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 19장 1-18절 “ 우리가 추구해야 할 거룩” / 거룩하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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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96:7–9 “7 만국의 족속들아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들고 그의 궁정에 들어갈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사랑이 충만하신 하나님 아버지!
암탉이 그 날개 아래 병아리를 품음과 같이 지난 한 주간도 저희들을 은혜 중에 보호하셨습니다.
그 은혜로 거룩한 주일 아침에 성전에 나와 예배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드리는 예배를 기쁘게 흠향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기쁨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하옵나이다. 아멘.
• 주제: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거룩함이다.
• 상황:
현대사회는 사람들을 이기적으로 만들고, 관계 속에서 고립시킨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 죄가 전염되고 오염될까 봐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쪽으로 가게 되는 듯하다.
그러니 자연스레 교회 생활에만 중독된다.
모이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흩어지기를 두려워한다.
그렇게 분리되고 단절되어 교회 생활에만 심취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이 아니다.
거룩은 독야청청이 아니다.
조선시대에 지조와 절개의 대표적 상징으로 사육신이 있습니다.
반란이 일어나자, 왕에 대한 자신의 충성과 신념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입니다.
대표적인 사람 중에서 성삼문이 사형장으로 끌려가면서 지은 시조가 있습니다.
이 몸이 죽어 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
봉래산 제일봉의 낙락장송이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여기서 유명한 독야청청이라는 단어가 나읍니다.
독야청청: 소나무처럼 푸르고 푸르게 홀로 높은 절개를 지키다
풀이하자면,‘나는 죽으면 산꼭대기의 굽어진 소나무가 되어서 계절이 아무리 바쁠지라도 사시사철 한결같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거룩함은 이런 것에 가깝습니다.
다들 세속화되고 타협하고 변질되어도 나는 독야청청하리라.
나는 홀로 푸르고 푸르게 하나님을 향한 높은 절개와 신념을 지킬 것이다. 이러한 것이 거룩이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물론 거룩함이라는 단어에는 지조와 절개의 느낌이 있습니다.
거룩한 사람은 변질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신의와 약속을 지 켜야 합니다.
그러나 곧 그것만이 거룩함은 아니라는 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레위기 19:1–2 (NKRV)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우리도 거룩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그 거룩이 대체 무엇일까요? 이 거룩의 구체적인 내용을 오늘 본문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레위기 19장 3-8절이하까지는 하나님과의 직접적 관계에서의 거룩이 소개됨니다.
안식일을 지키고,헛된 것을 향하지 말며,신상을 부어 만들지 말고, 화목제물을 어떻게 다투어야 하는지 갈은 내용들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레위기9-18절까지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내 용입니다.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나그네)을 위해서〉
곡식을 거둘 때 밭모통이를 남겨두는 것 (9)
떨어진 이삭을 놔두는 것 (9)
포도원의 열매를 모두 따지 않는 것 (10)
떨어진 열매도 줍지 않는 것 (10)
<이웃에 대하여>
도둑질 하지 않고, 서로 거짓말하지 않는 것 (11,12)
품꾼의 삯믈 다음 날 아침까지 안 주며 버리지 않는 것 (13)
청각장애인을 저주하지 않고, 시각장애인 앞에 장애물몰 두지 않는 것 (14)
재판할 때 가난하든지 세력 있든지 두둔하지 않는 것 (15)
비방하지 않는 것, 이웃의 피를 홀려 이익을 도모하지 않는 것 (16)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않고 이웃의 죄를 방관하지 않는 것 (17)
원수를 앞지 않고 동포를 원망하지 않는 것 (18)
이것이 거룩이랍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거룩이 이런 뜻이라니! 우리가흔히 생각 하는 거룩은 조용조용히 말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유지하고^ 품행이 방정맞지 않고, 머리 위에 링이 달려 있을 것 갈고,음악은 CCM만 듣고,TV나 넷플릭스도 보지 않 고 성경만 읽는 것 아니었나요.
우리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거룩의 개념에 대해 햇갈리기 시작합니다.
거룩은 종교적 수행 능력이 아니라 관계적인 개념이라는 것이에요
성경이 말하는 거룩은 종교 문화적인 우월함이나 남들이 따라올 수 없는 독보적인 수행이 아닙니다.
특히 여기서 말하는 관계적 측면을 자세히 보십시오.
약자에 대한 사랑과 배려,자비와 헌신입니다.
그것을 거룩이라고 말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내 주변 사람들이 내 거룩함에 대한 심사위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의 거룩은 매일 만나는 내 이웃들이 판단합니다.
만일 제가 윗집,아랫집과 층 간소음 문제로 맨날 부딪치고,소리 지르고 욕하고 싸우는데,그 이웃들이 어느 날 우연히 유튜브 알고리즘에 의해 제가 설교하는 영상을 보게 되었다고 가정해보십시 오.
그들은 맨날 부딪치는 못된 이웃과 선한 미소를 가진 설교자를 매칭하기 힘들어 할 것입니다. 제 설교가 온통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하다고 여길 것입니다.
또한 나의 거룩은 나에게 을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판단합니다.
