슥 2:1-13 오늘 우리는 어디에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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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늘 어디에 사는가?
스가랴 2장 1-13절
우리는 오늘 어디에 사느냐에 따라 한 사람의 사회적 능력을 가늠하는 사회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어디 사세요? 물어보면 아파트에 사는지, 주택에 사는지에 따라 사회적으로 눈치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어디에 사는지를 물어보게 되면 잘 이야기를 못하는 경우들을 보게 됩니다. 같은 곳에 산다고 해도 아파트와 주택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있습니다. 같은 아파트라고 해도 일반 아파트와 임대 아파트에 사이에 보이지 않는 담이 있습니다. 한 학교에서 담임 선생님이 일반 아파트와 임대 아파트 사는 아이들을 따로 줄을 세워 물의를 일으킨 기사도 본적 있습니다.
심지어는 교회 안에서도 아파트에 사는지, 주택에 사는지, 아파트는 어디 아파트에 사는지에 따라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아니 어떤 곳은 벽이 아니고 문에 빗장이 쳐있습니다. 2004년 국립 국어원이 “빗장도시”라는 신용어를 발표했습니다. 서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최은영씨가 서울 25구 160동의 집값과 학부모 자녀의 학력 수능점수 및 대학 진학률을 조사한 결과 – 집값도 비싸고 학력 수준이 높아서 외부에서 진입하기 힘든 강남을 “빗장도시”라 부르면서 이게 유명해 지면서 신조어로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최은영 씨가 – 서울의 3개구 서초, 강남, 송파를 조사한 결과 – 학부모와 자녀의 학력을 비교해 보니깐, 다른 구보다 월등히 높았다는 것입니다. 이 결과를 근거로 해서 한국 사회에서 학력은 일종의 권력이자, 자본이며, 불평등의 구조화와 고착화 하는 중요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한국의 소수 몇 명이 학력을 중심으로 특정지역에 몰려사니깐 높은 아파트 가격 때문에 경제력이 없는 사람은 들어가서 살 수 없는 “빗장도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빗장도시’ 안에 사는 사람들은 학력과 부와 재생산 되면서 살기는 좋지만, 폐쇄적이고 다른 계층을 배재하고 불평등을 강화 시키기 때문에 사회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빗장도시’의 폐쇄성은 오늘날 결혼 풍습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2005년 결혼정보 회사에서 30-35세 되는 사람들을 조사했는데 같은 지역 고교 출신을 배우자로 선택한 비율이 40.3% 였다고 합니다. 특별히 강남 고교 출신의 남성 중 83.9%는 강남출신의 여성를 16.1%는 서울 출신의 여성을 아내 감으로 선호했다고 합니다. 물론 강남 출신의 여성도 절반이상이 강남 출신의 남성을 선호했습니다.
이렇게 세상은 점점 ‘빗장도시’로 변해가고 있는데, 과연 하나님의 백성은 어디에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도 요새처럼 빗장을 만들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배시간에는 요새를 쌓지말고 하나님을 의지 해야 한다고 생각하다가 예배당을 나가는 순간 현실에서는 요새를 쌓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요새를 쌓으며 갈등하고 계십니까?
이런 질문을 하려면 우선 첫 번째, 자신을 정직하게 들여다 보는 용기가 있어야 하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우선 우리는 너무 쉽게 ‘빗장도시’에 대한 비판의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빗장도시’ 속에 살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빗장도시’가 내 문제가 아니라 남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한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습니다.
서울 시립대학교에 ‘송도용’이라는 교수가 서울시 신문에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솔직히 말하겠다. 현재 강북에 살고 있는 나 글쓴이도 강남이 주는 사회적 상승기류인 교육환경을 꿈꾼다. 사실 한편으로는 강남문화가 무섭기도하고 끔찍하기도 하다. 대학에서 교수하는 내가 느끼고 있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혹은 신비감과 혹은 기대감과 두려움 가운데 살고 있겠는가? 하지만 말이다 나도 할수만 있다면 강남으로 이사하고 싶다. 강남을 비판하는 글을 써 줄거라고 기대하지만 이것이 사실이다.”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자녀 때문에... 아이의 장래를 생각한다면 가능한 확률적으로나마 아이에게 더 좋은 환경을 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강남은 더 좋은 환경으로 만들어가는 빗장을 만들어가고 있고 우리 모두가 소망하는 자화상입니다.
