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을 고해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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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스스로 서게 하기 위해

3차 선교여행의 마지막 바울의 사역은
에베소에서 시작하여 고린도 까지 왕복하는
“격려와 위로”의 사역 이라고 불립니다.
지금 까지 세워진 교회들을 방문해서 말씀으로 권하고 믿음에 굳게 설 것을 강론 합니다.
바울은 이 기간 평소 보다 더욱 열정적으로 말씀을 전하고 가르칩니다.
드로아에 가서는 이른 아침 부터 밤이 샐때까지 강론 합니다.
바울의 사역은 지금 까지 한 결 같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행전 20:18–21 NKRV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바울은 마치 아이를 키우듯 교회를 정성껏 키웠습니다.
고난 중에도 담대히 전하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세워졌으니 됐다 라고 생각하지 않고 항상 돌보고 기도했습니다.
“바울의 사명은 교회를 개척한 다음 그들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절대 아니다.”
라고 성경학자들은 말합니다.
그가 얼마나 교회를 살뜰이 살피고 양육에 힘썼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일에 열심을 냈는지 보여주는 대목 이다.
교회는 건물만 지어놓고 사람만 모아온다고 서는 것이 아닙니다.
눈물과 기도로 보살펴야 합니다.
사도행전 20:1 NKRV
소요가 그치매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바울은 이렇게 어렵게 세우고 애지중지 보살핀 교회에게 왜 작별을 고하고 있습니까?
이제 교회가 스스로 서야 할 때가 왔기 때문 입니다.
떠나야 하는 이 시점에서 바울이 가장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당연히 교회가 스스로 서는 것일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떠나야 합니다.
사실, 바울이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할때
하나님은 아주 특별하게 역사해주셨습니다.
심지어 그의 옷가지들을 통해서도 병이 나을 정도 였습니다.
처음에 아시아에 올때 바울의 위상과 지금의 위상은 천지 차이 입니다.
어쩌면 바울을 중심으로 하나님은 일하셨다고 해도 무방한 시기 였습니다.
이제는 그런 특수한 시기는 가고 성숙의 시대가 오고 있었습니다.
아시아의 각 교회가 스스로 서야 하는 시기 입니다.
더 나아가 교회가 영향력을 발휘해야 할 시기가 오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격려와 위로를 받고 돌봄을 받던 교회가
이제는 스스로 돌보는 교회로 서야 하는 시기 였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조금 떨어진 교외의 밀레도에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소집합니다.
사도행전 20:28 NKRV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watch over yourself and over all the flock…”
자신을 살피고 양떼를 살펴라
지금까지 잘못하는 것이 있을때 바울의 교훈과 가르침을 받았지만
이제 스스로 삼가해야 합니다.
더불어 교회의 양떼들을 살피는 일을 바울을 대신하여 해야 합니다.
왜 하나님은 바울이 계속해서 머물면서 목회하는 일을 허락하지 않으셨을까요?
교회는 바울도 바나바도 아볼로도 그 누구도 주인이 될 수 없기 때문 입니다.
교회는 스스로 말씀 위에 서야 합니다. 사람에게 의지하여서는 안됩니다.
성도들도 성숙하여서 스스로 사명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자칫, 목회자가 성도들이 의존적인 상태를 조장하여 스스로 서지 못하게 한다면
옳바른 목회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자기 사람 모으는 정치판이 아니기 때문 입니다.
관련하여, 자녀 교육에서 가장 위험한 부모상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나르시시즘 부모 입니다.
타인을 통제하려는 욕구는 크고 타인을 공감해주는 공감력은 현저히 낮은 부모는
자녀를 망칩니다.
내 입맛에 맞는 사람을 만들어낼 뿐 한 사람의 독특한 인격체가 되는 것을 방해 합니다.
자식을 망치는 가장 더 위험한 부모상이 있습니다.
인에이블러(enabler) : 조장자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을 발휘하게 조장 하는 것.
겉으로 보기에는 돌봄으로 보이면서 의존하게 만드는 것.
예) 아이가 독립적으로 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그 아이가 시도해보고 실패해야 성장하는데, 부모가 미리 개입해 장애를 제거하는 것(헌신이 아닌 조장일 수 있다는 것) cf. 가스라이팅 : 조종자
가스라이팅은 겉으로 들어나기 때문에 비판 할 수 있지만 조장자는 겉으로는 누구보다 좋은 부모 모든 것을 자상하게 도와주고 해주는 부모로 보이기 때문에 더 위험하고 자기 스스로도 좋은 부모라고 착각을 합니다.
결국 아이들은 도전의 기회를 잃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게 되고 부모를 의지하게 됩니다.
What did you fail at this week?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확실한 사실 한 가지는
교회는 한 사람의 리더에 의해 일하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 입니다.
교회의 구성원인 우리가 결국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주 예배하고 봉사하고 배우는 것은
결국 나를 가르치는 사람의 역할을 이어받기 위함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은 새롭게 전도되어 들어올 양떼들을 위해 교육받고
양육 받는 중이라는 사실 입니다.
자기복제
바울을 세우신 하나님의 목적은 교회에 모여서 우리들 끼리 우애를 나누라고 모아놓으신 것이 아닙니다.
복음과 가르침과 격려와 위로를 받았으면 받은 것을 전하는 스스로 서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없이도 복음전파와 성숙의 열매가 맺히는 교회가 되라는 메세지를 주는 것이
바울의 작별의 의미 입니다.

