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한 번도 혼자가 아니었다(왕상19: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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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4년 11월 20일 수요일
제목 : 당신은 한 번도 혼자가 아니었다
본문 : 열왕기상 19:9-14
1. 그 누구보다 헌신했지만, 절망적인 현실을 맞이해버린 우리
1) 엘리야, 그도 한때 최선을 다했다
‘아브라함’ 하면 이삭을 드렸던 사건이 가장 먼저 떠오르시겠죠. ‘룻’ 하면 나오미라는 인물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입니다. 그렇다면 ‘엘리야’는 어떠십니까? ’엘리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건은 아마도 갈멜산 사건일 것입니다.
갈멜산 사건은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400명을 상대로 제단 위에 불을 누가 내리게 하냐로, 누구의 신이 더 참 신인가를 겨루는 영적 전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에서 우리는 엘리야가 압도적으로 이겼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엘리야가 갈멜산 사건을 통해 얻은 승리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짜릿했을 것입니다. 또 압도적으로 이겼다는 현장에서 오는 쾌거와 이로인해 치솟는 자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겠죠.
그러나 갈멜산 사건 직후, 엘리야의 모습에선 승리의 짜릿함도 하늘을 치솟던 자신감도 넘쳐 흐르던 쾌거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바닥을 쳐도 이렇게까지 칠 수 있나 의심이 될 정도로 심각하게 무너져 내리죠.
엘리야는 분명 하나님의 부르심에 충성을 다해 진심으로 순종했습니다. 그는 분명 갈멜산 사건을 앞두고 “내가 섬기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그들에게 보이겠노라” 결단하며 당차게 걸어갔지만, 갑작스런 우울증과 절망과 실패, 그리고 영적으로 무너짐을 겪으며 “차라리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부르짖을 정도로 아주 완벽하게 바닥을 치는 삶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 시대에도 아니 우리 주변에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충성으로 순종하는 자들이 결코 적지 않습니다. 섬김의 자리를 그 누구보다 지켜왔고, 잘 모른다 싶으면 따로 시간을 내어서라도 최선을 다해온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꽤 많은 이들이 엘리야처럼 바닥을 치는 삶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또는 지금도 최선을 다하곤 있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공허해 언젠간 넘어질 것만 같은 상황에 놓인 이들도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오늘 본문 속 엘리야의 심정이 더욱 공감되는 듯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어떠십니까? 엘리야의 이 심정이 공감되십니까? 아니면 엘리야와 같은 그런 시절을 이미 겪어보셨습니까? 그때 어떻게 이를 회복하셨습니까?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 절망 속에 놓인 엘리야가 어떻게 회복했는가를 함께 나누려 합니다.
2. 절망에 빠진 엘리야
1) 절망에 빠진 엘리야 : 1. 정서적 요인, 충격과 두려움
그에게 갈멜산 사건은 어쩌면 ‘모두가 하나님을 알게 할 부흥의 바람’이 몰아칠 것을 기대하는 시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의 승리로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라고 외치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금세 어긋나기 시작하죠. 영적 전쟁에서 패배한 아합이 곧장 그가 겪은 모든 일을 이세벨에게 전합니다. 그러자 이세벨은 이런 행동을 취하죠. 2절,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쉽게 말해 무엇입니까? “내가 엘리야, 반드시 죽이겠다!” 이거 아닙니까? 엘리야는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심을 전달한 영웅이었지만 이제는 생명을 위협받는 수배자가 되었습니다. 영웅에서 수배자로, 한 순간에 탈바꿈했기에 엘리야는 충격을 안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두려웠을 것입니다. 사실 그는 애당초 겁이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과거 그는 아합 왕의 궁전에, 이세벨 왕후의 궁전에 그는 당당히 걸어 들어 갔었습니다. 심지어 당당히 살아 걸어 나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당당함은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세벨의 행동에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치는 엘리야의 모습만 보일 뿐입니다.
2) 절망에 빠진 엘리야 : 2. 신체적 요인, 고립과 탈진
그리고 그의 도망은 곧 ‘고립’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이제 정말 그는 혼자 남았습니다. 그릿 시냇가에서 먹이를 공급하던 친구, 까마귀 조차 이젠 그의 곁에 없습니다. 오로지 혼자만의 시간을 견뎌야 합니다.
