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6:30-35 나는 생명의 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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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명의 떡이다
요한복음 6장 30-35절
요한복음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1-12장 까지, 그리고 13-21장까지 나누어집니다. 이 책의 구조는 1장은 서론부분입니다. 2장부터 가나혼인잔치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7개의 표적이 등장합니다. 이적이 아니라, 표적입니다. 표적은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때”에 대해 설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되심, 죽음과 부활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표적으로 두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믿는 사람과 믿지 않고 대적하는 부류들입니다. 이 부류는 갈등이 생기게 되고, 예수님을 십자가의 고난으로 몰고 갑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드러내게 합니다. 그래서 1-12장까지의 책을 표적의 책이라 불리게 됩니다.
두 번째, 13-20장에서 예수님은 이제 본격적으로 십자가의 죽음을 이야기 합니다. 믿고 따르는 제자들을 통해 교회를 이루게 하시고, 결국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곳인지를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고난, 부활의 사건을 소개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패턴하나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아픔과, 슬픔으로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 길을 영광의 길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래서 13-20장까지의 내용은 영광의 책입니다.
요한은 20장 31절에 이 책의 목적을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이 책의 기록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당시 영지주의 자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영은 선하고, 육은 타락하고 더러운데, 어떻게 선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했습니다. 요한복음의 저자인 요한은 이 점을 강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완전한 인간이시다. 믿으십니까?
또 다른 이유는, 이런 영지주의자들 때문에 참된 경건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 결과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타락의 길을 가게 됩니다. 더 나아가 실질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이 책의 기록 시기는 AD 70년에 기록한 책입니다. AD 70년에 무슨일이 벌어집니까?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졌습니다. 이 때, 그리스도인들의 박해가 시작됩니다. 이 박해는 이들의 신앙을 흔들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믿는게 무슨 유익인가? 이들이 요한복음을 통해 무엇을 깨닫게 될까요? 요한복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원자이고 살아계시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광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해 준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통해 나의 삶이 변하여지고, 나의 삶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유일한 구원자요, 나의 유일한 해답이고, 구원자 이심을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7개의 표적 중에서 첫 번째 표적입니다.
본문은 인간이 가진 근본적인 필요와 그 필요에 대한 해답을 우리에게 제시해 줍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는 필요한 것이 많습니다. 당신의 가장 근본적인 필요는 무엇인가요?
현대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심리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아브라함 버슬로우는 “인간의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필요는 육체적인 것” 이라고 했습니다. 먹고 사는 것 즉 생존을 위한 필요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최고의 필요은 자아 실현이다.” 라고 했습니다. 일리있는 지적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인간의 육체적 필요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도 자기 생존을 위한 필요가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잘 아셨습니다. 그 예로 요한복은 6장 앞 부분을 보겠습니다. 무슨 사건이 나옵니까?
오병이어 사건입니다.
벳세다의 들판에 모여 베고픈 군중들을 위해 예수께서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그 자체가 예수께서 배고픔의 문제에 대해서 무관심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병이어 기적 이후,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만 따라다니면 앞으로 먹고 사는 문제는 모두다 해결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오병이어 사건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이심을 나타내기 위한 표적이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주시는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심을 나타내기 위한 표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계속해서 예수님을 통해 썩을 육신의 양식만 구하고자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라오는 무리를 향하여 썩을 양식을 구하지 말고,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함께 예수님께서는 그 자신이 곧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이심을 밝히 말씀하셨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 때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렸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표적을 보며, 이 분이 무언가 위대한 분이심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밝히 드러내어 말씀하신 적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무리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임을 믿을 수 있도록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30-31절 말씀입니다. “(요 6:30)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6:31)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이 사람들이 얼마나 영적으로 눈이 어두운 지 보시기 바랍니다. 이미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지만,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임을 나타내는 표적을 보여 달라 하니 이 얼마나 무지한 사람들입니까? 예수님을 믿지 못한 무리들은 이전에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만나를 먹었던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도 그와 비슷한 표적을 일으켜 주시길 부탁했습니다. 만나가 하늘에서 내리는 것과 같이 놀라운 표적이 있으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보내신 자임을 믿겠다는 것이죠.