본 받을만한 어른이 되게 하기 위해

바울은 성령에메여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결단 합니다.
사도행전 20:22 NKRV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교회의 지도자로서 큰 결정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0:33–35 NKRV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바울의 삶은 모든 성도들에게 본이 될만한 청렴하고 신실하며 충성된 삶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저런 것이구나 라고 할만한 도덕적으로 신앙적으로 본이 될만한 모습을 몸서 보여줍니다.
바울은 여러번 자신을 본받으라고 권합니다.
빌립보서 3:17 NKRV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고린도전서 4:16 NKRV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어떻게 이렇게 당당하게 본받으라고 할 수 있었을까요?
고린도전서 4:2 NKRV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그는 최선을 다해 충성 했기 때문 입니다.
"하루를 연습하지 않으면 내가 알고, 이틀을 연습하지 않으면 아내 가 알고, 사흘을 연습하지 않으면 청중이 안다."
-마에스트로 레너드 번스타인-
나에게 부끄럽지 않을만큼 최선을 다한다면 바울 처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20:24 NKRV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생명을 건 바울은 저런 말을 할 자격이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을 감독자로 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라고 명합니다.
자신이 본을 보인대로 장로들이 앞장서서 본을 보이라는 명과도 같습니다.
‘하나님 목자로 세운 것은 사관님 아닙니까? 우리는 연약한 양입니다.’
‘왜 우리가 본을 보이고 밀알이 되어야 합니까? ‘라고 반문 하실 수도 있습니다.
숀(Shaun) 이었던 우리, 빗쪄(Bitzer)가 되어야 한다.
숀더쉽 이라는 크레이 에니메이션이 있습니다.
말썽쟁이 양 숀은 평범한 일상을 지루해하고 항상 말성을 부립니다.
양치기 개 빗쪄는 항상 숀과 양들이 저지른 문제를 주인이 알기 전에 처리하는 합니다.
빗쪄는 누가 시킨 것이 아니지만 자신의 역할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숀이었을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우리 모두 빗쪄가 되어야 합니다.
먼저 믿은 자들은 나중에 믿은 자들에게 본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는 본 받을만한 어른이 필요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웃지 못할 엉뚱한 에피소드가 소개 됩니다.
바울은 드로아서 주일을 보냅니다.
사도행전 20:7 NKRV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여기서 주간의 첫날 이라는 것은 일주일의 첫날 안식후 첫날을 의미 합니다.
주일입니다. 주일예배를 드리고 월요일에 드로아를 떠나려는 계획으로 바울은 밤중까지 강론을 합니다.
창가에 앉아 있었던 유두고가 등장하고
바울은 밤이 늦었으매도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니 우두고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3층에서 떨어져 죽습니다.
사도행전 20:9–10 NKRV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하고
근데, 바울이 또 올라가서 떡을 야식으로 먹고 다시 날이 새도록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죽었던 유두고가 살아납니다.
요즘 교회에서 청년들이 많이 떠나갑니다.
그나마 교회에 남아 있는 청년들은 세상과 교회 사이에 걸터 앉아 있습니다.
드로아 교회가 소망이 있는 이유는
졸더라도 교회 와서 졸게 한다는 것입니다.
강압적으로 오라 하였는지는 모르겠는데,
