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117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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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도 함께 모여 말씀을 사모하는 여러분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크신 은혜로 함께하시기를 소망합니다.
지난 목요일에 수능이 끝났죠? 고3들은 이제 어느정도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겠지만, 반대로 아마 여기 계신 여러분들은 마음을 다잡는 시간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아마 여기 계신 분들은 그런 마음들이 있어서 그러신 것이겠죠? 한편으로는 그냥 집갈걸 그랬나 싶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여기 있으니까 이렇게 우리가 만날 수 있잖아요? 이렇게 만난 만큼, 함께 오늘 주실 말씀에 또 귀기울이시고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누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은 다시 돌아와서 디모데를 향한 바울의 편지를 볼거에요. 그런데 지난번과는 또 다릅니다. 바로 디모데 후서를 우리가 볼 것이기 때문이죠.
디모데후서는 여러분들이 잘 아시다시피, 바울이 디모데에게 전한 두번째 편지입니다. 그래서 전후를 써서 디모데후서가 된 것이죠.
디모데후서의 특징점은 이 편지를 쓸 때의 바울의 상태가 어땠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사실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죽기 얼마 전에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혹시 바울이 어떻게 죽었는지 아시나요? 사실 이 부분은 성경에도 없기에 그저 전설처럼 전해들려오는 내용입니다만,
보통 전통적인 해석은 바울이 로마 네로 황제에 의해 처형을 당했다 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해석을 따르면, 바울은 죽기 전까지 로마에 잡혀 있었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구요, 그렇다는 것은 이 편지가 바울이 옥에 수감되어 있을 때 썼다는 것을 알 수 있을거에요.
바울은 이제 옥에 갇혀 몸이 성하게 나가지 못할 것을 알았고, 그래서 자신의 애제자인 디모데를 향해 앞으로 교회를 어떻게 운영해야할지에 대한 조언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볼 내용은 그 말씀들 중 2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첫 구절부터 어떤 말씀을 하고있죠? 그들로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명하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하는 길이라는 것이죠.
자 여기서 등장하는 그들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바로 이전 디모데전서에서도 보았던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지지난주 말씀 기억하시나요? 거짓 교사들, 주로 영지주의자들이 어떤 이야기를 한다고 했었죠? 말씀을 헛되게 가르치면서 그 구절로만 서로 변론하기를 좋아한다고 했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의 속뜻을 가르치기보다는 지식적으로 싸우기만을 즐긴다고 했었죠.
바울은 디모데로 하여금 그런 이들에게 엄히 명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라고요? 말다툼을 하지 말라.
결국 이전에 했던 말씀에서 계속 이어지는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이 자꾸 말씀을 가지고서 꼬투리를 잡고 다른 성도들과 토론을 하면서 싸우려고 한다는 거에요.
그러나 그런 모든 것들은 하나도 유익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을 듣게 되면 오히려 그의 신앙이 망하게 된다라는 것이죠.
왜 그럴까요? 지속적으로 뜬구름잡는 이야기만 하면서 본 뜻이 아닌 이상한 이야기들만 하고, 듣는 사람들은 그들이 소피스트들처럼 논리구조를 갖춰서 이야기를 하면 전혀 딴얘기를 해도 마치 그럴듯 하게 듣고 잘못된 적용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어지는 15절의 말씀을 통해 디모데가 말씀을 옳게 분별해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서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고 하는 것이죠.
그런 거짓 교사들에 대항하여 디모데 너는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게 바로 서라!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우리 공동체에 필요한 것도 이 말씀 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로 교회 공동체의 리더들을 향해서 항상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는 누가 있을까요? 말씀을 전하는 저도 있을 것이구요, 또 각 조들을 이끄는 리더들도 있을 것이구요, 그 안에서 함께 돕는 교사들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를 이끄는 리더들이 바로 서있지 못하면 공동체는 결국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이끄는 이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에는 아까 말했듯이 저와 리더들과 교사들이 있을 것이구요,
또 각자의 본교회에도 목사님들, 교사분들 계실거에요. 늘 우리 스스로의 여러가지 바람들을 놓고 기도하는 것도 좋지만, 우리 공동체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늘 리더들이 바르게 설 수 있도록, 또한 말씀대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설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어서 계속 볼까요? 16절을 보면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고 바울은 명합니다. 여기서 망령되고 헛된 말은 앞서 등장했던 거짓 교사들을 향한 말이겠죠?
