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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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이루어지다
성경이 이루어지다
살아가면서 각자가 생각하고 노력하고 준비한 것이 이루어진다라고 말하면 그것이 무엇이든 정말 대단한 것이겠죠. 사람들은 ‘정말 대단하구나’라고 말합니다. 하물며 짧은 인생사도 그러할진대 창세 전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이 이루어진다면 과연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있을까요?
계속해서 이제 그들이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갔다 장면은 바뀝니다. 유대인의 최고 의결기구에서 이제 로마의 관할로 넘어가는 과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에 앞서 저자 요한은 베드로의 배반 사건을 장면 사이에 배치하면서 관련된 자세한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칼을 써 잡히려는 예수를 구원하려고 했는지 또는 어쩔 수 없는 절박한 저항인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저자 요한은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는 장면에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이라고 말함으로 보다 신빙성이 높은 기사라고 말하고 있고 따라서 이어질 빌라도의 사건 역시 신뢰성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요한은 예수님의 심문 사건의 중심에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고 있는 사건을 배치했을까요?
베드로 이야기를 좀 더 하겠습니다.
요한은 예수께서 누구신가? 라는 질문에 베드로는 부인하는 행동을 보여줌으로 내면의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영화의 한 장면으로 본다면 정말 어처구니 없는 장면 아닙니까? 칼을 빼면서까지 행동했던 베드로와 불과 몇 시간 후의 베드로는 전혀 딴 판의 인물 아닌가요? 그런 경우가 우리 주변에는 없을까요? 특히 이런 배신은 가룟 유다처럼 배신한 자신의 행동이 옳다는 증명을 위해 더 적극적으로 앞장을 서게 됩니다. 우리 주위에도 한 때는 정의를 외치며, 약자의 편에서 이야기 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철저하게 바뀌는 분들이 있지 않습니다. 물론 반대의 사람도 있지요. 그런 경우는 자신의 삶이 부끄러워 드러내지 않고 자숙하면서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 때까지 기다리는 행보를 보이지 않습니까?
여러분! 베드로는 이미 기적을 포함해 많은 것을 보았고 공관복음에서는 예수를 향하여 ‘주는 그리스도’라고 고백까지 했던 인물입니다. 그런데 막상 현실이 나의 문제가 되었을 때 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언제 시작했습니까? 꽤 오래전에 시작해서 예수님의 그늘 아래 있지만 막상 어떻게 기도할지, 예수가 어떤 분이신지 잘 알고 있는가 하는 사실을 요한은 예수의 신문 장면과 베드로의 부인 장면을 교차로 보여주면 서로 얽히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멀리 갈 것 없습니다. 우리의 가장 가까운 가족들이 예수의 믿음을 제대로 알고 믿는가 하는 질문부터 시작해보시기 바랍니다. 고통과 고난이 우리 앞에 현실로 다가왔을 때 그래도 베드로보다 나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시간을 잠시 거슬러 올라가 볼까요? 자녀가 태어나 눈에 넣어도 안아플 때를 기억해보십시오. 그러다 자라나 아이가 말을 주고 받을만 할 때 동화 책에서 티비에서 뽀로로에서 싸우면 안된다는 이야기를 보고 듣고 ‘아빠, 엄마 싸우지 마세요’라고 할 때 귀담아 듣고 아이들 보는 데서는 그래서 안되겠구나? 했던 적 있죠? 아이가 유치원에서 술과 담배가 나쁘다 배우고, 안전벨트를 꼭 매어야 안전하고, 길을 건널 때 손을 들고 건너야 한다고 배워서 아빠와 엄마에게 이야기하면 ‘넌 틀렸어 잘못 배웠어’하는 부모가 있나요? 간혹 ‘엄마랑 있을 땐 괜찮아’ 라고 하는 경우는 있지만 하지만 그래도 아이 앞에서 노력한 모습을 보이려고 하죠? 부모라면 그때의 자기 설득은 아이와 사랑의 관계에서 일어나지만 불과 얼마 지나지 않으면 부모도 아이도 서로의 말을 잘 안듣는 시기가 찾아 옵니다. 우리 속에는 누가 있는 걸가요? 진짜 나는 누구일까요? 내가 누구냐 하는 문제입니다. 어느덧 나이가 들어가니 사랑하는 아이, 아내, 남편의 말에도 ‘세상은 그런게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주변에서의 말에는 더 하지 않습니까?
