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117 추수감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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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절

εἰρήνη -ης, ἡ; (eirēnē), 명사. 평화, 화평, 평안

평화 — 조화로운 관계와 분쟁이 없는 상태; 특별히 전쟁이 없는 기간.
평화의 축복 — 하나님의 호의나 축복으로 인한 평화로운 상태.

평온 ⇔ 평화 — 정신적인 스트레스나 불안이 없는 상태; 특별히 구원의 가치를 합당하게 인식함에서 비롯된다

-> 문맥상으로 보았을 때 “화평”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왜냐하면 그들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위의 것을 생각하라고 했고, 그로 인해 죽여야 할 땅의 지체 중에 분함, 노여움, 악의, 비방 등 상대방에 관련된 것을 버리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로 인해 새 사람을 입었고, 그리스도는 헬라인과 유대인을 차별하지 않으시며, 그는 만유시고 만유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새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서로 용납하고 용서할 수 있다.
따라서 이렇게 보았을 때에 그리스도의 “화평”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그가 죄와 악에 있는 땅의 지체인 우리와 화평하셔서 연합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른 이들을 사랑하고 화평할 수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에게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
-> 추가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대립의 관계를 끊어버린 새 시대의 도래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 = 성령의 내주 = 구원 = 물세례. 그리스도로 인하여 모든 세계가 연합된 새 시대에 들어오게 되었다.

βραβεύω (brabeuō), 동사. 주장하다, 결정하다, 지배하다

현능명3단
-> 그리스도의 새 시대로 들어왔기 때문에, 그 영역 안에서 지배를 받게 하라는 것 아닐까?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로 지배 받는 새 시대 언약 백성들이다.

καρδία -ας, ἡ; (kardia), 명사. 중심, 마음, 심장.

~하는 바, 하는 것. 관계대명사 여단목
-> 이것이 지칭하는 게 뭐지?

καλέω (kaleō), 동사. 부르다, 이름하다, 청하다, 칭하다

부과수직2복

εἷς -ὸς, ὁ; (heis), 형용사. 하나(1)

형.중단여

εὐχάριστος -ου, ὁ; (eucharistos), 형용사. 감사하는, 고마움을 아는.

γίνομαι (ginomai), 동사. ~이다, 되다, 일어나다, 발생하다

->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화평이 너희의 마음들 가운데 주장하게 하라,
-> 그것(화평)을 위하여 너희는 한 몸 안에 부르심을 받았다.
->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화평이 너희의 마음들 가운데 주장하게 하라, 그것을 위하여 너희는 한 몸 안에 부르심을 받았으니, 너희는 감사하는 자들이 되라.
16절

ἐνοικέω (enoikeō), 동사. 거하다, 살다

현능명3단

πλουσίως (plousiōs), 부사. 풍성히, 후히, 넉넉히.

-> 그리스도의 마음이 너희 안에 풍성히 거하게 하라,

σοφία -ας, ἡ; (sophia), 명사. 지혜

διδάσκω (didaskō), 동사. 가르치다, 지도하다

현능분남복주

νουθετέω (noutheteō), 동사. 훈계하다, 가르치다, 충고하다.

현능분남복주
스스로 (13절에서 “피차”라고 쓰임… 그렇게 해석해야 할 듯)
-> 모든 지혜로 스스로(피차) 가르치고 훈계하며,

ψαλμός -οῦ, ὁ; (psalmos), 명사. 시편, 찬약의 노래.

찬송

ὕμνος -ου, ὁ; (hymnos), 명사. 찬송, 노래.

ᾠδή -ῆς, ἡ; (ōdē), 명사. 노래

πνευματικός -οῦ, ὁ; (pneumatikos), 형용사. 신령한, 영적인

->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

χάρις -ος, ἡ; (charis), 명사. 은혜

ᾄδω (adō), 동사. 노래하다, 찬양하다.

현능분남복주
-> 너희의 하나님에게 너희들의 마음들로 은혜 안에 노래하며
-> 디다스코와 더불어서 수단의 분사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말씀 절에 나오는 분사 3개는 모두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거하는 수단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식으로 감사를 링크할 수 있음.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기 위해 가르치고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 그리스도의 마음이 너희 안에 풍성히 거하게 하라,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고 훈계하며,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로 너희의 하나님에게 너희들의 마음들로 은혜 안에 노래하며
->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이 풍성히 임할 때에 두 가지 마음을 가지게 되는데, 이것은 상대방에게 특히 도움이 되고 나에게도 도움이 되며, 자만하지 않고 연민에 빠지지도 않게 한다. 그것은 지혜로 가르치고 훈계하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다. 놀랍게도 여기서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상대방을 가르쳐야 한다는 식의 현대 논리를 따라가지 않는다. 상대방과 화평함 가운데 사랑으로 가르치고 훈계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드린다.
왜냐하면 그것이 예수님께서 나에게 하신 일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용서하고 품는 일이 힘들수록 놀랍게도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일을 예수님께서 나에게 하셨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해서 힘든 인간관계는 오히려 예수님이 나를 용납하셨다는 증거와 열매가 되며, 이는 우리에게 감사의 제목이 된다.
17절

τὶς -ος, ὁ; (tis), 대명사., 형용사. 부정)어떤 사람, 어떤 것.

ποιέω (poieō), 동사. 행하다, 만들다.

현능가2복 (추측의 조건, 확인 조건 아니다)
-> 만일 너희가 말씀 또는 일에 어떤 것마다 모든 것을 주 예수의 이름으로 행한다면,

εὐχαριστέω (eucharisteō), 동사. 감사하다, 축사하다, 감사 기도하다.

