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8:33-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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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가 무엇이냐?

빠르게 예수께서 붙잡힌 과정을 살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기드론 시내 건너편에서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예수를 잡으러 왔습니다. 다른 복음서와 달리 유다가 앞장 섰다고 기록합니다. 무엇보다 종교 지도자들이 주도적으로 예수 체포에 가담했다는 기사는 대제사장과 장로라고 언급한 마태와, 대제사장이라고 한 마가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는 저자 요한이 의도적으로 예수를 대적하는 세력이 3장에서 구원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과 미워하는 세력을 배치하는 구도를 극대화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로마를 대표하는 빌라도에게 예수의 죽음을 청탁함으로 이제 예수와 대적하는 구도는 유대인을 넘어서 세상을 대표하는 로마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죠. 28절에 ‘그들이’ 예수를 관정으로 끌고 간 시간은 새벽이라는 정보를 통해 체포와 십자가 형의 결정이 얼마나 빠르게 움직였는지 그러면서도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계획적인 것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경계선인 관정을 사이에 두고 빌라도에게 행악자라고 고발했던 그들에게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는 빌라도의 말에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다’는 답은 ‘죽여야 할 의도를 갖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저자는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한다’고 기록함으로 예수의 죽음이 이스라엘을 넘어 로마 세계로 어떻게 들어서게 되는지 이를 역사의 현장에서 보여 준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1. 우리는 모두 역사의 중심에 살고 있다.
우리가 기독교인이고 예수의 죽으심에 대한 역사적 사건을 믿음으로 보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러나 우리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어떤 연결이 있겠습니까? 최근 이스라엘을 공격해 많은 사람을 끌고 간 하마스를 향해 이때가 완전히 몰아낼 절호의 기회로 여기고 지금까지 2년여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국내에 종교 지도자들이라는 분들이 과도한 영적 해석을 내놓거나 또 다른 급진적인 신학 사상을 가진 이들은 백투더 예루살렘과 같은 시대적인 종말론에 심취하는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는 세계인으로 살며 전쟁과 평화에 대한 관심은 분명히 가져야 합니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인류 역사의 과정이 ‘성경의 성취’라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가에 대한 문제라는 것을 살펴야 합니다. 여러분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최근 우리나라는 정치적으로 큰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이유는 2년 반전 대통령 선거에서 0.7%차로 당선한 지금의 정권의 실패 때문이죠. 현재 지지율이 20% 아래로 떨어진 상태를 몇주째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많은 분석에서 젊은 층의 투표가 당락을 결정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제가 젊은 이를 탓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흔히 하는 말에 ‘무슨 역사의 중심에 있는가? 나는 한 개인에 불과하고 미미할 뿐이다’라고 말하지만 실제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씀 드리려 예를 든 것이죠.
빌라도 입장에서 로마에서 먼 지방에서 특이한 민족의 총독인 빌라도 사실 요한복음에서는 빌라도를 총독이라고 표현하지 않는 반면 마태는 무려 7번이나 ‘총독’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즉, 저자 요한에게 빌라도는 한 개인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출세를 위해 맡겨진 일을 잘해야 하는 로마의 군인 한 사람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하지만 이 또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일부라는 것을 살펴 보았던 것이죠. 그렇게 역사의 무대로 초청을 받고 예수를 만난 그의 질문은 ‘네가 왕이냐’입니다. 예수께서는 ‘들은 말이냐, 네가 생각해서 하는 말이냐’라고 하자 빌라도는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들과 대제사장들이 내게 넘겼다’ 고 답합니다. 이것이 1차 예수에 대한 빌라도의 탐색이라고 지난 주까지 살핀 내용입니다. 우리 주변의 비기독교인들 역시 ‘들은 말’이 전부입니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분들 역시 ‘들은 말’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께서는 ‘내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 갑니다. 흐름을 보십시오. ‘왕’은 통치자입니다. 무엇을 통치합니까? 나라를 통치합니다. 그리고 나라에는 백성이 있죠. 그렇죠. 그런데 나라가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입니다. 36절에 두 번이나 강조 됩니다. 그러자 빌라도는 ‘그렇다면 네가 왕이 맞다’라고 긍정적인 답을 합니다. 이어 예수께서는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다’라고 답합니다. 빌라도의 이해는 자연스럽습니다. 로마와 충돌하지 않는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는 빌라도 입장에서는 문제가 될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시기로 넘겼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의 기록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마태와 마가는 빌라도가 알고 있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인 ‘내가 이를 위하여’ 입니다. 그래서 ‘태어 났고, 세상에 왔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요한복음을 살폈기 때문에 ‘태어났다는 말씀이 성육신하심이고’ , ‘세상에 왔다는 말의 의미가 어렴풋이라도’ 이해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알 수 없는 것이죠. 계속해서 태어나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의미가 무엇이냐면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자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묻지만 진리가 무엇이다가 아니라 더 이상 대화는 진행되지 않고 멈춥니다.
