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15:1-21 하나님의 백성의 희망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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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백성의 희망은 무엇인가?
창세기 15장 1-21절
경제적으로 어렵다 보니깐 방송마다 희망을 주제로 특집을 만들고 희망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여 방영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그만큼 한국은 절망을 깊게 느끼고 있다는 반증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이렇게 희망을 자주 이야기 하면 도움이 되는가?
2007년에 “88만은 세대”라는 책을 써서 스타가 된 우석훈씨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이야기 한다. “우리사회는 희망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과해서 문제다”라고 말했다. 우석훈 씨는 20대 들에게 너무 많은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은 일종의 고문이라고 말했다. 희망고문?
이 희망고문이란 말은 원더걸스를 만들어 낸 프로듀서이자 가수인 박진영씨가 수필집을 냈는데, 그 수필집에서 사용된 언어이다.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행동은 같이 좋아하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럴 수 없다면,
그 다음에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행동은,
절망을 주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둘 사이에 애인으로서는,
전혀 희망이 없음을 분명히 인식시켜주는 것이다.
술에 취해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목소리 듣고 싶어 전화했어" 라고 전화를 한다든지..
사귈 마음이 전혀 없는 사람과..
그냥 괜찮다는 이유만으로 데이트를 한다든지..
싫어서 헤어지면서..
이유는 집안이 어려워서, 옛 애인을 못 잊어서..
혹은 일에 집중하기 위해서라고..
말을 한다든지 하는 행동들은 모두 상대방에게..
희망을 주는 행위들이다.
이런 행위를 나는 "희망고문" 이라고 부른다.
서점에서도 방송에서도 ‘성공한 20대 이야기’ ‘20대 제테크로 희망을 찾아라’ ‘20대 자기개발’ 등의 책들과 내용을 들을 수 있는데 그것은 희망의 과잉상태다. 인터넷에 20대라고 검색을 해 봐라. 모두가 성공 사례들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젊은 세대에게 너무 지나치게 희망을 이야기 한다. 젊은 세대가 희망을 실현시키기 위한 방법이 턱없이 부족한 마당에 그들에게 희망을 이야기 하는 것은 희망고문이다. 고문의 의도가 없다고 해서 고문이 아닌게 아니다.
절망스러운 20대에서 또 다른 고문을 가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것은 종종 교회에서도 사실인거 같다. 성공한 이들의 간증은 진정한 소망이 되기 보다는 고문이 되는 경우가 가끔있다.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성공의 이야기는 좌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상의 소망인 교회는 값싼 희망을 팔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은 절망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소망이 무엇인지 보여주기 위해 부름받은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소망은 무엇인가? 이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소망(Hope)과 소원(Wish)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개인적인 소원을 소망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각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면서 이것을 소망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나이에 따라서 소원이 다르다. 학생들은 수능 시험 잘 보는 것, 그 다음엔 좋은 직장에 들어갔으면, 예쁜 아내, 멋있는 신랑 만났으면, 그 후엔 돈을 넉넉히 벌었으면, 사업이 잘 되고 승진했으면 하는 소원을 가지고 있다. 이런 소원은 나쁜 것들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을 소원할 권리는 있다.
시편 20편 4절에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께서는 종종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신다. 이 소원은 들어주심을 통해서 종종 행복감을 느낀다. 그러나 이런 소원은 성경이 말하는 긍극적인 소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소원은 이루어질 수도 있고, 이루어지지 않을 수 도 있는데, 이루어지지 않으면 좌절과 절망을 가져다 주기에 소원은 진정한 소망일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소원은 미래를 통제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적인 방법으로 통제하려고 하고 염려한다. 그리고 두려움이 생긴다. 그래서 소원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좌절하고 절망한다. 따라서 개인적인 소원을 희망이라고 많이 이야기하는 사람이 그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오히려 좌절과 절망을 겪을 확률이 커지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이야기하는가? 미래의 끝을 우리가 원하는대로 알 수 있게 만들어 놓고 그것을 기다리는 것은 진정한 희망이 아니라고 말한다. 물론 우리는 소원을 가질 수 있다. 설령 그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최상의 것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최후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신뢰하며 기다리는 것이 진정한 희망이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또한, 한 개인의 소원은 그것이 성취된다 하더라도 전 공동체를 살리는 소망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자원은 유한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차지하면 다른 사람이 차지하지 못한다. 같은 지역에서 한 음식점이 잘 되면 어떤 음식점은 잘 못 된다.
