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42:1-7 여호와의 종은 왜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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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종은 왜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시는가?
이사야 42장 1-7절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이미지를 좋아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상한 갈대와 등불이미지 때문으로 보인다. 특별히 중년에 들어가면 상한 갈대라는 단어만 들어도 눈물이 난다고 한다. 그 이유는 시인 신경림씨의 시를 들으면 알 수 있다.
“언제부터는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이 시를 보면 우리는 정말 흔들리는 갈대라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이렇게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는 갈대같은 존재인 우리를 하나님은 꺽지 아니하신다고 하신다. 생각만 해도 정말 위로가 된다. 따라서 이사야 42장 3절의 말씀을 내적치유를 중요시 여기는 아버지 학교나 치유 사역을 하는 분들이 좋아하는 구절이기도 하다. 현대사회에서 상처를 받고 그들을 치유하는 것은 교회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치유사역이 교회의 큰 사역의 틀 안에서 이해하지 않으면 값싼 은혜로 전략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현대교회가 치유를 강조하면서 사람들에게 감성적이고 센티멘탈한 그리스도인들을 만들어 가고 있다. 이것은 성경해석을 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본문을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이해하여 본문에서 위로를 받는데 멈추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오늘 상한갈대를 꺽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이미지는 단순한 위로의 메시지가 아니다. 물론 위로의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강조점은 위로가 아니라 정의에 놓여 있다. 본문을 보면 정의가 1,3,4절에 무려 세 번이나 나와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오늘 본문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여호와의 종이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는 이유는 단순히 우리를 위로 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정의를 시행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상한 갈대와 정의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우선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갈대의 이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갈대 이미지 하면 흔들린다는 이유 때문에 연약한 식물이라고 생각한다. “여자는 흔들리는 갈대” 라는 연약한 존재로 오해하는 경우들이 많다. 그러나 갈대는 바람에 잘 흔들리기는 하지만 왠만해서는 쓰러지거나 꺽기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은 대나무와 유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조있는 풀이라 해서 귀하게 여겼다. 참대나무, 막대, 갈대... 딱딱한 재질의 식물을 말한다. 갈대는 호수나 강 주변 비옥한 땅에서 자라기 때문에 1~1.5미터 정도 자라고 줄기가 굵고 단단하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갈대로 배를 만들기고 하고 갈대로 지팡이를 만들기도 하고 길이를 재는 척량 도구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에스겔 29장 6절에 보면 “애굽은 이스라엘 지파에게 갈대 지팡이다” 이스라엘이 늘 애굽을 의지하기 때문에 갈대지팡이라고 소개하였다. 또한 요한계시록 11장 1절에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 라고 하였다.
즉, 갈대는 길이를 재는 측량자이기 때문에 ‘표준, 척도, 규범, 기준’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성경 외경을 제외하고 진짜 계시냐 무엇이냐 물을 때 그것을 정경이라 하는데, 정경이라는 단어 ‘캐논’은 갈대라는 히브리어 단어 ‘카네’에서 나왔다.
이렇게 본다면 갈대는 지팡이요, 길이를 재는 척도고 기준이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갈대라고 부르신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이 갈대라는 의미는 여호와께서 열방의 향해 정의를 베풀 때 이스라엘이 열방의 표준이요 기준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열방의 정의를 알리는 표준으로서 언약을 알리는 여호와의 종들이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들어간 다음에 그들은 의의 표준으로서 갈대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본래 하나님은 자신의 의로우신 뜻을 율법에 담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담긴 율법을 준행하면 이땅의 열방의 표준으로서 감당할 수 있었지만 그들은 율법을 떠났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1장 21-23절에서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정의가 거기에 충만하였고 공의가 그 가운데에 거하였더니 이제는 살인자들뿐이로다 네 은은 찌꺼기가 되었고 네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도다 네 고관들은 패역하여 도둑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예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지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하지 아니하는도다“
이스라엘은 은에다 찌꺼지를 넣고, 포도주에 물을 섞어서 경제적인 정의를 배반하였다. 이스라엘은 뇌물을 받으면서 가장 정의에 굶주려 있는 가난한 과부와 고아를 송사를 수리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말하면 지금 이스라엘을 “상한 갈대” 즉, “꺾인 갈대”가 된 것이다.
보통 대중 성경에는 “상한 갈대”로 되어있지만, 이 상한이라는 동사가 본래 ‘부러뜨리다, 꺽이다’의 수동태이기 때문에 “꺾인 갈대”가 맞는 의미라 하는 것이 훨씬 더 정확하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꺽인 갈대’가 되었기 때문에 척도를 재는 측량자로 사용할 수도 없고, 지팡이라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꺽인 갈대’는 매우 위험하다. 갈대는 단단해서 꺽이면 아주 예리해서 잘못 만지만, 손에 피가 난다. 그래서 꺽인 갈대는 잘라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의 종은 그 꺽인 갈대를 잘라버지 않겠다고 선언하신다. 그는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신다고 하셨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일까?