이들에 대한 대답이 32-33절 말씀입니다. “(6: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6: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먼저 예수님은 이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으십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내린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내리신 분은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세상에 내려 주신 떡은 ‘생명을 주는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날 그 벳세다의 그들에게 예수님은 놀라운 기적으로 그들의 필요를 채우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기적을 통해서 배고픔을 면했던 군중들은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그들의 삶이 달라졌나요? 좀심한 말인지 모르겠지만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불평하고 불만스러워하고 방황하며 슬퍼하고 배고파하는 군중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근본적인 것이 충족되어지 지지 않은 한 그들은 만족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엄청난 기적을 맛보고도 주님 앞에 더 커다란 기적을 요구하며 끝없이 불평하는 그 당시 민중들의 얼굴을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진정한 필요, 근원적인 필요는 무엇입니까?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은 모든 시대의 사람들이 직면하고 있는 근원적인 필요 두 가지를 지적해 주십니다.
첫 번째, 필요 /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이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필요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37절)”
이는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 앞에 오는 것, 그것이 근본적인 필요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음식, 직장, 더 큰 사업, 더 많은 물질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으로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너희들의 근본적인 필요는 하나님이시다.”
시편 기자는 이 사실을 깨닫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시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시42:1
인생의 근원적인 필요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없이는 제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다고 해서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시편 기자는 알았습니다. 성 어거스틴도 오래전에 이 사실을 깨닫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내 영혼이 당신의 품에 돌아가 쉬기까지는 결코 평안함이 없었나이다.”
지금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당신의 인생의 근본적인 필요가 해결되었다는 고백을 할 수 있나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갖지 못하고, 아직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우리는 아직도 굶주린 사람입니다.
두 번째, 필요 / 영생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시라, 하시니라.”(40절)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여러 가지 문제를 부딪힙니다. 내가 무언가 성취했다고 해도 그 기쁨은 순간입니다. 그 다음 우리는 인생의 또 다른 불안과 두려운 앞에 서야 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무엇일까?”
그 다음에는 무엇일까? 결국 사람이 마지막에 직면해야 할 것은 차디찬 무덤입니다. 이 무덤을 생각하면 쓸쓸합니다.
“나도 죽어야 한다. 그리고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 사실 앞에서 당신의 우리의 성공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내가 인생을 향략한다고 하지만 그 쾌락이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오늘 우리의 자유, 삶의 보람, 그것이 차디찬 한 줌의 흙 앞에서 가지는 의무는 도대체 무엇인가요?
중세 로마의 어떤 대학 정문 앞에 이런 큰 간판이 붙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여기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로마에 살고 있던 한 젊음이가 청운의 꿈을 품고서 공부를 하고자 했으나 가난해서 그 뜻을 이루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자선 사업을 하는 유명한 할머니 한 분을 찾아갔습니다.
“할머니, 저는 꿈이 있는 젊은이입니다. 학창 시절에만 저를 도와 주시면 반드시 그 은혜를 갚겠습니다.”
이 청년의 고백을 들으면서 할머니가 물었습니다.
“청년이 하려는 계획이 무엇이오?”
“예, 우선 법과대학에 들어가면 열심히 공부하고 싶어요.”
그리고 그 다음에는?
“대학을 졸업한 다음에는 변화사가 되어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서 정의 구현에 힘쓸께요.”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리고 그 다음에는... 변호사 사업을 좀더 확장해서 더 많은 사람들의 공익을 위해 일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늙겠죠? 늙으면 제자들을 양육해서 가난한 사람들의 인권과 편리를 위해 헌신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머리를 긁던 청년이 대답합니다.
“죽겠지요.”
그리고 그 다음에는??
“.....”
이 청년이 할 말이 없었습니다. 이때 할머니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는 단 한 푼도 투자할 수 없소”
그 할머니와의 만남이 청년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 사건 이후에 자기 인생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하나님 앞에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훗날 자기가 세운 대학 정문에 이 간판을 붙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삶의 이 궁극적인 문제, 영생의 문제, 인생의 마지막이라는 문제 앞에 할 말이 없는 사람들!! 이들에게 오늘의 성취도, 성공도, 의미가 없는 사실을 아시나요?
이것이 우리의 근원적인 필요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예수님께는 본문에서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해결책을 제시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리라.(35절)
유명한 선언입니다. 요한복음 전체에 나는--무엇이다. 라는 예수님의 선언의 일곱가지가 나오는데 그 중의 하나가 “내가 곧 생명의 떡” 이라는 선언입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선언 속에 담겨진 의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께서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라고 하신 말씀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내가”라는 말은 흔힌 우리가 친구와 대화하면서 “내가 말이야! 내가 있잖아!” 하는 식으로 말하는 “내가” 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내가”는 하나님에 대해서만 사용되는 말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물음에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것은 신적 명칭입니다. 예수님은 동일한 의미를 여기에서 사용했습니다. 구약에서 사용되었던 그 의미와 전적으로 동일한 선언이 “내가”라는 단어입니다.
