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인 삶을 사는 성도-사도행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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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인 삶을 사는 성도
사도행전 26:24–32 (NKSV)
24 바울이 이렇게 변호하니, 베스도가 큰소리로 “바울아, 네가 미쳤구나.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였구나” 하고 말하였다.
25 그 때에 바울이 대답하였다. “베스도 총독님, 나는 미치지 않았습니다. 나는 맑은 정신으로 참말을 하고 있습니다.
26 임금님께서는 이 일을 잘 알고 계시므로, 내가 임금님께 거리낌없이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한 구석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므로, 임금님께서는 그 어느 사실 하나라도 모르실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27 아그립바 임금님, 예언자들을 믿으십니까? 믿으시는 줄 압니다.”
28 그러자 아그립바 왕이 바울에게 말하였다. “그대가 짧은 말로 나를 설복해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고 하는가!”
29 바울이 대답하였다. “짧거나 길거나 간에, 나는 임금님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고 있는 모든 사람이, 이렇게 결박을 당한 것 외에는, 꼭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빕니다.”
30 왕과 총독과 버니게 및 그들과 함께 앉아 있는 사람들이 다 일어났다.
31 그들은 물러가서 서로 말하였다. “그 사람은 사형을 당하거나, 갇힐 만한 일을 한 것이 하나도 없소.”
32 그 때에 아그립바 왕이 베스도에게 말하였다. “그 사람이 황제에게 상소하지 않았으면, 석방될 수 있었을 것이오.”
사도행전을 쓴 누가는 두권의 책을 썼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입니다.
누가복음은 구약에서 예언이 예수그리스도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또 사도행전은 예수그리스도의 예언이 세상안에서 교회를 통해 성취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1세기 이전까지 유대인들은 세상에서 중심은 자신들로 알았다.
또한 자신들의 세계가 온 세계라고 여겼다. 왜냐하면 유일하신 하나님이 오직 유대민족만 택했고 유대민족을 통해 복을 주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 흔적이 지금도 유대인들의 삶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흩어져있어도 유대인들이 있는 곳에서는 문화의 중심이 이동을 합니다.
미국에서 유대인 공동체는 역서적, 경제, 정치, 문화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할리우드문화는 유대인 이민자들이 주도해서 만들어낸 산업니다.
유대인들은 어떻게 이렇게 문화를 바꾸었갔을까요?
유대인들에게 중요한 윤리적 가치가 있는데, “티쿤 올람(Tikkun Olam)” 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이 의미는 “세상을 고치다”라는 뜻인데, 현대에서 유대인을 통해 사회적, 윤리적, 인도주의적 활동을 이끄는 중심 철학이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이 “티쿤 올람”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통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야 된다는 집단적 노력이 담겨져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철학적 사고와 함께 예루살렘에서 선교적활동을 통해 로마와 지구반대편 구석구석까지 복음과 더불어 전파되어져 가고 있음을 사도행전을 통해 보여줍니다.
사도들을 통해 전해지는 복음은 단순히 말로 선포되는 것이 아니라 강력한 행위가 따라다닙니다.
사도행전에서는 복음을 전하면서 기적들이 함께 일어납니다.
다른 성경보다 훨씬 더 많은 기적들이 소개됩니다.
가장 먼저
성령강림과 관계된 기적
- 사도행전 2:1–4“1 오순절이 되어서, 그들은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었다. 2 그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3 그리고 불길이 솟아오를 때 혓바닥처럼 갈라지는 것 같은 혀들이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4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각각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치유와관계된 기적
사도행전 3:6–8 “6 베드로가 말하기를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하고, 7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는 즉시 다리와 발목에 힘을 얻어서, 8 벌떡 일어나서 걸었다. 그는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다.”
사도행전 14:8–10 “8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지체장애인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는 나면서부터 못 걷는 사람이 되어서, 걸어본 적이 없었다. 9 이 사람이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 바울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고침을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알고는, 10 큰 소리로 “그대의 발로 똑바로 일어서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는 벌떡 일어나서, 걷기 시작하였다.”
죽은자가 살아나는 기적
사도행전 9:40–42 “40 베드로는 모든 사람을 바깥으로 내보내고 나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였다. 그리고 시신 쪽으로 몸을 돌려서, “다비다여, 일어나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 여자는 눈을 떠서,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서 앉았다. 41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서, 그 여자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서, 그 여자가 살아 있음을 보여 주었다. 42 그 일이 온 욥바에 알려지니,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게 되었다.”