현능분남복주
-> 방식의 분사, 즉 주동사에 동반되는 감정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월리스의 중급헬라어 문법 343쪽) 즉 감사하면서 주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감사하면서 주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πατήρ -ὸς, ὁ; (patēr), 명사. 아버지, 조상.

-> 그(주 예수) 덕분에 아버지께 감사한다.
=> 만일 너희가 말 또는 일에 어떤 것마다 모든 것을 주 예수의 이름으로 행한다면, 그(주 예수) 덕분에 아버지께 감사한다.
-> 우리가 모든 일들, 특히 상대방을 용납하고 용서하는 일에 있어서 주 예수의 이름으로 행한다면, 우리는 아버지께 감사하게 된다. 그분은 도저히 화평할 수 없는 우리와 화평하신 분이다. 우리들은 그 분과 연합되었고, 그분은 나 말고도 다른 사람과 연합되셨기 때문에, 나는 만유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 인해 당연히 그들과 한 몸이고 그들을 용납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감사제목이 된다.
-> 적용/ 이 감사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함의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교만하는 마음이 없이 상대방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들을 흔쾌히 사랑하지만, 어떤 동정이나 연민 없이, 그들을 똑바로 보고 동등한 입장에서 사랑할 수 있다. 그것이 나에게 맞지 않고 내가 한껏 양보해야 한다고 보이는 입장에서도 그렇다. 이로 인해 우리들은 급을 나누는 현대 사회에서 동등한 사랑을 할 수 있게 하고, 또한 그러한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하나가 될 수 있게 한다.
-> F.C.F/ 현대 사회에서는 그럴듯한 에티튜드와 사회성이 하나의 계급이 되었다. 성마른 사람들, 사회성이 부족한 사람들, 자연스럽지 않은 사람들, 독특한 성격이 있는 사람들은 소외되게 되었다. 모두가 아닌 척하지만 사실은 남에게 친절하고 예의있는 사람들이 사회에서 인정받으며, 사회 윗 계급에서는 이미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추방당해있다. 그들은 이미 그들만의 사회를 이루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정말 그럴지라도 우리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을 때에 그들을 포용할 수 있고 진심으로 그들을 사랑하고 용납할 수 있다. 놀랍게도 어떤 자만이나 권위의식 없이 말이다! 우리는 오히려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하나님께 감사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예수님께서 나에게 하신 일이기 때문이다.
[PNTC 골로새서] - 더글라스 무
15절
15 몸의 연합에 대한 바울의 관심은 이 구절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이 구절은 카이("그리고", TNIV에는 번역되지 않음, 예: ESV 참조)로 시작하는데, 이는 이 다음 명령이 바울이 12절부터 전개해 온 주제를 이어가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하게 하십시오."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경험하는 주요 축복 중 하나로 '평화'를 강조합니다.
에베소서 4:2-3의 다소 평행한 본문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랑"(14절)에서 "평화"로의 전환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완전히 겸손하고 온유하며,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십시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오”
바울은 골로새서 1장 20절에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을 자신과 "화목하게" 하셨다고 주장하면서 이 동사를 이런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이 구절에 대한 주석에서 언급했듯이 그리스도를 통해 확립된 평화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기대했던 종말론적 우주 회복의 상태인 샬롬입니다.
-> 그리스도의 피로 만물이 자신과 화목하게 되었다. 샬롬의 상태. 샬롬의 상태는 분열된 골로새 교회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 구절에서 바울은 이 보편적 평화의 구체적인 측면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먼저, 그는 골로새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평화가 "다스리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다스리다"는 그리스어 동사로, 경합 상황에서 판결을 내리는 "심판"의 활동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 동사는 자연스럽게 "통제"라는 의미를 가지며, 표준 그리스어 사전에서는 그리스도의 평화가 "결정적인 요소가 되게 하라"고 표현합니다. 일반적으로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이 "평화"를 중재자, 즉 경쟁적인 우려와 이해관계보다 우선시해야 하는 요소로 삼기를 원합니다. 신자들은 원칙을 희생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확보해 주신 평화를 촉진하고 보여주는 방식으로 서로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 평화가 우리를 지배하고 통제해야 한다.
바울이 여기서 '그리스도와의 평화'를 객관적인 의미로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두 번째 지표는 '너희 마음속에'라는 문구를 추가한 것입니다. 바울은 평화가 우리 마음속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가 "마음속에서" 지배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새 자아"를 특징짓는 평화가 우리 내면의 지배 원리 또는 미덕이 되어야 하며, 우리의 모든 관계,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서로의 관계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평화"는 "그가 구현하고 가져다주는 평화"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 14:27, 참조: 16:33)고 말씀하신 분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셨습니다.
-> 평화가 우리 마음을 지배해야 한다.
