 예수님은 “때가 찾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복음을 믿어라” 라고 하셨지, “복음이 믿어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5장에 가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치러 가는 길에 12년 동안 혈루병 앓던 여인의 병이 낫는 일이 일어난 직후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전갈을 받으셨다. 그 때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에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5:36)고 하셨다. 믿지 못하고 있는 회당장에게 ‘믿으라’고 명령하신다. 성경에서 믿어질 것이라는 표현은 한 번도 없다. 그런데 왜 이런 혼란이 왔을까? 에베소서 2장 8절 때문이다.
“너희는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가 은혜의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한다. 그러니깐 믿음이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보라. 여기서 하나님의 선물은 은혜나 믿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것’ 전체를 가리킨다. 구원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이다.
믿음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가 반응하는 것이다. 만약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도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인데, 하나님이 선물을 안 주셔놓고 믿지 않는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이상한 논리가 나오게 된다. 따라서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에 대한 우리의 인격적 반응이다.
‘어느날 갑자기 확 믿겨졌다’ 그것은 하나님 말씀이 자기에게 설득되었다는 것이지 믿음을 선물 받아서 믿게 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지를 무시한 채 마구 밀어붙이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조작하지 않으신다. 사랑은 조작하는 것이 아니다. 진실로 다가가서 진실로 반응하게 하는 것이 사랑이다. 그게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방법이다. 그래서 믿음이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인격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잘못된 믿음 2 – 믿음은 내가 소원하는 바를 믿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내가 소원하는 바를 간절히 믿는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에서 예수님도 혈루병 여인이나 바디매오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셨으니깐 그 말이 맞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 그들은 자기 병이 낫고 눈을 뜰 것을 믿었고, 그렇게 해서 병이 낫고 눈을 뜬 것이 그들에게는 구원이니깐,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 하신 것이라고 들었다. 그래서 많은 설교자들이 ‘병이 있으면 믿음으로 기도하라. 병이 낫지 않으면 믿음이 부족해서다’ 라고 말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절망에 빠지는지 모른다.
마가복음에 등장하는 혈루병 여인의 이야기를 아는가? 그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예수님을 만지면 자신의 병이 나을 것이라 생각한 여인인 딱 한 사람 이 여인밖에 없었다. 병에 거린 사람들이 얼마나 낫기를 갈망하는지 아는가? 서로 다투며 예수님을 만진 무리 중에 ‘그 분을 만지면 나을지도 모른다, 아니 나을 수 있다’고 간절히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여인만 나았다. 그리고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네 병을 고쳤다”라고 하셨다.
믿음은 내가 간절히 소원하는 바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믿는 것이다. 내가 올해 반드시 결혼할 것이고,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굳게 믿는 것은 기독교의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소원이다. 믿음은 내가 원하는 대로 축복을 얻어내는 수단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얼마나 의심하지 않고 세게 믿느냐가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따라오는 것이다. 살살 믿으면 안되고, 세게 믿어야 하나님이 응답해 주신다고 생각한다.
잘못된 믿음 3 – 의심하지 말고 세게 믿어야 한다.
마가복음 11장 23-24절 예수님이 의심하지 않는 믿음에 대해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이 말씀을 약속의 말씀으로 붙잡고 기도하는 분들이 많다.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세게 믿어야 한다. 그러나 이 말씀 바로 앞에는 “하나님을 믿으라”(22절)라는 말씀이 더 있다. 그리고 더 앞서 마가복음 11장 12-14절에는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 제자들이 그 말씀을 들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20절에 그 다음날 아침에 지나가다가 무화과나무가 말라 죽어버린 것을 보고 제자들이 놀라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다. “하나님을 믿어라” 어떤 하나님을 믿으라는 이야기인가? 열매 맺지 않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해서 심판한 것처럼 열매 맺지 않는 이스라엘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이다. 그저 나를 시집장가 보내주고 대학 보내주고 병 낫게 해주실 하나님을 믿으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은 마땅히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할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열매를 구하실 때 열매를 맺지 않고 위선으로 가득 찬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라는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가 무엇을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회복하시는 일을 할 때,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게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기도하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이것은 개인적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의심하지 않고 믿으면 다 이루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질 것을 의심하지 않고 기도할 때 그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내 믿음이 약하다. 좀 더 세게 믿어라고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착각이다. 내가 만약 음식을 잘 못 먹어서 배가 아픈데 두통약을 먹으면서 꼭 나을 것이라고 세게 믿는다면 내가 낳을까? 배가 아플 땐 그냥 소화제 먹으면 된다. 두통약 먹고 나을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믿음은 세게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신 일을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다. 왜 하나님을 이상한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리는가? 아이가 아빠에게 장난감을 사달라고 하는데 ‘네 열심히 부족하다. 더 열심히 장난감을 원해야지’ 이렇게 말하는 부모가 어디 있는가? 부모는 자녀의 열심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의 필요 때문에 움직인다.
