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지된 장_이사야 53장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110 viewsNotes
Transcript
하나님이 전한 복음
하나님이 전한 복음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 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그 내시가 빌립에게 말하되 청컨대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없음) 이에 명하여 수레를 멈추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베풀고
에디오피아내시가성경을읽고있는데, 빌립은 바로알아들었습니다, 그가 이사야서를 읽고있다는것을. 32절을 보면,그가읽던 대목은 이사야서 53장 입니다. 이 말씀에서 시작하여 빌립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바로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야 라는 소식을 전하였고, 그 결과로 이 사람은 바로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엠마오로 가던 두 명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설명’ 하셨을 때도, 이 대목을 빼놓으시지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사야서 52장 13절부터 53장 끝까지 이사야가 예언한 내용을 읽어 보면, 마치 복음서를 요약해 놓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이 부분을 ‘이사야가 전한 복음’ 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마태가 전한 복음, 마가가 전한 복음, 누가가 전한 복음, 요한이 전한 복음에 이어 다섯 번 째 복음서라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이 복음서를 쓴 이사야는 예수님이 오시기 약 7백년 전의 사람입니다. 그가 미리 와서 예수님을 일생을 다 들여다 본 것 같이 쓴 것과 이사야서 53장이 다 과거형 시제로 기술되어 있는 것은 전혀 무관하지 않습니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시기 전에도 계셨고, 시간도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시간에 제한을 받지 않으십니다. 그가 작정하셨으니 미리 아시는 것이고, 시간 밖에서 보시고 계시니 미리 아시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계시하셨고, 그것을 본 이사야는 마치 과거에 일어난 일처럼 앞으로 오실 예수님에 대하여 예언하였습니다.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 그가 나라들을 놀라게 할 것이며 왕들은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그들에게 전파되지 아니한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이 세 구절은 이어져 오는 53장을 소개하는 식의 머리말입니다. 14절을 보면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구타를 당하신 예수님의 얼굴을 연상케 합니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변방인 나사렛 출신의 목수였고, 종교지도자 집안 출신도 아닙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빌라도 앞에서 그리고 헤롯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지 않으시고 잠잠하셨습니다. 그의 고난과 죽음은 대속의 고난이었습니다.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그는 두 강도와 함께 처형을 당하셨고, 부자인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장사지낸 바 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성경을 조금만 아는 자도 이 대목을 읽어주면 누구든지 예수님을 떠올릴 것입니다. 어떤 전도자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게 이 부분을 히브리어로 읽어보게 하고 그들의 반응을 기록한 동영상이 여럿 있습니다. 일반적인 상식과 다르게 유대인들 대다수는 무신론자입니다. 종교적인 유대인들도 이사야서 53장을 본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매주 안식일마다 그들은 회당에서 구약성경을 읽는데, 반드시 모세오경 일부분을 읽고 또 기타 부분을 읽습니다. 그런데 이사야서 52장 다음 순서는 54장입니다. 52:13-53:12은 건너 뜁니다. 53장은 유대인들에게 사실 상 금지된 장입니다. 이 대목이 이사야서의 일부인 것은 부인하지 않고 메시아에 대한 예언임을 부인하지 않지만 사실상 금지된 장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뭐라고 말할 수가 없으니까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 대목을 읽는다면 서구사회에서 사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사야서에 왜 예수 얘기가 나오지?” 라고 묻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사야서에는 여러 예언과성취가나타납니다. 아시리아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하여, 북왕국 이스라엘과 시리아가 연합하면서 남왕국 유다에게 함께 할 것을 요구하였을 때, 유다가 이런 제안을 거부하자 두 나라가 연합하여 유다를 공격하던 시기에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아하스 왕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르신과 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
대저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며 육십오년 내에 에브라임이 패망하여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할 것이며 에브라임의 머리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머리는 르말리야의 아들이니라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대로 북왕국 이스라엘과 시리아가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이제 남왕국 유다도 멸망 당하기 직전의 위기에 직면해 있던 시기였을 때, 이사야는 아시리아가 곧 바벨론에 의해 멸망 당하고 바벨론이 패권국가가 될 것이며, 유다의 백성은 바벨론의 포로가 된다고 예언합니다. 아시리아가 절대 패권국이던 이 시절에 그런 말이 믿겨지겠습니까? 더 나아가서 그 바벨론이 메데에 의해 망할 것이고, 메데의 왕 고레스라는 자가 나타나서 유대인들의 목자가 되고, 그들을 고국으로 돌려 보낼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내 목자라 그가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네 기초가 놓여지리라 하는 자니라
여호와께서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고레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그의 오른손을 붙들고 그 앞에 열국을 항복하게 하며 내가 왕들의 허리를 풀어 그 앞에 문들을 열고 성문들이 닫히지 못하게 하리라 내가 너보다 앞서 가서 험한 곳을 평탄하게 하며 놋문을 쳐서 부수며 쇠빗장을 꺾고 네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 네 이름을 부르는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을 네가 알게 하리라 내가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자 이스라엘을 위하여 네 이름을 불러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 띠를 동일 것이요
당시에 메데는 분열되어 있는 나라 이었고 약한 나라였습니다. 이런 나라가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누가 생각할 수 있었겠습니까?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요. 이런 사건들이 실제로 일어나기 약 150년 전에 이렇게 구체적으로 예언을 했으니, 계몽주의 시대 이후 학자들은 “에이, 그럴 리가 없어. 이름까지 예언했다고? 나중에 삽입한 이야기일거야. 이사야서는 이사야만 쓴 것이 아니고, 후대의 사람들이 다음 세기 그리고 그 다음 세기에 추가로 쓴 것임에 틀림이 없어” 라고 주장하였고, 또 많은 학자들이 이런 주장에 동조하여, “맞아, 이사야서를 보면 문체가 전반부랑 후반부가 다른 걸 볼 수 있어” 이렇게 동조하였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55년간 활동한 선지자의 문체가 수 십 년간 꼭 같은 문체로 써야 합니까? 다른 부분이 있을 수도 있지요.