15a절의 명령의 상호 관계적 초점은 그리스도의 평화가 지배해야 하는 이유를 제공하는 구절의 두 번째 부분에서 확인됩니다: 여러분은 한 몸의 지체로서 평화를 위해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고전 7:15, 갈 5:13, 엡 4:4, 살전 4:7, 딤후 1:9 이 모든 본문에서 요점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단순히 자신의 백성이 되라고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삶을 살도록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삶은 소명과 결부되어 있으며 소명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한 몸으로"를 우리의 부르심의 방식을 나타내는 말로 삼아야 합니다. 복음은 피할 수 없이 개인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스스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스스로 믿음으로 응답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복음은 피할 수 없는 공동체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부르심을 받아 "한 몸"을 구성합니다. 서신 앞부분(1:18, 24; 참조. 2:19)에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명시적으로 언급하는 것을 보면 바울이 특정한 "몸"을 염두에 두고 있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새 자아"인 우리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으며, 통치 원리로서의 평화 추구는 이러한 공동체적 현실에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입니다.
-> 우리의 주의 몸이다. 한 몸이다. 따라서 우리들의 관계 사이에서 평화는 자연스러운 방식이 될 것이다.
15절의 마지막에 나오는 감사하라는 짧은 권고는 한편으로는 예상치 못한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부르심에 대한 감사로 가득 찬 신자들은(15a절) 동료 신자들에게 사랑과 용서의 은혜를 베풀고 공동체에서 평화의 표현을 방해할 수 있는 사소한 문제를 제쳐두기가 더 쉬워질 것입니다.
-> 그리스도의 평화가 우리 마음을 다스리게 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되어야 한다. 특히 한 몸인 다른 이들과의 관계에서 그것이 지배원리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화평하여 샬롬이었기 때문.
16절
16절과 15절을 연결하는 접속사나 입자가 없는 것은 아마도 둘 사이의 명백한 평행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너희 마음 속에) 다스리게 하라"와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너희 가운데) 거하게 하라"가 평행합니다(그리스어 어순도 동일합니다). 신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언급은 매우 흔하지만 "그리스도의 말씀"은 드물게 등장합니다. 아마도 바울은 "그리스도가 선포한 말씀 또는 메시지"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메시지", "메시아에 관한 메시지"를 의미했을 것입니다.
->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메시지이다.
공동체의 예배에 초점을 맞춘 이 구절의 나머지 부분은 오히려 바울이 공동체 전체가 그리스도에 관한 메시지를 공동체 경험의 중심에 두도록 촉구하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구체적으로 바울은 그 메시지가 그들 사이에 풍성하게 거하게 하라고 촉구합니다. "풍성하게"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이러한 지속적인 언급이 피상적이거나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삶에 변화의 힘을 가질 수 있는 깊고 관통하는 묵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는 골로새 공동체 전체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깊이 묵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TNIV가 구절의 기본 구조를 올바르게 가지고 있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바울은 공동체가 다양한 종류의 노래를 통해 서로를 가르치고 훈계하기를 원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노래하기를 원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앞의 명령과 느슨하게 연결되어 그리스도의 말씀이 공동체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두 가지 양식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TNIV의 "가르치고 훈계하는 대로"라는 구조는 다른 많은 번역본에서 선택한 "가르치고 훈계하는" 구조와 마찬가지로 이 점을 잘 드러냅니다. 이 구절의 두 번째 부분과 세 번째 부분 사이의 관계는 훨씬 더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부분의 "노래하다"라는 분사는 두 번째 부분의 다양한 노래 유형에 대한 언급과 함께 그 노래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정보를 추가합니다: "하나님께"와 "너희 마음속에 감사하는 마음으로"입니다.
-> 그리스도의 말씀을 중심으로 바울이 그들에게 권하는 것은 두 가지이다. 1)가르치고 권면하는 것, 그리고 2)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찬양하는 것이다.
'가르치다'는 기독교 진리를 긍정적으로 제시하는 것을 의미하며, '훈계하다'는 진리에서 벗어날 위험에 대한 보다 부정적인 경고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활동이 "모든 지혜로"(엔 파세 소피아)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 즉 가르치고 훈계하는 사람들이 상황과 대상에 대한 통찰력에 따라 적절한 방식으로 수행해야 한다. 이 본문은 회중의 각 구성원에게 다른 구성원을 가르치고 훈계할 책임을 부여합니다.
-> 그들은 서로 진리를 제시하며, 위험한 일에 경고해야 한다. 모든 일은 지혜로!
신자들이 서로 가르치고 훈계하는 방법으로 "시편과 찬송과 성령의 노래"를 식별합니다. 이 경우 "시편"은 성경에 근거한 노래로, "찬송가"는 그리스도에 관한 노래로, "노래"는 "성령의 자극을 받은" 자발적인 작곡으로 식별하는 것이 매력적입니다.
-> 그들은 시편과 찬송가와 노래로 서로를 가르치고 훈계했다.
-> 왜?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또한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로 피차 가르치고 권면한다는 것은 무슨 연결성인가? - 이런 생각이 들기는 한다. 우리들은 시편과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통해 공동체적인 고백을 하고, 이 고백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다. 여기에는 가르치고 권면하는 내용이 들어가있고(수단), 그 감정은 감사함이다(방식(감정)). 하지만 이렇게 연결성으로 꼭 보지 않아도 각자의 요소들이 예배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이 구절은 초기 기독교인들의 예배를 들여다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구절 중 하나입니다. 물론 이 구절은 너무 짧고 구체적인 윤곽이 불확실하여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기에는 부족합니다. 하지만 세 가지 점을 강조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에 관한 메시지', 더 넓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예배 경험의 중심이었다는 점입니다. 둘째, 다양한 형태의 음악이 예배 경험에 필수적인 요소였습니다. 셋째, 가르치고 훈계하는 일은 의심할 여지없이 종종 회중 내에서 특정한 은사를 받은 개인(예: 바울[골 1:28] 또는 에바브라[골 2:7])이나 장로(딤전 3:2; 5:17; 참조: 고전 12:28; 딤후 2:2)의 책임이지만 모든 회중원이 함께 참여했습니다.