사도행전 20:9–12 “9 유두고라는 청년이 창문에 걸터앉아 있다가, 바울의 말이 오랫동안 계속되므로,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몹시 졸다가 삼 층에서 떨어졌다. 사람들이 일으켜 보니, 죽어 있었다. 10 바울이 내려가서, 그에게 엎드려, 끌어안고 말하기를 “소란을 피우지 마십시오. 아직 목숨이 붙어 있습니다” 하였다. 11 바울은 위층으로 올라가서, 빵을 떼어서 먹고 나서, 날이 새도록 오래 이야기하고 떠나갔다. 12 사람들은 그 살아난 청년을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래서 그들은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다.”
이외에도 감옥문이 열리는 사건이 두번, 귀신을 쫓은 사건 등 초자연적인 기적들이 숫하게 일어났습니다.
왜 사도행전에서는 이렇게 많은 기적들이 일어났을까요?
사도행전에서의 기적은 복음의 진리를 증명하고 교회가 성장하고 믿음의 확장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런 일들을 통해서 사도행전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공적인 자리로 나아오기 시작했고 스스로가 그리스도인으로 공개적인 자리에서 세상이 보는 앞에서 복음이 진짜라는 것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기에 이 기적은 탁월한 효과가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신앙은 공적인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신앙이 너무도 사적인 것으로 변했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지요. 그런데서 그렇게 기도하고 찬양하고 그러면 안되요.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는 그냥 좀 조용히 있어요. 우리끼리 있을때 그렇게 합시다.
그래서 신앙을 가지고 있다가 회사에 출근하면 차에 넣어놓고, 우리 아이들은 가방속에 집어 넣고, 엄마들은 집에다 두고 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신앙을 사용할 때는 우리의 소원과 염려, 개인적인 수많은 것들을 위해 사용할 때가 많습니다.
세상을 위해 신앙을 사용할 때도 지극히 우리 입장에서 요구합니다.
유대인이 삶의 태도로 가지고 있던 “티쿤올람”처럼 세상을 유익하게 개선시키는 행동이 아니라 우리의 종교적 입장을 주장하는 것으로 사용되어 집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자신들에게 맡긴 신앙을 공적인 광장으로 끌고 나오기 시작합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제자들이 당시 가장 붐비는 절기중에 일어났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붐비는 곳에서 방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일을 수많은 사람들이 보고 목격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신앙을 가지고 공적인 장소로 들어갑니다. 지난번 뷔제이 선교사님이 설교했던 공적광장이 등장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신앙을 공적광장으로 끌고 갑니다.
정치권력의 가장 깊숙한 곳, 사회적으로 가장 공신력있게 느껴지는 곳에서 바울은 복음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는 곳은 밀실이 아니었습니다.
사도들은 복음을 가지고 공적으로 살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바울에게 호의적이었던 로마총독 베스도가 헤롯 아그립바2세가 자신에게 방문하자 좋은 판결을 받게 하려고 바울을 아그립바 왕앞에서 변호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줍니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와 둘러쌓여 있는 권력자들 앞에서 자신이 예수그리스도를 만난 이야기와 구약의 예언대로 고난받고 죽으셨다가 다시 사셨다는 것을 거침 없이 이야기합니다.
베스도는 이것이 불리할까봐 “바울아 네가 미쳤구나”라고 멈추게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말하는 이 복음이 지극히 이성적이며 진리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1. 복음은 보편적인 진리입니다.
단지 신비로운 환상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말한 복음은 역사적 사건 속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26절에서 임금님은 지금 이 일을 이미 알고 계시지 않느냐. 어느 한 구석 숨어서 몰래 일어난 일이 아니라 다 알만 한 일이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복음의 공공성과 보편성을 말합니다. 복음은 비밀이 아닙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해석을 해주어야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비로 가득찬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누구나 다 알만한 역사적 사건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수많은 사람들이 목격한 공공성을 가진 일이며 누구나 다 볼수 있고 알수 있는 곳에서 일어난 보편적인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청소년들과 청년들이 가끔 이 복음,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을 이해가 안된다고 말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이해를 하려고 하니까 이해가 안되는 것입니다. 이 일은 이해해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지극히 이성적이고 역사적으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시작이 됩니다. 왜 이 일은 숨겨진 일이 아니라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목격한 지극히 보편적인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순신장군이 명량해전에서 13척의 배로 수백척의 일본배를 침몰시켰다는것이 이해가 됩니까? 일본군들은 이해를 못했어요. 믿지를 않았어요. 역사적 사건을 이해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사실이기 때문에 그렇게 아는 것입니다.