1-39장은 언약의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회복되기 전에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민족의 죄 문제를 지적합니다. 1-39장에서 강조된 심판은 40-66장에서 강조된 죄의 용서와 사면으로 이끄는 정화하는 힘입니다.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의 구원은 종 된 나라가 할 수 없는 일을 성취할 '이상적인 종', 즉 메시아를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하나님의 종은 정복자이기 이전에 대속자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정복자이기만을 기대했지, 고난 받는 종이라는 것은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이어서40~66장은 죄로부터의 구원 그 이상을 강조합니다. 이 장들은 우주의 변화, 주님의 창조 질서의 회복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공교롭게도 구약은 39권, 신약이 27권인 것처럼, 이사야서는 39+27=66장입니다. 후반부의 시작은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 즉 세례자 요한의 외침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이 예언은 4복음서의 초입 마다 그대로 인용이 됩니다. 그리고 이사야서 끝에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예언이 나옵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는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계시록의 거의 끝에 나오는 이 말씀이 주님이 이 땅에 오시기 약 700년 전에 예언되어 있었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이사야서의 후반부가 복음서들의 시작부터 계시록의 끝장까지 다 포함하였습니다. 이래서 이사야서를 성경 전체의 축약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서 53장을 비롯한 여러 예언의 내용이 너무 정확하니까, 17세기에 소위 학자라 하는 사람들 중에서 53장은 후대에 썼을 것이 틀림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 아무리 예언이라도 이렇게 정확하게 예언되었을 리가 없다. 이런 예언들은 사실 후대의 사람들이 역사적 사건을 보고 후대에 기록한 것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입니다. 2천 3백년 이상 이런 주장을 한 사람들이 없다가 갑자기 이런 사람들이 나왔고, 또 많은 사람들이 동조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사야서 53장도 1세기 이후에 삽입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주장이 나왔을 때 가장 오래 된 이사야서 사본이 주후 900년 경 것이니 그런 말이 나올만도 합니다.
그런데 B.C. 150년 경에 헬라어로 번역된 70인역 구약성경에 이사야서 53장이 그대로 있었습 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유대인 공동체에서 이 성경은 널리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에디오피아로 돌아가던 고위관료가 마차에서 읽던 말씀도 이사야서 53장입니다. 후대에 추가된 것이 아닌 것 맞지요? 1947년에 사해 근처의 어느 동굴에서 어떤 목동이 고대 파피루스를 발견하였습니다. 사해사본은 주전3세기부터 주후1세기의 쿰란공동체가 남긴 사본들입니다. 이중에 B.C. 150년경의 이사야서 사본이 통째로 발견되었습니다. 조작을 주장했던 어떤 학자들의 주장처럼 이사야서 일부만 발견되거나 조각조각 발견된 것이 아니라 통째로 한 책으로 발견되었습니다. 53장도 물론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주님이 오시기 약 150년 전의 구약성경에 이사야서에53장도 그대로 있습니다. 이전에는 가장 오래 된 이사야서 사본이 주후 9백년 경이었는데, 이제는 주전 150년 경의 사본이 발견되었으니 조작을 주장하던 주장은 부인된 것 맞지요? 예수님의 생애를 본 후대의 사람들이 추가한 것 아니지요? 예언이 너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니까, 너무나 똑같이 그 예언들이 성취되었으니까 그것은 조작된 것이 틀림 없다는 주장은 부인됩니다.