->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행동 원리 : 그리스도를 통하여 (양, 중보자)
1)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그리스도의 평강)
2)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라 (그리스도의 말씀)
3)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리스도의 성품과 본성)
-> 구약의 제사장은 중보를 했었어야 한다. 하지만 대제사장이 꼭 필요했음. 이것은 중보자이기는 하지만 강력한 단절을 의미한다. (구약의 제사와 비교하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중보자 그리스도는 어떠한가? 우리들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 화평하게 하셔서, 하나님과 우리가 화평으로 연합하게 하신다. 따라서 우리들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행동 방법 : 우리 (예배 방식, 번제를 하는 행동)
1)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한 몸으로 살아라)
2)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가르치고 권면하고 찬양하기)
3)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삶의 모든 부분에서)
-> 따라서 우리의 삶은, 우리의 모든 행동은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삶으로 예배를 드린다, 감사의 제사를!! 모든 삶에서 특별히 그러하다.
행동 감정 : 하나님께
1)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감사)
2)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로 찬양)
3)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직접 감사)
-> 이렇게 분류해본다면, 그리스도 안에 연합하여 하나님과 화평하게 된 우리의 삶의 전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의 영으로부터 시작하여, 우리의 삶, 또한 감정까지 정리해놓은 것과도 같아보인다.
=>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삶”이라는 방식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 적용점 : 우리의 모든 행동이 제사다!! 우리는 모든 행동을 통하여 감사의 제사를 드리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자! 삶의 예배!
제목 : 감사의 제사
17절
바울은 공동체 생활에 초점을 맞춘 이 권고의 단락을 일반적인 명령으로 마무리합니다: 그리고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십시오. 이 본문에서 그리스도인의 행동의 시금석이 주 예수님인 것처럼, 여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주 그리스도 예수를 받았으니, 그 안에서 여러분의 삶을 계속 살아가십시오."
-> 권고를 통해 단락을 마무리함.
"말"(로고스)과 "행동"(에르곤)의 조합은 세상과의 상호작용의 총체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방법입니다.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을 포함한 모든 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역에서 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고려에 따라 지배되어야 합니다. 예배 모임이 "그리스도의 메시지"(16절)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것처럼, 모든 삶은 예배의 경험으로 보아야 합니다(참조: 롬 12:1-2).
-> 우리의 삶의 모든 부분(말&행동)이 예배의 경험이다.
"주님의 이름으로"라는 문구는 다양한 뉘앙스를 지니고 있지만, 종종 주님의 본질이나 성품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의 이름으로" 모든 일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의 이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주님의 본성과 성품에 부합하는 행동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신자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때 그들은 그분의 권위 아래 들어가고 그분의 성품을 따르도록 부름받으며, 참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세례를 받습니다(갈 3:27, 롬 6:3). 우리는 그 주님을 입어 공동체로서 다름 아닌 예수님이신 '새로운 자아'가 되었으므로, 이제 우리 존재의 총체는 예수님을 항상 염두에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 그리스도와 연합했기에 그리스도의 성품과 본성으로…
결론의 참여절은 감사가 그리스도인 순종의 중요한 요소인 동시에 그 순종의 중요한 원천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1:11; 2:7; 3:15, 16; 4:2 참조). 여기에는 태도 이상의 것이 요구됩니다. 마음속의 감사(16절)는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께 드리는 실제적이고 언어적인 감사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어떤 해석자들은 그리스도가 감사의 근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선택한 구성을 존중해야 합니다: 감사하는 것은 그리스도 '때문에'(비난이 붙은 디아)가 아니라 그리스도 '통해'(속격이 붙은 디아) 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가 그리스도를 세상과 신자에게 하나님이신 모든 것의 중보자로 지속적으로 제시하는 방식에 따라, 그리스도는 아버지께 대한 우리의 감사를 중보합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가 우리의 감사를 하나님께 '전달'한다고 구체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이러한 개념이 두드러지지 않으므로 그리스도를 일반적으로 (거짓 선생의 천사들과는 대조적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분으로 생각하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감사할 수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하셨던 감사의 삶이, 그와 연합함으로 우리의 삶에도 나타난다는 것이 아닐까? 무슨 일에도 주 예수의 본성과 성품으로 하고, 매사에 그렇게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Christ-centered/ 생각해보면 그리스도의 삶은 참으로 감사할 수가 없는 삶이었다. 많은 비방자들이 있었고, 십자가라는 억울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감사하는 분이었다. 범사에…
