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진 여인의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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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달라진 여인의 관심
본문: 요한복음 4:15-21
찬송: 493장 하늘 가는 밝은 길이
제목: 달라진 여인의 관심
본문: 요한복음 4:15-21
찬송: 493장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말씀의 문을 열며>
오늘은 우리의 관심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4세기 위대한 교부 히포의 어거스틴은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를 해석하면서 아주 독특한 통찰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이 여인이 5명의 남편이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어거스틴이 말하기를, 인간은 처음에 다섯 가지 감각, 곧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만지는 것에 사로잡혀 살아간다고 했습니다. 마치 이 여인이 다섯 명의 남편에게 매여 살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도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관심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확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혈압은 잘 유지되는, 당 수치는 괜찮은지, 관절은 아프지 않은지, 오늘은 어떤 반찬을 먹을지… 자녀들과 통화할 때는 손주들이 학원은 잘 다니고 있는지, 며느리나 사위와 잘 지내고 있는지를 묻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오감에만 매여 살다보면, 어느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려는 더 깊은 것들을 놓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말합니다. 인간이 영적 이성으로 깨어날 때, 비로소 더 높은 지혜를 찾기 시작한다고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는, 바로 이렇게 세상적 관심에서 영적 관심으로 변화되어 가는 한 인생의 여정을 보여줍니다.
<육신의 필요에만 관심을 둔 여인>
이 여인은 예수님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된다”라고 말씀을 듣고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로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첫 관심사는 단순히 물 길으러 다니는 수고를 덜고 싶었던 것입니다. 매일 뙤약볕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물을 길으러 오는 것은 여간 고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라는 표현을 듣고도, 그저 “다시는 물 길러 오지 않아도 되는 편리한 물” 정도로만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여인의 이러한 모습은 오늘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종종 신앙생활을 통해 현재 눈 앞의 어려움만 해결받으려 하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새벽기도에 나와도 자기의 소원만 아뢰입니다. “주님, 자녀 취업시켜 주세요.”, “사업장 번성케 해주세요.”, “이번 수술 잘 되게 해주세요.” 하는 기도제목을 가지고 기도를 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런 기도제목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적 필요도 돌보시는 분이시니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갑자기 사마리아 여인에게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얼핏 보면 뜬금없는 말씀 같지만, 이는 그녀의 관심을 더 깊은 차원으로 이끌기 위한 주님의 전략적인 질문이었습니다. 마치 오늘 우리에게 “네 삶의 실체는 무엇이냐?”, “네 영혼의 갈급함은 어디서 해결받고 있느냐?”고 물으시는 것과 같습니다.
여인이 물을 길으러 나왔던 야곱의 우물은 단순한 우물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야곱이 그의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었고, 수천 년간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 유산이 담긴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그저 물만 길으러 왔다가, 예상치 못한 대화를 통해 자기 삶의 진정한 목마름과 마주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겠죠. 주일예배, 새벽기도, 아니면 또 다른 기도모임 등 이런 신앙생활이 그저 일상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남편을 불러오라.” 이는 곧 “네 삶의 진정한 모습으로 나와 함께 마주하자”라는 초청입니다.
<자신의 실존과 마주한 여인>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의 갑작스런 이야기에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요 4:17a)라고 대답합니다. 아마 여인은 속으로 부끄러웠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더 이상 대화를 피하고 싶은 마음으로 남편이 없다고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여인의 대답은 형식적으로는 맞는 말이었습니다. 현재 함께 살고 있는 남자가 법적인 남편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는 진실의 절반만을 말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인의 깊은 상처와 아픔을 정확하게 짚어내십니다. 17절에서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단순히 그녀의 과거를 폭로하시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부족한 모습을 지적하시되, 그것을 치유와 회복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깊이 생각할 것은 예수님의 태도입니다. 주님은 이 여인을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네 말이 참되도다”(요 4:18b)라고 하시며 그녀의 정직성을 인정해주셨습니다. 이는 마치 의사가 환자의 병을 진단하되 치료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순간 여인의 마음은 여러가지 생각으로 무척 복잡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삶이 예수님 앞에 벌거벗겨진 것 같은 부끄러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동시에 “이 사람은 내 인생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구나”하는 놀라움도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와 같은 순간이 필요합니다. 진정한 신앙생활은 나의 모든 모습을 하나님 앞에 있는 그대로 내어놓을 때 시작됩니다. 주일마다 예배당에 나오면서도 우리는 참 많은 것을 숨기고 하나님 앞에서 서 있습니다. 우리가 집사님, 권사님 이렇게 서로를 부르고 불리지만, 속마음은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하지는 않는습니까?