만약에 이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자녀들이 좋은 대학가기를 소원하고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허락하신다면 과연, 기독교는 이 세상의 소망이 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진정한 소망이란? 어떤일이 성취될 것이라고 신뢰하는 것이지만, 그 성취는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지, 우리 인간의 소원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진정한 소망이란? 끝을 알 수 없지만, 항상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이것이 진정한 소망이라고 해도 미래의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소망할 수 있을까? 이게 과연 가능할까? 이런 질문에 답하려면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아브라함은 갈바를 알지 못한 채 소망으로 살아간 믿음의 조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시고 축복하셨다. 그래서 갈바를 알지 못한 채 순례길을 떠났다. 그러나 순례길은 아브라함이 생각한 것보다 험하고 길었다. 우리가 알다시피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큰 민족을 이루어 주 겠다고 약속하셨음에도 불구하고 8-9년이 지난 15장에서는 후손 한명 없었고, 땅 한평 소유하지 못했다. 그러다보니깐 아브라함이 약간 흔들렸던거 같다.
창세기 15장 1절을 보면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기뻐하지 않는다. 2절을 보면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큰 민족을 주겠다. 너의 자손이 티끌처럼 될 것이라’는 약속이 성취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아브라함의 소망은 바닥을 드러내게 됐다. 그는 냉혹한 현실 앞에서 좌절과 절망을 느낀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상속자를 엘리에셀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에 하나님은 소망이 바닥난 아브라함에게 소망을 주기 위해서 하늘의 별과 같은 자손을 주겠다고 약속한 다음에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재차 약속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어떻게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소망의 근거를 제시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러자 하나님은 놀라운 시청각 교육을 보여주셨는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삼년된 암소, 삼년된 암염소, 삼년된 수양, 산비둘기, 집비둘기를 잡아서 쪼갰다. 그리고 마주대하여 놓으니 솔개가 내려왔다. 시체 냄새를 맡고 온 솔개를 하루종일 쫓았던 것같다. 이렇게 지쳐있는 아브라함에게 17-18절에 보면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여기에서 언약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다. 연기나는 화로와 타는 햇불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하나님의 임재를 가리키는 상징이다. 타는 햇불과 연기나는 화로가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는 것은 하나님이 그 사이로 지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고기를 쪼개놓으면 굉장히 많은 피가 흔건하게 젖는데. 그 사이로 하나님이 지나가시는 장면이다. 이것은 고대근동 아시아에서 계약을 하는 장면으로 나중에 종교의식으로까지 승화된다. 계약 당사자 둘이 계약을 맺은 다음에 계약을 체결하는 의식이다. 이것은 만일 너와 내가 이 계약을 파괴하면 신의 저주를 받아서 쪼갠 고기처럼 반쪽이 난다는 사실을 신 앞에서 맹세하는 의식인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지금 무엇을 하신 것인가?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이 땅을 주겠다는 약속은 ‘내 몸숨을 걸고 지키마!’ 하고 저주의 맹세를 하신 것이다.
‘내가 약속한 것은 무슨 수가 있더라도 끝까지 지키겠다’는 이러한 약속은 당시 언약체계인 방식을 하신 것이다. 요사이에도 피로 의형제를 맺고 갱단의 결속을 강화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께서 피로 맹세할 이유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신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시면서 ‘내가 이 약속 지키지 아니하면 자기 저주를 당할 것이다’ 라고 맹세한 이유가 무엇인가?
냉혹한 현실 가운데서도 최후 승리를 믿고 소망의 끈을 놓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스스로 피의 맹세를 하신 것이다. 결국 우리의 소망은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지키시겠다고 피로 맹세하시는 언약의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개인적인 성취에 우리의 소망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은 끝까지 지키시는가? 동물의 피로 약속하신 이 아브라함의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 피를 흘리실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을 지키기 위해서 피를 흘리셨다는 것을 보여준 가장 분명한 증거는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이 약속을 지키기위해 어떤일까지 마다하지 않으셨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린 십자가하면 장식용으로 밖에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십자가는 로마시대에 가장 잔혹한 처형방법이었다. 금속이 달려있는 채찍으로 맞고, 자기가 진 십자가를 처형장까지 가게 하고, 그곳에서 못을 박는 처형이다. 그래서 아무에게나 처형하지 않았다. 로마 시민자에게는 절대 하지 않았다. 로마에 저항하는 자의 의지를 확실히 꺾기 위해서 반역자나 노예들 종들을 십자가 처형으로 다스렸기 때문에 이 십자가의 죽음은 종의 죽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트루먼 데이비스 라는 의사가 십자가의 못박히는 것이 무엇인지 의학적으로 설명하였다. “죄인의 손목에 박힌 못이 신경에 압력을 가하면 큰 고통이 느껴진다. 몸이 늘어지면서 생기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 몸을 위로 끌어당기면 몸무게는 못이 박힌 발로 이어지게 되고 타는듯한 고통을 뼈사이에서 느낀다. 팔이 피로해지고 근육에서 경련이 일어나면서 고통이 끊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경련과 고통 때문에 숨 쉴 수 있는 능력마저 잃는다. 공기는 패로 주입되지만 숨을 내쉴 수는 없다. 따라서 약간의 공기를 마시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결국 이산화탄소가 패와 혈관에 쌓이게 되면 경련은 약간 가라앉는다. 그러면 몸을 위로 끓어 당겨서 산소를 들이마시고 내쉬게 된다. 그러나 고통의 시간이 지속되면 몸은 다시 경련을 잃으키고 일시적인 질식상태에 이른다. 결국 근육조직에서 너무나 많은 양의 액체가 빠져나가게 되고 패는 적은양의 공기를 들이쉬기 위해 마지막으로 고통스럽게 움직인다. 죄인은 이제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는 것을 뼈속까지 느끼고 죽음앞에 몸을 맡낀다.”