여러분! 1년 넘게 우리는 요한복음을 꽤 자세하게 살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들은 말’에서 멈췄습니까? 아니면 ‘진리는 이것이다’라고 자기의 말을 할 수 있습니까?
2. 진리가 무엇입니까?
우리 시대의 특징 중 하나가 누군가의 말을 듣지 않는 시대라는 것이죠. 우리나라 사람이 많이 하는 말이 ‘그게 말이 돼’ 라고 합니다. 요즘 화제가 되는 이슈 중 하나가 출근 시간이 9시이면 9시 땡하고 들어가는 직원이 무슨 문제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더 최근에는 이런 이슈도 있습니다. ‘마약을 하는 것이 무슨 문제가 돼?’ 라는 것이죠. 이유인 즉, 내가 내 돈으로 사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고 그래야 내 몸 망가지는데 왜 처벌을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인한 다양한 반론이 가능하지만 일단 조금 더 살펴 보겠습니다. 중요한 건 저의 질문이 아니라 꽤 퍼져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사고가 부정적인 면만 있지 않고 긍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최근 세계를 휩쓸고 있는 아파트라는 노래는 우리나라 놀이를 접목시켜 이렇게 노래하면 왜 안돼라는 출발이 세계를 뒤흔들고 있고 흔히 말하는 k 컬쳐의 매우 중요한 토양이 되는 부분이죠.
이런 식의 합리적 사고의 끝판은 진리라는 변하지 않는 영역에서 순기능을 할까요? 아니면 역기능을 할까요라는 질문에 다다릅니다. 빌라도의 합리적 사고는 ‘진리에 대한 증언’을 위해 오신 예수 앞에서 멈췄습니다. 빌라도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 나라가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면’ 그건 괜찮다. 혼자서 상상 속에 나라를 세우고 왕이 라고 한다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현실에 ‘너는 별거 아니다’는 생각 말입니다. 그래서 다음에 ‘진리가 무엇이냐’라는 질문임에도 불구하고 대화는 끝납니다. 혹시 우리도 이런 질문에서 끝난다면 다시 요한복음의 처음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룟 유다는 배신의 길로 갔고, 베드로 역시 넘어진 상태이기 때문이죠.
합리적인 사고는 결국 믿음이라는 영역에서 부딪히게 됩니다. 바로 그때 믿음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키가 ‘진리’입니다. 이렇게 생각을 해 봅시다.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별은 ‘태양’입니다.(별은 스스로 빛을 내는 전체) 태양은 빛으로 8분이라는 거리에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가까운 별은 어디에 있을까요? 빛으로 자그만치 4년을 가야하는 센타우리 프록시마라고 하는 별이라고 합니다. 이런 과학적 사실이 우리에겐 별다른 감흥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게 왜?’라는 질문으로 끝난다는 말이지만 과학도에게는 신비감을 줄 것이고 우주에 대한 경외심을 느낄 것입니다. 여기에 신비와 경외라는 영역은 ‘과학이라는 증명’을 넘어서 갖는 그들만의 믿음의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류 역사의 오랜 시간을 거쳐 우리의 언어로 읽도록 발견되어졌고, 복원 그리고 해석을 거쳐 전해진 ‘과학이라는 증명’을 통과했습니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이 ‘글을 읽고 접한’ 후에 합리적 사고를 넘어 ‘이 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믿음의 영역으로 들어 섰습니다. 우리만이 갖는 ‘믿음’이 작용합니다. 37절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는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빌라도에게는 ‘작용’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아직 아닙니다. 저자 요한은 이미 믿음이 작동한 사람들을 소개했고 그 부분을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확실한 도장을 저와 여러분에게 찍어 주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으심 그리고 부활까지 예수께서 행하신 ‘진리에 대한 증언’이 우리에게 도달한 것입니다. 아멘
