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합은 왜 붉은 줄을 달았을까? 2024 1124 수2: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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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2:15–21 (NKRV)‌
15 라합이 그들을 창문에서 줄로 달아 내리니 그의 집이 성벽 위에 있으므로 그가 성벽 위에 거주하였음이라 16 라합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렵건대 뒤쫓는 사람들이 너희와 마주칠까 하노니 너희는 산으로 가서 거기서 사흘 동안 숨어 있다가 뒤쫓는 자들이 돌아간 후에 너희의 길을 갈지니라
17 그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에게 서약하게 한 이 맹세에 대하여 우리가 허물이 없게 하리니 18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 내린 창문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버지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19 누구든지 네 집 문을 나가서 거리로 가면 그의 피가 그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우리는 허물이 없으리라 그러나 누구든지 너와 함께 집에 있는 자에게 손을 대면 그의 피는 우리의 머리로 돌아오려니와 20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면 네가 우리에게 서약하게 한 맹세에 대하여 우리에게 허물이 없으리라 하니
21 라합이 이르되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 하고 그들을 보내어 가게 하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니라
오늘 설교는 ONE FOR ISRAEL MINISTRY 의 히브리어 묵상을 인용하고 참고하여 각색한 설교임을 밝힙니다.

1.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언제 우리는 희망을 찾는가? 성경에 희망, 소망이라는 단어가 의외로 조금 밖에 나오지 않는다. 구약에서는 약 80여회 정도, 그리고 신약에서는 그보다 적은 수의 희망이라는 단어가 사용됐다. 우리가 성경 안에서, 하나님 안에서, 예수 안에서 희망, 소망을 발견한다는 어떤 테마, 주제의식을 생각할 때 생각보다 이 단어의 사용이 굉장히 적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 이 단어는 욥기, 시편, 이사야, 예레미야 서와 같은 성경 기자들이 힘들고 어렵고 고통 당하는 상황 가운데에서 사용됐다. 즉, 이 소망이라는 단어는 힘들고 어려운 우리의 삶 속에서 더 많이 발견되고, 사용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이 자신들이 겪고 있는 소망을, 희망을 찾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있었기에 그것이 얼마나 간절한지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소망은 잘 보이지 않는다. 소망, 희망 이런 것들이 눈에 보이는가? 손에 잡힐 듯이 선명한 것인가? 오히려 그렇지 않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소망이라고, 희망이라고 부르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하게도 예레미야는 자신의 상황에서 역설적인 말씀을 선포한다.
예레미야 29:11 (NKRV)
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
또 히브리서 기자도 마찬가지이다.
히브리서 12:2 (NKRV)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요즘 뉴스를 보면 소망이라 부를 것이 없는 요즘 시대 같다. 소망을 이야기하면 마치 그것은 소원을 비는 것이나 꿈을 꾸는 것으로 치부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성경은 단호하게 이야기 한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우리 소망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 원래 소망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미래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것이 이뤄지면 좋고 아니면 마는 신기루와 같은 것으로 여기지만, 우리는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나의 길을 인도하시고 나의 삶을 이끌고 계셔서 소망을 그의 안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히브리서 6:19 (NKRV)
19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우리의 소망은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이 아닌, 하나님 안에서 분명하고 확실하고 확고한 미래적 사실이 될 것이다. 결국엔 승리요, 결국엔 희망인 보이지 않는 우리 주 하나님을 바라보는 우리가 되길.

2. 예수가 우리의 생명줄입니다.