F.C.F./ “긍정의 힘” 같은 긍정 에너지가 감사가 아니다. 기독교는 덮어두고 감사하라는 식의 메시지가 많았다. 그런 것은 감사가 아니다. 우리는 바울이 감사하라고 하는 상황이 쉽지 않은 상황임을 알아야 한다. 지금 사람들끼리 분열이 있는 상황에서 감사하라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덮어놓고 감사가 아니다.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중심으로 진리를 제시하고 안 좋은 것을 권면하며 그렇게 하라고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찬양하고 또한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착한 멍청이”처럼 계속 웃고 감사하라는 것이 아니다.
적용/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은 항상 웃을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항상 감사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이런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은, 모든 말과 행동, 우리의 모든 삶에서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추가로 말하자면, 15절과 16절과 17절에 계속해서 감사가 나오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핵심어들은 “그리스도의 평강, 그리스도의 말씀, 그리고 무엇을 하든지”로, 삶의 전반적인 부분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에 특징지어지는 것들이 바로 “감사”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삶이 감사로 특징지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가 하신 일 덕분에 감사할 수 있는 것인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우리의 마음이 감사로 가득차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우리의 삶은 감사로 가득하게 된다. 새 사람의 특징은 감사다.
-> 생각해본 3가지의 가능성 (확실한 것은 새 사람의 특징, 신약의 새 언약 백성은 감사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 그 은혜 덕분에 우리 생활 전반에 감사한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분의 성품으로 인해 감사하게 된다.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영역으로 우리는 들어오게 되었는데, 이 영역 자체를 우리가 감사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
-> 그리스도를 “통하여”는 중보의 개념이지만 오히려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우리들은 하나님께 직접 감사를 전달할 수 있다고 해야 하는가? 이것은 평강을 위하여 한 몸이 되었다는 해석하고도 잘 맞을 수 있다. 우리들은 서로 한 몸이 된 것이고 그 근거는, 골로새서 1장 20절에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을 자신과 "화목하게" 하셨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만물과, 또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들은 이러한 확장성과 개방성에 따라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내 생각에 우리의 생활 전반에 걸쳐서 그리스도의 평강이 나타나고, 그리스도의 말씀에 거하고, 무엇을 하든지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는 가운데 감사가 나타날 수 있는 것은, 결국 종국적으로 하나님과의 개방된 바울의 시점을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서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었다! 이러한 직접적 연결성과 긴밀성을 인하여서 우리들은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의 감사가 그리스도를 통한 것이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며, 우리 생활 전반에 나타나는 것이다. 이제는 새 시대가 되었다. 하나님께 직접 감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개방성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성령의 내주,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특징에서도 의미가 통한다. 우리가 모든 생활 전반에 걸쳐 감사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설교 팁 : “통하여”를 클루로 제시,
골1:20
골로새서 1:20 NKRV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감사가 생활 전반에 나타나는 이유 - 하나님과의 화평과 개방성.
우리가 감사해야 할 이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었기 때문에! 만유의 주시다 그분은! 이것이 명백하게 그리스도 “때문에”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감사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존전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 놓으신 중재자이신 그분을 통하여 지금 하나님께 감사가 전달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하나님께로의 직접적인 접근을 가로막았던 휘장을 찢어놓았으므로, 독자들은 확신을 가지고 이 감사의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 P. T. O’Brien
-> 또한 17절에서만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아버지-아들의 관계가 회복되었다. 화평하게 되었다! 우리들은 이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럼 감사한가? 물론 너무 감사하지만, 하나님과 직접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의 이유가 되는가?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역 때문에보다 더 감사할 이유가 된다는 것인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라.
[NIV 골로새서] - 데이비드 갈란드
15절의 핵심어는 “그리스도의 평강”, 16절은 “그리스도의 말씀”, 17절은 “주 예수의 이름”이다.
그리스도의 평강은 두 가지 결과를 가지고 있다. (1) 그리스도의 평강은 그의 몸 안에 관계들을 특징지어야 한다. 교회 안에 통합적인 조화는 필수적이다. (2) 그리스도의 평강은 감사를 하게 한다. 신자들은 억압적인 문화로부터 탈출하여 자유와 기회의 땅에서 피난처를 찾은 난민처럼 감사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평강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있는 곳에 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 그것은 교회의 가르침과 권고를 인도하는 하나님의 지혜의 풍성함을 포함한다. 몇몇이 아니라 모든 교회가 그 책임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 감사는 “시편, 찬송가, 노래들”로 표현된다. 이러한 찬양들이 그들의 예배 가운데 중심적이었다.
“무엇을 하든지…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라는 마지막 권고는 2:6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라고 한 것을 상기시킨다.