합리적 사고 중심에는 자신을 중심에 둔 세계이고 옛날이나 지금도 여전히 위험한 세계입니다. 정보는 모두가 공유할 정도로 세상에 퍼졌고 몇 번의 터치만으로 번역에 논문까지 써 주는 쳇지피티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반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성은 사라지고 자기만이 제일 중요한 시대는 반면에 서로를 의심해야만 살 수 있는 시대로 만들었습니다. 특히 진리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는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라도가 보여 주는 세계는 여전히 우리가 사는 세계입니다. 너의 설명이 그럴듯하다는 있어보이는 생각에, 무엇보다 나의 세계에는 해가 되지 않는면 굳이 너는 죽이지는 않겠다. 그의 결론은 그럴듯 합니다. 합리적으로 보이지 않습니까? 38절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다’라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빌라도는 유월절에 유대인들에게 행했던 전례를 들먹입니다. 39절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다’ 이 정도면 빌라도는 할 만큼 한 것입니다. 거기에 ‘전례’까지 들먹이며 유대 지도자들을 회유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종교 지도자들의 반응은 전혀 달랐습니다. 40절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여전히 새벽입니다. 유월절이 시작되는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예수를 죽여야 하는 유대지도자들은 천금같은 기회를 놓칠 수 없습니다. 새벽 시간에 그것도 로마의 관정앞에서 소리를 질렀다. 오히려 그들은 로마를 겁박하는 것입니다. 앞서 닭이 울었습니다. 사람들이 일어날 시간이 다다릅니다. 그런데 로마의 관정에서 소리를 지르는 무리를 상상해 보십시오. 어쩌면 폭동으로 번질 조심이 시작되는 것 아닙니까? 그들이 원한 인물은 ‘바라바’라는 ‘강도’라고 소개를 합니다. 그런데 공관복음에서는 바라바를 반란과 살인한 자로 소개합니다. 즉 공관복음이 바라바를 조명해주지만 요한복음은 바라바는 개인에 불과합니다. 마치 총독으로 소개되지 않고 빌라도로 소개된 것처럼 말입니다.
19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에’ 그런 작은 소동은 언제든 예루살렘 성 안에서 폭동으로 번질 위험이 있습니다. 특히 종교 지도자들이 선동하는 힘은 생각보다 큰 것을 빌라도는 알기 때문에 즉시 행동으로 옮깁니다.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소리를 지르는 자들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알았기에 거기에 호응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결정을 내린 ‘죄가 없음’을 종교 지도자들에게 관철시킬 힘이 없는 일개 지역의 총독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예수를 죽이는 논리가 이스라엘을 위해 한 사람이 죽는 것이 좋다는 매우 합리적인 설명이 누구에게서 나왔습니까? 대제사장에게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 18:14 “14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자러라” 여전히 이 논리는 우리 사는 세상을 혼돈에 빠트립니다.
세계적 석학 마이클 샐던은 근현대의 정의를 자신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를 시작하며 이런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당신이 기관사이고 갈림길을 두고 있는데 한쪽 선로에는 한 사람이 있고, 다른 쪽에는 여러 사람이 있다. 이때 한 쪽을 선택하지 않으면 기차가 탈선해서 많은 사람이 죽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질문을 던지자 당연히 한 사람을 선택합니다. 그러자 이어서 그 한 사람이 가족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묻습니다. 예수가 누구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와 한 사람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를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소리를 높였지만 이제 얼마 안가서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라’고 입장을 바꿉니다.