그런 과정에서 성장한 아이들이 부모의 말을 들을리가 없죠. 아무리 부모가 옳은 말을 한들 말이 틀려서가 아니라 오랜 시간 아이의 마음에 쌓여 있는 ‘부모에 대한 신뢰’가 없기 때문이죠. 그때는 비로소 큰 값을 치뤄야 합니다. 그럼에도 사랑하는 깊은 마음을 이해 시키기 위한 큰 값은 다양한 형태로 우리에게 청구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때 늦은 후회라고 합니다. 배신한 베드로를 위해 예수께 청구된 무게는 지금 눈 앞에 ‘진행형’으로 더 무거워 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중심에 사로잡힌 베드로는 자신을 직시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자신을 인정하고 예수께 나와 그러하오니 나를 붙잡아 달라고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이것을 자존심 상하는 문제로 접근하는 것은 세상의 방식입니다. 부모에게도 자존심을 내세워서야 어떻게 관계를 회복하겠습니까?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자신의 자존심을 내려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분이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의 여러분이 되십시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이미 아버지의 사랑으로 큰 값을 치뤄주신 예수께서 계시기 때문이고 그렇게 값을 치루고 계신 예수님은 베드로 앞에 계실뿐만 아니라 저와 여러분 앞에 계시고 마음에 내주하시고 계십니다. ‘나’라는 자신의 콘크리트로 가려진 우리를 지난 한 주 동안 ‘가족의 아픔’이라는 고통과 고난을 통해서 어제보다 더 나은 믿음의 세계로 인도받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기를 소원합니다. 에스겔 36:26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시편 31:9 “9 여호와여 내가 고통 중에 있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근심 때문에 눈과 영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렇기에 은혜 앞으로 나오는 것은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맞이 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살펴 보겠습니다.
두려움은 마치 장난처럼 다가와 갑자기 들이닥치는 침투를 우리는 경험합니다. 본문처럼 ‘새벽이라’ 모두 잠든 시간에 평온을 누리는 무방시 시간에 언제든 다시 불쑥 찾아올지도 모릅니다. 유대지도자들은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기 위해 새벽부터 움직입니다. 빌라도가 있는 곳은 ‘관정’은 로마군의 본부이자 총독이 거하는 장소인데 여기는 이방인이 있는 곳이고 유월절이 시작되면 이방인과 접촉하면 더럽혀졌다는 유대인들의 전통을 따라 유월절 행사에 참여할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새벽’조차도 아까운 시간이자 빨리 끝내야 하는 긴박한 시간입니다.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자신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럽히지 않은 경계선에 관정 밖에 서 빌라도를 원했고, 빌라도는 새벽에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고 말합니다. 이 때 이들은 ‘예수’라고 말하지 않고 ‘행악자’라고 고발합니다. 여러분은 예수께서 반역에 해당되는 죄목으로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여기에서는 ‘행악자’라는 죄명으로 고발 당했을까요?
유대 지도자들은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예수를 신성모독 즉 하나님을 아버지로, 자신을 아들로 말씀하시는 예수를 ‘죽이기로’ 하고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자를 출교 즉 쫓아 내기로 결의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어 이스라엘 왕이라고 유대인들이 예수를 높이는 이상 드러내 놓고 죽일 방법은 없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빌라도 총독을 움직이는 것만이 유일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착각하는 것 중 하나는 하늘이 무너져도 쏟아날 구멍이 마치 선한 사람의 전유물 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화에 보면 오히려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한 탕할 기회가 찾아오거나, 정말 안하려고 했는데 한 번만 했다가 결국은 큰 일이 나는 이야기가 더 많지 않습니까? 유대 지도자들에게 ‘빌라도’는 하늘이 준 기회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라고 받아들이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새벽이라는 시간에 빌라도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이 사람이 매우 엄중한 반역자’라고 시작을 한다면 빌라도는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처리하려 했을 것입니다. 이어질 예수의 심문에서 요한은 그런 빌라도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행악자’라는 죄명에 예수라는 이름을 숨기고 애매모호한 상태 이어서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는 말은 우리가 처리하면 나중에 문제가 될 수도 있고 당신이 처리하기에는 별 것 아니니 빨리 결정하면 된다는 것이죠. 그러자 빌라도는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어지는 말은 ‘그렇게 말씀하시니 우리 법대로 할 테이니 나중에 문제를 삼지 마십시오’라고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대답은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들의 본심이 담긴 말입니다.
그러자 저자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고 본문에 끼어들듯 말하지만 주의 깊게 살펴야 합니다. 행악자에서 - 너희 법대로 하라는 빌라도의 말에 죽여야 할 사람으로 본심이 드러 났습니다. 그러자 33절에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아마도 관정의 문 앞에서 ‘너희 법대로’라고 쉽게 돌려보내려던 빌라도는 눈치를 챘을 겁니다. 새벽에 고위 관료들이 찾아와 자신을 깨우고 예수라는 이름을 숨기고 ‘행악자’로 말하며 ‘반드시 죽이고자’하는 유대 지도자들의 계략이 숨어 있는 것이죠. 그러면서 성경은 ‘성경이 성취되는 죽음’이라고 북마크를 하듯 표시를 한다는 것입니다.
