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강절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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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을 믿고 승리의 삶을 살아가자
약속을 믿고 승리의 삶을 살아가자
대강절은 ‘오심’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오심(Advent)을 가리키는 라틴어 용어 아드벤투스Adventus는 이교의 용어였습니디. 이교도들이 제사를 드릴 때 신들이 제사하는 자들을 위해 그 제사자리에 방문하는 것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곤 했습니다. 로마제국은 이 종교적인 의미를 이어받아 왕적 위엄을 가진 인물이 취임하여 공식적인 방문을 하는 것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했습니다. 이렇게 ‘공식적인 방문’을 의미하는 이 단어는 이후에 교회의 전문용어로 자리잡는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을 방문하신 것을 가리키는 용어로 정착된 것입니다.
현 시대에는 성탄절 이전의 4주일을 ‘대강절’이라고 부릅니다. ‘주님의 강림을 기다리는 절기’라는 뜻입니다. 고대 교회는 이방축제였던 태양 숭배일을 성탄절을 바꾸어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오심, 즉 성육신을 묵상하면서 성탄절 당일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로 확장하였습니다. 이것이 4주간의 대강절로 자리잡았습니다. 대강절은 금식하면서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것은 큰 기쁨이면서 동시에 회개하면서 주님의 오심을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대강절에는 이런 저런 장식을 하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대강절 화환’이다. 그 화환 중간에 촛대를 네 개 만들어 초를 꽂아 놓는다. 매 주일마다 하나씩 촛불을 켜서 마지막 주에 네 개의 초 전부에 불을 다 밝힌다. 화환 가운데 가장 큰 다섯 번째의 촛대를 만들어 놓고 성탄절 당일에 그 초를 켜기도 한다. 이렇게 촛불을 켜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빛으로 오신 것을 가리키기 위함이다. 이 빛은 동방의 점성술사들이 별빛을 보고 예루살렘으로 찾아온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어둠 속에 빛이 비췄다. 사망이 왕노릇하는 이 땅에 그리스도께서 빛으로, 생명으로 이 땅에 오셨다. 대강절은 빛들의 절기이다. 빛으로 오신 주님을 성탄 당일만 축하하는 것이 얼마나 아쉬운 일인가?
대강절은 우리에게 기다림에 관해 묵상하게 한다. 대강절에 우리는 무엇을, 아니 누구를 기다리는가? 우리가 기다리는 주님은 2000여 년 전에 이 땅에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만이 아니다. 사실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기다리는 주님은 과거의 아기 예수님만이 아니고, 미래에 오실 그리스도만도 아니다. 대강절에 우리는 지금도 계속해서 오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맞이한다. 삼중적인 오심을 기다리는 것이다. 교회는 대강절에 전체 그리스도를 기다린다. 신자는 성찬상에서 전체 그리스도를 받듯이, 대강절에서도 전체 그리스도를 받는다.
아담과 하와는 특별한 사람입니다. 어떤 면에서 특별한 사람들입니까? 인류의 어떤 사람들과 다르게 그들은 죄가 없는 상태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 상태에서 하나님과 교제한 아주 특별한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그들을 기쁨이 충만한 에덴에 두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동산의 모든 실과를 허락받았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원하기만 하면 모든 것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오직 한 가지 선악과만 예외였습니다. 선악과는 그 나무 자체에 어떤 효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악과는 동산 중앙에 있기에 동산 어느 곳에 거하더라도 보였습니다. 따라서 선악과는 동산 어디에 거하든지 아담과 하와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자신들의 위치를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동산 어느 곳을 거닐어도 아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이 나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 하나님은 선한 분이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으면 나는 죽는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살아야 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선악과를 먹지 않으면 동산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다는 생각을 어디서나 했습니다. 언제든지 했습니다. 그러나 단 하나 금지된 그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여러분 이게 아주 불공평해 보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모든 것을 허락하시고는 단 하나를 금지하셨는데 그 하나도 자신들이 마음대로 하고 싶어했습니다. 사탄의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사탄의 꾀임에 넘어갔습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이 되라는 사탄의 말을 그대로 수용했습니다.