그렇다면 마가복음에 나타난 믿음은 무엇인가?
마가복음에는 ‘믿다, 믿음’ 이라는 단어가 여러번 나온다. ‘믿다’ 라는 단어는 13번, ‘믿음’ 이라는 동사는 3번, 명사는 5번 나온다. 마가복음에서 나오는 믿음이라는 단어는 목적어없이 사용되었는데, 단 3군데만 목적어를 사용하였다. 그 첫 번째 등장이 바로 1장 15절의 본문의 내용이다.
“복음을 믿어라” 그 다음에 9장 42절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나를’ 곧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조금 전에 본 무화과나무 사건이 등장하는 11장 22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마가복음에서 ‘믿으라’고 할 때 그 믿는 대상은 늘 예수님과 하나님, 그리고 그분의 복음이다. 예수님은 자신과 복음을 동일시하신다. 예수님이 믿으라고 하시는 대상은 예수님과 하나님, 복음이다.
예수님은 ‘복음, 예수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께 손을 댔지만 혈루병 걸린 여인 한 사람만 병이 나은 것은 ‘예수님이 메시아시니 내 병을 낫게 하실지 모른다’는 믿음 때문이지 내 병이 나을 거라는 믿음으로 간절하게 정성껏 만졌기 때문이 아니다. 그 여인의 믿음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뿐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애기하는 믿음은 내가 믿고 싶은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그분이 우리에게 무엇을 약속하셨는지, 그분이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에 점점 기복주의가 강해지면서 열심히 정성껏 믿으면 하나님이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실 거라는 생각이 퍼져 있다. 그래서 마치 하나님이 항상 우리 믿음을 재고 계시다가 기준을 충족하면 겨우 하나씩 복을 떨어뜨려주시는 인색한 분처럼 오해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나님을 우리를 위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분인데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힘주어 애기했고 마태복음 역시 우리가 구하기 전에 이미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다 알고 계신 분이 하늘의 아버지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감기를 고쳐주시는 것이나 암을 낫게 하시는 것이 똑같이 쉬운 일이다.
사랑하는 가족의 암도 하나님의 뜻이면 낫게 하실 수 있다. 내 믿음이 없기 때문에 가족의 암이 안 낫는 것도, 나의 믿음이 없기 때문에 병이 안 낫는 것도 아니다. 언제든지 고쳐주실 수 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불러 가실 수 도 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그리스도인의 믿음이다.
우리는 복음이라고 하면 십자가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십자가만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십자가는 신앙의 근본이다. 그러나 복음은 더 포괄적이고 더 깊다.
복음은 세상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또한 세상 뿐 아니라 내가 어디에 속했는지를 이야기해 준다. 내가 무슨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도 애기해 주고 있다. “복음을 믿어라” 라고 하신 복음속에 우리가 믿고 살아야 할 핵신 진리가 들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때가 찼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복음을 믿어라”라는 말씀이 예수님의 중심 가르침인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이 복음 속에 다 있다.
복음은 3가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이 세상은 어떤 곳인가?
복음은 때가 차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을 믿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에 대한 복음의 관점이다. 세상은 무의미하게 그냥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깨어진 세상을 바라보시며 오랫동안 기다리셨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간들을 오래 참고 바라보셨다. 이스라엘이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려주길 간절히 바라셨지만 그들은 철저하게 실패했고 땅의 사람들은 모두 절망 가운데 황제의 복음을 따르고 있었다. 하나님은 그러한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임하게 하셨다. 하나님의 때가 찼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하나님 나라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대해 갖고 있는 믿음은 이것이다. 하나님 없이 신음하며 무의미하게 있던 세상을 하나님은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단호하게 개입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시작하셨다는 것, 그리고 이 나라가 온전하게 이루어질 그 때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이 깨어진 세상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면, 하나님이 왜 세상에 개입하실 수 밖에 없었는지 더 분명해진다. 왜, 복음이 좋은 소식인지 드러난다. 이 관점이 없이는 세상에 속아서 우리는 살아간다.
