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발은 땅에 두 눈은 하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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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6:1-12
전도서 6:1-12
서론
한때, 온라인에서 성공한 인생의 기준표가 등장해 화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해당 기준표는 연령별로 어떤 인생이 성공한 인생인지를 정의했는데, 한번 앞을 보면서 같이 보도록 하겠습니다.
10대 - 성공한 아버지를 뒀으면 성공
20대 - 학벌이 좋으면 성공
30대 - 좋은 직장에 다니면 성공
40대 - 2차 쏠 수 있으면 성공
50대 - 공부 잘하는 자녀 있으면 성공
60대 - 아직 돈 벌고 있으면 성공
70대 - 건강하면 성공
80대 - 본처가 밥 차려 주면 성공
90대 - 전화 오는 사람 있으면 성공
100세 - 아침에 눈뜨면 성공
어떻습니까? 보시면서, 각자의 나이대에 해당하는 성공의 기준이 공감이 되시나요? 혹여나 어떤 분들이 ‘너무 인터넷 온라인에서 돌아다니는 얘기가 아니냐?’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최근 2021년, 잡코리아에서 조사한 통계를 말씀드리면, 2040세대는 성공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내 만족’을 꼽고 있었는데, 응답자의 39.8%가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행복을 느끼는 삶’을 답했고, 22.2%는 ‘경제적으로 풍족하도록 부를 일군 삶’이라 했으며, 15.2%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안정되고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 삶’이라 응답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통계를 들으셨는데, 들으면서 어떤 생각이 떠오르셨습니까? 아마 공감되어 고개를 끄덕이는 분들도 계실 것이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이것 말고 다른 것이 성공의 기준이지! 라고 생각하고 계신 분들도 이 자리에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개인적으로 이 통계를 보며, 공감 또는 부정의 차원을 넘어 다른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어떤 생각이냐? 성공의 기준이 ‘참 어렵다’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제 말을 듣고 “왜 어렵냐?”라는 의문이 드시는 분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아니! 자기가 만족하고 행복하면 성공한 것이지, 돈 잘 벌고 풍족한 삶, 윤택한 삶 살면 충분히 성공이라 할 만하지, 안정되고 불화 없는 화목한 가정이면 충분히 성공의 기준이라 할만하지 않는가?”라는 의문이죠.
네! 맞습니다! 자기가 만족하고 행복하면 그 삶은 성공한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만족하고 행복하는 그 기준은 절대적인 기준인가요? 수학이나 통계처럼 어느 정도 수치에 이르면 나는 행복하다! 할 수 있는 것인가요?
예를 들어, 내가 집 한 채 자가를 가지고 있으면 행복할 것이다. 만족할 것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하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집 한 채를 마련했어요! 분명 행복하겠죠! 만족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한 기준에 다다라보니 더 큰 기준, 더 높은 기준이 있는 겁니다. 주변 엄마들 얘기를 들어보니, 누구는 더 좋은 아파트, 더 큰 평수에 들어가 산다느니, 아주 좋은 차를 샀다느니, 누구 자녀들은 좋은 대학교, 좋은 직장에 다닌다느니. 뭐 이런, 나의 상태보다 더 나아보이는 기준들, 상황들, 여건들을 볼 때 나의 행복에 대한 기준, 만족에 대한 기준, 그리고 성공에 대한 기준들이 뒤틀리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공의 기준이 너무나 어려운 이유 첫째는, 성공의 핵심되는 기준인 ‘행복’이 너무 상대적이다!라는 것입니다. 나는 10만큼 가지고 있어서 행복하다! 성공했다! 생각했는데, 내 주위를 보니 다 20, 30, 100 이상을 가지고 있을 때, 얼마나 박탈감을 느끼고 좌절감을 느낍니까? 성공했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성공의 기준이 너무나도 어려운 이유인 것입니다.
그리고 성공의 기준이 어려운 이유 둘째는 성공의 주된 핵심인 ‘행복’을 주는 요소들이 ‘순간적’이다!라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돈도 대기업 사장 급으로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가정도 너무 평안합니다. 싸움도 없어요. 본인 스스로도 만족합니다. 그런데, 그 상태가 계속, 영원히 유지될 수 있을까요? 없다. 이 말입니다!