바울은 그들이 계속 경건하지 아니함에 나아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말이 마치 뭐와 같대요?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다고 합니다.
여러분 종양이라는 것을 들어보셨죠? 처음에 생길 때에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을 그냥 두고 방치한다면 어떻게 되나요?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장기에 악영향을 주게 되죠.
보통 그래서 건강검진을 받거나 할때 종양을 발견하면 어떻게 할까요? 빠르게 떼어낼 것을 권합니다.
보통 대장내시경을 하게 되면 그 자리에서 제거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자. 그런데 여기서 바울이 그런 악성 종양과 같은 이들을 아예 제시를 합니다. 누가 등장하죠? 후메네오와 빌레도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들이 그럼 어떤 이야기를 했길래 그러느냐, 이어지는 18절에 등장합니다. 그릇된 진리를 이야기하는데,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자. 이건 또 무슨 이야기냐, 여러분들 부활이 뭔지는 다들 아시잖아요? 자 그러면, 부활이 앞으로 우리에게 있을까요?
부활은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십자가 사망에서 다시 부활하시기도 하셨지만, 그건 예수님만 하시는게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처럼 부활할 거에요.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말씀처럼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때에, 즉 주님께서 다시 이 땅에 재림하실 때에, 모든 죽은 자들이 부활하고, 우리 또한 변화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등장한 이 후메네오와 빌레도는 마치 이런 부활이 앞으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말씀이 말하는 부활은 실제적인 육체의 변화가 아니라, 영적 변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를 통해 영적인 부활을 누린 것이고, 모든 구원은 이미 이루어졌다! 라고 말하고 다녔던 것입니다.
이 역시도 우리가 지지난주에 보았던 영지주의자들의 논리와 비슷하죠? 육적인 것은 천한 것이니까 이런 것은 부활하면 안되고, 오직 선한 영적인 것만이 부활할 것이다. 그리고 이미 부활하였다! 라는 식인거에요.
그런데 이런 말들이 어떤 문제가 되는거에요? 18절 하반절에 보면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린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거에요. 후메네오와 빌레도와 같은 사람들은 이미 영적 부활이 이루어졌어. 그래서 믿는 우리는 이미 구원 받았으니 죄를 지어도 상관없어! 라는 결론이 맺어질 수 있겠죠.
혹은 이미 부활이 이루어졌는데, 너는 그거 몰라? 아직 확신 못해? 그럼 너는 구원받지 못한거네! 이런 결론도 있을 수 있겠죠.
그러니 많은 이들이 혼란 속에 시험에 들게 되는거에요. 앞선 경우에는 막 사람들이 죄를 아무렇지도 않게 짓고 다니는 모습에 시험이 들고,
뒤의 경우에는 자신이 구원에서 탈락했다는 이야기로 시험에 들게 하고.
이러니저러니 많은 이들이 교회 안에서 어려움을 겪고 낙심하는 일들이 발생한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러한 어려움에도 너무 걱정하거나 낙심하지 말것을 이어지는 구절을 통해 이야기합니다.
19절에서 말하죠.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고 인침이 있다.
무슨 이야기일까요? 어렵고 힘들겠지만, 하나님은 계시고 그 진리는 지금도 서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인침이 있다.
인침이라는 것은 옛날에 어떤 편지나 이런 것들을 봉인할때 초를 녹여서 거기다가 도장 같은 것으로 뭘하죠? 봉인을 하죠. 여기서의 봉인이 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봉인은 무언가를 보존할 때 쓰기도 하지만, 또 어떨 때 쓰냐면, 이것이 누구의 것인지, 누구의 권위로 봉인한 것인지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치셨다. 봉인하셨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 지체들은, 이 영혼들은 나의 것이다. 내가 지킨다. 내가 보장한다. 그러니 손대지 말라! 라고 할 수 있겠죠.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다면, 주님은 이미 우리에게 그의 도장으로 인을 치셨습니다. 얘는 나의 자녀다. 얘는 나의 것이다.