우리 모두가 빗장도시를 쌓고 그 안에서 자녀에게 학력과 부를 고착화 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지 않는 한 우리 모두 각자 자기의 수준에서 빗장도시를 만들고 있다는 인식도 하지 못한채 요새를 쌓을 수 도 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인간들은 이렇게 성을 쌓으려고 합니까?
이것을 잘 보여주는 소설이 있는데, 영국 소설가 아치볼드 크로닌이 쓴 “성채”라는 소설입니다. 2차 세계대전 병사들이 자기와의 싸움을 이기기 위해서 전쟁터에서 지내고 다녔다는 전설적인 책입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 엔드류 맨슨인데 의사입니다. 의과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남부의 탄광촌에 들어가서 광부들을 위해 폐결핵을 연구하는 인도주의적 의사였는데 나중에 명성을 쌓고 돈을 좋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브레이크를 걸었습니다. “여보 왜 이렇게 돈 돈 하세요? 우리가 그토록 가난했을 때도 행복했죠. 더 이상 돈의 재물이 되기 싫어요. 잊지 않으셨죠. 눈에 보이지 않는 성채를 점령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 이에 엔드류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단지 성공하고 싶을 뿐이야. 세상은 돈과 재산만으로 사람을 판단하거든 가지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불의를 당해. 나는 앞으로 남을 부리는 입장이 되고 싶은 거 뿐이야.”
그렇습니다. 세상은 언제나 신분이나 재산으로 사람을 평가하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언제나 현실이며 역사의 수레바퀴가 돌아가는 한, 결코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잠언기자는 이미 잠언 18장 11절에서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라 그가 높은 성벽 같이 여기느니라” 이미 지적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현대인들이 ‘빗장도시’로 진입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런 상황에서 ‘성채’를 쌓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이방인들은 높은 성을 쌓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역시 “우리도 성을 쌓고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고 반문하면서 성을 쌓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한국사회와 한국교회는 심각한 대가를 치르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빗장도시의 성벽을 헐거나 문을 여는데 기여하기 보다는 오히려 빗장안으로 들어가서 빗장을 잠그는 일을 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그러면서 우리도 모르게 엄청난 고독을 느끼고 있습니다. 성을 쌓고 빗장을 만들면 그 성은 사람을 삼키고 무서운 땅이 됩니다. 성읍을 견고하게 만들고 문을 만들고 잠그게 되면 사람들과 소통이 불가능 하기 때문에 결국 무서운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죠. 몇년전 용산 재개발로 인해 경찰과 철거인들이 대립하게 되었고 그 결과 많은 피해자가 생겼습니다.
또한 평택의 쌍용 자동차 문제 역시 – 소통의 부재가 낳은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한반도는 사람을 삼키는 무서운 땅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구약시대 가나안을 정탐하던 정탐꾼의 한 보고를 들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민수기 13장 27절에 보면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데 이것은 그 땅의 과일이니이다...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정탐꾼들이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그들처럼 요새를 쌓고 전쟁을 하라라고 명령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삼키는 땅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새화 된 땅 사람을 삼키는 땅으로 바뀌는 한반도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또 하나의 성채를 쌓아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이 욕망을 이겨내려면, 이 욕망보다 더 큰 꿈이 있어야 합니다. 꿈이 없으면 더 이상 욕망을 다스릴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스가랴에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더 이상 성채나 빗장도시가 없어도 얼마나 멋지게 살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8개의 환상을 보여주셨는데 그 중 3번째 환상이 성벽에 관한 환상입니다. 스가랴 2장 1절에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측량줄을 그의 손에 잡았기로” 측량줄은 줄자입니다. 스가랴가 묻습니다. “예루살렘을 측량하여 그 넓이를 보고자 함이라” 합니다. 예루살렘의 회복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창세기 11장에서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으니깐 하나님이 무너뜨리셨습니다. 그 바벨 요새로부터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 요새를 무너뜨리고 하나님께서 거룩한 백성들을 세우셨는데, 이스라엘 천년의 역사 가운데 요새를 쌓다가 그만 바벨론의 포로고 잡혀 간 것입니다. 그리고 70년 후에 스룹바벨과 에스라가 포로민들을 끌고 귀국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대한 성전과 성벽을 쌓는 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왕국의 재건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바벨론에서 돌아온 다음에 성전건축이 중단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스가랴가 다시 측량한다고 하니깐, 이것은 보통 기쁨일이 아닌 것입니다. 이런 계획이 한 소년을 통해 일어나자 소동이 일어납니다.