공동의 예배만이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감사도 그렇다. 찬양과 감사는 그리스도인 삶의 모든 것을 포함하는 구분적인 특징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살고 그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되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는 모든 것들은 그의 부르심, 그의 명령, 그의 약속들, 그의 자양을 아는 것에서 행해져야 한다.
-> 우리들은 여기서 중요한 것을 하나 알 수 있다. 그것은 우리의 감사의 근원이 그리스도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안에 있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평강이 있어야 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풍성히 거하며(피차 가르치고 권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감사할 수 있다.
[NIGTC 골로새서] - 제임스 던
15절
바울 사상의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랑의 긴밀한 보완은 평화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평화는 1:20에서 이미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평화의 상태를 염두에 둔 것이기 때문에 단순히 영적이거나 개인화된 느낌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골로새 그리스도인들의 확신과 평온은 그 승리와 화해의 반영이었습니다(1:20-22; 2:15). 그들은 이 일에 "부름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골로새 신자들이 마음에서 경험할 수 있었던 평화는 이미 오실 메시아의 시대에 그들이 메시아의 백성에 속해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주어가 "너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평화"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골로새인들이 성취해야 할 것이 아니라 그냥 두어야 할 것, 즉 다음 절에서처럼 평화가 그들이 응답할 수밖에 없는 부름인 것처럼 통제하고 조작하려는 모든 시도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평화가 결정자가 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것에 대한 지식과 그 결과 신자들이 누릴 수 있는 내면의 평온한 고요함, 어려운 결정에서 어떤 과정을 따라야 하는지, 공동체 관계의 긴장(3:13 참조)이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은유는 매력적인 비유입니다. 주로 개인적인 관계에 관한 문제(이 구절의 주제)에서는 "화평을 이루는 것을 추구"(롬 14:19)하는 것이 좋은 규칙입니다.
-> 그리스도와 연합하였으니, 내가 아니라 그분의 평화가 주장하게 해야 한다. 개인 관계에서는 화평하기.
골로새 교인들이 "부름"을 받은 것은 바로 이러한 평화를 위해 중재하는 것입니다. Καλέω는 바울의 또 다른 특징적인 용어입니다. 일상적인 연설에서는 식사 초대나 법정 소환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경우에는 평화를 이룬 자(1:20)가 그 평화로, 이전 전쟁의 난민과 희생자들을 그의 죽음이 쟁취한 평화의 영역으로 부른다는 소환입니다.
평화와 부름 받은 백성에 대한 이야기에 내포된 공동체적 차원은 그 부름이 '한 몸'을 염두에 두고 있으며, 한 몸은 또한 그리스도의 평화가 실현되는 장이라는 점을 상기시킴으로써 더욱 강화됩니다. 그 강조점은 일치의 은유로서의 몸, 정확하게는 서로 다른 부분의 상호보완성과 통합된 전체로 구성된 일치로서의 몸입니다. 초기 바울서신에서와 마찬가지로, 주로 (골로새에 있는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서의 지역(골로새) 교회, 즉 예배를 위해 모이는 가정 교회에 대한 생각인 것 같습니다(3:16).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의 우주적 몸으로 간주되는 교회(1:18a, 24; 2:19)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데, 이 하나됨은 그 자체가 그리스도의 평화의 효과이며 그 평화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습니다(따라서 다시 엡 4:3).
-> 그리스도의 평화가 있기에 한 몸이 되라고 할 수 있지만, 한 몸이 되기 위해 그리스도의 평화가 필수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실현되는 장이 한 몸이다.
감사하는 정신이 골로새 그리스도인의 기본 태도여야 한다는 추론은 분명합니다. 3:13-15의 주제인 타인에 대한 용서와 사랑, 그리스도의 평화, 하나님에 대한 감사는 서로 얽혀 있고 상호 의존적이며, 어느 하나 없이는 다른 주제들도 지속될 수 없습니다.
->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우리 몸에는 평강, 용서, 감사 등이 나타나게 된다.
16절
바로 앞의 권고는 특별히 골로새 신자들이 직면한 상황 때문에 생긴 것 같지는 않습니다(대조 3:1-4). 그것은 모든 시대의 모든 교회에 적합하고 관련성이 있습니다.
기독교 예배에서 찬양하는 요소는 전혀 놀라운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말씀", 가르침과 훈계, 찬송과 감사 등 처음부터 지금까지 전형적인 기독교 예배의 특징이었던 요소들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구절은 초기 기독교 예배의 내용과 성격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하고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구절 중 하나입니다.
-> 사실 보면 말씀, 가르침과 훈계, 찬송과 감사는 기독교 예배의 특징이다! 구절 자체가 예배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일 수도?
그렇게 볼 때에 15-17절이 그리스도의 평강, 말씀 중심의 예배, 예수를 통한 삶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나?
왜 다 감사로 링크가 되어있지?
Χριστοῦ는 신약성경에서 여기(히 6:1에서 한정된 형태로)에만 나오지만 "주의 말씀"(살전 1:8; 살후 3:1; 행 8:25; 12:24 등)과 동등한 의미로 사용됩니다. 따라서 그것은 (그) 그리스도가 내용인 말씀(복음)과 (그)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말씀(예수 전통)을 모두 나타낼 수 있으며(그래서 대부분;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임재의 방식", 울터 189), 속격 형태가 양자택일(객관적이거나 주관적인)에 강요될 이유가 없다. 이것은 다시 2:6-7의 이중 강조와 일치합니다.
랍비들이 나중에 지적한 것처럼 집에 거하는 사람은 지나가는 손님이 아니라 집의 주인이라고 합니다(Str-B 3.239). 3:15에서와 같이 명령의 주체는 독자가 아니라 그들이 마음을 열고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하는 대상입니다(참조, Lohmeyer 150). 이러한 맥락에서 ἐν ὑμῖν은 "너희 가운데"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이는 예배와 교육을 위한 골로새 그리스도인들의 공동 모임에서 설교/교육의 요소를 나타냅니다.