오늘 본문 여호수아서에 나오는 여리고성에 살았던 라합도 그 소망을 붙잡았던 사람이다. 여리고 성 주민들은 요단강을 건너 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려워했다. 그러던 중 두 정탐꾼이 여리고 성에 숨어들었고, 라합이라는 한 여자가 그들을 자신의 집에 숨겨 주었다. 라합은 그 두 정탐꾼에게 이렇게 고백한다. 우리는 당신들의 소문을 들었고, 당신들의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인 줄 들어 알았다는 고백을 한다. 실로 위대한 고백이다. 눈으로 보고, 만져져서 믿은 것이 아니라,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을 보여준 사람이 라합인 것이다. 그리고 두 정탐꾼을 보내줄 때 특이한 장면이 있다.
여호수아 2:15 (NKRV)
15 라합이 그들을 창문에서 로 달아 내리니 그의 집이 성벽 위에 있으므로 그가 성벽 위에 거주하였음이라
여호수아 2:15 (BHS OT)
15 וַתֹּורִדֵ֥ם בַּחֶ֖בֶל בְּעַ֣ד הַֽחַלֹּ֑ון כִּ֤י בֵיתָהּ֙ בְּקִ֣יר הַֽחֹומָ֔ה וּבַֽחֹומָ֖ה הִ֥יא יֹושָֽׁבֶת׃
헤벨 חבל. 지금 현대 히브리어에서도 코드, 로프, 줄. 평범한 줄. 어떤 영역을 나누는 선을 의미하기도 하고, 추상적으로 우리의 슬픔과 고난의 한계를 정하는 곳에도 쓰이기도 함. 말 그대로 창문에서 성벽 아래도 도망칠 수 있게 줄을 내린 것이란 말.
그런데 정탐꾼들이 자신들을 살아서 나갈 수 있게 해준 라합에게 다시 은혜를 베풀 때에 하는 말이 서로 다른 단어로 기록되어 있다.
여호수아 2:18 (NKRV)
18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 내린 창문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버지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여호수아 2:18 (BHS OT)
18 הִנֵּ֛ה אֲנַ֥חְנוּ בָאִ֖ים בָּאָ֑רֶץ אֶת־תִּקְוַ֡ת חוּט֩ הַשָּׁנִ֨י הַזֶּ֜ה תִּקְשְׁרִ֗י בַּֽחַלֹּון֙ אֲשֶׁ֣ר הֹורַדְתֵּ֣נוּ בֹ֔ו וְאֶת־אָבִ֨יךְ וְאֶת־אִמֵּ֜ךְ וְאֶת־אַחַ֗יִךְ וְאֵת֙ כָּל־בֵּ֣ית אָבִ֔יךְ תַּאַסְפִ֥י אֵלַ֖יִךְ הַבָּֽיְתָה׃
정탐꾼들이 라합에게 “우리를 도망치게 내려줬던 그 줄”을 다시 매달아놓으라고 함. 그런데 색깔이 있음. 붉은 줄. 더 재밌는 사실은 분명히 라합이 내렸던 그 똑같은 줄인데, 헤벨을 쓰지 않고 다른 단어를 사용했음. 티크바.
21절도 읽어보자.
여호수아 2:21 (NKRV)
21 라합이 이르되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 하고 그들을 보내어 가게 하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니라
여호수아 2:21 (BHS OT)
21 וַתֹּ֨אמֶר֙ כְּדִבְרֵיכֶ֣ם כֶּן־ה֔וּא וַֽתְּשַׁלְּחֵ֖ם וַיֵּלֵ֑כוּ וַתִּקְשֹׁ֛ר אֶת־תִּקְוַ֥ת הַשָּׁנִ֖י בַּחַלֹּֽון׃
처음엔 그냥 줄이었음. 헤벨. 그런데 이제 단어가 달라졌음. 그리고 그 줄이 붉은 줄임이 드러났음. תקווה. 라합에게는 그냥 흔한 줄이었음. 그런데 정탐꾼을 만나고 그녀가 내렸던 줄은 이제 헤벨이 아닌, 붉은 티크바가 되었음.
이 티크바가 무엇이냐면 바로 소망, 희망이라는 단어이다!
소망 희망 hope 티크바, 이 티크바의 어근은 카바 rope 밧줄(생명줄)
그러니까 줄은 줄인데 희망과 소망을 주는 줄이다. 우리가 바다에 빠지면 밧줄을 던져 구하듯이 바로 생명줄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로프가 호프로. rope -> hope.
로프. 줄의 특징은 두 밧줄을 꼬아서 하나의 줄을 만듬. 그리고 두 물체를 연결해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함. 우리의 안에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에 있다. 이것이 우리를 살리는 생명줄이다. 우리를 바인딩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과 약속에 우리를 묶는 것이다. 그래서 이 생명줄:티크바:희망이 될 수 있는 이유이다. 우리는 아직 볼 수 없고, 아직 이뤄지지 않은 멀리 있는 소망이지만, 그것이 현실에 구속력을 갖게 하는 힘은 바로 예수 안에 우리의 소망을 두는 일, 즉 나를 예수로 꽁꽁 묶는 일이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한 것이다.
히브리서 11:1 (NKRV)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내가 지금 바라는 것들이 눈에 보이지 않고, 현실 가운데 물리적으로 찾을 수 없는 것이지만,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함은, 그것에 소망을 두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것은 현실적인 구속력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 삶이 그렇게 살아지지 않는가. 하다 못해 내일 수학여행을 떠날 예정인 학생들이 오늘 기쁘고 설레는 마음으로 준비물을 사고 즐거워 하면서 오늘 지금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내일 일이 아직 오지 않았지만, 그 내일의 기쁨이 오늘을 구속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이 기뻐지게 되는 것처럼. 주 안에서 발견하게 되는 희망과 소망은 나의 오늘을 살게 한다.

3. 소망은 정해진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를 발견한 사람들에게 소망은 어렴풋한 것이 아닌 정해진 길로 가는 것임을 다시 한 번 깨달아야 한다. 붉은 줄 = 출애굽 유월절 사건 = 속죄제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유월절 사건 중에 양의 붉은 피로 죽음을 면했고, 라합은 이 붉은 줄을 통해 구원을 얻었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구원 받았다. 우리는 이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으로 받은 사람들이다.
아까 티크바, 카바의 히브리어 단어를 이야기 했는데, 현대 이스라엘에서 이 단어들의 어근을 공유하는 ‘카브’라는 단어가 있다.
티크바(소망) -> 카바(밧줄) -> 카브(경로, 선)
버스 노선을 이야기할 때, 카브라고 이야기한다. 버스가 정해진 노선을 따라 운행을 하고, 거기에 탄 승객들을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모셔다 주는 것처럼, 주 안에서 소망을 발견한 우리가, 예수와 하나되어 결국에 가야할 길, 천국소망의 길을 간다는 것이다.
오늘 편입예배. 한빛교회의 새가족들. 인생의 새로운 소망을 예수께 두기로 새롭게 정하신 분들. 예수를 믿는 것은 생명줄을 붙잡는 것. 우리와 함께 생명의 길로 함께 나아가기로 다짐한 새가족들을 진심으로 축복해주길. 나아가 우리가 품고 있는 전도대상자들. 그들을 교회로 나오게 하는 전도라는 행위는 소망, 희망을 전달하는 일이다. 생명줄을 던져주는 일이다. 여리고 성의 라합이 붉은 줄을 매달았던 것처럼 우리도 주 안에서 소망과 희망의 생명줄을 예수로 단단하게 묶어, 오늘도 담대하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길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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