이제 스가랴에게 말하던 천사가 나가니깐 다른 천사가 와서 그 소년에게 예루살렘을 측량하던 일을 멈추라고 지시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4-5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르되 너는 달려가서 그 소년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예루살렘은 그 가운데 사람과 가축이 많으므로 성곽 없는 성읍이 될 것이라 하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불로 둘러싼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에서 영광이 되리라”
예루살렘은 성곽이 없는 성읍이 될 것이기 때문에 측량할 필요가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성곽없는 성읍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프라자, 페라자”입니다. 이 단어는 넓게 사방에 트인 지역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근데 이게 가능한 것입니까? 고대근동 아시아에서 성벽 없이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적에 공격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성곽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성벽없는 곳에서 예루살렘 백성들이 살 수 있다는 것인가? 도저히 이해 될 수 없지만 그 약속 가운데는 인간의 가시적인 성곽보다 더 강력한 보호 수단이 있다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몰랐던 것입니다.
5절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불로 둘러싼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에서 영광이 되리라”
개역성경에는 “내가 사방에서 불성곽이 되며...” 라고 쓰여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면에서 불성곽이 되어 주시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성곽이 필요 없다는 것이죠. 불성곽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간 행군할 때 아무런 보호수단이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불기둥이 되어주셔서 그 누구도 이스라엘을 해 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성벽과 문과 빗장이 없다고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면에서 우리를 위해서 불성곽이 되어주시기 때문이죠. 이보다 더 큰 힘! 이보다 큰 위로가 되는 약속이 어디 있습니까? 잘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불성곽을 지어주시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친히 우리 사면에서 불성곽이 되어 주신다는 것이죠. 이보다 더 멋진 비전, 이보다 더 큰 감동과 환상과 꿈을 들으신 적이 있습니까? 듣기만 해도 우리에게 힘이 되어 주는 말씀 아닙니까? 더 구체적인 말씀은 8절에 나타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사면에서 불성곽이 되어주시고, 눈동자같이 보호하시니깐 들판에 나가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듣기에는 아주 멋져 보이지만 인간적으로 보기에는 여전히 불안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여전히 요새를 쌓는 것을 거부하십니다. 요새를 쌓는 다는 것은 싸우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새를 쌓으면 사랑이 오고 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왜 오늘날의 세상이 차갑게 얼어붙게 되었습니까? 현대인들이 성을 쌓으면서 서로 지쳐있기 때문에. 여기에 하나님의 백성마저 요새를 쌓는다면 이 세상을 녹일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차갑게 얼어붙은 땅을 하나님의 불로 녹이기 위해 이 세상에 우리를 보내신 것입니다. 사랑에 주리고 목말라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이유는 그 사랑을 느끼게 하게 하려고 보내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하려면 우리의 삶 가운데 불성곽이 나타나야 합니다. 불성곽이 나타나려면 인간적인 성벽을 버리고 우리가 들판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건드렸는데 하나님의 불성곽이 함께 있다는 것을 이들이 깨달을 때 비로서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영광이 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은 성벽안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하나님의 사랑이 넘처 흘러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성벽없는 성읍으로 만드시고 아직 바벨론에 남아있는 포로민들에게 바벨론에서 피하여 도망할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2장 6절에 보면 “오호라 너희는 북방 땅에서 도피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내가 너희를 하늘 사방에 바람 같이 흩어지게 하였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바벨론 요새에서 도망하여 성곽없는 들판으로 나아가면 하나님이 직접 불성곽이 되어주시고 이 세상은 하나님의 불로 뜨거워지게 되고 이 동토의 땅이 풀리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때야 비로서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가운데 나타나고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다는 것이죠.
왜 한국교회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을 열방이 보지 못하는 것입니까? 인간적인 요새를 쌓아놓고 성벽 안에 있으니깐 하나님의 불성곽이 보호하고 있는 것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죠.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가운데 나타나 열방의 빛이 되고 열방을 녹이는 불이 됩니까? 우리교회 성도들이 성곽없는 촌락으로 나아가 하나님을 의지한다면 하나님이 사면에서 불성곽으로 보호하게 될 것이고 이 때 열방이 이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가운데 있음을 목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불성곽이 되어 우리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꿈꾸고 성곽없는 들판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사랑이 불성곽이 되어 우리를 보호하신다고 한다면 이 불이 소멸하는 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진멸하시는 불이시기는 하지만, 여기서 사용하는 불은 진멸하시는 불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불성곽이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불이 우리의 죄악과 병으로부터 보호하실 거라고 착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불성곽이 어떤 식으로 우리를 보호하시는지 잘 보여주는 예가 있는데 그것은 ‘헤리포터’ 이야기입니다.