하나님 없이는 이 시대가 얼마나 고통스럽고 슬프고 아픈 곳인지, 이 세상의 실상을 보기를 바란다. 만약 그 고통을 경험하고 있지 않다면 세상 속으로 직접 들어가 봐야 한다. 중증장애인들이 있는곳, 이주노동자들의 모임, 어린아이들의 입양기관, 노숙인들이 있는 지하도, 탈북한 사람들이 모여사는 북한의 국경 등 어쩔 수 없이 고통스러운 삶을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들어보라. 그곳에 예수님이 계신다.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이 약하고 아픈 사람들을 찾아 만나셨듯이 오늘도 예수님은 그들 곁에 그들과 함께 계신다. 그들 때문에, 이 깨어진 세상 때문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 그리스도인들이 이것을 잊어 버릴 때, 좋은 교회 건물 지어놓고 부자 교회 만들어 놓고 자기들끼지 행복하게 살면서 주님의 일을 한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복음을 믿어라”라고 할 때 그 복음이 무엇인지 아는가? 이 세상이 소망없고 깨어졌고 고통스럽고 아프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다스리시며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다. 그저 내 영혼만 만져주시는 하나님으로 축소시키지 말아야 한다. 내 마음도 만져주시지만 나보다 더 아프고 고통스럽고 절망스러운 사람들에게 마음을 쏟으시는 하나님을 발결 할 때, 내 고통은 오히려 작아진다. 우리는 우리 아버지의 땅을 지키고 가꾸어 책임져야 할 사람들임을 기억해야 한다.
2. 나는 누구인가?
복음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이야기한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대부분은 먼저 소속을 밝힌다.
“저는 어느학교 어디에 다니는 사람입니다”
“저는 어느 교회 다니는 누구입니다”
사람들은 소속으로 자아정체감을 가진다. 그런데 복음은 우리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했고 하나님의 가족이 되게 했다.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이 되게 만들었다. 그 소속감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정체감을 갖게 된 것이다. 이제 가정도, 직장도, 교회도 내 궁극적인 소속이 아니다. 나의 궁극적인 소속은 하나님 나라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해 있다. 우리가 복음을 믿는 다는 것은 나를 구원하셔서 하나님 앞에 세우신 십자가 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복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이 땅에 이미 임했지만 아직 완전히 임하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의 운동원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내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나라에 속해서 내 인생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도록 하기 위해 죽으신 사건이다. 그렇게 때문에 이 땅을 사는 누구든지 자기 역량이 크든 작든 상관없이 각자 분량에 맞게 하나님 나라의 운동원으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단한 사람들이다. 우리의 인생으로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찾아볼 말씀이 있다.
마가복음 10장 29-30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이 땅에서 이러이러한 것을 버린 자는 현세에 이런저런 것을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다고 나와 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우리가 버린 목록과 받을 목록의 약간의 차이가 있다. 무엇일까?
찾았나? 바로 아버지이다. 목록이 길어서 예수님이 실수 하신 것인가? 그뿐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 다 버리고 고난당한 사람이 어떻게 백 배나 받는다는 것일까? 돌려받기는커녕 고난받다가 끝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스데반도 그러했고 바울도 그러했다. 우리가 아버지를 버렸을 때 아버지를 백배로 돌려받지 않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돌려받는 것을 주님을 위해 포기한 집과 형제, 자매, 부모, 자식, 전토의 백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가족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백배나 돌려받는 것,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고 모임 공동체, 바로 교회이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가족이 실제로 드러나는 곳, 그곳이 바로 교회이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렸을 때, 주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공동체를 만들어 주셨다. 실망인가? 그러나 교회는 매우 중요하다. 이 어둠의 시대에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하나님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역할을 제대로 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로 급속도로 들어오게 될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로 들어오지 못한다. 교회가 문을 닫아 버리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로 들어갈 방법이 없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교회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우리교회 뿐 아니라 지역의 교회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지금 사방에서 교회가 무너지고 있다. 교회가 교회다움을 잃어버리고 있다. 교회에 교회의 영광스러운 비전이 사라지고 있다. 그 결과,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지 못한다. 교회가 문을 닫아버렸기 때문이다. 끔찍한 일이다.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였인다는 것,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속하여 하나님 나라 운동원으로 산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냥 교회나 출석하고 헌금이나 내겠다고 다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교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드러낼 사람들이다. 그런데 만약 교회가 도덕적으로 옳지 않고, 성경의 진리 위에 바르게 서 있지 않다면, 그곳에서 하나니 나라 운동이 나를 통해 이루지기 힘들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를 아는가? 성경이 믿을 만하지 못해서, 진화론을 믿기 때문이 아니다. 40-50%가 교회와 그리스도인 때문에 못 믿겠다고 답한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교회를 세워야 한다. 교회를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교회의 부흥과 회복을 위해서 건강한 교회가 이 땅에 세워지는 일을 위해서 우리의 인생을 드러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간절히 원하시는 것이 이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삶을 꿈꿔라.” 내가 속한 교회가 지역 사회와 주변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명해 보여주는 전시장이 되는 그런 비전을 갖기를 소원한다.
