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2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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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리스도의 적': 영지주의
1. '그리스도의 적': 영지주의
오소서 성령님. 새로 나게 하소서. 오늘 독서에는 ‘그리스도의 적’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이 그리스도의 적이란 영지주의자들이었습니다. 낯선 단어지요.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고백합니까. 예수님께서 육을 지니신 참 인간이자 참 하느님이시라고 고백하지요. 참 하느님께서 인성을 취하셔서 아기가 되시고, 그 인성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우리 머리로 아무리 그럴듯하게 만들어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믿어야 할 신비이지요.
그러나 영지주의자들은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었지요. 그래서 교리를 이렇게 만들어 버립니다. 하느님이신 성자께서 이 세상에 오시는데, 온전한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껍데기를 쓰고 사람인 척 하시다가, 나중에 십자가에 못 박힐 때에는 성자께서 그 몸을 버리고 떠나셨다.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고 고백하지 않는 자들입니다.”라는 말씀이 바로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물질, 우리의 몸, 현재 세상의 가치를 아주 낮게 평가했습니다. 그저 몸은 우리의 감옥일 뿐이니 빨리 버리고 저 세상으로 초월해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그래서 비밀스러운 수행을 통해, 비밀스러운 기도 방법을 통해서 신비로운 체험을 하는 것만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계명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지요.
2. 새로운 가르침에 대한 이끌림
2. 새로운 가르침에 대한 이끌림
우리에게도 가끔 비슷한 유혹이 오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한다고 하지만 매일 똑같은 것의 반복이지요. 평일미사든 주일미사든 미사도 똑같고, 각 공동체별로 하는 회합, 모임, 교육도 비슷하지요. 강론도 조금씩은 다르지만 큰 틀에서 보면 비슷비슷해 보입니다. 그러다 보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사실은 엄청난 보물인데도,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게 됩니다. 권태로워지지요.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가르침에 이끌리기도 합니다. 예컨대 ‘성모님의 비밀스러운 열두 가지 말씀’ 누구에게만 발현해서 하신 어떤 말씀 이런 것들에 혹하기도 하지요. 그런 것들에 관심을 두다 보면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보다 어떤 초월, 신비 체험, 비밀스러운 계시 이런 것들에만 관심을 갖게 됩니다.
3. 서로 사랑하라는 오래도록 새로운 가르침
3. 서로 사랑하라는 오래도록 새로운 가르침
우리 신앙은 무엇인가. 아우구스티누스가 예수님을 두고 “이토록 오래된, 이토록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라고 찬미했습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파스카 신비도,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도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요한 사도가 말하듯 ‘우리가 처음부터 지녀온 계명’이지요. 그러나 그 오래된 가르침을 묵상하고 실천하다 보면 거기서 오는 새로운 맛이 있습니다. 이를 두고 오래되고도 새로운 아름다움이라고 했겠지요. 우리도 매일 우리가 하는 신앙 생활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열심을 다해 묵상하고 실천하면서 오래되고도 새로운 아름다움을 느끼길 바랍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