자연세계에서 경험하는 것 이상의 어떤 것도 믿지 않는 철학적 자연주의를 고수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초자연적인 것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철학적 자연주의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자연적인 것으로 설명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우주와 이 지구의 모든 생물들의 존재도 자연적으로 생긴 것으로 설명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우주가 그리고 모든 생물이 우연의 산물로 저절로 존재하게 되었다고 설명하지 않는 모든설명을 그들은 거부합니다. 이런 부당한 행위에 대하여 필 존슨은 [Darwin on Trial] 이라는 책을 써서 고발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법정에서 대립되는 주장을 쌍방에서 치열하게 펼치는데, 재판장이 한 쪽 주장은 다 증거로 채택하지 않는 법정이 있다면, 그 법정은 공정한 법정입니까? 인류의 기원에 대하여, 우주의 기원에 대하여 여러 주장을 펼치는데, 자연주의적 주장 즉 만물은 스스로 생긴 것이라는 설명 모델이 아니면 어떤 설명도 꺼내지 못하게 한다면 그게 공정한 재판이겠습니까?
J. Warner Wallace라는 형사가 평생 미제사건만 전담하고 살다가, 친구의 권유로 교회에 방문한 후, 성경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원래 무신론자 이었고, 그의 직업 답게 그는 물적인 증거 외에는 아무 것도 믿지 않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성경 안에서 깊은 것을 발견하면서도 복음서에 나오는 증언들이 과연 진실한 것인지 미제사건을 수사하는 기법으로 신약성경의 증언들을 분석을 했습니다. 물적 증거가 명확할 때는 수사가 훨씬 쉽지만, 물적 증거는 없고, 증인들의 진술만이 있을 때는, 그 증언들이 믿을 만한지 분석하는 도구가 있다고 합니다. 그는 이런 분석도구를 활용하여 복음서 안에 나오는 다양한 증인들의 증언들을 분석했습니다. 그들이 꾸며낸 이야기는 아닌지, 집단적으로 망상에 빠져서 한 얘기는 아닌지 분석을 하였습니다. 증언들마다 기술하는 내용에는 차이가 좀 있었지만, 그들이 증언하는 핵심내용은 일관되고 진실하다는 것을 그는 발견했습니다. 그의 분석에 관심이 있는 분은 Cold-Case Christianity 라는 책을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이 저자도 지적한 것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은 모두 자연주의적인 증언 외에는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 실험으로 재현할 수 없는 것은 부인하는 사람이 한반도에 삼국시대, 고려시대가 있었다는 것은 부인하지 않습니다. 2차대전 중에 홀로코스트가 있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목격자들의 증언이 믿을 만할 때는 믿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경의 수 많은 증언들은 왜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까? 자연주의적 설명만 받아들인다면, 하나님의 천지창조, 하나님의 성육신,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오병이어의 표적,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있었던 수 많은 표적 들이 다 부인됩니다. 성경 만큼 진실한 증언이 어디 있습니까? 성경 어디에도 어떤 인물을 영웅으로 만들고 신화화 한 곳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허물도, 야곱의 허물도, 삼손의 허물, 다윗의 범죄,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의 배반 등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도 미화시킨 사례를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인류의 어떤 고대 문헌에서도 이렇게 진실한 증언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은 어느정도로 자신들의 증언이 진짜임을 증명했냐 하면, 그런 증언들 때문에 목숨을 잃는 순간까지 증언을 번복하지 않을 정도로 증언했습니다. 그런데 그 증언들을 부인한다면 대체 세상에 믿을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세상에 이보다 더 진실한 증언을 찾아볼 수 있습니까?
고대 문서 중에 사본이 남아있는 것들과 신약성경 사본을 한 번 비교해 보겠습니다. 신약성경은 헬라어로만 되어있는 사본이 5,700 개 이상 남아 있습니다. 그중 가장 오래된 사본들은 2세기 초 사본들입니다. 이 중 10 내지 15 개의 사본은 신약성경이 완성된 후 100년 안의 사본입니다. 원본과 사본 사이의 갭이 다른 고대문헌과 비교할 때, 비교할 수 없이 짧습니다. 라틴어, 콥틱어, 시리아어, 아람어, 그루지아어, 고트어, 아랍어 등으로 번역된 고대 사본도 2만 내지 25,000 개 정도 사본이 발견됩니다. 교부들이 초대교회 시기에 남긴 글들 속에 인용된 수는 백 만 개 이상 되고, 이 인용된 구절을 다 모으면 신약성경 거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입니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호머의오디세이 등 고대의 다른 그리스, 로마의 문헌들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평균 20 개 정도만 남아있고, 실제로 쓰여졌던 시기에서 거의 천 년 지난 후의 사본 밖에 남아있는 것이 없습니다. 남아있는 사본의 개수가 천 배 정도 차이가 있고, 시간 간격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고대 문서 중 이 정도 사본이 남아있는 경우가 있습니까?