오늘 우리 가족이 평안하고 불화가 없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어떤 사건, 어떤 자그마한 요소로 불화가 생길 수도 있는 것이고. 내가 완전히 쥐었다고 생각한 돈이 수 년 만에, 아니! 하루 아침에 사라질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당장 우리가 본 일례로, 한국 2위 그룹까지 갔던 대우의 몰락을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절대 위기는 없을 것 같은 삼성전자의 위기를 우리는 지금 보고 있지 않습니까? 이처럼 우리에게 행복과 성공을 결정할 수 있는 요소와 기준들은 지극히 순간적이고 유동적이기에 참으로 성공의 기준이 어렵다고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본론
오늘 본문 말씀은 이러한 성공과 행복이 너무나 상대적이고, 제한적이며 순간적인 것임을 네 가지 경우를 들어 명확히 제시하고 있는데요. 다 함께, 1절에서 2절에 걸쳐 첫 번째 경우를 읽어보겠습니다.
1절: 내가 해 아래에서 한 가지 불행한 일이 있는 것을 보았나니 이는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이라
2절: 어떤 사람은 그의 영혼이 바라는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그가 그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
아멘
네! 1절을 보시면, 전도서의 저자인 전도자. 솔로몬이 해 아래에서 한 가지 불행한 일을 보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해 아래는, 전도서에서 말하는 매우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인데, 해 아래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말하고 해 위는 뭡니까? 네! 하나님 계신 그 영원한 나라, 천국을 말합니다.
다시 돌아와서, 해 아래에서 한 가지 불행한 일을 보았는데, 그 일이 무엇입니까? 네! 행복과 성공의 기준이라 할 만한 부족함 없고 재물과 부요와 존귀가 있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뭡니까? 그것을 누릴 수 없어요. 오히려 내가 열심히 벌어놓은 그 재물과 부요를 다른 사람이 누리는 것입니다. 성경은 본인이 누릴 수 없는 이유를 명확하게 제시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다양한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죠. 평생 고생하며 재산을 모아놓은 본인의 재산을 자식들이 유산 다툼을 한다거나, 내가 회사에서 열심히 뼈빠지게 일해서 돈을 많이 번 것 같지만, 결국 내가 일한 것보다 돈을 더 많이 버는 것은 다른 임원, 더 높은 직급인 것 같은 그런 현실을 우리는 떠올려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떤 마음이 듭니까? 분노합니다. 불행을 느낍니다.
다음으로 전도자가 말한 두 번째 경우는 무엇인지 다 함께 3절에서 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3절: 사람이 비록 백 명의 자녀를 낳고 또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지라도 그의 영혼은 그러한 행복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또 그가 안장되지 못하면 나는 이르기를 낙태된 자가 그보다는 낫다 하나니
4절: 낙태된 자는 헛되이 왔다가 어두운 중에 가매 그의 이름이 어둠에 덮이니
5절: 햇빛도 보지 못하고 또 그것을 알지도 못하나 이가 그보다 더 평안함이라
아멘.
백 명의 자녀를 낳고 장수한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서 백 명은 숫자 그대로의 백명이 아닌 다산을 말합니다. 다산하고 장수한 것, 얼마나 큰 행복이요 성공입니까? 그러나 자녀들이 그 부모의 죽음에 제대로 안장시키지도 않고 무관심한 모습을 보이는 것, 이것이 과연, 행복이요 성공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전도자는 이러한 사람의 삶을 놓고 낙태된 자보다 더 비참한 삶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경우로, 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7절: 사람의 수고는 다 자기의 입을 위함이나 그 식욕은 채울 수 없느니라
아멘
여기서 말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먹고 살기 위해, 맛있는 것, 더 좋은 것을 입기 위해 열심히 발버둥치며 살았고 그것을 얻은 것 같지만, 결국 그걸 먹을 식욕이 없고 입을 힘이 없어 병상에 누워 환자복 입은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요, 성공한 사람이라 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네 번째 경우로, 8절을 읽겠습니다.
8절: 지혜자가 우매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 살아 있는 자들 앞에서 행할 줄을 아는 가난한 자에게는 무슨 유익이 있는가
아멘
학벌 좋고, 박사학위까지 있는 사람은 성공했다 할 수 있습니까?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요! 또다른 무지 앞에서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 때, 좌절과 허무함을 느낍니다. 아는 것이 많다는 것도 결국 성공과 행복의 기준이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위 네 가지의 경우를 보며 우리는 앞서 말했던, 성공의 기준이 너무나 어렵다! 행복과 만족이 너무나 상대적이고 제한적이며 순간적이다! 라는 것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됩니다.