어찌되었건 어른들이 열심히 밤중까지 날이 새도록 강론을 열심히 듣는 모습을 유두고가 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믿음의 선배이자 어른으로서 자신이 받은 사명에 대해 목숨을 걸만큼 충성되었습니다.
이 청년 유두고는 바울이 살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났습니다.
하지만, 바울과 드로아 교회 예배의 본이 될만한 어른들이
하나님의 역사의 한 역할을 감당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회에는 이런 어른들이 있어야 청년들이 살아납니다.
유두고가 살아나듯이, 적지 않게 위로를 주듯이
교회에 이런 어른들의 예배에 대한, 선교에 대한,말씀에 대한 열정이 있어야 청년들이 보고 배우고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요즘 청년들을 만나보면 그야말로 허허벌판에 홀로 서 있는 아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믿을만한 어른, 존경할만한 롤모델이 없어 보입니다.
교회에서는 신앙지키며 살라고 가르치지만
집에가면 공부해서 성공해라 돈이 최고다 가르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세상과 교회 사이의 창문에 걸터 앉아 있는 부모들도 부지수 입니다.
이 시대는 창문에 걸터 앉은 위태한 시대이자
갑질하고 청년들을 이용하고 경쟁상대로 생각하는 나이만 많은 사람이 아니라
우리 청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본받을 만한 어른 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청년들의 본이 되는 어른이 될까요?
누군가의 본이 되기 전에 내 인생을 내 신앙을 진실되게 열심히 살면 됩니다.
저의 후배가 있는데, 그 친구의 어머니는 느즈막히 사회복지사 공부를 시작하셨습니다.
하필이면 이 친구 고등학교 내내 어머니는 대학공부를 하셨습니다.
당연히 한번도 과일을 깍아주거나 제대로 공부 뒷바라지 한적도 없지만
그 집 자녀들 다 대학 잘가고 잘 살고 있습니다.
그 친구 말이, 그냥 열심히 사시는 엄마 모습이 자녀들에게 본이 되어서 공부하라고 안해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먼저 신앙 안에 바로 서면 분명 청년들은 다시 살아 날 것입니다.
바울은 훌륭한 지도자로서 본이 될만한 어른으로서
자신의 사명을 따라, 온힘을 다하여 달려 나갔습니다.
그것 자체가 온 장로와 성도들에게 본이 되었고 유두고를 살리는 역사가 나타나게 했습니다.

밀알이 되기 위해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 가운데 바울은 밀알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작별을 고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명자는 절대 죽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명을 다하기 까지...” 라는 단서가 있습니다.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죽어야 합니다.
교회사적으로 바울이 사라진다는 것은 초기 기독교에 있어서 아주 큰 파장을 주는 문제 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굳이 떠나야 했을까요?
요한복음 12:24 NKRV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그가 죽어야 그가 땅에 떨어져야 열매가 맺히기 때문 입니다.
바울은 이 큰 결심에 대해 깊히 생각할 시간이 필요 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의 아주 파토스 적인 즉, 감정적인 구간이 등장 합니다.
바울은 드로아에서 에베소 지나서 조금 더 내려가야 하는 한적한 도시 밀레도로 갑니다.
그 과정에서 조금 특이한 결정을 합니다.
사도행전 20:13 NKRV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가니 이는 바울이 걸어서 가고자 하여 그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
바울은 이 경로를 홀로 도보로 가기로 결정 합니다.
이 거리는 걸어서 32km (20마일) 적지 않은 거리 입니다.
이 행로는 주로 상대적으로 빠른 뱃길을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훨씬 오래 걸리고 걷는 수고를 자초 합니다.
바울은 걷는 시간 동안 복잡한 감정을 정리합니다.

