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자의 길(윤영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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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로를 떠나 항해를 다 마치고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말씀의 사람이 되어라. 복음의 사람이 되어라.
본문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로마로 건너가기 위함.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며 제자들을 만남. 그런데,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함.
사도행전 21:4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Why?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전파하는 사람이었다. 즉, 유대교에는 원수와도 같다.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한 제자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한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제자들의 말을 들어하는가? 듣지 말아야 하는가?
보통은 들어야된다고 한다. 하지만, 바울은 들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사도행전 21:8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빌립 집사의 집에 머물고 있는데, 아가보라는 자가 와서 바울에게 예언한다. ‘아가보’는 초대교회에서 권위있던 예언자였다. 그는 사도바울에게 이런 예언을 한다.
사도행전 21: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예언의 내용은 흉한 내용이었다. 아가보의 예언은 바울의 허리띠를 풀어서 자신의 손발을 묶고 이 띠(허리띠)의 임자가 로마 군인에게 넘겨질 것을 말한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 실물 예언을 하기도 한다. 이사야 선지자는 허리띠를 풀고, 신발을 벗고, 반 나체로 3년동안 다닌 적이 있다. 이스라엘(남유다)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예레미야는 나무 멍에를 메고 다니며 바벨론에게 포로가 될 것을 예언했다.
예언자는 물론이거니와 제자들도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한다.
우리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주의 일을 할 때에는 바른 결정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다른 사람을 통해, 기도 중 확신으로 답을 주신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선택한다. 죽을 것도 각오하였다.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사도 바울은 고집을 부리는 것인가? 정말 지금 올라가는 것이 성령의 감동을 거부하는 것인가? 에 대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성령의 역사는 ‘예루살렘에 가면 핍박을 받는다’까지였다.
성령께서 제자들과 예언가를 통해 바울에게 말한 이유는 그의 선택을 요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성령의 뜻을 고생되는데 왜 가는가? 로 생각한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때에 조심할 것이 있다.
기준이 그 길이 ‘힘듦’과 ‘편함’이 되면, 하나님의 바른 뜻을 찾을 수가 없게 된다.
성령께서 장차 고난이 있다고 말했고, 바울이 성령이 말씀하시길 ‘힘들기에 올라가지 말라’고 한 것에 동의했다면, 바울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인가?
사도행전 21:13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사도 바울은 주님이 좋은 쪽으로 결정했다.
사도 바울도 동일하게 두려웠을 것이며, 고민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 또한 목회의 길이 어려움과 고난의 길인 줄 알고 들어섰다.
그런데 우리는 그 가운데에서 꽃길을 찾는 것은 아니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