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시험 (창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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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아마 여기 계신 여러분 누구나 다 시험에 대한 안좋은 기억들이 있을 것입니다. 시험을 망쳐서 성적이 떨어진 기억, 중요한 시험을 못봐서 원하던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기억 등등 아마 학창시절을 겪으신 분이라면 누구나 시험에 대한 압박과 부담감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돌아보니까 정말 징글징글하게 시험을 많이 봤습니다. 32년 동안 8살에 초등학교 입학하고 지금까지 군대 2년을 빼면 늘 학교에서 학생으로 있었지 때문입니다. 초 6 중 3 고 3 재수 대학교 4 대학원 지금까지 매 학기마다 시험 혹은 시험에 준하는 과제들이 있었고 시험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였습니다.
근데 시험 중에 가장 곤란하고 부담이 되는 시험은 예상치 못한 시험입니다. 중간고사 기말고사 범위와 날짜가 정해진 시간은 내가 계획을 짜서 공부하고 시험에 맞춰서 내 실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데, 깜짝 시험 팝업퀴즈는 정말 순수 내 실력으로 보는 시험이기 때문이죠. 성실히 공부를 해왔으면 괜찮은데 그렇지 않을경우 참 난감한 기억들이 있습니다.
공부 시험 뿐만이 아니라 우리 삶에도 소위 시험 보통은 어려운 상황 고난이 찾아 옵니다. 예측할 수 있으면 좋으려만 대부분의 경우는 예측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닥쳐오죠. 우리가 영적으로 두가지로 해석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주는 시험, 그리고 사단이 주는 유혹 시험이죠. 사단이 주는 시험은 우리를 넘어지게 하고 고꾸라트리기 위해 찾아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는 시험은 성격이 다르죠. 성경에서 많은 성경인물들이 하나님의 시험을 겪습니다. 하지만 이 시험은 그를 무너뜨리기 위한 시험이 아니라, 믿음을 더 강하게 하고 영적으로 더 세우기 위한 시험이죠.
오늘 본문의 내용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이 왜 아브라함을 시험하였으며 그 목적이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험을 잘 극복하는 방법도 제시하죠.
<본론>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아브라함아” 그러고는 대뜸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라” 그리고 “거기에서 내가 일러준 산으로 올라가 이삭을 번제로 바쳐라” 고 말씀하십니다. 황당한 말씀이죠. 번제라는 것은 희생물을 죽이고 불로 태워서 하나님께 바치는 제사를 말하는데, 자신의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요? 사실 오늘 본문을 읽는 성경의 독자들에게 창세기의 저자는 친절하게 1절에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시험”임을 알려준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우리는 ‘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이렇게 말도 안되는 명령을 하시는구나’ 우리는 이렇게 받아드릴 수 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어땠는가? 이 사실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저 하나님께서 갑자기 등장하셔서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그를 번제물로 바치라는 것. 아브라함의 인생에 다시 한번 거대한 시험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 2절에 하나님의 명령은 여러모로 아브라함이 처음으로 성경에서 등장하는 창세기 12장 “너는 너의 고향 친척과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를 떠올리게 합니다. 12장 1절에서 쓰여진 “가라”라는 히브리어 단어와 오늘 본문 2절에서 모리아 땅으로 가라라고 할 때 쓰인 단어는 동일한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딱 2번만 쓰여진 특이한 단어인데 한번이 12장에서 아브라함을 처음 불러내실 때 사용되었고 그리고 오늘 본문 이삭을 바치러 가라는 명령에 쓰여졌다. 이것은 창세기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아브라함 스토리가 22장을 끝으로 이삭으로 그 주인공이 바뀌어지는 것을 볼 때 아브라함 스토리의 처음과 끝을 담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번째 가라고 명하신 명령에 따라 아브라함은 그의 과거와 모든 가족들을 끊고 가나안으로 향했고 오늘 마지막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러 가라는 명령으로 그의 유일한 아들 상속자 그의 미래를 끊어버리라고 명령하신다.
아브라함은 분명 하나님의 부르심에 나아가는 믿음을 12장에서 보여주었다. 하지만 12장부터 22장에 이르는 25년동안 ‘너로 인해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는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그가 하나님과의 동행 내내 서투르게 비틀거리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죠.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에 이르렀지만 그 땅에 기근이 들자 가나안을 떠나 이집트로 떠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 가나안 땅이었지만 바로 문제가 생기자 그는 그 땅을 떠나버립니다. 그리고 그는 이집트에서 자신의 아내 사라를 자신의 누이이자 아내로 속입니다. 아내가 너무 아름다워 이집트 파라오가 자신을 죽일까봐 두려웠기 때문이죠. 거기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만약 파라오가 사라를 자신의 아내로 취했다면 아브라함은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후손을 어떻게 얻었을까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면 사라를 누이라고 속여 위험에 빠뜨리는 일은 하지 않았을것 입니다.
