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양의 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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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말-도입]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오늘도 요한복음 강해를 시작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로 말씀의 깊은 곳으로 이끌어 가시길 기대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같이 교독 하겠습니다 [요10: 1--10]
1.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3.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5.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6.예수께서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7.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서론]
요한복음 10장은 9장의 마지막을 이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 말씀은 문맥을 따라 읽어야 합니다.장과 절의 구분은 나중에 붙여진 것이라고 말씀 드린 기억이 납니다. 특히 절의 분류는 16세기에 이루어 졌으며 이는 우리가 앞뒤 문맥을 유의하여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전체 문맥으로 볼 때는 두개의 단락으로 구성됩니다. 1-6절과 7-10절 입니다. 첫번째 단락은 “양 우리”에 대한 말씀을, 두번째 단락은 “양의 문”에 대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두 단락은 하나의 주제를 병행법을 사용하여 구성합니다. 즉 같은 이야기를 시점을 달리해서 설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첫번째 단락인 “양 우리” 단락은 3인칭 시점에서 기록하고 있다면 두번째 단락인 “양의 문” 단락은 1인칭 시점으로 같은 주제를 병행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인 “나는 양의 문이라” 라는 요한복음에서 나타나는 “에고 에이미”는 7가지 예수님의 신적 선언 3번째에 해당됩니다. 7가지가 뭐죠! (나는 생명의 떡6/ 세상의 빛 8/나는 문, 나는 선한 목자10/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 /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 / 나는 참 포도나무이다15,)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 1절과 7절 에서는 요한복음에서만 나오는 예수님의 화법 “진실로” 화법을 사용하여 단락을 나누고 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10장이 요한복음 9장에 이어진 말씀이라는 것은 화자와 청자가 동일하다는데 있습니다. 9장 후반부에 예수님과 함께 거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너희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다”고 말입니다. 그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지도자이고 유대인들을 이끌어 가는 목자라고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10장 말씀을 통해 선한 목자에 대한 비유를 베푸십니다. 9장에서 예수님이 치료해준 출생부터 맹인 되었던 자를 바리새인들은 쫒아 내버립니다. 요9:34” 말씀을 보면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여기서 ‘쫓아내다’는 헬라어 동사’ ἐκβάλλω “에크발로”는 밖으로 던지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0장 4절의 ‘내놓다’와 같이 사용된 동사입니다.’ 이것은 스스로를 지도자라고, 이스라엘의 목자라고 생각하는 바리새인들은 힘없고 연약한 맹인을 내쫓았지만 예수님은 그를 찾아가 맞이하며 누가 진정한 선한 목자인지 보여주셨습니다. 이어서 주님은 10장의 양과 목자의 비유를 통해 유대인 지도자들에게는 축출 대상이 왜 예수님 에게는 목회의 대상이 되는지를 상세하게 보여 주십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 10장은 이러한 배경속에 나온 주님의 설교입니다.
[본론]
예수님은 고대 근동에서 흔히 벌어지는 목축 장면에서 오늘의 내러티브를 가져오십니다. 예수님은 항상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소재를 가지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설교자에게 늘 꿈꾸는 목표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목자와 양, 양우리와 문, 문지기와 삯꾼, 도둑과 강도를 등장인물로 사용하여 본문 비유를 베푸십니다. 공관복음에도 목자와 양의 이미지가 나오지만 요한복음 10장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이 상세한 언급을 하지 않아서 요한복음의 독특함을 발견합니다.오늘은 단락별로 말씀 주해를 위해 띄워 놓고 보겠습니다. 첫번째 단락인 1-6절 말씀입니다.
1.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3.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5.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6.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1절에서 나오는 ‘양의 우리’는 오늘날 교회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양의 우리’는 특이하게도 예수님의 양이 아닌 다른 양에게도 진입이 허락됩니다. 16절말씀을 한번 읽겠습니다.”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여기서 ‘다른 양’은 아직 주님의 양이 되지 않은 양을 말합니다. 그 다른 양이 교회안에 같이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안에는 주님의 양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 거듭나지 않은 신자들도 함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참으로 다행스러운 것은 주님이 그들도 인도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양일가요? 다른 양일까요? 궁금하시죠?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 아십니다.그리고 오늘 말씀 잘 들으시면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1절에 “들어가다”라는 “에이세르코마이” [εἰσέρχομαι} 는 2절과 9절에서도 동일하게 사용됩니다. 1절에서는 양우리에 잘못된 방법으로 접근하는 자를 소개합니다. 이들은 도둑이며 강도입니다. 그리고 5절에서 나오는 ‘타인’ 또한 같은 존재입니다. 타인이란 같은 지역의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도둑은 내부에서 은밀히 행하는 자를 말하며, 그리고 강도는 드러내 놓고 외부에서 폭력으로 약탈하는 자를 말합니다. 이들은 담의 바깥에서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우리를 넘어 옵니다. 그러나 목자인 주님은 문으로 들어가십니다.