창2:16-17절에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여기 잘 보시는대로 단수입니다. 아담에게 말씀하셨고 아담이 그 여자에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죽었습니까? 우리가 보기에 살아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거 같습니다. 그러나 죽은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을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이제 아담과 하와는 영원한 생명과 즐거움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모든 것들을 더이상 즐길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에서 영원한 어둠으로 쫓겨났습니다. 쫓겨나고 나니 이제야 자신들이 처한 현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원시복음, 즉 처음의 복음이 아담과 하와를 어떻게 회복시켰는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처음 복음은 사단을 향한 저주 가운데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아담에게 물었습니다. 왜 아담에게 먼저 물었습니까? 아담이 직분자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잘못을 물을 때는 이유가 무엇이죠? 잘못에 대해 관심이 없으면 그냥 심판하면 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담에게 여자에게 왜 그랬냐고 물은 것은 그들에게 회복할 기회가 있음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둘 다 하나님 탓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여자가 먹으라 했습니다. 뱀이 먹으라 했습니다. 이렇게 핑계를 되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 핑계는 하나님을 향한 핑계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하나님이 뱀에게는 왜 먹으라고 꼬셨냐고 묻지 않습니다. 바로 저주를 선언하십니다.
여러분 이 시점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탄을 향한 저주가 우리에게는 복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뱀은 실제 뱀이 아니라 사탄의 대리자입니다. 진노하신 하나님은 사탄에게 바로 저주를 선언했습니다. 이사야14:112-14절에 보시면 사탄이 저주를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탄은 계명성입니다. 사탄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그 즉시로 저주를 받고 땅에 떨어졌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거짓말한 사탄은 저주를 받습니다. 바로 이 지점입니다 .우리는 죄를 행합니다. 죄는 하나님의 말이 아니라 사탄의 말을 듣는 아담과 하와와 동일한 죄를 짓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는, 이 세상의 모든 죄는 하나님을 향해 짓는 죄입니다. 그러나 그 죄의 결과는 사망입니다. 잠시 잠깐은 행복을 누릴 수 있고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허무와 죄 가운데 사망 가운데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뱀에게, 사탄에게 내린 저주입니다. 우리는 사탄을 보면서 위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아 사탄을 따라가면 달콤한 것 같고 나에게 행복을 줄 것 같고 내가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 올라서는 것 처럼 영화로워 보이고 즐거워 보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결국 종신토록 저주를 받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탄의 결국을 알고 사탄처럼 되지 않도록 사탄과 싸울 수 있습니다. 이제 눈을 들어 사탄의 결국을 바라보고 죄의 유혹가운데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미 사탄을 저주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탄을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둘째 사탄에게 저주하심으로 인류는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저주하셨습니다. 그런데 저주 가운데 이상한 선언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누군가를 저주할 힘과 위치에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냥 심판하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여기서 여자는 누구일까요? 하와입니다. 왜냐하면 여자인 하와가 뱀의 말에 속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우리에게 알려줍니까? 뱀, 즉 사탄은 여자에게 접근해서 니가 하나님 같이 될 수 있다고 꼬셨습니다. 요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고 했습니다. 사탄에게 속아서 하와와 남자는 사탄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사탄과 함께 원수되지 않고 계속 그대로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탄에게 속해서 사탄과 함께 멸망했을 것입니다. 죄로 인해 사망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철학은 죽음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봅니다. 그러나 성경은 전혀 다르게 말합니다. 죽음이란 사람에게 자연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바빙크는 이렇게 말합니다. “죽음의 원인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데 있고(창2:17), 마귀가 인간을 유혹하여 타락하고 죽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마귀에게 있으며(요8:44), 인간의 삶 전체를 허물어 뜨리고 말하자면 자기 자신에게서 죽음을 이끌어 내는 죄 자체에 있고(약1:15), 죄를 죽음으로 갚는 하나님의 심판에 있다(롬6:23)”
우리가 처한 현실을 잘 보여줍니다. 우리는 사탄에게 속아 죄와 사망에 빠졌으며 자연스럽지 않은 죽음 가운데 처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반드시 죽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삶 전체가 허물어졌고 우리 안에서 죄는 끊임없이 솟아져 나와 하나님을 대적하며, 결국 우리는 죄를 갚으시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항상 서 있습니다. 언제나 멸망의 때를 두려워하며 살아가는 비참한 처지에 놓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자와 원수 되게 하심으로 여자와 아담을 구분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과 사탄 사이에 개입하셔서 죄와 죽음의 권세를 깨드리셨습니다. 사탄으로부터 아담과 하와를 구별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이 사이에 개입하셨습니다.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여자와 사탄 사이에 원수됨을 주셨고 여자의 후손과 사탄의 후손 사이에도 원수됨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 이후로 오는 모든 여자의 후손은 사탄을 대적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사탄을 대적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사탄과 타락한 자기 백성 사이에 적개심을 주셔서 서로 미워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구원이 됩니다. 우리는 사탄으로부터 구별된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로 우리는 한 무리를 보게 됩니다. 