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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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는, 두가지의 큰 문화 지류가 흐르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늘나라의 ‘겸손의 문화’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 세상의 ‘높아짐의 문화’입니다. 이는 바벨의 문화라고도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참 모순적이죠?
가장 높~은 하늘나라는, 낮아지려고 하고,
하늘나라보다 낮은 이 세상은, 높아지려고 하니 말이죠.
어떤 이들은 말합니다.
높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 매력 있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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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그런데 이 표현은 잘못된 표현입니다.
높아지려는 문화는 매력적인게 아니라 매혹적인 겁니다.
매력적이다는 말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이라는 건데,
이것은 겉으로 보이는 외형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측면도 포함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높아지려는 성향이 상대방에게 정신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줍니까?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한테 상처 받는 이유가 뭡니까?
높아지려는 상대방 때문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높아지려는 문화는 매력적이다는 말보다, 매혹적이다.라고 하는 게 더 맞는 표현입니다.
매혹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니까,
남을 유혹해서 정신을 흐리게 한다는 뜻을 가진대요.
높아지려는 문화랑 딱 맞는 말이죠?
높아지는 게 더 핫해. 더 쿨해. 더 멋있어.
이렇게 말하면서, 상대방의 정신을 흐리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릇된 모양으로 살아가게 만들어버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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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이후로,
지상에 사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높아지려는 문화지류를 추구했습니다.
매혹적이니까요…
그런데 그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하나님이 바벨탑을 세우려하는 인류를 흩어버리셨잖아요.
홍수로 심판하셨잖아요.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불을 쏟으셔서 심판하셨잖아요.
여러분, 그런데 이렇게 높아지려는 사람들을 계속 심판하다 보면,
이 세상에 살아남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다 심판 받아 죽어버릴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책임을 다하지 않는게, 되어버리잖아요.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을 모두 진멸시키기엔 인간을 너무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공의와 사랑을 모두 성립시키기 위해 한 가지 방법을 실행시키십니다.
그것은 바로, 겸손의 최고봉이신 예수님을
이 높아지려는 문화가 들끓는 지상으로 보내시는 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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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론
‘앤드류 머레이’라는 신학자는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한 번 읽어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부터 이미 겸손을 소유하고 계셨다. 그 겸손이 그 분을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게 했고, 자신을 낮춰 사람이 되게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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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맞는 말 아닙니까 여러분?
예수님은 이미 하늘에서부터 겸손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이 곳으로 내려오실 수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미 낮아지셨는데, 더 낮은 자리를 찾아가십니다.
낮아짐의 극치, 십자가의 자리에까지 나아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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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순간이 점차 다가오자 예수님은,
겸손의 상징인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십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는 구약 성경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함이셨습니다. 스가랴서 9장에 그 내용이 있는데요.
제가 스가랴 9장 9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스가랴 9:9 (NKRV)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을 지키시므로, 철저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신 겁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뭐라고 말합니까? 오늘 본문 9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마태복음 21:9 (NKRV)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이, 정치적 혹은 군사적 행동을 통해서 로마를 정복하고, 가장 높은 왕, 온 세상을 제패하는 왕이 되어달라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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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예수님이 겸손한 분이 아니셨다면, 이 백성들의 환호성을 듣자마자 나귀 새끼 등에서 내려오셨을 겁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당장 로마로 튀어가서 튼튼한 백마 한마리를 끌고 오라고 했을 겁니다.
여러분, 그런데 예수님이, 그 순간에, 바벨의 문화에 눈이 멀어 나귀 새끼가 아닌 백마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면,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이 완전히 불일치가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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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예수님이 낮아지기 싫다고, 백마를 타고 들어오셨다 쳐 봅시다.
그럼 그 다음 단계에서도 아마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선택을 하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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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단계는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이었죠?
예수님이 겸손한 분이 아니셨다면, 가룟 유다의 손모가지를 꺾으셨을 겁니다. 그리고 자신을 팔아넘기지 못하도록 뭐 어디 가둬놓으셨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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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때 참으셨다 쳐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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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그 다음 단계,
베드로가 말고의 귀를 짜를 때, 예수님은 말고의 목을 치셨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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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도 참으셨다 쳐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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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그 다음 단계,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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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로마 병사들이 밑에서 막 조롱합니다.
‘니가 메시야면 내려와봐라.’(점점 더 크게-억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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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겸손한 분이 아니셨다면, 그 순간 화가 치밀어 오르셔서, 당장 십자가에서 내려와 그들을 치셨을 겁니다.
하지만 여러분.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십니다.
낮아짐의 극치를 보여주셨습니다.
사랑의 끝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얻었습니다.
영생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예수님과 전혀 상관 없던 사람이었는데,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계속해서 우리더러 높아지라고 부추깁니다.
다~~ 높아지려고 하는데, 너만 낮아지려고 하면,
계속 손해를 보고, 결국 망하게 된다고 조롱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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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십자가로 끌려가실 때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아무 소리도 내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겸손하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났습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부활하셨습니다!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재림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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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는 겸손의 왕으로 오시는 게 아니라
온 세상을 심판하고, 마귀들과 싸우는 용맹한 왕으로 오십니다.
그 때는 나귀 새끼를 타고 오지 않으십니다.
그 때는 정말,, 백마를 타고 오십니다.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한번 읽어드리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의 19장 11절입니다.
요한계시록 19:11 (NKRV)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사랑하는 여러분.
낮아지는 삶은 결코 손해 보고, 패배하는 삶이 아닙니다.
낮은 곳에 승리가 있습니다.
가장 낮은 자리였던 십자가가 패배의 자리였습니까?
죽으셨다고 패배한 겁니까?
아닙니다. 그 곳에서 죽으셨지만, 부활하셔서 죽음을 이기셨지 않습니까?
이거 보십시오.
십자가는 승리의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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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이 곳에 모인 모든 성도님들도,
낮아지기를 기뻐하시길 축복합니다.
낮아지는 여러분의 삶에 승리를 허락해 주실 줄 믿습니다.
그 믿음으로 오늘 하루도 예수님처럼 겸손하게, 낮은 곳으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