예수와 관련된 일들도 그렇다는 것을 바울이 아그립바왕에게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아그립바왕은 28절에서 그대가 짧은 말로 나를 설복해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고 하는가 묻습니다.
짧은 말은 이 얼마안되는 시간동안 설득한 말을 말합니다. 이 정도의 말로 설득하는가 묻습니다.
바울 29절에서 복음은 짧게 말고 길게말하는게 중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복음을 화려한 언변이나 말솜씨로 알게 하는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복음이 얼마나 진리이며 보편적인가를 다시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복음은 높으나 낮으나, 부유하나 가난하나, 많이 배우거나 안배우거나 상관없이 동일하게 전해진다는 것입니다. 또한 복음을 전하는 것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 복음으로의 초청은 포괄적인 초청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또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임을 말합니다.
복음을 통한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인가,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2:4 (NKSV)
4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얻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바울은 자신처럼 감옥에 갇힌 것 말고 왕도 자신과 같이 되기를, 아니 이 말을 듣고 있는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이 자신과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회사에 있던지, 학교에 있던지, 어디에 있던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살때에는 이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신앙이 지극히 개인적일 때는 이런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복음으로의 초청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공적으로 바뀌게 되면 어디서든지 누구에게든지 복음을 말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너무 눈치도 없고 베려가 없어가지고 공적인 생활속에서 그리스도인이 빌런이 되면 안됩니다.
요즘 나는 솔로다 이런 프로그램에서 기독교인들은 공공의 적이 되어가고 있어요. 빌런이 되어가고 있어요.
이런 때에 cbs에서 아주 도전적인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홀리한 내짝! 그리스도인들간에 만남을 주선하는 티비방송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번주 수요일 토다의숲에서 촬영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이 공적인 신앙이 되는 순간 우리의 삶의 태도는 너무도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태도가 이웃을 사랑하는 태도로 동일하게 나타나게 됩니다.
역으로 이렇게 해석하면 됩니다. 내가 이웃이나 타인에게 하는 행동이 하나님께 하는 행동과 동일하다 라고 말이죠.
그러면 우리의 삶의 태도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정리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개인적이고 숨겨진 생활이 아닙니다.
우리는 보편적이고 역사적인 진리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가진 이 신앙을 가지고 공적인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공적광장으로 가지고 가야 합니다. 가방안에 넣어 놓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 속에 파묻혀 살아가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이 내 삶을 책임지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을 책가방속에, 차속에, 집안에 넣어놓은채로 이 순간만큼은 저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야돼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2:29–31 (NKSV)
29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고 찾지 말고, 염려하지 말아라.
30 이런 것은 다 이방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31 그러므로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공적인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사적인 삶에 갇혀 있지 말고 공적인 삶,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삶을 살고 그것을 구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이렇게 해야 우리는 복음을 우리 삶안에서 공적인 자리로 가지고 갈 수 있습니다.
공적인 자리, 공적광장이 어디라고 그랬죠. 우리가 살아가는 아주 보편적인 현장,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자리가 아니라 누구나 다 있을 수 있고 누구나 다 볼 수 있는 장소입니다.
도시 안, 학교, 회사, 카페, 버스 안…사람드리 제약없이 있을 수 있는 모든 곳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복음을 붙들고 살아가는 우리는 공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공적인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신앙이 개인적이지 않고 공적인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한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한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공적인 삶을 사는 신앙인이 되면 우리의 태도는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이처럼 천대받는 이유는, 우리가 신앙인임을 자랑스럽게 말하고 다니지 못하는 이유는
성도들이 신앙을 가지고 공적인 삶을 살지 않아서 입니다. 신앙을 복음을 공적인 자리로 가지고 가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숨기고 사니 우리의 삶의 태도가 거짓되어도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들키게 되면 신앙이 부끄러워지고 교회가 부끄러워지는 것입니다.
한주동안 우리 신앙이 공적이고 보편적인 자리에서 드러날 수 있는 삶을 사시길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