그러니 어느 누구도 쉽게 어려분들을 건들거나 무너뜨릴 수가 없습니다.
같은 선상에서 바울이 두 구절을 인용합니다.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뭘 말하는거에요? 주님이 우리를 다 알고 계신다. 그렇기에 주님께서 우리를 돌보실 것이다.
그리고 그 주님 안에 있는 자라면, 당연히 불의에서 떠날 수밖에 없다.
앞서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말한 것처럼 이미 부활해서 죄를 지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겠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라면, 마땅히 의롭지 못한 죄악들에게서 벗어나야 한다. 그것이 주님께서 명하신 바이다! 라고 바울은 말씀을 인용하면서 다시금 강조한 것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그러한 거짓 교사들을 어떻게 디모데가 대해야 할지를 일러줍니다.
20절에서 그릇 비유를 드는데요, 어떻게 말하느냐, 금 그릇, 은 그릇 처럼 귀한 그릇도 있지만, 나무 그릇과 질 그릇도 있다. 즉 귀하게 쓰이는 그릇도 있고, 막 쓰는 그릇도 있다는거에요.
이 비유는 무엇을 뜻하냐면요, 공동체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어요~ 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귀한 자녀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도 함께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귀한 그릇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어떻게 하라? 이어지는 21절에 나오죠. 자기를 깨끗하게 해야 한다. 그러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할 수 있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합당하게 선한 일에 사용하실 것이다.
결국 정리하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후매네오와 빌레도같이 잘못 가르치고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은 이 공동체가 이상하기 때문이 아니라 원래 그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러한 이들로부터 벗어나 올바른 자리에 거하려면, 거짓 가르침들, 잘못된 것들에서 벗어나 깨끗한 모습으로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하게 그의 뜻에 맞게 사용하실 것이다.
그러면서 바울은 이어지는 구절들을 통해 깨끗한, 귀한 그릇이 되는 방법들을 일러줍니다.
22절부터 정욕을 피하고, 믿음의 공동체와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그리고 23절로 이어지죠. 어리석고 무식한 이야기 다 버려라. 여기서 공동체 안에 다툼이 일어난다.
그럼 뭘 하면 되는거죠? 우리 육신을 휘감는 정욕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인간적인 욕심들을 가리키겠죠. 남을 짓밟고 올라서려는 욕구, 나의 육적인 즐거움을 채우려는 욕구 등등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내려놓으라는 것이 온전히 차단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기본적인 욕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살아가도록 만드신 것이기에 행해야 하죠.
다만 너무 과하거나 그 욕구 자체만을 추구하는 모습들이 있으면 안되겠죠.
그리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저는 이 부분에서 사실 처음에는 주를 믿는 사람들끼리만 뭉쳐라 인줄 알았어요.
하지만 실제 본문의 의미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끼리끼리 모여라는 말씀을 하실 분이 아니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은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이 모인다면, 혼자 있을 때보다, 함께 모일 때,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이 더욱 크게 나타날 것이고, 그것을 따라나가는 모습들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도 그 사랑이 나타날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고 하죠. 앞서 말씀드렸듯이, 쓸데없는 변론들을 추구하다보면 결국에는 서로의 논리가 맞다는. 다툼만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삶에서 과한 욕심을 내려놓고, 주를 믿는 이들과 함께 나아가고, 거짓 교사들의 변론에 끼어들지 않고 그런 것들을 버린다면, 그 모습은 하나님이 택하시고 일하게 하시는 귀한 그릇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울은 디모데에게 권면하는데요, 이번에는 다른 성도들이 아니라 거짓 교사들을 향한 말씀이었습니다.
주의 종. 여기서는 디모데를 말하겠죠? 진정한 주의 종은 다투지 않고 온유하고 잘 참고 잘 가르친다고 합니다.
그러니 바울은 디모데에게도 같은 모습을 취하라고 말합니다. 거역하는 자를 그냥 쫓아내거나 죽이지 말고, 온유함으로 훈계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변화시키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회개하게 하사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도록 이끄시고 결국 깨끗한 그릇으로 만드셔서 사용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하는 오늘의 권면은 무엇일까요. 거짓 교사들을 대할 때, 그들을 훈계하고, 종양과 같이 떼어낼 각오도 해야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새 그릇으로 만드신 것처럼, 우리도 그들을 그저 내치는 것이 아니라, 온유함으로 훈계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원수까지도 품으시는 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삶에서 사회를 보고, 어떤 사건과 대상을 볼 때, 쉽게 하는 것들이 있어요.