단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인 것인가?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그냥 위로를 받으면 되는 것인가? 많은 교우들이 문맥의 교훈을 살피지 않은 채, 이 구절 하나만 달랑 떼어내어 감정적으로 위로받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된다면 기독교는 자칫하면 값싼 은혜를 파는 종교 상점이 될 수 있다. 단순히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기 때문에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히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더 큰 이유가 있다. 이사야 42장 6-7절에 나온다.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왜,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셨는가? 실패한 종들을 다시 일으켜 세워 이방의 빛으로 세우기 위함이다.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다시한번 그들을 세우기 위해, 다시한번 이방의 빛이 되기 위한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진정 희망이 된다. 상한 갈대를 꺽지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우리에게 소망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다 경험한다. 하나님의 의가 율법에 담겨 있지만, 우리중에는 그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의로움을 받을 수 있는가?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꺽인 갈대요, 꺼져가는 등불이다. 그런데 이런 우리를 꺽지 아니하시고 끄지 아니하시고 다시 세워주신다고 하신다니 이보다 더 큰 소망이 어디 있는가?
오늘 우리가 선포해야 할 복음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어떻게 꺽인갈대와 꺼져가는 등불같은 이스라엘을 다시 여호와의 종으로 세우느냐에 있다. 꺽인 갈대를 그냥 내버려두면 다시 세워지는가? 꺼져가는 등불을 그냥 내버려두면 다시 타오르는가?
아니다. 다시 세상에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누군가 꺽이지 아니하는 갈대의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흔들리는 등불같은 이스라엘이 다시 이방의 빛으로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흔들리지 아니하는 빛의 모습을 보여주는 진정한 여호와의 종이 필요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사야 42장 1-4절에서 이런 여호와의 종을 이스라엘에게 보내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이 말씀은 이사야서에 나오는 4개의 종의 노래 중에서 첫 번째 나오는 종의 노래이다. 특별히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본문의 3,4절에 봐야 한다. 3,4절에는 동일한 단어가 반복되어 있다. 그러나 한글로 번역하면서 의역해 버렸다. 원문으로 직역하게 되면, “그는 꺽인 갈대를 부러뜨리지 아니하며 흔들리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그는 꺽이지 아니하고 흔들리지 아니하고 세상의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로 번역해야 한다.
꺽인 갈대를 잘라내지 아니하는 여호와의 종은 스스로 꺽이지 아니하시는 분이시다. 또한 흔들리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는 여호와의 종은 스스로는 흔들리지 않는 분이다. 처음에 여호와의 종, 이스라엘은 꺽이고 흔들리는 종이었다. 그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는 꺽이지 아니하고 흔들리지 않는 여호와의 종을 보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호와의 종을 보고 꺽어지고 흔들리는 이전의 종들이 새로운 여호와의 종을 보고 진정한 여호와의 종이 되기를 하나님께서 바라시고 계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종은 누구인가?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다. 예수께서 어떻게 흔들리지 아니한 불빛으로 그가 어떻게 꺽이지 않는 갈대로 친히 보이셔서 꺽이고 흔들리는 우리는 어떻게 위로하고 계시는지 공관복음에 보면 너무나 자세히 나와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공생애를 시작할 때, 예루살렘의 귀족이나 상류층을 대상으로 사역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흑암에 살고있는 이방인을 대상으로 사역을 시작하셨다. 예수님은 천국복음을 전하면서 불평하지도 않으시고 약한 자, 병든자, 귀신들린자들을 고치시면서 자신를 드러내지 않으셨다. 이사야 42장 2절에 나오는 종의 모습과 얼마나 똑같은가?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진정한 여호와의 종의 모습이다. 주님은 상한갈대를 꺽지아니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안식일이지만 손마른 자를 고쳐주셨다. 안식일법을 어기면 어떤 박해와 고난이 다가오는지 알면서도 이방땅에서 고통하는 이들을 업신여기지 않으셨다. 안식일법을 만든사람들이 강제적으로 이 법을 지키도록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들을 향해 “하나님은 자비를 원하시고 제사를 원하시지 않는다”고 외치셨다.
이 일로 인해 바리새인들인 예수를 죽이려고 의논하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가난한자와 언약한자들을 위해 정의를 베푸는 일에 흔들림이 없으셨다. 예수께서는 빌라도에게 심판을 받는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으셨다. 관리들과 군인들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조롱하였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십자가의 모진 고통을 당하면서도 오른편 강도의 요청을 무시하지 않으셨다. 이 모든 일을 목도한 이방인의 백부장은 이렇게 말한다. “이 사람은 정령 의인이었도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께서 이렇게 꺽이지 아니하고 흔들리지 아니하는 모습을 보여주신 이유가 무엇인가? 앞에서 말한거처럼, 꺽인 갈대와 흔들리는 등불같은 우리를 다시 종으로 세워 이방의 빛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였다.