2절에서 말하는 목자는 예수님을 말합니다. 목자는 양을 위하고 양은 목자에 의합니다. 3절에서는 갑자기 문지기가 등장합니다. 사진을 잠깐 보겠습니다. [사진1.2] 여기서 문지기는 양의 우리를 지키고 목자가 오면 문을 열어주는 것이 임무입니다. 시 84:10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문지가는 목자가 맡겨논 양을 목자가 올때까지 도적과 강도로부터 지키고 목자가 오면 문을 열어주는 것이 역할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교회의 목사들이 이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양을 이단으로부터 보호하고 목자가 내준 양식을 양들에게 먹이고 목자가 오면 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문지기가 목자행세를 하면 양들이 병이 든다는 것입니다. 양들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함께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세상에 있는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거닐다가(?) 다시 밤이 되면 ‘양의 우리’로 목자가 이끌어 오면 쉼을 얻습니다. 그런데 그릇된 문지기는 자신의 판단으로 목자가 와도 문을 열어주지 않고 양들을 가두어 놓습니다. 밖에는 이리와 원수들로 가득하기에 위험하다고 말합니다. 우리 주변에 이런 문지기를 쉽게 볼 수 있는데 누굴까요? 부모님들 입니다. 여러분 부모님들의 모습이 아니길 바랍니다. 물론 문지기는 도적에게 문을 열어주면 안되고 목자인 예수님께 만 문을 열어 주어야 합니다.하지만 문지기가 목자의 음성을 민감하지 않으면 문을 열어 주지 않아 양을 우리 속에만 가두어 두게 됩니다. 그러면 양이 병이 듭니다. 문지기는 오직 목자를 위해 존재해야 하고 목자에게만 문을 열어 주어야 합니다.
양들은 눈이 매우 어두운 반면에 청각은 매우 발달되어 있어서 자기 목자의 목소리를 들으면 바로 알아 듣는다고 합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반응합니다. 3절은 목자와 양떼들의 상호작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양들의 입장에서 보면 첫째, 목자의 음성을 듣습니다. 양들에게 목자를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목자와 도둑을 구분 못하면 양들은 망합니다. 따라서 양들은 목자의 음성에 민감해야 하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여기서 음성은 성경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양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말씀을 주의 깊게 듣고 친밀하게 반응하고 구분해야 합니다.도둑과 목자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 양들은 목자를 따릅니다. 목자의 인도에 순종하며 목자의 공급을 기대합니다. 예수님은 양들이 목자를 따르는 것은 “그들이 그의 음성을 알기 때문이다’ 고 말씀하십니다. 알기에 듣는 것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상호작용의 다른 측면인 목자의 입장에서 보면, 목자는 첫째, 양들을 부릅니다. 그런데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하나씩 부릅니다. 이름을 부르는 것은 친밀과 애정의 표현입니다. 여러분들도 제가 이름을 불러주면 좋지요? 저도 그렇습니다. “아저씨! 저기요! 여러분이 저를 이렇게 부르면 저는 매우 슬플 것 같습니다. “이름을 빼고 형제님,자매님 이렇게만 부르면 거리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름을 부르는 것은 친밀감을 넘어서 중요한 사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언약관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 개개인의 이름을 아신다는 것은 구속의 언약백성으로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을 부르셨다는 것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둘째, 목자는 양들을 이끌어 냅니다. 진정한 목자는 양들을 우리에만 가두어 두지 않습니다. 양들에게 신선한 풀을 제공해 주기 위해 바깥으로 이끌어 냅니다.비록 밖에 나다니면 무릎이 까지고 구덩이에 빠지는 일도 있지만 목자가 구해줍니다. 이것이 목자와 문지기의 차이입니다. 목자는 모든 상황을 해결한 능력이 있고 문지기는 위험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제한적입니다. 자녀양육의 비결은 목자이신 하나님에게 믿음으로 맡기는 것입니다. 목동 다윗은 시23:2에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이렇게 노래 합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셋째, 목자는 양들보다 앞장서서 가십니다. 4절에 보면 목자가 앞에서 가기 때문에 양들을 우리 밖에 내놓아도 걱정이 없고,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따라서 가기 때문에 우리 밖으로 나와도 안심합니다.