사실 견딤이 아니라 스스로 고립의 상황을 만들어 버린 거죠. 제 3의 누군가로부터 버림을 받아서 혼자가 되어 지금의 고립을 견뎌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 두려워 도망치다 스스로가 고립된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고립은 엄청난 화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도마를 생각해봅시다. 그는 예수님을 팔았고, 죄책감 때문일까요?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처음 나타나셨을 때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혼자였습니다. 그는 고립되었습니다. 그리고 도마의 고립은 염려와 우울증을 키워내는 모판이 되었죠. 엘리야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설상가상 ‘탈진’까지 겪죠. 지난 날 그의 하루 하루는 치열했습니다.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심을 전하기 위해 갈멜산에서 그는 강렬한 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리곤 손 만한 작은 구름에서 비가 내려 마차를 타고 이스르엘로 달려가는 아합보다도 더 먼저 쉼 없이 이스르엘로 달려갔고, 이제는 이세벨의 위협에 그는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브엘세바로 향하기까지 합니다.
그동안 성경은 그가 쉼 없이 달려간 길에 무엇을 먹었는지 무엇을 마셨는지 기록하지 않습니다. 정말 그가 먹고 마실 시간조차 없이 달려왔다라면 탈진 상태에 빠진다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정상일지도 모릅니다.
3) 절망에 빠진 엘리야 : 3. 심리적 요인, 전적 실패 콤플렉스와 사실 왜곡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엘리야의 상태는 온전치 않습니다. 그렇다보니 상황을 정상적으로 판단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어 보이죠.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외칩니다. 4절,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갈멜산에서의 엘리야를 다시 꺼내봅시다. 그의 용기, 그리고 결과를 생각하면 완벽한 승리고 성공 아닙니까? 이를 실패라 생각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하지만 온전치 않은 지금의 엘리야는 ‘완벽하게 실패했다’고 생각합니다. “주님! 할 만큼 했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지만 모두 헛수고였어요. 노력했지만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분명 크게 성공한 것 같았는데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결국 저는 실패자입니다. 어쩌면 주님의 사역도 실패겠네요. 저는 이전 세대 사람들보다 나을 게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 그만두렵니다. 이제껏 제 모든 일은 허사에 불과하니 이제 제 생명을 거두어 가십쇼.”
그는 전적으로 실패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이제는 죽고자 하나님께 애원합니다. 그걸로 끝납니까? 이젠 사실을 왜곡하기도 하죠. 분명 엘리야에겐 오바댜와 그리고 그가 숨겼던 여호와의 선지자들 100명이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엘리야는 그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나만 남았거늘”이라 말하며 아무도 없다고 말합니다. 또 이세벨은 그저 죽이겠다 메세지만 남겼을 뿐인데 마치 그는 군대가 자기를 쫓아오는 것마냥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한다” 고 외치기까지 합니다.
4) 절망에 빠진 엘리야 : 4. 영적 요인, 기도 응답에 대한 불신 그리고 사탄의 공격
정서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이만하면 충분히 엘리야가 얼마나 절망 가운데 있는지 알 수 있지만, 사실 엘리야가 정말 절망적인건 영적인 요인들입니다.
그가 절망 중에 절망에 놓인 이유는 먼저 기도 응답에 대한 불신이 그 안에 있었습니다. 갈멜산 사건에서 그는 분명 이렇게 기도했죠. “하나님! 저 사람들이 여호와는 하나님이심을 알게하시옵소서!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켜 주시옵소서!” 어떻게 됩니까? 이루어졌잖아요. 엘리야의 기도는 응답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이세벨이 협박하자 기도 응답을 직접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루어진 모든 것을 부정합니다. 엘리야가 정말 절망적인건 지금 엘리야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는 겁니다.
3. 치유하시는 하나님
1) 치유하시는 하나님 : 1. 기력 회복, 잠과 먹고 마실 것을 주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야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절망에 빠진 엘리야를 하나님은 회복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네 단계를 거쳐 회복을 허락하시는데, 먼저는 기력을 회복시키십니다.