그래서 전도자인 솔로몬은 위 경우를 말하며 뭐라고 정리하고 있습니까? 다 함께 9절과 11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9절: 눈으로 보는 것이 마음으로 공상하는 것보다 나으나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11절: 헛된 것을 더하게 하는 많은 일들이 있나니 그것들이 사람에게 무슨 유익이 있으랴
아멘
여기서 전도자가 말하는 해 아래에서의 것, 해 아래에서의 성공의 기준, 행복의 기준을 뭐라고 표현합니까? 그렇습니다. 헛된 것!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헛된 것’이라는 표현에 우리는 주목해볼 수 있어야 합니다. 헛된 것이라는 단어, 히브리어로 ‘헤벨’은 전체 성경에서 73번 정도 나오는데, 그중에 전도서에서만 38번이 나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구절 있지 않습니까? ‘전도서’ 하면 떠오르는 구절 무엇이 있습니까? 네! 전도서 1:2 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여기서 이 ‘헛되다’라는 것이 히브리어로 ‘헤벨’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까지 제가 한 얘기를 잘 따라오면서 들으신 분들은 이런 생각을 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앞에 설교하는 고예준 전도사가 해 아래의 것, 이 세상의 것은 전부 헛되고 공허한 것이니 해 아래의 것에는 관심 끄고 해 위의 것, 하나님 나라, 천국만 바라보고 살라고 하나보다. 뭐 이런 생각을 하실 수 있으실 것 같습니다.
단순하게 얘기하면 그렇게 얘기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저는 이 땅의 것이 완전 무의미하고, 비어있고 무쓸모하다는 수동적 허무주의, 니힐리즘과 같은 것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염세주의, 영지주의와 같은 이 땅의 것은 악해, 허무해 오직 영적인 세상만 보고 살아! 이 세상은 신경쓰지 말고 버려! 라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함이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전도서의 핵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도서에서 말하는 이 ‘헛되다’라는 단어, 헤벨에 대해서 우리는 분명한 뜻을 알고 전도서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이해하고 바라볼 때, 우리는 전도서에 담긴 하나님의 뜻, 그 진리의 복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헤벨’의 히브리어 원뜻이 무엇일까요? ‘헤벨’은 헛되다! 라는 뜻도 물론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뜻으로 ‘짧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전도서 전체의 내용을 볼 때는 헛됨, 허무라는 표현보다는 ‘짧다’라는 표현이 더 적절합니다.
전도자인 솔로몬이 세상을 살면서 세상을 보니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된 이유가 그 자체가 무의미하고 허무해서가 아니라, 그것들이 ‘영원하지 않고’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짧은 ‘헤벨’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 세상에 ‘시간’이라는 선 안에서 영원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수백, 수 천년 흐른 것 같은 한강도, 그 바다도 결국 시간이라는 선 안에서 없어지는, 영원이라는 것 안에서 너무나 짧게 사라져버리는 ‘헤벨’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헤벨의 원래 뜻을 더 살펴보면, ‘수증기, 입김, 이슬’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겨울에 입에서 나오는 입김, 해가 뜨기 전 잠깐 생겼던 이슬을 생각해보십시오! 잠깐 눈에 보이고 실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순식간에 사라져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헤벨’이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헤벨과 함께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전도서의 핵심 단어를 하나 더 알아야 합니다. 짧다, 허무하다 라는 헤벨과 반대되는 단어, 무엇입니까? 영원함을 나타내는 단어 ‘올람’입니다. 다 함께 전도서 3:11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여기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할 때 영원의 단어가 무엇이라구요? 네! 바로 ‘올람’이라는 것입니다. 전도서는 해 아래에 있는 것들을 가리켜 헤벨, ‘짧은 것’, ‘영원하지 않은 것’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해 위의 것을 놓고 ‘올람’, 영원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해 아래, 해가 뜨고 지는 시간의 흐름 속에 있습니다. 영원한 것 없이 시간이 흐릅니다. 헤벨의 세상에서는 누구든지 시간에 올라탔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을 따라 청년과 중년 그리고 노년의 때를 거쳐 허무하게 죽게 됩니다.