빌라도는 보란 듯 예수를 채찍질하고 군인들은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힙니다. 이는 마치 ‘왕’으로 취임하는 ‘왕의 아들’에게 관을 씌우고 왕의 옷을 입히는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고 왕을 높이는 자세를 취하지만 이내 ‘손으로 때리더라’고 기록합니다. 우리는 힘 없는 한 사람에게 가해지는 폭력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이사야가 말했는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보아도 됩니다. 그러나 적어도 저자 요한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내가 증언하러 왔다’ 는 의미에서 읽어야 합니다. 증언하다는 ‘마르튀레오’는 목숨을 바쳐라는 의미인데 그의 증언의 참됨을 향해 가시는 하나님의 아들로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진리라는 내용인 앞서 예수께서 보이신 기적의 의미와 행하시고 말씀하신 모든 말씀이 ‘진리’임을 깨닫게 되고 우리를 믿음의 세계로 들여 보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비루한 모습의 가치 없는 한 사람만 보였다면 저자 요한은 그 너머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목숨을 바쳐 ‘진리에 대한 증언’을 보라고 저자는 과감하게 예수의 아프심, 고통당하시는 모습을 의도적으로 빼고 ‘때렸다. 맞았다’라고 기록하는 것입니다.
4절에 빌라도는 ‘다시 밖에 나갔다’ 그리고 ‘보라’ 라고 자신 있게 외칩니다. 무엇을 볼까요? 그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퍼포먼스는 채찍으로 맞아 찢어진 예수의 모습입니다. ‘자 이정도면 충분하지, 더 이상 큰 일 만들지 말라’ 그러면서도 정의를 세우 척 말합니다.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한다’는 말은 얼마나 적절한 핑계입니까? 빌라도는 자기가 한 일에 자신 있었습니다. 그것을 알게 하기 위해 권력을 이용한 폭력을 자유롭게 사용합니다. 최근 우리나라도 그렇습니다. 한 개인에게는 몇 백차례의 압수 수색을 하면서도 누구에게는 그 흔한 조사조차 한 번을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빌라도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권력을 휘두르듯 말입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권력을 사용했는데도 ‘찾지 못했다’ 그걸 너희가 알라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종교 지도자들 앞에 내 보인 예수는 5절 ‘가시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왔습니다.
그 정도라면 정신 차렸겠지, 끔찍하구만 하며 불쌍히 여기거나 가엽게 여기지만 그들에게 없었습니다. 6절에 ‘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소릴 질러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이제 그들은 더 이상 목적을 숨길 필요가 없습니다. ‘죽여라, 죽여라’ 입니다. 그러자 빌라도는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그리고 3번째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다’고 기록합니다. 빌라도는 어떤 면에서 매우 신중한 사람입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예루살렘의 통치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로마로 입성할 수 없습니다. 적당한 자유를 주고 전례를 만들어 바라바와 같은 정치범이자 살인자라도 풀어주는 아량을 베풉니다. 하지만 종교지도자들은 절호의 기회를 결코 버릴 자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폭동을 조장하고 있지 않습니까?
유대인들은 7절 ‘우리에게 법이 있다.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이라고 말하고 율법을 말하고 내용이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기 때문이다고 말합니다. 레위기 24:16 “16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니라 거류민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죽일지니라” 이 한구절이라면 맞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에 보여든 그들은 이미 예수를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돌을 들어 예수를 죽일 수 없었습니다. 그랬기에 종교 지도자들은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행악자로 그러다 정치범으로 몰았습니다 계속되는 빌라도의 거부에 본색을 드러내며 대놓고 ‘종교적’으로도 ‘당연히’ 죽여야 할 인물이라고 주장합니다. 다음 주에 살펴볼 본문에서 이들의 선동은 이제 빌라도를 아예 공격 대상으로 합니다. 12절에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빌라도의 시간은 그저 평범한 나와 주변인들의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시간은 우리의 생명이 다하는 시간까지 마치 태양을 중심으로 도는 행성들처럼 진리의 빛을 받고 살아 갑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는 질문까지는 갔지만 거기가 끝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찌되었든 빌라도가 선 자리보다는 그래도 한걸음 더 들어와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마치 예수 곁에 있는 제자들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멈춰서는 안됩니다. 과학을 탐구하는 학자들도 경외심을 갖고 학문에 심취해 발견하고 기뻐하며 매일의 수고를 감당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진리의 빛을 받은 우리는 어떠해야 할까요? 이런 질문들이 분명하게 저와 여러분의 삶을 진리안에 더 풍성하게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1:14 NKRV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17 NKRV
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요한복음 3:21 NKRV
21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4:23–24 NKRV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한복음 8:32 NKRV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한복음 8:44 NKRV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요한복음 14:6 NKRV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17 NKRV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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