먹고 마심없이 또 쉼 없이 걷고 또 걸었습니다. 탈진으로 지쳐 쓰러져 차라리 죽여달라 외치는 엘리야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쉼’ 입니다. 5-7절,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한동안 엘리야는 먹고 마시고 자고를 반복했습니다. 그릿 시냇가에서 까마귀가 주던 것과는 달리 이제는 천사가 직접 나서 구운 떡과 물을 공급합니다. 그러다 잠에 들고, 또 때가 되면 어루만지며 다시 먹을 것을 줍니다.
하나님은 먹고 마실 것만 주신게 아닙니다. 잠도 주셨죠. “잠은 자연스러운 신체의 반응 아닙니까?” 말할 수 있지만, 잠은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닙니다. 시편 127편 2절은 “여호와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고 기록합니다. 엘리야에게 허락된 잠은 애당초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엘리야를 향한 하나님의 선물인거죠.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침대에 누워 먹고 마시고 잠들기를 반복합니다. 지금 당장은 해야 할 일에 대해 그 어떤 누구도 이야기 하지도, 연락이 오지도 않습니다. 오로지 쉼에만 집중할 수 있는 이 시간, 너무나 달콤해보이지 않습니까? 엘리야는 그렇게 아주 완벽한 쉼을 통해 기력을 회복합니다.
2) 치유하시는 하나님 : 2. 정체성 회복, 호렙산으로!
쉼을 통해 기력을 회복한 엘리야는 다시 일어나 걷습니다. 차라리 죽여달라던 엘리야는 온대 간대 없고 다시 밤낮 40일을 걸어 호렙산, 즉 시내산에 이르게 됩니다.
근데 왜 하나님은 밤낮 40일에 거쳐 시내산으로 인도하셨을까요? 시내산은 어떤 곳 입니까? 과거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에게 큰 능력과 많은 표적으로 스스로를 계시하셨습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들과 언약을 맺으시며,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내산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새로운 정체성과 사명을 얻게 되는 곳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시내산으로 부르심은 엘리야의 정체성이 회복되길 바람이었습니다.
회복되어야 할 엘리야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 아닙니까? 익숙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아주 중요한 이 정체성을 다시 한 번 더 일깨워 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엘리야를 시내산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날 우리 역시 정체성을 잃지 않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교회로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예배로 부르셨습니다. 왜요? 우리의 정체성은 현세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쫓아야 하는지, 무엇을 지켜 행해야 하는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발견하고 다짐하고 결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치유하시는 하나님 : 3. 사명의 회복, “네가 어찌하여 여기에 있느냐!”
기력이 회복되가고 정체성의 회복을 누려가던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사명을 회복시키고자 이제 묻습니다. 9절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사실 하나님은 강압적으로 엘리야를 일으키실 수 있었습니다. 번아웃이 온 엘리야에게 “지금 네가 이럴 때냐”고 쓴소리를 하실 수 있었고, 핀잔을 주어 정신이 번쩍 들게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미한 소리를 통해 엘리야의 마음을 어루만지셨어요. 물론 하나님의 세미한 소리가 엘리야 입장에선 가슴을 파고드는 천둥 번개와 같은 큰 소리였을진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하나님은 세미한 소리로 물으셨습니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은 엘리야의 사명을 회복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엘리야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을 그들의 참 정체성과 사명으로 되돌리고 오직 여호와만을 그들의 하나님으로 예배하는 소명으로 되돌리는 것이 엘리야의 소명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엘리야를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 아닙니까?
그렇게 중요한 사명을 잊고 살아가는 엘리야에게 책망하시기 보다, 불 같이 화 내시기 보다 하나님은 부드럽게 어루만지셨습니다. 마치 상한 갈대와 같았던 엘리야를 하나님은 꺾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이를 접붙여 다시 회복시키셨습니다.
4) 치유하시는 하나님 : 4. 확신의 회복, 네 길을 돌이켜 가라!
그렇게 회복된 엘리야의 사명에 이제 확신을 더하십니다. 이전보다 더 큰 일을 맡기시는데, 15절과 16절 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점차 회복의 대로를 걷던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그래 힘들었지? 고생이 많아. 아직 상처가 남았으니 고향에서 쉬다가 다 쉬었다 싶으면 그때 다시 움직여보자!” 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더 큰 사명으로 부르심에 확신을 더하십니다.