또 아브라함이 롯을 데리고 함께 여행을 떠난 장면에도 의문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친척과 아비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는 그 친척인 조카 롯을 함께 데리고 하란을 떠납니다. 아마도 제가 생각하기에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때 이미 75세였기에 그는 자신의 아들 역할로 롯을 대신하기 위해 동행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롯을 데리고 간 결정은 결국 어떻게 되죠? 롯은 결국 소돔으로 가게 되고 롯의 자손은 모압과 암몬의 조상이 되고 그들은 아브라함 자손의 적이 됩니다.
롯이 사라자지 아브라함은 사라의 몸에서는 아들을 낳을 수 없다고 생각해서 사라의 여종 하갈과 동침하고 그에게서 이스마엘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이 이스마엘은 어떻게 되죠? 사라에 의해 쫓겨나게 되고 이스마엘의 자손 역시 아브라함의 자손과 적대적인 민족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속적으로 너에게서 너와 사라 사이에서 자식이 생길 것이라고 말씀하지만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진지하게 믿지 못했습니다.
20장에서도 아브라함은 다시 한번 사라를 지역 통치자인 아비멜렉에게 누이라 소개하며 속입니다. 이 사람이 자신의 아내를 빼앗을까 두려웠기 때문이죠. 하나님께서는 사라를 통해 아들을 낳으리라고 말씀하시는데 아브라함은 거듭 아내를 위험에 빠뜨리는 어리석은 결정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또 그 위기 가운데서 사라와 아브라함을 보호하시죠
그리고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던 해, 21장에서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서 아들이 생기게 됩니다. 이삭이죠.
그리고 오늘 본문 22장 1절이 이렇게 시작됩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after these things 12장에서 22장까지 이르는 일련의 일들이 있은 후에, 더 구체적으로 이삭이 태어남으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아브라함이 목격하고 경험한 이후에 오늘 일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마치 선생님이 여기까지 가르쳐줬으니 이제 시험을 봐야겠지?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자 내가 이렇게 까지 너를 끌고 왔지? 이런 상황에서 너는 어떡할건데? 라고 물어보시듯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십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끝에 힘들게 얻은 아들 이삭이건만 아이러니하게 하나님께서는 그 이삭을 바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지지난주에 젠더리빌 파티를 통해서 둘째가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솔직히 딸이 하나 있기에 둘째는 아들이면 좋겠다라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정말 아들이니까 제가 너무 신이나고 기뻤습니다. 저희 부부 사이에 몇가지 어려운 일도 있었고 3년만에 생긴 아기라 그 기쁨이 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런 생각이 많이들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저에게 아브라함과 똑같은 요구를 하신다면 나는 어떻게 반응할까? 쉽게 예라고 대답하지 못할 것같습니다. 아마 여기 계신 누구나 자녀를 바치라는 명령에 쉽게 순종할 분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명령에 아브라함은 어떠한 질문도 어떠한 대답도 없이 행동으로 명령에 순종함을 보입니다. 아침이 되자 아브라함은 묵묵히 종들과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신 산으로 출발합니다. 나귀에 안장을 얹고 번제에 쓸 장작들을 지고 터벅터벅 길을 떠납니다. 3일 아브라함은 3일을 걸어 갔습니다. 이 3일 동안 얼마나 아브라함의 마음이 복잡하고 혼란스러웠을까요? “이 하나님을 내가 정말 믿을 수 있을까? 내 아들 어떻게 얻은 아들인데 이 아들을 왜?” 이러한 생각들이 그를 괴롭히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그는 순종함으로 묵묵히 나아갑니다.
5절 이윽고 산 밑에 도착한 아브라함은 두 종들에게 나와 이삭이 올라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오겠다고 말합니다.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여기서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복수로 “우리”가 다시 돌아오겠다고 아브라함이 고백했다는 점입니다. 그는 이삭과 제사를 드리고 다시 여기로 올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어느 정도 자라 나무를 지고 갈 수 있을 정도 십대가 된 이삭은 번제에 쓰일 장작을 지고 아브라함을 따라갑니다. 아버지에게 장작은 있는데 제물이 안보이네요 제물은 어디있나요? 라고 순진무구하게 물어보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실 것이라는 말만 하고 계속해서 산을 오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일러주신 곳에 이르자 아브라함은 그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위에 놓고 마치 슬로우 모션으로 이 장면을 보는 것 같습니다. 내레이터가 천천히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의 눈에는 이삭이 어떻게 보였을지 궁금합니다. 내 아들, 내 하나뿐인 아들, 내가 사랑하는 아들.
불가능했던 약속을 이루신 하나님, 이해는 안되지만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기로 결심을 하고 칼을 뽑아 듭니다. 10절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그때 하늘에서 천사의 소리가 들립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내가 아노라."
이전까지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해 두번이나 아내를 자신의 누이라고 속였고 롯을 데리고 나왔고 하갈을 취해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해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해서 일어난 일들이었습니다. 무슨 일이 아브라함을 변화시켰나요? 불과 20장까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해 어리석은 모습을 보이던 아브라함이 22장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완전한 순종의 모습을 보입니다. 무엇이 그를 변화시켰나요?