바로 선과 악을 따지는 것이죠. 어떤 이들은 선한 이들이고, 어떤 이들은 악한 이들이다.
그리고 선한 이들은 상을 받아야 하고, 악한 이들은 벌을 받아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악으로 상정한 이들에 대해서 너무나도 쉽게 비방하고 조소하고 하게 됩니다.
하지만 오늘 주님께서 바울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이죠. 그건 우리가 할 바가 아니라고 말이죠.
물론 그들이 가진 악들은 악성 종양처럼 가만히 두면 번져나가 공동체를 해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끊어내야 할 것은 그 악한 것뿐이지, 사람마저 끊어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성도들, 특히 리더들은 다른 이들과 다퉈서 승리를 거두는 것이 아니라, 온유함으로 가르치고 훈계하며 최대한 그들이 돌아올 수 있도록 손을 내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살면서 소위 말하는 ‘빌런’들을 여럿 만나게 되실 겁니다.
그리고 그 빌런이라는 것이 바로 학교 기숙사, 같은 반과 같이 정말 근처에 있을 수도 있겠죠.
우리가 그런 빌런들을 대할 때 기초적으로는 당연히 그런 악한 것들을 따라가선 안되겠죠. 그러한 유혹들은 과감히 끊어내야 할 필요는 있지만,
반대로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배척하고 정죄하고 벌받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악을 끊어내는 것이지 사람을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바울이 비유했던 것처럼 그 빌런들이 정말 나무 그릇이나 질그릇처럼 택함받지 못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누가 알겠어요. 오직 주님만이 아시겠죠. 우리가 봤을때는 아무리봐도 질그릇인데, 사실 닦아보니 금 그릇일 수도 있는거에요.
그러니 우리가 할 것은 질그릇 처럼 보이는 이들을 위한 기도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저들을 닦아달라고. 금 그릇이 되어 우리와 함께하게 해달라고.
만약 정말로 그들이 질그릇이라면, 그들이 죄로 인해 탈락할 이들이라면, 그것은 주님께서 알아서 갚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이 아니라는거에요.
그러니 우리는 항상 우리에게 잘해주는 사람이나 공격하는 사람이나 상관없이 모두를 향해 기도해야 합니다.
리더들도 어때요? 조원이 안나온다고 해서 에이 좋은걸 알려줘도 못받아먹으니 넌 탈락이다! 이러지 말고, 주님께서 알 수 있도록, 다시 함께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리더들이 이러한 일들을 해야하니,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리더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는 거겠죠.
그저 힘들다고 사람들 배척하고 오지 말라하고 이래버리면 어떻게 되겠어요. 공동체가 말 그대로 망할 수밖에 없겠죠.
그러니 리더들이 온유하게 잘 가르치고 또한 기도할 수 있도록 우리도 기도해야 할 것이구요,
리더들도 스스로가 온유함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도록,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을 정리해볼게요. 오늘 바울은 디모데에게 거짓 교사들을 어떻게 대해야할지를 일러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잘못된 변론과 같은 것들은 끊어내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그들의 모든 잘못들을 맞게 처리하실 거니까 우리는 모두를 향해 온유함으로 참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죠.
이제 연말이 다가오고, 여러분들은 기말 모드로 들어갈 거구요, 특히 2학년들은 고3모드로 들어갈겁니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또 예민한 마음들이 생겨서 온유함이 사라질 수도 있어요.
그건 내 친구가 그럴 수도 있고, 동시에 나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 말씀을 잘 기억하시고, 우리 안에 생겨나는 악성 종양과 같은 악들은 끊어내시고, 대신 온유함으로 우리 마음을 가득 채워서 모든 공동체를 품어 안고 기도할 수 있는, 그래서 우리 모두가 금그릇으로 주님 앞에 사용될 수 있는 귀한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찬양: 우리 오늘 눈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