이러한 의학적 기술을 듣고 나면 십자가 처형이 얼마나 처참한지 느낄수가 있다. 인간이 당하는 처참한 죽음인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왔다는 것은 이해하기도 힘들고, 그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못이 박혀 죽었다라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초대교회의 가르침은 당시 헬라인들과 로마인들에게는 미친소리와 다를바가 없었다. 어떻게 하나님이 수치를 당하고 종이나 반역자가 당하는 십자가 처형을 당할 수 있는가? 그것은 말이 안되는 일이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22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한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왜! 십자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가?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기까지 우리에게 하신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최후 승리를 신뢰하고 소망할 수 있는 것이다. 십자가 위에서 그 참혹함을 온 몸으로 받아낼 정도로 하나님의 사랑은 큰 것이기 때문에 십자가 위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하며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도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인 것이다.
왜 주님이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으셨을까?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는가를 보여주신 것이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를 아끼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어떻게 해산을 고통으로 너를 낳았는지를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세상의 칭찬이 아니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한번 약속하면 죽기까지 신실하게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기 위함일 뿐이다. 우리 주님이 원하는 것은 이 세상의 왕관이 아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어떤 고통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내가 너를 고통 가운데 너와 함께 하시겠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우리가 십자가의 고통같은 절망 한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우리 곁에 다가와 같은 고통을 온 몸으로 견뎌내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로마병사의 조롱에도 주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사랑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주님은 쪼갠 고기처럼 반쪽이 되어 나무에 달린 채 온 세상을 향해 외치고 있다.
‘나무에 달린자마다 저주 받은 자라고’ 했다. 우리가 언약을 어겨 우리가 온 몸으로 뒤집어 써야 될 저주를 그리스도께서 홀로 감당하시고 하늘과 땅 사이 나무에 달려 십자가 위에서 지금도 사랑한다 아들아, 내 딸아, 내가 너를 낳았노라 지금도 부르짖고 계시는 것이다.
지금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데 지금 또 다시 그 사랑을 보여달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다시 이 땅에 오시게 해서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이야기가 아닌가? 기적이 나타나고 이빨이 금이빨로 바뀌는 것 그게 뭐가 대단한가? 여기 이렇게 있는데...
하나님의 사랑의 증표가 있는데, 그러기에 하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두려움에서 극복할 수 있다. 끝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이 그 약속을 끝내 지키실 것이고,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시게 할 정도까지 신실하게 그 약속을 지키시고 부활하셔서 최후 승리를 보여주셨기 때문에 우리 또한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그 아들을 십자가게 못 박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망이 무엇인가? 끝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며 끝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닌가? 미래에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품고 그 소원이 어떻게 될까? 노심초사 염려한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소망의 백성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의 백성은 스스로 미래를 통제한다는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둘러싸고 빚어갈 것을 기대하면서 최후승리의 약속을 기다리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절망을 벗어나 참다운 소망으로 승리하며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일찍이 이러한 사실을 기독교 철학자 케이르케고르는 이렇게 말한다. “절망의 반대말은 희망이 아니라 신앙이다. 죽음에 이르는 절망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저 잘 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로는 안된다. 절망이 죽음의 병이라는 것은 절망하는 죽는다라는 의미가 아니다. 절망은 믿음이 없이는 죽어서도 해결할 수 없는 병이라는 것이다. ‘좀더 좋은 환경 좀더 나은 조건에서 살았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좋은 환경에서 살면 절망이 사라지는가? 좋은 직장, 좋은 대학, 좋은 집을 가지고 있어도 몇 달 지나면 다 그 기쁨도 다 없어진다. 절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절망의 반대말은 희망이 아니라 신앙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의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한번 약속하시면 목숨까지 바쳐 이루어내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언약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죽음의 이르는 절망에서 벗어나 진정한 소망을 소원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절망의 땅에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원한다.
-힘들고 지쳐 낙망하고 넘어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