왜 그리스도가 인생의 문제에 대한 대답입니까? 그분은 하나님이 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나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나를 지으신 분이시오. 나의 섭리자이시오, 나의 구속자시오,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이 내 문제의 해답이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만나를 주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배고픔을 해결하신 사실을 환기시키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32절)
하늘에서 내린 떡, 사실 그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 이 말씀은 “내가 하나님이다.”는 선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 영접했다. 라고 할 때 그것을 과소평가 하지 마십시오. 그 말은 그리스도가 내안에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그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라면 무슨 부족함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분이 해답이십니다.
둘째로, 예수님 자신이 해답이십니다.
우리의 진정한 필요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그 무엇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탕자가 아버리를 떠날 때 그의 필요는 무엇있었나요? 그의 필요는 많았습니다. 우선 그에게는 독립이 필요했습니다. 마음대로 살고 싶었습니다. “아버지, 제게 자유를 주세요, 제 마음대로 여행도하고 하고 싶은일 하고 싶어요.”
그에게는 많은 필요가 쌓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탕자가 먼 나라에서 모든 것을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서 돌아오는 그날, 그에게 진정 필요했던 것은 한 가지밖에 없었습니다. 그 필요는 아버지였습니다.
“오 아버지께서 나를 영접해 주신다면! 아버지와의 관계가 다시 한번 회복될 수만 있다면..”
그럴 수 만 있다면 다른 것은 아무것도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돌아오는 탕자 그리고 그 아들을 끌어안은 그 아버지의 음성을 기억하시나요?
“애들아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이자. 이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내 아들이라.” 이제 이 아들의 모든 외적인 필요가 채워졌습니다. 아버지를 만날 때 모든 문제들이 다 채워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얼마나 주실 수 있는 분 정도가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의 궁극적 필요 자체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 하나, 예수님 자신입니다.
셋째로, 예수님 안에 참된 영원한 만족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새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인류 역사상 누가 이런 엄청난 약속을 한 사람을 본적 있나요?
우리가 그리스도를 신뢰하였을 때, 적어도 우리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는 모두 해결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아버지이십니다. 무덤 전 건너편에는 영원한 본향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다. 이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된 것은 그리스도인의 특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소한 필요 때문에 나쁜 일을 하고 있을 지라도 우리는 감히 이런 고백을 할 수가 있습니다.
“나는 결코 목마르지 않습니다. 배고프지 않습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아직도 필요한 것들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내 필요를 다 알고 계십니다. 사소한 것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주실 줄 믿습니다. 또 내가 필요가 바꾸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면, 주께서 내 시선을 조정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고백은 내 것입니다. 주께서 나에게 생명의 떡으로 오셨기에 나도 주님이 말씀하신 그 말씀처럼 고백합니다.
“내게는 배고픔이 없습니다. 내게는 목마름이 없습니다.”
시편 기자는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가 나의 생명의 떡으로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으로서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 얼마나 복되고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이제 이 약속을 더욱 확신있게 주장하십시오. 하늘과 땅을 주장하시는 아버지, 그분께서 나의 아버지시라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애니 플렌트라는 여인은 이 은혜를 다음과 같은 시로 주님 앞에 고백했습니다.
우리의 짐이 무거워 질 때,
더욱 은혜 내리시며,
우리가 힘겨워 할 때,
더욱 힘을 주시도다
고통이 더해질 때, 긍휼을 입히시고
시험이 더해질 때 평강을 부으시도다.
아! 그의 사랑 끝없어라.
그의 은혜 측량할 길 없어라.
헤아릴 바 없어라.
이 작은 머리는 무한하신 그 풍요와 그 능하심을!
오! 주 예수여!
당신은 내게 주시네, 주시네. 또 주시네
주님이 함께하시는 한 우리는 고통과 갈등을 안겨주는 많은 필요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향해 당당히 이 행복한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배고픔이 없습니다. 목마름이 없습니다. 주님 때문입니다. 주께서 주님 자신을 저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며 찬송하십시오. 그러면 우리 생애의 모든 갈들과 고통을 넘어서서 이 참된 기쁨과 만족을 되찾는 평안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참된 영원한 만족은 예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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