제가 이렇게 말씀 드린다고 해서 어떤 부족함을 들추고 정죄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의 부족함이 드러나는 순간이 바로 은혜의 시작점이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여전히 사랑으로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마리아 여인처럼 주님 앞에 솔직해지는 용기있는 모습입니다.
<영적 관심으로 나아간 여인>
이제 사마리아 여인은 용기를 내어 예수님을 부릅니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놀라운 변화가 그녀에게 일어난 것이지요. 자신의 과거를 정확하게 알고 계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19절부터 여인의 관심이 달라진 것을 보여줍니다.
여인은 계속해서 20절에서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녀의 말은 “그리심 산과 예루살렘 성전, 어디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라는 질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는 가장 첨예한 갈등이 있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자기 조상 때부터 그리심산에서 예배드렸다고 주장했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만이 유일한 예배 처소라 고집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참으로 놀랍기만 합니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 살렘에서도 말고…” 이는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간혹 이런 분들이 계십니다. 큰 교회에 가면 은혜를 더 받을 것 같고, 유명한 기도원에 가면 기도 응답을 더 잘 받을 것 같고…
하지만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요 4:23) 예수님이 말씀하신 ‘영과 진리’는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찬고 만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큰 교회가 은혜를 더 받고, 유명한 기도원이 더 응답을 받는다면 하나님은 온세상 교회를 다 크고, 기도원들은 아주 유명한 곳으로 만들어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어디에 있든, 설교자가 누구이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동안 교회를 다녔지만 형식적인 예배만 드렸다면, 새벽에 기도했지만 습관적인 기도만 했다면, 이제 우리도 달라져야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그저 의무감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아버지를 뵙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보여준 이 변화가 바로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물을 길으러 왔다가 생수를 발견하고, 종교적 논쟁을 하러 왔다가 참된 예배를 깨닫게 된 것처럼, 우리도 형식을 넘어 본질로, 겉모습을 넘어 진실한 예배자로 나아야 하겠습니다.
<말씀의 문을 닫으며>
이제 말씀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한 여인의 변화되는 모습을 통해 귀중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우리도 처음에는 보고 듣고 만지는 것, 곧 오감의 필요에만 집중했습니다. 주님께 나아와도 건강과 물질, 자녀의 성공 같은 현실적인 필요만을 구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를 그 자리에 머물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네 남편을 불러오라” 하시며 우리 삶의 깊은 곳을 만지셨습니다. 때로는 부끄럽고, 때로는 아프고, 때로는 숨기고 싶은 모습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우리는 비로소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의 관심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다시 한번 물어봅시다. 아직도 일상의 필요를 채우는 데만 급급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만나러 오는 것이 아니라, 그저 교회에 출석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마리아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달려갔습니다. 더 이상 물이 필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제 우리의 작은 물동이들을 내려놓읍시다. 주님 앞에 우리의 모든 것을 내어놓고,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리로 나아가는 우리 중앙교회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가지 적용
첫째, 매일 아침 기도 시간에 형식적인 기도가 아닌, 주님과의 진실한 대화를 나눕시다.
둘째, 주일예배를 드릴 때 습관적인 참석이 아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시간으로 삼읍시다.
셋째, 우리가 받은 은혜를 이웃과 나누는 일에 더 큰 관심을 가집시다.
참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도 말씀을 통해 우리를 가르쳐 주시고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피상적이었는지 깨닫게 하시니 민망하기 그지없습니다. 마치 사마리아 여인처럼 우리도 일상의 필요, 육신의 만족만을 구하며 살았습니다. 깊이 있는 영적 만남을 피하고, 때로는 주님 앞에 솔직하지 못한 모습으로 살아왔음을 고백합니다.
하지만 주님,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보여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의 연약한 모습도, 부족한 모습도 주님 앞에 있는 그대로 내어놓을 수 있는 은혜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저희가 결단합니다. 더 이상 겉모습의 신앙생활이 아닌 주님과의 깊은 만남을 사모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매일의 기도 시간이 형식적인 시간이 아닌 아버지와의 친밀한 교제의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고,
주일예배를 드릴 때마다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을 예배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말씀을 들을 때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이 아니라 내 삶에 적용하고 실천하는 성도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특별히 주님, 우리가 받은 은혜를 이웃과 나누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마리아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두고 기쁜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전하는 참된 증인의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말씀을 듣기만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시고 행함이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관심이 세상의 것에서 영원한 것으로 옮겨가게 하시고, 날마다 주님을 더 깊이 알아가는 은혜를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