자연주의적 입장만 고집한다면, 무에서 유가 나오는 것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해도 그것을 고집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무생물에서 생물이 나왔다는 설명, 무인격에서 인격과 지성이 나왔다는 것에 대해서 이상하지 않냐 말해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각 생물의 DNA안에 엄청난 양의 정보와 프로그램이 들어있는데, 이 정보와 프로그램이 저절로 생겼다는 것이냐 물어도 외면합니다. 리차드 도킨스에게 어떤 토론에서 질의자가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어떤 정보가 스스로 생겨서 DNA에 들어간 사례를 자연세계 안에서 딱 하나만 지적해달라고 하니까, 도킨스는 한동안 천장을 보며 계속 답을 찾았습니다. 한 가지 사례도 찾을 수 없는거지요.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주의 크기가 얼마나 큽니까? 태양은 우리 은하계에 있는 250억 개의 별 중의 하나입니다. 이 은하계 밖에는 이런 종류의 은하계가 2조 개 정도 있다고 합니다. 수 십 억 개 내지 수천 억 개의 별들이 있는 은하계들이 너무 멀리 있어서 지구에서 보면 그냥 하나의 별처럼 보입니다. 그런 은하계가 2조 개 가까이 있다고 합니다. 2조 개 곱하기 수 백억개를 곱하면 어떻게 됩니까? 우주 속에 있는 이 엄청난 질량과 에너지와 그 안의 질서가 저절로 생겼다고요? 그게 말이 됩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 인류가 별의 갯수를 알고 있는 게 고작 수 천에서 이 만 개 정도 이었던 이 시절에 하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현대에서는 모래의 수와 별의 수를 비교해도 이상하지 않지만, 모세가 창세기를 쓰던 시절에 이런 표현을 사람이 할 수 있었을까요?
그는 북쪽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아무것도 없는 곳에 매다시며
He stretches out the north over the void and hangs the earth on nothing.
욥의 시대는 아브라함과 비슷한 시기에 살았습니다. 이 시기에 지구가 허공에 매달려 있다고 알고 있었던 사람이 있었나요? 그런데 성경은 북편이 허공으로 뻗어 있고, 지구가 허공에 떠 있음을 성경은 약 4천 년 전에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그의 말씀을 믿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가장 똑똑하고 객관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무거나 믿게 됩니다. 공산주의, 나치즘 등 끔직한것들을 받아들였습니다. 서구사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현 상태에서, 흠모할 만한 것이 보입니까? 그들의 지성이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보십시오. 남자가 여자가 될 수 있다고 하고, 여자가 남자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사람의 성은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가 주관적으로 느끼는 것에 의해 결정된다고 합니다. 상담교사라는 자들이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여자인데, 남자라는 몸을 잘못 입고 태어난 거야.” 이런 상담교수가 부지기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초자연적 사건입니다. 자연주의적 현대과학은 창조된 세계의 경험 외에 아무 것도 알 수 없습니다. 시간과 공간에 갇혀 있는 창조물이 시간과 공간과 물질과 에너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판단하겠다고 하니 말이 됩니까?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자기가 증언하는 바가 진실됨을 증거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잃는 것도 마다하지 않은 이런 사람들이 면밀히 조사하고 확인하여 증언한 말씀을 부인하면, 이 세상에 믿을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성경의 저자들은 대부분 자기들이 전하는 바 복음 때문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사형을 집행했는데 죽지 않아서 밧모섬으로 유배를 보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자기의 전하는 바 때문에 톱에 쓸려서 죽었습니다. 이보다 진실한 증언이 있습니까? 이런 증인들의 입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찌라도 양털 같이 되리.” 하나님이 “제발 우리대화 좀 하자. 이제 죄를 버리고 돌아오면 그 죄를 다 씻어줄게” 이렇게 호소하시는데 귀를 막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뱀의 유혹은 어떻게 시작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판단 대상으로 놓는 것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공격하고 믿지 못하게 하고, 거짓된 약속을 던짐으로써 인류를 멸망시켰습니다. 지금도 똑 같습니다. 그 정도 당했으면 됐지, 또 얼마나 당하려고 합니까? 사탄의 전략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공격이 시작됩니다. 그때도 효과 있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사탄은 아담 때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게 함으로 우리를 무너뜨립니다. 개인 뿐만 아니라, 나라와 문명을 무너뜨립니다. 이런 공격에 대항하여 견고한 진을 파하는 능력은 바로 말씀을 굳게 붙드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둠이 아무리 깊어도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합니다. 어둠이 깊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빛을 든 자들이 적은 것이 문제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가진 우리가 담대하게 진리의 말씀을 전할 때, 어둠은 물러갈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