‘해리포터’ 이야기는 마법과 마술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기독교적인 부분이 있어서 인용합니다. 악한 마술사 볼드모트가 자기에게 해가 되는 해리를 죽일려고 하다가 아버지와 어머니가 막아내게 됩니다. 그래서 아버지 어머니가 목숨을 잃습니다. 그리고 해리를 죽이지 못한채 이마에 번개 모양을 남기게 됩니다. 결국 해리포터 이야기는 볼드모트가 해리를 죽이기 위한 반복되는 이야기입니다. 어느날 해리가 마법학교의 교장인 덤블도어에게 왜 볼드모트가 자기를 죽일 수 없는지 이유를 물어보게 됩니다. 교장이 이렇게 말합니다. “너의 어머니가 너를 구하기 위해 죽으셨단다. 볼드모트가 이해 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이란다. 너를 위한 어머니의 강한 사랑은 그 흔적을 남겨 놓는다는 것을 모른 것이지. 물론 어떤 흔적이나 상처가 우리를 보호하는 것은 아니란다. 비론 우리를 사랑한 사람이 사라진다 해도 깊이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이 우리를 영원히 보호하는 것이란다. 그것이 바로 너의 번개모양의 상처 안에 있지 않니?” 해리포터 이야기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죽기를 원하는 자기 희생적 사랑이 결코 한 사람을 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악으로부터도 보호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 소설은 이 사랑이 해리가 원하는 여러모양의 보호를 제공하지 못한다고 지적해요. 사랑은 해리가 부모의 죽음을 막지 못합니다. 이 사랑은 억압적 사랑에서 해리가 학대당하는 것을 막지 못합니다. 사랑은 자기를 죽이려는 악한 대상을 막아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악으로부터 보호해 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에 인간의 영혼을 악에서 구해내는 것은 어머니 사랑같은 자기 희생적 사랑 뿐이라고 외치고 있기 때문에 문화와 국경과 피부색을 넘어 거의 모든 나라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거 아닙니까?
우리는 무슨 진리를 믿고 있습니까? 돈으로 학벌로 성벽을 쌓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권력과 명예로 성채를 쌓고 그 안에 있으면 우리 영혼을 구해 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그렇게 보신다면 해리포터 시리즈 보다 못한 거죠.
악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유일한 힘은 하나님의 사랑이란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사랑은 악과 재앙으로부터 우리를 구해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원치않는 일들이 일어날 수 있고 그리고 심한 상처를 당할 수도 있고 원치않은 일들로 인해 크게 울일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는 분명합니다. 우리가 인간이 세운 성곽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성곽없는 평온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불성곽이 되게 허용만 한다면 이 세상에든 하늘에서든 우리를 헤할 어떤 것도 없을 것입니다. 자기의 목숨을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한 죽음마저도 우리를 어쩌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이야기 한 것이 아닙니까?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1,38,39
우리가 성벽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한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닙니다. 환란, 적신, 기근, 칼에서 면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어쩌면 지속적인 용기와 무한한 수고를 요구하는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빗장도시인 한국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방법은 이 길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불성곽을 의지하고 성곽없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길로 나아가는 방법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복음성가 중에 “그의 빛 안에 살면”이라는 곡이 있습니다. 가사가 이렇습니다.
우리 가정에도 무슨 일이 불어 닥칠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사랑만이 우리가 의지하는 유일한 힘이라는 사실은 확실합니다.
사랑하는 성문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무슨 꿈을 꾸고 계십니까? 빗장도시와 요새들이 들어있는 이 한반도에서 어떻게 하면 빗당도시 안에서 자녀에게 풍요로움과 부와 명예를 전달해 나가면서 살아가는 꿈을 꾸고 계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불성곽이 사면에서 우리를 보호하고 계심을 믿으면서 성곽없는 촌락으로 나아가는 것을 꾸고 계십니까? 우리가 비록 빗장없는 성곽으로 나아가도 우리는 상관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에 불성곽을 의지 하고 세상으로 나아가면 우리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에게 많은 축복을 받으셨다면 이 받은 축복을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더 큰 신령한 은혜를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불성곽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전파하면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 되기를 소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