만일 제가 교회 에서 동역하는 목사님,전도사님들을 사역의 성과로 판단하고,마음에 안 들면 불같이 화를 내며 인격을 모독하고,그들을 나의 목회적 야망을 위한 도구로 여긴다고 생 각해보십시오.
그들은 제가 그 어떤 거룩한 표정과 종교적 언어를 사용할지라도 위 선적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저는 교회에서 사람들을 목회 상담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직장이나 사업장에서 일하면서 만나게 되는고객이나 의뢰인 중에 카톡 프로필에 성경 구절 이 있거나 교회 다니는 표시가 나면 긴장하게 된다고 종교가 없거나 타 종교인에 비 해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더욱 자신의 작은 이익에도 목숨 걸고 덤벼드는 통에 너 무 힘들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나의 거룩은 나와 이익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판단합 니다.
거룩은 독야청청이 아닙니다.
거룩은 혼자 레벨업하는 것도 아닙니다.
거룩은 매우 관계적인 개념이며 특히 나보다 약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내가 어떻게 대하는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하나님은 약자를 좋아하시는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대답은 간단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약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약한 자를 사랑하셔서 가장 약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군림하는 제국의 주인이 아니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29 b
29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심지어 마태복음 25장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실 정도입니다.
마태복음 25:45 b
45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그러므로 내 주변의 약자들은 하나님께서 내 거룩에 대한 심사위원으로 보내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나의 일상적 거룩은 이웃과 약자들에 의해 판단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진정 거룩한 사람인가
오늘 본문에서 그 유명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나읍니다.눅10선한사마
레위기 19:18 (NKRV)
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이 구절은 아마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들어봤을 것입니다. 이 구절이 가지고 있는 의미에 대해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통해 설명하셨습니다. 어떤 유대인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강도들은 그의 옷올 벗기고 때려 모든 것을 빼앗은 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갑니다. 여기서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다는 것은 이 정도면 놔두면 알아서 죽을 거라고 여겼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를 죽였다는 의미입니다. 확인 사살을 안 했을 뿐인 것이조
사고를 당한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자면,그는 길을 걷다가 곤경에 처했습니다.
어 느 날 갑작스레 사고를 당한 겁니다. 갑자기 고통이 들이닥쳤고,불행이 그 삶을 뒤 덮었습니다. 치명적인 상실을 겪습니다. 그는 절망적인 슬픔과 고통 속에서 죽어갑 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겠지만,고통과 절망 속에서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과 누구 라도 나를 도와줬으면 할 때 수반되는 감정은 서러움입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닥친 거지?‘ 그는 누군지도 모를 그 누군가를 향해서,온 세상을 향해서 외치게 됩니 다.
제발 누가 나 좀 도와주십시오! 누구라도 있다면 나를 살려주십시오!
이때 한 사람이 지나갑니다. 첫 번째 사람은 제사장입니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거룩한 사람입니다.
제사장은 백성들을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며, 레위기에서 말하는 율법과 계명을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입니다. 아마도 제사장 을 발견한 순간,그는 희망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래, 다행이다! 제사장은 거룩한 사 람이니 나를 도와주고 살려줄 거야!’ 하지만 제사장은 못 본 체하고 지나갑니다.
단순하게 보자면 이 상황을 회피하고 지나가는 제사장을 우리는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사실 제사장에게는 지나가야 할 만한 나름의 명분이 있었습니다. 레위기 21장에 의하면 제사장은 죽은 사람을 만지면 안 됩니다. 그건 부 정하다고 여겨졌습니다.
레위기 21:1 b(NKRV)
1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그의 백성 중에서 죽은 자를 만짐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더럽히지 말려니와
그러니 이 사람을 도와주려 했는데 괜히 이 사람이 죽기라 도 하면 죽은 사람을 만졌으므로 나도 부정하게 되어,이후에 자신이 제사를 진행하는 일에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는 소임을 다하지 못하게 됩니다. 어쩌면 그는 급히 제사를 드리러 가는 길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는 피해서 간 것입니다.
누군가를 돕는 선한 일과 헌신을 피해가게 하는 합리적인 명분은 제사장 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영화를 보면 모든 악당들에게는 이유가 있습니다. 다만 내로남불일 뿐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레위인입니다. 레위인은 하나님의 제사와 성전 일을 위해 구별된 사람들이죠.
그도 제사장과 똑같은 이유로 피해서 갑니다.
죽어가는 유대인은 연달아 소망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며 좌절했을 겁니다.
특히 소위 신앙이 좋고 경건하며 거룩하다는 사람들에 대한 배신감이 컸을 겁니다.
이때 세 번째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사마리아인입니다.
많이들 아시다시피 유 대인들에게 있어서 사마리아인은 일반적인 사람 이하의 취급을 받았습니다. 가장 부정하고 불결한 존재들입니다. 조금 과장되게 말해볼까요. 지금으로 치자면, 그는 교회에 출석하기보다는 유흥업소를 다닙니다. 온몸에는 문신이 있습니다. 말을 할 때 상욕을 사용하지 않으면 한 문장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에게서는 불쾌한 담배 냄새가 납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사마리아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마 유대인은 아무런 기대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사마리아인이 그 앞에 멈춰 섰습니다.