모인 회중 안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나누는 공동체적 맥락이 예상되는 것은 다음 절에서 말씀의 "내주"가 더 설명되거나 상호 보완적인 활동이 표시됨으로써 확인됩니다: "모든 지혜로 [14절 참조] 서로 가르치고 경고하며". 1:28("모든 사람에게 경고하고 모든 지혜로 모든 사람을 가르치라")의 강한 반향은 결코 우연이 아닐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1:28에서는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적 사명을 (적어도 디모데는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임무로) 설명한 반면, 여기서는 경고와 가르침이 기업의 책임으로 간주된다는 것입니다(Fee 649). 실제로 바울이 서신을 보낸 교회의 구성원들이 서로를 가르치고 훈계할 상호 책임을 인식해야 한다고 얼마나 강조했는지는 바울서신에서 눈에 띄는 특징입니다.
-> 회중 안에서 말씀이 나눠질수록, 그리스도는 강하게 내주하신다. 또한 이 가르침과 권면은 모든 사람들의 책임이다.
기독교 예배의 세 번째 요소는 노래입니다. "시편"은 성경(특히 다윗의 시편)에서 직접 뽑아낸 찬양을 가리키는 반면, "찬송가"는 더 뚜렷한 기독교 작곡(이사야의 "새 노래", 사 42:10?)이라는 것입니다. 42:10?)
마지막 절은 아마도 "감사"(χάρις, 롬 6:17; 7:25; 고후 2:14; 8:16; 9:15; BAGD 5절, 여기서는 모든 번역에서 대부분 "감사"로 번역)의 중요성을 다시 강조하고 있는 듯합니다. 영감과 감사는 함께 가는 것이므로 그러한 찬양이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자연스러운 표현이라는 것은 전적으로 예상할 수 있습니다. "너희 마음속에(또는 함께)"라는 말이 추가된 것은 단순히 입술로만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개인적인 경험의 깊이에 뿌리를 두고 그 근원에서 솟아나는 예배, 즉 마음의 예배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17절
동시에, 이렇게 칭찬하는 찬양과 경배, 감사의 태도는 단순히 내면의 태도이거나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를 위해 모일 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는 모든 일, 즉 말과 행동에서 동일한 태도가 바탕이 되어 표현되어야 합니다. 예배와 일상 생활 사이에는 단절이 있을 수 없으며, 오히려 일상 생활 전체가 동일한 정신, 즉 "여러분의 영적 예배"(롬 12:1-2)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주님이 "주 예수"라는 사실은 예수에게 귀속된 κύριος의 중요성을 더욱 잘 보여줍니다. 예수가 야훼의 역할을 대신한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 아니라(1:2 및 3 참조), 오히려 하나님이 자신의 주권적 역할을 그리스도와 공유하셨다는 것을 빌 2:9-11고후 3:11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는 아마도 기독론만큼이나 기독교적일 것입니다. 고대 지중해 세계의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인 것은 그분만큼이나 자신들을 식별하는 방법이었고, 이로써 그들은 이 주 예수와 관련하여 알려질 준비가 되어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라벨링의 가벼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름'은 고대 세계에서 한 사람을 알리고, 그 사람의 성격을 드러내며, (우리가 말하듯이) 다른 사람을 '파악'할 수 있는 주요한 방법 중 하나였습니다(비텐하르트, TDNT 5.243, 250-51, 253-54 참조) 그러므로 주 예수님을 참조하여 자신을 식별한다는 것은 그분의 명성과 권능에 모든 것을 거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으로서도 예수님의 역할이 단순히 중보자, 즉 누구(διʼ αὐτοῦ)로 인해(διʼ αὐτόν) 감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통해(διʼ αὐτόν) 감사하는 것(오브라이언, 골1:212-13; 1:3에 다시 참조)임을 다시 한번 주목합니다. 사실, 기독교의 메시지가 골로새서의 천사 숭배와 가장 직접적으로 연관된 것은 바로 이 (상대적으로 덜 고귀한) 역할, 즉 "주 예수의 이름으로" 그리고 "그를 통해" 아버지 하나님께 효과적인 예배를 드린다는 기독교의 주장입니다.
세 번째 세 구절(3:15-17)에서 감사의 중요성을 상기시키는 것은 예배와 제자도의 삶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정신이 얼마나 근본적인지를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롬 14:6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께 감사하려는 의식적인 관심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그 행위를 비난할 때에도 그 행위의 수용 가능성에 대한 귀중한 시험이 될 수 있습니다.
[WBC 골로새서] - P.T. O’Brien
15절
여기서 평강은 독자들이 서로간에 관계를 맺고 어울릴 때 그리스도의 평강이 그들의 삶을 완전히 주장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평강”은 그분이 구현하고 있고 가져다 주는 평강을 지칭한다. 그분은 믿는 자들에게 평강을 주신다. 사실상 그분 자신이 그 평강이시다(엡2:14).
“주장하다”는 신약성경에서 여기에만 나타나는데 원래 경기에서 상급을 주관하고 수여했던 심판관의 기능을 가리켰다. 하지만 이 동사는 주로 “재판하다, 결정하다, 주관하다, 통치하다”라는 보다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너희 마음을”. “마음”은 관례적으로 의지, 감정, 사상 그리고 애정의 원천으로서 한 사람의 인격의 중심을 나타내는 구약성경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리스도 자신이 그들 가운데서 나타나고 다스리셔야 할 것이다.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골로새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평강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해지고 있으므로, 후자의 표현은 새 사람이 지금 살고 있는 영역 혹은 공간을 지칭해야 한다. “한 몸으로”는 믿는 자의 부르심의 목적을 가리키지 않고 소명의 방식 혹은 양식을 가리킨다. 그들이 “한 단일체의 몸의 지체들로” 부르심을 받은 것은 그리스도의 평강으로의 부르심이다. 따라서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들(1:20; 21), 곧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분과 화평케 된 사람들은 그들 자신 가운데 있는 평강을 나타내 보여야 한다.
-> 그들이 가지고 있는 평강은, 또한 한 몸에서 나타내야 할 평강은, 1:20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평케된 그 화평이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몸이 이 기관임을 암시하고 있으며 평강의 장소로 묘사했다는 것은 가능하다. 그리스도는 몸의 머리이시며 평강과 화목의 기관이시다. 그는 거기서는 세계적인 상황에서 나타난 모습이고, 여기서는 특별한 교회와 그 교회의 문제들을 위하여 현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바울 서신에서 유카리스테오라는 단어 그룹은 통례적으로 감사로 외적인 표현을 하는 사의를 나타낸다. 바울 서신에는 감사의 공적인 면에 대한 강조가 들어 있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 안에서 은혜롭게 행하신 일을 언급함으로써 다른 그리스도인들 역시 그분을 찬양하도록 자극받게 되었다.
