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하는 목소리로(욘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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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는 목소리로(욘 2:1-10)
부제: 감사를 제물로 삼아 예배하라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절기를 맞으면서 감사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은 좋은 일지만, 감사가 연례행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매주일예배와 매일의 새벽예배에 나와야하는 우리는, 「감사」라는 예배의 제물을 잊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예배는, 무엇인가 소원을 이루는 염불의 시간이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가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감사라는 믿음의 제물을 통하여 하나님을 인정하며 찬양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아름다운 음악으로 치장 된다고 하여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며, 많은 사람이 모였다고 하여 「성공」하는 것도 아닐뿐더러, 단지 많은 헌금이 「향기로운 제물」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예배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성도의 인격적인 고백과 믿음이 있을 때, 찬양도 헌금도 많은 성도의 모임도,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 예배가 됩니다.
이러한 모든 내용을 압축해서 담아 놓은 말씀이 오늘 본문,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9)입니다.
<본론>
1. 예배는 구원의 감격을 가진 성도만이 드릴 수 있습니다.
먼저 본문은 「예배는 구원의 감격을 가진 성도만이 드릴 수 있다」는 사실은 말합니다.
요나서는 비록 넉 장밖에 안 되는 성경임에도 불구하고 흥미진진한 에피소드가 참 많습니다.
어느 날(주전 793-753) 하나님이 요나에게 니늬웨; 당시 신흥강대국으로 특히 북이스라엘에게 치명적인 라이벌이 이었던 앗수르의 서울(지금의 이라크 모술)에 회개의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요나는 이 명령을 거부하고 다시스(북아프리가를 마주한 스페인의 항구도시)행(行) 배에 오릅니다.
갑자기 풍랑을 만납니다. 사람들은 필사의 노력을 했으나 되지 않자, 각자의 신에게 기도합니다.
그러나 풍랑은 그칠 줄 모릅니다. 이에 제비를 뽑아 원인제공자 요나를 찾아내 바다에 던집니다.
바다에 던져진 요나는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사흘의 목숨을 건 회개와 기도로 탈출합니다.
흥미미진진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그저 재밌는 옛날얘기로만 들어서는 안 됩니다.
2장에서의 요나의 기도와 회개는, 하나님을 향한 제사(예배)로 나아갑니다.
4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7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그리고 9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결국, 요나는 그의 미션 이전에, 하나님을 제대로 예배하는 예배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배(禮拜)라는 말의 의미는 ‘존경을 돌리다’, ‘영광을 누군가에게 돌리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 하나님께 최상의 존영을 올려드리는 일이 예배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예배는 누가 드릴 수 있습니까? 구원의 감격을 가진 성도만이 드릴 수 있습니다.
예배는 오로지 하나님께만 드려져야 하며, 하나님만이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유일하신 분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러한 고백과 믿음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요나는 말합니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9b)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이 신앙하는 ‘미지의 조물주’가 아닙니다. 그래서 덮어놓고 막연하게 예배하고 신앙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시며 전능하신지, 얼마나 자비로우시고 공의로운 분이신지를 아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예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 스스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타락하여 죄성으로 몸과 마음이 부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을 긍휼히 여기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이셨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주인으로 영접하는 자에게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이 구원의 은혜를 얻은 성도만이, 비로소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을 바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만이, 이 놀라운 은혜에 감격하여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고 예배할 수 있습니다.
예배의 출발점은 예수가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시인하고 믿는 믿음이며,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아 누리는 데서부터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발견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9b)입니다.
그래서 그는 기꺼이 「주의 성전을 바라보며,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예배하겠다」고 결단을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예배의 자리에 나와서 감격과 감사가 없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라는 예배의 중심을 떠나서 다른 곳에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그저 일주일에 한 번 의례적으로 나와 드리는 그야말로 형식적인 예배가 되는 것은, 예배에서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아닌 다른 것을 찾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항상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베푸신 구원과 크신 은혜를 헤아리고, 그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함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 예배 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구원의 감격을 회복해야 참 예배를 계속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본문은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여 참 예배를 계속 하라」고 말합니다.
요나는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9b)라고 말합니다.
요나의 물고기 뱃속에서의 최고 이슈는 「니늬웨로 가겠느냐?」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물고 뱃속까지 오게 된 이유가, 「니늬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물고기 뱃속에서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그 속에서 회복을 시작합니다.
우리는 실패의 자리에서 일어나야 하고 돌아서야 합니다.
그렇다면 실패의 자리에서 일어나서 돌아서는 것의 시작은 무엇일까요?
그 시작은 「마음을 하나님을 향하여」에서 입니다. 1절 2절을 읽겠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1, 2)
요나가 하나님께 “부르짖었다”(2b)는 것은, 그동안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있던 그의 마음을 하나님을 향하여 돌아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할 것이 있습니다. 이러한 요나의 심적 변화는 다급한 나머지 그저 살려만 달라고 비는 단순한 기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요나는 자신이 변하여 ‘하나님을 향하는 모습’을 제3자의 입장에서 표현하는데, 자신의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그의 하나님”(1)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요나 자신입니다. 요나가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그(나)의 하나님”으로 표현하는 것은 여기가 처음입니다.