그러나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 영원한 세계 곧, 올람의 세계가 있습니다. 해 위의 인생이 있습니다. 그곳은 영원합니다. 시간의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우리가 해 아래 이 땅에서 기쁜 일이 생겨도 하루이틀 시간이 지나면 첫날 같은 기쁨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해 위의 세상은 영원해서 시간이 흐르지 않기 때문에 시들시들해지거나 익숙해지거나 하지 않고 처음 기쁨이 영원한 곳입니다. 해 아래에서 짧은 인생을 살아갈 때 시간이 흐르다보면 첫사랑도 잊게 되고, 구원의 감격도 익숙해지고, 매일 듣던 말씀에 감흥이 사라져도 저 영원한 해 위의 인생은 보고 싶은 예수님 직접 만나게 될 때의 그 감격과 기쁨이 영원할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아멘!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해 아래인 이 세상에 살면서 헤벨 안에 둘러 쌓여 살아갑니다. 전부 ‘시간’이라는 선 안에서 입김과 같이 순간적이고 사라져버리는 것들 속에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에게는 갈망이 있습니다. 어떤 갈망입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주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곧 ‘올람을 갈망하는 마음’이 우리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비록 이 세계는 우리의 타락으로 인해, 헤벨이 되어버렸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 속에는 ‘영원한 것’ 곧 ‘올람’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앞서 말한 대로,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 만족을 주는 요소들을 이 땅에서 열심히 찾지요. 그런데, 찾을 수 있겠습니까? 없다 이 말입니다! 모래 밖에 없는 모래 사장에서 다이아몬드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우리는 올람을 찾기 위해 이 세상에서 애쓰고 노력하며 발버둥 치지만 도저히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영원을 갈망하는 이 마음, 어떻게 채울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방법이 있습니다. 오직 하나의 방법입니다. 해 위에 계신 분이 해 아래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올람이신 분이 헤벨의 세상에 내려오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아주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 함께 요1:14 말씀을 읽겠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아멘! 또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막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아멘! 올람의 세상에서 헤벨에 살아가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직접 내려오신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올람이신 우리 주를 믿는 자, 그 올람을 누리게 됩니다.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아멘! 이 복음을 이 진리를 믿으십니까? 믿으시길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 더 이상 헤벨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자기의 참된 만족, 참된 행복, 그 영원한 기쁨을 올람 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귀결시키며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성공의 기준, 자신의 행복과 만족의 기준을 이 세상의 헤벨의 것에 두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자기가 돈이 많다고 그렇게 크게 기뻐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녀가 잘 나간다고 이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뻐하지 않습니다. 때론 내가 가진 것들을 다 잃어도, 하루 아침에 사라져도 세상을 완전히 잃은 것처럼 소망이 없는 것처럼 살지도 않습니다. 왜요? 헤벨의 기준이 아닌 올람의 기준을 두고 사니 이 땅에서의 삶을 놓고 크게 일희일비 하며 살아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멀리하게 되는 것에 대해, 죄에 쉽게 넘어지는 것에 대해는 그 누구보다 애통하며 괴로워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에 대해, 그리스도 닮은 삶을 살아가며 단 한 사람이라도 더 이 영원을 맛보게 하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큰 기쁨으로 반응하며 살아갑니다. 그것을 위해 해 아래의 것, 헤벨의 것을 아낌없이! 기꺼이 쏟으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삶을 무엇이라 표현할 수 있을까요? 저는 군주론을 쓴 마키아밸리의 표현을 가져와서 말하고 싶습니다. “두 발은 땅에 두고 살아가지만, 두 눈은 하늘에 두고 살아가는 삶.”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저와 사랑하는 예사랑교회 성도 여러분과 모두가, ‘헤벨’의 것에 우리의 성공의 기준을 두지 않는 자 되길 원합니다. 이 땅에서 잘되고 잘 살면 뭐합니까? 올람이신 예수님을 모르면 다 무의미한 것 아닙니까? 다 헤벨과 같은 것 아닙니까?
내 자녀들이 대학 잘가기 위해 주일에 교회 안 가고 학원 가면 뭐합니까? 내 자녀가 헤벨만 쫓도록 돕다가 올람을 놓쳐버리면 그거야 말로 진짜 끔찍한 일 아니겠습니까?
우리 주님께 드리는 것에 있어서는 손이 떨리고, 주저되고 아깝다 생각하는 마음이 있다면, 헤벨을 붙잡기 위해 올람을 놓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어떻게든 이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해서, 거짓말 하고 배신하고 탐욕 부리는 것 괜찮아! 라는 분이 계신다면, 스스로가 올람이신 예수님을 만난 것이 맞나? 내가 그 영원한 나라를 미리 맛보고 경험한 자가 맞는가?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명문 휘튼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20대의 젊은 나이에 아우카족에 선교를 떠났다가 아우카족의 창에 맞아 순교한 짐 엘리엇 선교사님의 말을 끝으로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 영원하지 않은 것을 포기하는 자는 결코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 찬양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