3. 오늘을 살아갈 힘을 어디에서 얻는가?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내 삶의 목표이고 이유이고 힘이시다. 예수님이 나에게 복음인 것을 믿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복음이 우리 인생의 최우선이다. 우리 삶의 전체에서 예수님이 최우선 순위가 되기를 소원한다. 이성교제할 때, 결혼 할 때, 직장을 선택할 때, 교회를 선택할 때, 우리가 내리는 모든 결정의 최종 권위가 예수 그리스도께 있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이 어떤 관심을 갖고 계시고 지금 어디로 가고 계신지를 모른다면 예수님이 우리의 최종 우선순위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알기 위해 복음서를 읽어라. 성경을 열심히 읽고 통째로 씹어 먹어라. 어디에서든지 성경이 보이도록 하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최우선순위라는 것은 살아있는 예수님 앞에서 그분에 대한 살아있는 지식과 살아있는 인격으로 진실하게 반응한다는 것이다. 우리 삶에 예수님이 최우선순위가 되도록 애써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당연히 예수님과 복음을 전하게 될 것이다. 마가복음에는 복음을 선포했다는 말씀이 열 번 넘게 나오는데 그 중 예수님이 선포하신 경우는 두 번 뿐이다. 1장 38-39절 예수님이 선포하신 이후 놀랍게도 중풍병자가, 귀신들린 자가, 선포한다. 예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선포의 주체가 된 것이다. 예수님의 은혜를 입은 여러분, 이제 학교에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이 예수님을 전하기 소원한다. 우리는 점점 예수 믿는 사람들을 제자로 길러내기만 하는 것 같다. 어떻게든 불신자들에게 이 좋으신 예수님을 전하려고 고민해야 한다. 실패? 당연한 것이다. 쉽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 부탁한다. 여러분이 정말 예수님 때문에 살아났고, 예수님 때문에 꿈을 꾸기 시작했고 예수님이 삶의 목표고 힘이라면, 그렇다고 한다면 예수님을 전하라. 되든 안 되든, 실패하고 말이 막히고 무시당하더라도 진실하게 예수님을 전할 때, 우리 주변의 사람들은 주께로 돌아오기 시작할 것이다. 복음을 믿는 다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최우선순위라는 것을 믿고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알아가고 누리고 예배할 뿐 아니라 예수님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결론>
믿는 다는 것은 내가 믿고 싶은 것을 믿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믿는다고 할 때 믿음은 하나님을, 예수님을, 복음을 믿는 것이다. 그럴 때 능치 못할 일이 없다. 하나님을 조작하기 위해 믿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절대로 조작당하지 않으신다. 우주를 다스리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믿는 것은 바로 이 세상이 하나님께서 단호하게 개입하셔야 하는 상황이고 실재로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새로운 시대가 열렸고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것이다. 아직 완전한 나라가 임하지 않았지만 이미 그 나라가 임한 세상이라는 것을 믿는 믿음이다. 그뿐 아니라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도록 주님이 우리를 도우신다는 것, 내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자 운동원으로 산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을 이 땅에 드러내 보이는 것이 내 사명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 그래서 그분이 내 삶의 최우선순위가 되고, 그분을 알아가고 예배하고 전하는 일에 내 삶을 드리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예수님, 그분의 복음을 믿으시기를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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