저는 4절 말씀이 너무도 은혜가 됩니다. 저는 주님의 은혜로 부름 받고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을 위해 남은 인생을 살아가겠습니다.마음의 결단을 하고 신대원을 갔습니다. 이것이 자기 부인이고 좁은 길이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길이라 생각하여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렸고 드디어 때가 되어 주님의 은혜로 이 길을 걷기 시작하게 되었다고 생각을 했었습니다.그런데 말입니다.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주님이 보게 하셨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양 우리’ 안에서만 빙글빙글 돌고 있었던 양이었다는 것입니다. 눈도 어둡고 목자의 음성도 잘 못 들어서 주님이 나가자고 부르시는데 땅에 코 처박고 우리 안에서만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놀랍고 너무도 감사한 일은, 이런 교회라는 우리 안에서만 살아가던 어리석은 저를 밖으로 끌어내 주신 것입니다. 제가 헌신을 결단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넓은 세상으로 이끌어 주신 것입니다. 삶의결단을 하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주님이 오래 참아 주셨던 것입니다. 이런 사실만으로도 감사한데 이에 더해서 주님이 앞에 가시면서 저를 인도해 주신다고 말씀 하십니다.저는 주님의 음성만 들으며 좋은 공기와 신선한 풀들을 뜯으면서 자유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할렐루야! ‘에크발로’라는 밖으로 던지다는 뜻은 저에게 주님이 오셔서 이끌어 낸다는 뜻으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무엇이 여러분을 두렵고 불안하게 합니까? 좋은 대학에 가고 싶고, 대기업에 취업하고 싶고, 능력 있고 학벌 좋은 배우자 만나 결혼하고 싶으신 가요? 저는 여러분이 모두 그런 삶을 살아가시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더라도 그것은 실패이고 세상에서 쫓겨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길 당부 드립니다. 저도 청년시절과 지난 과거는 돌이켜 보면 보이는 외부적인 평가와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조바심 내고 살았지만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빌3:7-9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존귀하고 보배롭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붙잡힌 바 되어 지금 아 자리 예배자의 자리에 서 계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5절에서의 타인은 1절과 8절에 나오는 도둑과 강도를 말합니다. 성도는 목회자의 입에서 나오는 음성이 우리 모두의 영원한 목자 되시는 주님의 음성인지 아닌지 분별해야 하고 만약 주님의 음성이 아니라면 따르지 않도록 늘 주의해야 합니다. 여기서 도망한다는 헬라어 ‘페우고’ φεύγω는 적극적으로 벗어나기 위하여 피하는 것을 나타내는 동사입니다.
6절 말씀으로 첫번째 단락을 정리합니다. 비유는 헬라어 ‘파로이미아’ 입니다. 유대인들은 비유로 말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비유의 해석은 문법에 근거하지 않고 화자와 청자 사이의 교감이나 친밀감의 크기에 의존합니다. 본문 상황의 청자인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미워하고 죽이려 했기에 비유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도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렌즈로 읽어야 말씀이 이해가 됩니다. 예수님이 유대인과 바리새인들의 본질을 한마디로 정리하십니다. 요5:42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다음 단락입니다.
7.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내가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도둑이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이제 두번째 단락을 살펴보겠습니다. 앞 단락과 마찬가지로 이번 단락도 ‘문’ 이라는 주제가 병립되어 나오고 ‘양들’ 및 ’도둑과 강도’가 등장합니다.다만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시점이 3인칭(그)에서 1인칭(나)로 바뀐 점과 문으로 들어가느냐 아니냐?가 앞 단락의 요점이라면 이번 단락은 언제 문에 오느냐?가 차이점입니다. 7절 시작은 ‘그러므로’와 ‘다시’라는 말로 앞의 비유를 이해못한 사람들에게 반복적인 설명임을 드러냅니다. “나는 양의 문이라”는 의미는 첫째,예수님은 양들에게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이 있고 둘째는 우리로 양들이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바로 우리로 표현되는 교회의 문이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통할 때만 모든 ‘적법성’을 지닌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양들을 위해 존재하시는 문이 되십니다. 교회는 예수라는 하나의 동일한 문으로 인해 하나의 양우리에 속한 것입니다.