감정적에 치우치지 말자

바울은 생각이 많았을 것입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과 또한 현재 많은 교회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때문 입니다.
특히, 본문에는 언급하지 않지만 고린도에서의 분란이 가장 컸을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2:4 NKRV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에베소를 떠나 도착한 반환점, 헬라지역이라고 말한 곳은 고린도 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가고 있을때, 그 교회에서는 바울을 반대하고 그의 사도직을 의심하는 분란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을 앞서 디도를 보내 편지를 전달합니다. 그것이 고린도 전서 입니다.
나중에 데살로니가와 베뢰아를 거쳐 마게도냐에 갔을때 고린도 후서를 쓰는데
고린도에 갔던 시기의 마음을 이렇게 묘사 합니다.
큰 눌림, 걱정, 많은 눈물로 편지를 썼었다 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빠르고 편한 뱃길을 마다하고 생각을 정리하고 감정을 추수르길 원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든 세상에서 일을 하든
우리 앞에는 종종 큰 눌림과 걱정 그리고 눈물 날 일들이 많이 옵니다.
그럴때, 우리는 빨리 그 일이 해결되기를 원하고 또 빨리 해결하려고 배를 탑니다.
하지만 뱃길은 빠르지만 거친 파도로 쉴새 없이 흔들립니다.
잠시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길 새를 주지 않습니다.
그럴때 바울처럼 느린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빨리 가면 일이 빨리 해결 되는 것보다 내적인 힘이 부족하여 오히려 폭풍에 휩쓸릴 위험이 큽니다.
터벅터벅 걸으면서 이 고난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묵상하고 기도해보아야 합니다.
모든 것이 명확해지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 합니다.
우리에게는 감정의 소용돌이와 빠른 해결 보다 정확한 의미와 가치, 그리고 목적이 필요 합니다.
큰 결단에 앞서 바울은 그런 시간을 가졌습니다.
사도행전 20:25 NKRV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감정적으로는 신앙의 우정을 나눈 믿음의 형제들과 다시 못보게 되는 것은 슬프지만
꼭 해야만 하는 일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밀알이 되어 자양분이 된다는 것은 감정적인 결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큰 결단 입니다.
바울이 아시아지역의 교회들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것은
로마로 압송되어 죽음을 맞는다는 것을 의미 합니다.
바울의 사명이 다했고 새시대의 새 사명을 위해 바울은 밀알이 되어야 했습니다.

결론

만남이 있고 우정을 쌓아가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 후에는 작별이 있습니다.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고 익숙해지는 과정이 있고
그후에 작별이 있습니다.
세상은 좋은 첫인상의 만남의 기억에 머물고자 합니다.
좋은 말을 하고 격려와 위로에만 머물려고 합니다.
되도록이면 익숙한 곳에 익숙한 방식에 익숙한 삶 속에 머물려고 합니다.
세상의 방식은 관성과 중력의 세계 입니다.
성도의 만남에는 하나님이 계셔야 복됩니다.
성도의 우정에는 영적 성숙과 동역이 있어야 합니다.
성도의 작별에는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위한 밀알됨이 있어야 합니다.
익숙한 방식과 삶에 작별을 고하는 결단이 필요 합니다.
우리는 말씀 안에 믿음안에 성숙함으로 스스로 서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감에 있어 독립적이어야 하지 사람을 의지해서는 안됩니다.
사명 앞에 순종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스스로 자원함으로 기쁨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성도야 말로
교회의 청년들에게 본이 될만한 어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충성된 바울과 같이 본이 될만한 믿음의 선배가 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바로 선 아버지가 어머니가 될 수 있습니다.
청년들과 다음 세대를 일으킬 본이 되는 성숙한 성도와 교회가 되길 축원 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성숙을 막아서는 익숙한 걸들로 부터 작별을 고하기로 결단하시는 복된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찬양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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