요나가 변했습니다. 과거 요나의 모습은 어땠습니까? 욥은 난파 위기에 있는 자신과 승객들을 위해 “네 하나님께 구하라”(1:6)는 선장의 호소에도, 배 밑에 꽁꽁 숨어(그래서요? 하며) 시큰둥했습니다.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헤어 날 수 없는 풍랑 앞에서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1:14) 하며, 이방인 선원들조차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기도하는데도, 이 일이 남의 일인 양, 하나님을 남의 하나님으로 여기며 마음 문을 꼬~ㄱ 닫고 있었습니다.
요나는 자신이 원하지 않은, 원수 니느웨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을 낯설게 여기며 나와 상관없는 분으로 여겼습니다.
아니!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을 버린 자식으로, 당신과 상관없는 사람으로 여길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방향으로, 자신의 마음과 삶의 방향을 180도 돌려 버렸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은 욥의 그런 행태를 기가 막히게 표현합니다. “욥바로 내려갔더니 יָרַד 야라드”(1:3a) “배에 올랐더라 원어는 「내려갔다」와 같은 단어 사용하여 יָרַד 야라드”(1:3b) “배 밑층에 내려가서 יָרַד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1:5)
성경은 마음과 삶의 방향이 잘못 된 것을 “내려갔다”고 표현합니다. 요나가 「하나님을 “자신(그)의 하나님”되심을 거부하자」, 계속해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요나의 「내려감」은 절정에 이릅니다. 하나님은 그를 “스올의 뱃속”(2a)에 집어넣으십니다. 스올은 망자들이 가는 무덤입니다.
「절정은 곧 끝이 온다」는 의미입니다. 요나는 「내려감의 끝, 스올」에서, 「죽음을 경험」하며 획기적인 생의 전환점을 맞습니다.
「아! 내가 살 길은 오직 하나님이구나!」체득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2c), 하나님이 “들으시는”(2d) 경험을 합니다.
스올이 얼마나 절망적인 곳인지를 “깊음 속 바다(심연)”(3)로 표현합니다. 겉으로는 평화롭고 아름답게만 보이는 바다가, 죽음의 큰 파도와 큰 물결이 있는, 또 하나의 무덤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절망 끝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6a)
요나는 끝내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니 יָרַד” 라고 말합니다. 산의 뿌리는 「배 밑」이나 「바다 밑」 과 같이 「더 이상 내려 갈 수 없는 땅속 끝」입니다.
겉으로 보면, 요나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하나님을 떠난 요나를 하나님이 벌하시는 것으로 비쳐지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여기까지 끈질기게 요나를 따라오셨다, 함께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요나가 하나님을 자신과 상관없는 분으로 여기고 깊은 곳으로 숨으려하자, 하나님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그곳 “산의 뿌리”;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곳까지 따라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열정; 당신 백성에 대한 사랑으로,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찾아내셨습니다.
하나님은 포기하시 않는 분입니다. 당신 백성을 포기하시지 않고, 당신의 계획을 포기하시지 않고, 당신의 사랑을 포기하시지 않는 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은 더 놀랍습니다.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6b)에서 “오래도록עוֹלָם” 올람은 「영원한」입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요나의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인 것인지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요나)는 사망권세가 그를 붙잡고 「영원한 빗장」을 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만든 빗장도 풀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백성에 채워진 빗장은 영원한 것입니다. 누구든 그 사망의 빗장을 풀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에 불가능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요나를 붙잡았습니다! 죽음의 수렁에서 낚아 채셔서 끌어 올리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6c)
할렐루야! 요나의 회복은 그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여」, 하나님을 “그의 하나님”(1)으로 인정할 때,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요나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6d)으로 고백할 때, 회복; 구원은 완성되었습니다.
그 결과를 요나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7)
의역하면 이렇습니다. “내 목숨이 힘없이 꺼져 갈 때에, 내가 주님을 기억하였더니 나의 기도가 주께 이르렀으며(응답 되었으며), 주님 계신 성전에까지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을 거부하던, 아니 하나님을 무시하던 요나는 「스올」 「깊은 속 바다」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으나, 그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여」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자, 놀라운 변화를 맞이했습니다.
생의 전환점은 소년이 청년 되고, 청년이 갱년기를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여」,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요나는 「구약의 탕자」라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를 떠난 아들이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돼지 사료를 뺏어 먹어야 할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복은 15:17-20입니다.
17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진정한 회복은 나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여,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회복된 하나님과의 관계는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게 하며, 그렇게 회복된 구원의 감격과 감사는 우리 예배의 제물이 되어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이 계시는 ‘거룩한 성전’에 도달하게 합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인정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함으로,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여 참 예배를 계속 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랜 동안 습관적으로 요나서를 읽으며 집중한 곳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1:17)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2:10)
요나가 말이야~ 하나님 말씀에 거부하고 까불다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사람이 할 수 없는 큰 경험을 한 후, 회개하고(정신 차리고) 거기서 나왔데~~~
물론, 빠뜨릴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단 한 줄로, 그리고 물고기 뱃속에서 나온 사실도 단 한 줄로 기술합니다.
그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그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게 된 이유, 그리고 그곳에서 나오게 된 원인을 아주 자세히 기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당하고 계십니까? 스올 같이 죽을 것만 같은 자리에 있습니까?
예, 이 참담한 현실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대신 이 사실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나를 포기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올에서 헤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 심지어 그 스올이 나의 불순종과 나의 실수로 인한 것이라 할지라도,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고」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면」그 때부터 「회복은 시작된다」는 사실입니다.
바라기는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감사의 목소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제물입니다.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여, 예배에 나올 때 마다, 바른 예배자로 참 예배를 계속 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