누가복음 10:33–35 (NKRV)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았던 사마리아인이 그를 도와주었습니다.
여기에서 나온 사마 리아인의 행동에 대한 표현들을 보십시오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붓고 싸매고.
돌보아 주니라.
내가 갚으리라.
제사장과 레위인은 보고도 피해서 갔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죽어가는 유대인 에게 위와 같은 다섯 가지를 행했습니다.
죽어가는 유대인에게 있어서 누가 진정으로 거룩한 사람입니까?
제사장과 레위인이 아님니다. 사마리아인이 가장 거룩합니다.
그리고 이 거룩함은 온 세상에서 가장 거룩하신 분을 닮았습니다.
고귀하시고 고결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가 자신의 거룩함을 드러내신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는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죄인들에게 가까이 가셨습니다.
죄인들의 상처와 아픔의 자리에 붓고 싸매셨습니다.
죄인들을 먹이고 가르치며 돌보셨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서 죽으심으로 그 죗값을 대신 갚으셨습니다.
이 다섯 가지 거룩한 행동은 주님께서 저 같은 죄인에게 하신 일이 기도합니다.
이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 난 그 거룩함을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너희의 하나님이라
얼마 전에 유명한 축구선수이자 신실한 그리스도인인 이영표 선수가 국제 어린이 양육기구인 컴패션의 모금 행사에서 했던 이야기를 너무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왜 세상은 불공평한 것인가’에 대한 대답인데,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세 사람이 있다. 빵이 세 개가 있다.
한 사람당 하나씩 나눠주는게 옳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공정하긴 해도 이 셋이 사랑을 배우지 못한다.
그래서 빵 주인은 한 명에게 빵 세 개를 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이게 모두 너의 것은 아니다. 저들의 것믈 너에게 준다.
그러니 나누어 먹으렴.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과 유사합니다. 농사짓는 사람은 밭모퉁이 를 남겨야 합니다. 수확을 할 때 떨어진 이삭을 그대로 두어야지 주우면 안 됩니다. 포도원의 열매도 모두 따지 말아야 하며 떨어진 건 그냥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왜 내 거를 그렇게 나누어야 하냐며 따져 물을 수 있습니다. “내가 농사지 은 건데요 왜 나누어야 하나요?”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땅을 만든 건 나다.” “내가 열심히 포도를 키웠으니 내 거 아닌가요?”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햇볕과 비를 준 건 나다.” 또한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를 창조한 것도 나 다,너에게 하루를 허락한 것도 나다.”
나에게 주어진 것은 내 것이 아님니다. 모두 내가 가지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모 두 내가 먹으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나누어주어야 할 것을 하나님께 서 지금 나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지금 내 주머니에 넣어두신 것입니다. 내 손에 맡 기신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이것을 누군가에게 전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분명 하 나님 앞에서 책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로부터 기인한 ‘선한 사마리아인 법’이 있습니다. 그 법은 구조불이행을 처벌하는 법입니다. 누군가 절대적으로 곤경에 처한 것을 봤는데 그냥 모른 척 지나가는 것을 법으로 처벌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내 주머니의 빵은 모두 내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과 돈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에게 나누어야 할,‘주께서 맡기신 것들’입니다.
이영표 선수의 강연을 듣고 감동을 받아 집에 가서 그가 쓴 책을 보았습니다. 그의 책에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축구 용어중에 ‘Keep the ball’ 이라는 표현이 있다고 합 니다. 직역하자면 ‘공을 가지고 있어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축구에서 ‘Keep the ball’ 은 그런 의미가 아니랍니다. ‘계속해서 공을 나누어주고 패스하라’는 뜻이라는 겁니 디•. 왜냐하면 혼자서 공을 오래 가지고 있으면 공을 상대 팀에게 빼앗기기 때문입니 다. 감독은 선수들에게 말합니다. Keep the ball. 공을 나누어줘. 감독은 요구합니다.
Keep the ball. 공을 패스해줘. 그렇게 공을 서로에게 나누고 돌리면서 한 팀으로써 공을 가지고 있게 됩니다. 함께 팀의 승리를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영상 13:9초 부터 14:58초까지 편집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십니다.
강도 만난 자의 빵을 너의 주머니에 넣었다.
고통 속에서 눈물 흘리는 자의 빵을 너의 주머니에 넣었다.
장애인과 그 가정에게 필요한 빵믈 너의 주머니에 넣었다.
이 도시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의 빵을 너의 주머니에 넣었다.
네 이웃의 빵을 너의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니 나누어주어라.
나는 너 뿐만 아니라
너희 모두의 하나님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기도문에서 가르쳐주신 대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 다. 지금 내 옆에 누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나와 그 사람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니 내 주머니에 있는 빵을 그에게 나누어줍시다. 내게 주어진 재능과 시간과 돈을 그 사 람에게 나누어줍시다. 왜 나에게 이런 것을 주느냐고 질문하거든 대답합시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