서두에 여러분에게 ‘가장 쉬울 때 설득을 당하라’고 했고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제 우리의 나이는 50대를 넘어서 죽음이라는 단어가 시작되는 시간에 돌입했습니다. 앞으로 길지 않은 시간에 우리의 부모와 이별하게 될 것이고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팩트입니다. 어쩌면 내가 먼저 일수도 있는 순서 역시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장 쉬울 때’ 사랑하는 아이가 처음 옳고 그름을 부모에게 배우고 기관의 어린이가 되어 선생님으로 부터 배운 첫 무대에서 아깝게 흘려 보냈던 시간을 이제는 자녀에게 물려 줄 신앙 조차도 버거워 하고 있지 않습니까? 나는 하고 싶은데 시간 때문에, 상황이 그래서 그러니 지금은 ‘가장 어려울 때 설득조차 힘든’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자 요한은 성경의 성취를 이루시는 죽음을 향해 가시는 예수님이심을 저와 여러분들이 온전히 깨닫기를 베드로의 배반의 시선에서, 자신을 옳아 매려는 유대 지도자들의 계략을 보는 빌라도의 시선에서 이런 모든 장면이 성경의 말씀을 성취하는 하나님의 시선에서 인간의 역사의 한 장면으로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도 이 장면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사도행전 4:27–28 “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28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설교를 준비하며 우리가 당하는 고난에 대한 위로와 아픔 그리고 희망적인 미래에 대한 설교를 하려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니다. 지금이 바로 예수님이 어떠하신 분인가를 바로 알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설득 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역사의 무대에 초청 되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행악자는 사라지고, 죽여야 할 대상에서 빌라도는 쉽게 끝날 문제가 아님을 직시했습니다. ‘다시 관정에 들어가’ 이제 정식 재판이 시작된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의 결정에 따라 지금 예루살렘 성 안에 엄청난 인파의 사람들이 폭동으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네가 왕이냐’ 이 질문은 ‘그래 며칠 전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칭호를 받고 들어온 ‘그 사람’을 만나고 있다는 것을 빌라도는 알았음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지난 주 저는 ‘창조의 질서’를 이야기하면서 사람에게는 ‘시간’을 주셨고 시간을 통해 ‘역사’를 만들고 역사의 시간에 존재한다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로마의 총독으로 성공 후 로마로 입성하려면 속국이지만 평상시 로마군조차 주둔 할 수 없는 특이한 자치권을 인정받은 유대인의 총독이 된 이상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는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 처 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님의 대답은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 빌라도의 대답은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다’ 그러니까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넘기며 ‘이 사람이 며칠전 이스라엘 왕이라고 선동한 자 또는 사람들에 의해 그렇게 불리던 자라는 사실은 결국 ‘행악자’가 아니라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로마 입장에서 보면 ‘반란자’요, ‘정치적인 인물’이라는 고도의 정치적 노림수가 숨어 있는 것입니다.
1차전으로 탐색전은 끝났습니다. 유대인 지도자들이 어떤 결과를 원하며 어떻게 빌라도에게 넘겼는지 그리고 역사적 사건과 함께 하나님의 성취 사건임을 알았고, 이제 빌라도는 자신에게 넘겨진 역사의 시간을 어떻게 풀어갈까요? 우리 역시 각자의 시간에서 하나님의 성취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깨닫고 우리 마음으로 받아 들일 수 있다면 이 땅에서는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내는 정도일지는 몰라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특별하게 부르시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설교가 우리의 아픔을 위로하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 삶에 평안과 위로가 최종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뜻하심이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 역사에 어떻게 등장했으며 십자가의 죽으심이 왜 필요했는가를 각자의 마음 문 안으로 받아들이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비록 빌라도와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은 저와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와 우리가 어린 시절 교회를 다니며 기뻐하며 즐거워 했던 기억들이 과거의 추억으로만 남아 버린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땅에 살아가다보니 안주해버리고 만 것입니다. 우리 동화에 ‘나무꾼과 선녀’이야기가 있습니다. 어찌보면 ‘하늘 나라’를 잊지 않은 선녀의 이야기 아닙니까?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살아도 결국은 가야 할 하늘에 대한 간절함을 결코 잊어버리지 않은 이야기 아닙니까? 예수께서 다시 가야할 아버지의 나라에 대해 십자가라는 성취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있음’을 저와 여러분에게 죽으심이 ‘성취’라면 우리는 어떠해야 합니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현실을 주어진 생명이 있는 만큼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있음을 예수의 십자가 죽으심의 성취로 드러남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의 이 땅의 현실의 참혹함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나라가 있다면 반드시 통치하는 주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네가 왕이냐’ 이 말의 이중적 의미는 이 땅에서 왕으로 통치하려는 세상 군왕이 아니라 이 땅에 속하지 않은 ‘새 하늘, 새 땅’이 왕이신 예수와 함께 드러난 시작점에 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말을 드러내는 조연에 불과합니다. 주변 종교 지도자들도 배경에 불과합니다. 그렇기에 빌라도는 ‘네가 왕이 아니냐’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내가 믿고 의지하는 예수는 누구신가? 우리가 아프고 위로받고 싶을 때 우리의 신앙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편으로 기적을 행하시고 통치를 하시는 분이시니 이 정도의 고통은 해결 해 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라고 따지듯 묻기도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어린 아이가 부모에게 장난감도 못 사주냐고 응석부리고 드러 눕는 행동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간절하게 기도하며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갑니다. 잠시의 평화와 안식도 우리 삶에는 분명 필요합니다. 하지만 늙어지고 생명이 다해 갈 때 우리에게 필요한 진정한 안식과 평화는 하나님의 나라에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