21장 이후 이삭이 태어났을 때 아브라함은 참으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깨달았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삭이 태어났음을 매우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말씀하신대로 약속하신대로 말씀하신 시기에 라는 말이 반복적으로 강조되어 나오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아 내가 너를 불러낼 때부터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내가 약속하지 않았느냐?” 마치 아브라함을 따뜻하게 꾸짖듯이 본문은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일이 아브라함을 변화시켰습니다. 그제서야 이전에 모든 것들이 퍼즐이 맞춰졌다고 표현해야할까요? 하나님은 언제나 신실하셨고 그분의 계획에 따라 모든 것이 이루어졌음을.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에 아무 대꾸 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에 “내가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알겠노라” 이 시험을 통해 하나님께서 듣고자 하신, 보고자 하신 아브라함의 모습의 답이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자신을 경외하는지 아닌지를 시험해보고 싶으셨습니다. 이것이 이 시험의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자 우리의 표어도 그렇지 않습니까?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능력으로 진행하자, 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막연하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영어로 fear 라고 번역된 경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 그것이 경외하는 것일까?
저는 오늘 본문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좋은 영감을 주고 있다고 믿습니다. 12절을 다시 한번 읽어봅시다 [창22: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이 표현이 익숙하지 않습니까? 이삭에 대한 설명입니다. 오늘 본문 22장 2절에도 하나님께서 이삭을 지칭하시면서 똑같은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하지만 하나가 더 붙어있죠. 우리 2절 한번 읽어볼까요? [창22: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영어로 보면 더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무엇이 빠졌죠? “사랑”이라는 단어입니다. 성경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는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의 본성과도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처음으로 “사랑”이 언급되는 곳은 어디일까요? 네 바로 오늘 본문 22장 2절입니다. 성경의 저자는 의도적으로 “사랑하는 자”라는 문구를 생략하고 있습니다. 22:16절에도 이삭을 지칭하는데 네 아들 네 독자라고 나오며 더 이상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이삭보다 더 사랑하는 분이 있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의 시험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너에게 나는 얼마나 중요한가? 너는 나를 얼마나 사랑하느냐? 아브라함은 이 질문에 자신이 가장 사랑하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100세에 낳은 자신의 외아들 이삭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는 대답을 한 것입니다. 그의 우선순위가 바로 잡혔습니다. 그는 절대적인 순종으로 이 사랑을 보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그 무엇보다 그 어떠한 것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것임을 오늘 본문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19절입니다. 이 이야기는 이렇게 마치고 있습니다. 언급된 인물에 주목해보세요. [창22:19] 이에 아브라함이 그의 종들에게로 돌아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주하였더라. 여기에 누가 빠졌죠? 아브라함이 두 종들을 산 밑에 두고 올라갈 때 이삭과 함께 다시 돌아오겠다고 말하였고 실제로도 이삭은 죽지 않고 아브라함과 같이 산을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이삭에 대한 언급은 어디있죠? 시험이 끝난 뒤에 이삭은 사라진 것처럼 보입니다. 적어도 아브라함과 함께 등장하는 장면은 이후에 아브라함이 죽을 때 그 이외에는 이삭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마치 누가 지우개로 지운것처럼 이삭은 아브라함의 스토리에서 사라졌습니다. 물론 둘은 여느 부자 관계처럼 함께 대화하고 시간을 보냈으리라 확신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러한 언급을 완전히 생략하고 있습니다. 이는 의도적인 것입니다. 성경은 아브라함과 그의 하나님 사이에 더 이상 아무것도 자신의 아들 이삭조차 끼어들지 못하게 합니다. 아브라함에게 내 아들 내 외아들, 내가 사랑하는 자는 “나의 하나님 나의 유일한 하나님 내가 사랑하는 분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유일한 사랑이시고 주인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고백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교회 시대 내내 성도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기 위해 가치 있는 것들을 버리는 연습을 해왔습니다. 수도원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금욕, 검소함을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추구하고자 하였고 어떤 이들은 금식을 통해 하나님을 위해 나의 삶의 일부를 희생하는 버리는 연습을 하였습니다. 저는 이런 부분에서 우리에게 적용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자신 외에 다른 것을 더 우선하는 것을 우상숭배라고 규정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우상은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자리를 위협하는 것에는 무엇이 있나요? 자녀인가요? 가족인가요? 돈, 명예 내 커리어? 내 친구 내 사업장인가요? 이런 것들이 점점 내 삶에서 커져서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우리에게 경외의 연습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고는 하지만 말뿐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걸 어떻게 보이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희생할 것을 도전합니다. 우리 삶에서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 내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 그것을 내려놓는 연습, 왜요? 우리는 하나님을 그것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나의 가치 있는 것을 희생하면서 하면서 생각하는 것은 이것보다 내가 하나님을 더 사랑합니다. 그 고백이 우리 삶에서 실천되고 보여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