8절을 보면 ’나보다 먼저 온자’라는 독특한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 시간적 의미로 예수님보다 먼저 와서 자기가 양의 문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이 재림 하시기 전에 자신이 예수이고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이단들이 있습니다. 신천지, 그리스도의 교회, 구원파,외에 많은 이들이 그렇습니다. 그들을 보면 매우 부지런하고 열심입니다. [신천지 2만명 시위-경기도청, 금요일] [제가 기흥역에 노방전도] 를 나가면 항상 있는 사람들이 이런 이단교회들 입니다. 그릇된 가르침에도 이렇게 열심인데 진정한 복음을 소유한 우리들은 더욱 힘을 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8절 말씀대로 예수님을 뒤따르지 않고 앞지르는 모든 자들이 도둑이고 강도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인격과 생각과 말과 행동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 안을 살펴보십시오! 목사나 전도사,장로,권사,집사들 중에 예수님의 인격이 발견되지 않고, 예수의 생각과 무관하고,그 행실에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또한 강도와 도둑의 혐의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마땅히 그런 사람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9절은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 어떤 이득이 주어지는 지에 대한 설명입니다.우리 예수님은 구원의 문입니다. 그 문으로 들어가면 누구든지 모든 종류의 속박에서 자유함을 얻습니다. 사61:1-2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앞 단락에서 목자와 양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 주요점이라면 9절은 우리가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을 얻고, 들어가며 나가며 양식을 얻는 유익을 표현합니다. 여기에서 ‘들어오고 나가는’ 표현은 모든 활동과 일상을 말합니다. 구원을 받은 이후에는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예수라는 문으로 출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내 안에서 행하시는 것을 뜻합니다. 정리하자면 우리가 예수님을 통할 때 얻는 유익은 첫째, 구원을 얻게 되고 둘째, 예수님과 항상 함께 하고 셋째, 양식을 얻게 됩니다. 10절은 7-9절까지의 내용을 정리하는 결론 말씀입니다. 도둑이 오는 것과 내가 오는 것과 목적이 다르다고 주님이 말합니다. 도둑은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고 쫓아냅니다. 여기서 ‘파괴하다’는 헬라어 ‘아폴리미’ ἀπόλλυμι 는 “흩어버리다’는 12절의 ‘스코르피조’ ‘σκορπίζω’ 라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도둑이 양 우리에 와서 일부는 도둑질 하고 ,일부는 죽이고, 나머지는 문을 열고 흩어버리는 것을 점층법을 사용하여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시면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많은 것을 얻습니다. 오늘날 교회에는 여전히 도둑으로 인해 사건사고가 일어납니다. 부자세습의 도적질을 하는 사람, 욕망의 불화살로 양들을 잡아 먹는 문지기, 횡령과 사기가 존재합니다. 도둑이 들은 교회는 빼앗기고 죽고 파괴됩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근본 원인은 도둑이 있어서가 아니라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계시면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베푸십니다. 죽은자도 살리십니다. 행15:16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예수님은 모든 무너진 장막을 새롭게 하시고 풍성하게 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결론]
행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요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주님은 양의 문이 되신다고 말씀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그리고 이 문을 통하지 않고 넘어 오는 자는 도적이고 강도며 타인이라고 단언하십니다. 도적과 강도와 타인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빼앗고 흩어버리는 일을 하지만 오직 주님은 양으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시기 위해서 양들에게로 오십니다. 주님의 양들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갑니다. 말씀을 따라갑니다. 들며 나가며 꼴을 얻습니다. 교회에서나 교회밖에서도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보호하심을 받습니다. 목자의 음성을 따르는 양은 안전하고 자유롭습니다. 걸어가는 길의 끝에 마주하게 될 결과에 대한 책임이 목자에게 있지 양에게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즐겨 읽고 배우고 훈련하는 일에 자신을 온전히 드립시다. 오늘날 세상은 혼탁합니다. 삯꾼과 이리가 교회안에도 많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잘 듣고 따라가지 않는 양은 망하고 잡아 먹힙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교회안에서만 머무르면 안됩니다. 교회밖에서는 세상에 맞서 주님의 제자로 선한 영향력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주님의 영으로 충만하지 않고는 능력으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주의 성령은 우리가 주의 말씀을 읽고 순종하며 살고자 주님의 도우심을 구할 때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세상은 신자들을 공격합니다. 벧전5:8-9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그러나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롬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우리 주님은 이 모든 사망 권세를 깨트리고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 이루신 우리의 영원한 목자 되십니다.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따라 오늘도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를 자유롭게 누비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간절히 기도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