그 무리는 여자의 후손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여자의 후손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사탄과 싸움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여자의 후손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원시복음이라고 합니다. 여자의 후손, 즉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은 모두 여자의 후손과 한 몸이 됩니다. 이 여자의 후손이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된 교회의 머리되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사탄을 저주하시는 그 자리에서 교회를 말씀하시고 계시고 교회를 특별히 구별하고 계시고 교회를 보호하고 계십니다. 사탄의 공격을 받을 것이라 말씀하시면서 교회가 사탄과 원수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교회를 보호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겠다고 하나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 이후로 이제는 실제 전쟁의 역사입니다. 누구와 누구의 싸움일까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즉 사탄의 후손과의 싸움입니다. 아담 이후로 교회는 언제나 싸웠습니다. 아벨이 속한 교회는 뱀의 후손인 가인과 싸웠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노아 홍수 시대에 뱀의 후손들이 교회를 외면하고 대적했으며, 여자의 후손인 아브라함을 공격했습니다. 애굽 왕은 사라를 납치해서 여자의 후손의 대를 끊으려 했으며 애굽 왕 바로는 여자의 후손인 이스라엘을 핍박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암울한 시대를 지날 때가 있습니다. 사사 시대가 그러했습니다. 사탄의 공격으로 이스라엘이 모두 죄로 물들어서 멸망하는 것 처러 보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은 사무엘을 준비해서 교회를 보호했으며 결국 유다 지파에서 다윗이란 왕을 하나님이 주셔서 이스라엘 교회를 보호하셨습니다.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 교회가 쪼개지고 사탄으로 인해 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 때도 하나님은 엘리야와 엘리사를 보내서 교회를 보호하셨습니다. 그 뿐입니까?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도 사탄의 공격은 멈추지 않습니다. 교회라는 탈을 쓰고 중세에 참된 교회를 공격했으며 칼뱅이나 루터와 같은 믿음의 사람들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어두움 가운데서 방황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탄의 공격이 있을 때 마다 하나님은 사탄을 원수로 여기는 여자의 후손들을 준비하셔서 교회를 지키셨고 순결하게 교회를 보호하고 보존하셨습니다.
마지막 셋째, 여자의 후손인 교회에게 승리를 약속하셨습니다.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여자의 후손이 뱀과의 싸움에서 완전히 승리할 것임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옛 뱀이 교회를 공격할 때마다 뱀이 이기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여자의 후손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을 때 사탄은 이겼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단지 예수님의 발뒤꿈치를 상하게 할 뿐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에게 했던 것처럼 지속적으로 교회를 넘어뜨리려 했습니다. 어떤 때에는 세상의 권력과 힘을 사용해서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실제 초대교회 시절이나 일제 시대에 교회는 많은 핍박을 당했습니다. 사탄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도 교회는 살아남아 승리를 선언했습니다. 어떤 때는 사탄이 교묘한 세상 학문으로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어떤 때는 인본주의 철학으로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어떤 때에는 과학으로 공격했습니다. 사탄이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일들이 있어왔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굉장히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발 뒤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 말씀하셨기에 교회는 항상 그런 공격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공격을 받기를 피하지 않으셨고 고통 뒤에 있는 승리를 선언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언제 승리하셨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발 뒤꿈치 공격에도 불구하고 승리할 수 있을까요?
바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승리하셨고 그 순간에 우리의 모든 죄악을 없이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예수님이 받으셨고 그 결과 우리는 이제 진노가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으로 자비하신 아버지로 하나님을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제 사탄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여전히 사탄은 살아서 우리의 발 뒤꿈치를 상하게 하려고 마지막 발버둥을 치고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게으러게 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의심하게 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피곤하게 만들고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는 것을 힘들게 상황을 조정합니다. 때로는 다투게 하고, 때로는 집안 일로 힘들게 하고 때로는 별거 아닌 일로 화나게 하고 우리의 육체를 약하게 하고 병들게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 때 입니다. 단지 발 뒤꿈치를 상할 뿐입니다. 우리의 승리를 앗아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여자의 후손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구약의 성도들이 여자의 후손의 오심을 기다렸듯이 우리는 재림을 기다립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크리스마스는 아기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을 맞이했듯이 진정한 승리자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날이어야합니다. 우리는 그 날을 바라보며 오늘 하루하루를 견딜 수가 있고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면 우리의 모든 고통과 어려움과 힘듦은 끝이 나고 진정한 기쁨과 평화가 우리를 맞이할 것입니다. 우리의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님을 통해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주와 함께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이미 악은 종말을 맞이했습니다.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님이 다시 오실 그 날까지 함께 주님을 기다리며 원수된 사탄과의 전쟁을 함께 견뎌가는 큰사랑교회 성도들 되기 바랍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