하사엘에게 아람 왕이 되도록 기름을 붓게 하시어 장차 국제 정세를 논하게 하시고,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사 훗날 이스라엘의 미래를 그려나가게 하셨으며,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자신의 후계자를 세우게 함으로 말미암아 역사의 한 페이지를 계속해서 써 내려가도록 하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아주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알려주고 싶으셨던 거에요. 넌 한 번도 혼자가 아니었다고. 너가 고통스러워 할 때도 나는 함께 있었고, 너가 혼자라 생각할 때도 나는 그 곁에 있었다고.
4. 당신은 한 번도 혼자가 아니었다
1) 폭풍 속에 두려워하는 제자들, 그들을 찾아오신 예수님
요한복음 6장엔 오병이어 사건 이후 예수님의 제자들은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이동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이들은 큰 바람을 만나 폭풍을 마주하게 되는데, 예수님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자 끝내 이들은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만 같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요한은 파도가 심하게 쳐 머리와 옷이 다 젖었다던가, 젓던 노가 반으로 부러졌다던가, 배 안으로 물이 차 점점 가라앉게 되었다던가 하는 그 순간을 묘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주 빠른 전개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자들을 향해 어떤 이야기가 펼쳐지는지 기록합니다. 어떻게요?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가 알아야 할 내용은 그게 전부인 거예요. 예수님은 폭풍을 잠잠케 하시기 전에 폭풍 가운데로 걸어 제자들에게 가셨습니다. 그리곤 말씀하세요.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폭풍우가 멈추는 것보다 더 중요한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절망 가운데 놓인 엘리야에게도,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 상황을 벗어날 다른 무언가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천재지변이 일어나 엘리야를 겁박한 이세벨이 사망에 이른다거나, 갑자기 폭풍이 잠잠해지는, 그런 상황이 필요한게 아니라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 이었어요.
2) 불안한 현실 속에 놓인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 “너는 혼자가 아니란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이 불안 가운데 삽니다. 정말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사는데 자신이 없어요. 이유는 모르겠는데, 정말 불안합니다. 그래서 저도, 또 우리 성도님들의 미래도 어떻게 될련지 한치 앞도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진심으로 여러분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새 힘을 내고 일어서야 하는 겁니다. 비록 내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들을 왜 주시지 않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사랑하시는 그 아들을 주셨잖아요.
고난 뒤에 성공이 오는 것이 영광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광은 고난 중에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광입니다. 절망 중에도 나를 위해 울며 끌어 안아 주시는 예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영광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이 자리에 모인 우리에게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는 단 한 번도 혼자가 아니었다고. 내가 너와 항상 함께 하고 있었다고.
[결단찬양 및 기도]
1. 이것이 영원한 삶 A + 내 삶 드리리 A(후렴)
- 정말 최선을 다해 섬기고 봉사하는 우리인데 절망과 낙망을 마주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때로는 헛헛하기도 하고, 때로는 씻지 못할 상처로 아파 울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세상의 방법을 찾아 위로 받고, 치유되길 소망했지만 이는 오래가지 못해 끝내 다시 아파했습니다. 이 시간 기도하실 때, 주님 내 안에 상처가 너무나 많습니다. 이 아픔들 모두 주님의 방법으로 치유하여 주시옵소서. 내 마음의 모든 짐들 내려놓고 주님의 세미한 음성에 귀 기울여 주께서 허락하신 회복을 경험하는 우리 되게 하소서
- 지금 당장은 다시금 하나님 앞에 돌아와도, 금세 세상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우리입니다. 참으로 연약하고 어리석어 내 삶이 주의 것임을 또 놓쳐 살아갑니다. 간절히 바라옵기로는, 오늘도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내 모든 삶 드려 내게 허락하신 사명이 회복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날 부르신, 날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나를 통해 성취되도록 나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2.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며 A
- 엘리야가 홀로 걷는 것같은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폭풍 속에서 두려워하실 때에도 예수님은 그들 곁에 계셨습니다. 오늘 날 우리가 빈 들에서 홀로 걸어간다 느낄 때도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이 시간 기도하옵기로는 나의 찬양이시며, 나의 영광되시는 하나님을 바로 알아가게 하여주시옵소서. 영원히 주님을 찬양하게 하시며, 평생토록 주님을 경배하는 우리 되게하소서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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