이곳 15절에는 감사의 근거들이 나타나 있지 않지만, 앞에서 본서의 독자들은 흑암의 권세에서 구원하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들어가게 하신 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권고를 받은 바 있다(1:12-14).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가져다 주시는 하나님의 능하신 일을 크게 강조하고 있다. 3:15에서 그 몸에 참예한 사람들에 대해 되풀이하여 가르쳐진 그러한 감사가 독자들이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는” 것과 같이 드려질 것이다. 그러나 감사가 :범사에”(살전 5:18) 드려져야 하는 것처럼 이렇게 연합된 경우에만 해당되지 않고(17절에서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감사는 모든 활동이 동반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히 받은 사람들의 적절한 반응이다(엡 5:18-20).
-> 감사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통해 하신 일에 대한 감사이고, 또한 이 감사는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항상 해야할 적절한 반응이라는 것이다.
16절
골로새인들은 그리스의 평강이 그들의 삶을 주관하게 하라는 권면을 받았던 것처럼, 이제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들 가운데 풍성하게 거하도록 하라고 권면을 받는다. “그리스도의”라는 소유격적 소유격적 표현은, 그리스도에게 중심을 두고 있는 메시지 곧 에바브라가 처음으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한 때부터 골로새 교인들에게 와서 그들의 삶 속에 굳건히 자리를 차지했던 진리의 말씀을 가리키는 목적어일 것이다. 그러한 말씀을 규범적이면서도 그들의 삶을 지배해야 한다.
-> 우리는 감사를 그리스도와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 말씀을 받아 살아가는 우리에게 감사가 있는 것이지, 감사는 하나의 인생을 대하는 긍정적 태도로 우리에게 주어질 수 없다. 우리가 항상 감사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그 말씀은 그들 안에 풍성히 거해야 한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 자신이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시게 될 것이며, 성령께서 신자들 가운데 거주하신다. “너희 속에”는 “그 말씀이 영속적인 활동과 다스림의 본거지로서 자리를 가지고 있는 하나의 집에 비유되는 너희 교회 전체 가운데”를 의미한다. “풍성히”는, 복음이 그들의 삶 가운데서 그 은혜롭고 영광스러움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풍성한 내주는 그들이 함께 모여 그들에게 전파되고 설명될 때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듣고 그 권위에 복종할 때 일어날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이 믿는 자들 가운데 내주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말씀”도 그들 가운데 풍성히 거하여 큰 축복을 가져다주어야 할 것이다.
-> 말씀이 그들 안에 풍성히 있어야 한다. 그래서 성령의 내주가 있고 그리스도가 그들 안에 있을 것이다.
“가르치며 권면하고” 어느 경우든 모든 지혜로 가르치고 권하는 것은 말씀의 내주로부터 생겨난다. 이는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공적으로 선포하는 일이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그러한 가르침과 권면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너희 자신들”은 회중의 지체들이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 이 상호 교육과 경고는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라는 수단을 통하여” 일어나야 한다. 만일 사도가 교회 모임 가운데서 상호 교훈을 위하여 응답송이나 혹은 독창을 염두에 두었다면 서로간의 가르침과 권면은 당연히 가능했을 것이다. 이 세 개의 시, 찬미, 노래는 함께 “성령께서 감동하시는 모든 범위의 노래”를 묘사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공동체의 지체 가운데 내주하고 그들을 주장하는 것처럼, 그들 역시 성령의 감동을 받은 시와 찬미와 노래로 가르치고 권면한다.
“감사함으로” 감사, 곧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우리의 정당한 반응인 감사를 또다시 의중에 두고 있을 가능성. 15절에서 “마음”은 한 사람의 전인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었다. “사람은 입술로만 하나님을 찬양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전인이 찬양의 노래로 충만되어야 할 것이다.”
17절
모든 행동은 주 예수에 대한 순종 가운데서 행해져야 하며,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가 동반되어야 한다. 만일 독자들의 삶 속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거하는 것이 골로새 교인들이 하나님께 감사의 노래를 부를 때 상호간의 가르침과 권면 가운데 나타나야 한다면, 그것은 또한 이러한 포괄적인 방법으로 이 활력 넘치는 임재를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모든”은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가 주 예수에 대한 순종 가운데 생활화되어져야 한다는 요점을 강하게 잘 인식시키고 있다. 자신의 모든 행동에 있어서 믿는 자는 “영적 예배”가 되도록 해야 한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가 예수의 이름 아래 있다. 당신의 모든 행동이 하늘을 위한 행동이 되게 하라. 그리스도인이 되면서 신자는 예수를 주님으로 부르며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로 들어간다. 그는 전적으로 그분에게 속한다. 그러므로 그가 말하거나 행하는 모든 것은 예수께서 자기 주님이시라는 사실에 비추어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의 행실은 예수님의 성품과 전적으로 일치해야 하며, 또한 이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 사람 안에 그리고 회중의 지체들 안에 풍성히 거할 때 일어나게 된다.
“그를 힘입어 감사하라” 감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버지께 드려지면서 모든 행실과 동반하여 드려져야 한다. “그를 통하여”는 그리스도께서 감사의 중재시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아버지의 존전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 놓으신 중재자이신 그분을 통하여 지금 하나님께 감사가 전달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하나님께로의 직접적인 접근을 가로막았던 휘장을 찢어놓았으므로, 독자들은 확신을 가지고 이 감사의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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