오늘 우리는 어떠한가? 예수님이 다시 돌려준 이방의 빛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는가? 우리는 꺽이지 않고 흔들리지 아니하고 이방의 정의를 베푸는 여호와의 종에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는가? 여호와의 종의 사명은 생각해보면 너무나 감동적이다. 보통 자신이 꺽이지 아니하고 흔들리지 아니하면 꺽이고 흔들리는 사람들을 짓밝는다. 그런데 여호와의 종은 자신은 꺽이지 아니하고 흔들리지 아니함에도 불구하고 꺽인 갈대와 흔들리는 등불을 잘라내거나 끄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교회가 정의에 대해 생각할 때 놓쳐서는 안된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꺽인 갈대 꺼져가는 등불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국사회는 겉으로는 이념과 정의를 이야기하지만 적자생존의 삶 앞에서, 이익앞에서는 반칙과 꼼수를 마다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리스도인 조차 그 흐름에 따라 살아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정말 흔들림없이, 꺽임없이 이방의 빛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는가? 기독교인 역시 반칙과 꼼수를 보이고 있다. 고위 공직자 청문회 때마다 나오는 “불법 땅투기, 주민등록 위장전입, 자녀 군문제 의혹”등에서 그리스도인 역시 반칙과 꼼수를 보이고 있음이 드러났다.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에서 출세하고 성공했지만, 끝내는 꺽인갈대로 살아가고 있다. 지금 한국사회와 교회는 정의에 매우 목말라 하고 있다.
2010년에 마이클 센들에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한국에 들어온지 6개월 만에 60만부가 팔렸다. 이것은 한국사회가 정의에 목말라 하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물론 한국사회는 민주가 이루어 졌지만 아직도 우리 현실에는 불의한 부분이 많이 남아 있다. 기득권 세력은 자신들이 잘 살고 돈 많이 벌고 권력을 누리는 것이 자신들의 능력이 탁월했다고 하면서 억울하면 출세하라고 한다. 그러나 사회 기득권층이 겉으로는 법과 질서를 이야기 하지만 뒤로는 반칙과 꼼수로 자신의 이익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일 드러나면서 많은 젊은이들이 정의를 목말라 하고 있다.
왜~ 나꼼수라는 것이 인기가 있는가? 들어보면 전부 욕이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매우 좋아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한국사회는 반칙과 꼼수가 많다는 것이다. 이런 위기의 상황 가운데서 오늘 주시는 본문은 위로가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꺽인 갈대를 꺽지 아니하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시는 분이기에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다시 일어서서 열방의 빛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고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여호와의 종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는가?
방법은 하나이다. 이 땅의 하나님의 정의를 시행하면서도 꺽이지 않으시고 흔들리지 않는 진정한 여호와의 종이신 주님의 삶을 함께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방법은 이것밖에 없다. 주님은 이땅에 오셨지만 법과 질서는 여전히 있었다. 법과 질서가 있지만 법과 질서를 운행하는 과정에서 사랑이라는 더 큰 가치가 없으면 정의가 불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께서 유대당국와 로마제국의 압박과 살해 위험에도 흔들리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이사야 42장에 여호와의 종의 사명을 예수께서 당신의 사명으로 받아드리신 것이다. 그는 끝내 꺽이거나 흔들리지 않으신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감당하신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패했던 종의 사명을 다시 회복시켜 주셨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가 세상에서 빛의 역할을 잘 감당하려면 우리 역시 예수님처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종, 여호와의 종의 사명을 우리의 사명으로 받아드려야 한다. 우리 스스로는 꺽이거나 흔들리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꺽이거나 흔들릴 때 함부로 정죄하거나 비난하지 아니하는 사랑의 모습을 보이면서 여호와의 종의 사명을 우리의 정체성으로 받아드린다면 우리는 이방의 빛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면 그 옛날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새로운 여호와의 종, 성령을 보내주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성령을 부어주시고 우리의 손을 잡아주시고 우리를 보호하시어 열방의 빛으로 세워 주실 것이다. 이사야 42장 5-7절에 분명하게 우리에게 선포하고 있다.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지금 우리의 모습을 정직하게 드려다 보아야 한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의에 목마른 갈증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한다. 세상의 성공과 지위에 목말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지 못한 우리의 모습에 통증을 느끼고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해야 한다. 그리고 성령의 충만을 갈망해야 한다. 그 성령께서 우리에게 충만히 임하셔서 그 옛날 여호와의 종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셔서 진정한 여호와의 종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 역시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면 예수께서 우리에게 다시 회복시키신 이방의 빛의 사명을 잘 감당하게 될 것이다. - 마음이 상한자를 고치는 주님... <찬양>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