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9:8 -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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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
지난 주 우리는 ‘진리가 무엇이냐’라는 빌라도의 질문이 여전히 우리에게도 ‘진리를 알고 있는가?’라고 질문할 수 있으며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하며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에서 살아내고자 한다면 예수께서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고, 세상에 왔고, 진리에 대하여 증언했고’ 그래서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는다’는 말씀으로 위로를 받는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세상과 자신의 나라를 분명하게 구분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법정의 결정 과정 마지막 부분을 다룹니다. 영화로 본다면 십자가의 죽으심은 클라이막스로 볼 수 있지만 사실 저자 요한은 십자가의 죽으심은 세상과 마지막 싸움이 어떻게 결론 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런 질문을 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끝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또는 ‘그렇다면 앞에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와 가르침 그리고 확실하게 표적으로 보여주시고 고쳐주신 사역은 도대체 무엇인가?’하는 의문을 던지는가 하면 여전히 주도권을 가지신 예수의 십자가 죽으심은 이것이 끝이 아니고 예수께서 하셨던 가르치심과 표적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볼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이어지는 ‘부활 사건’이야 말로 저자 요한의 클라이막스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자 요한은 왜 빌라도의 이야기를 길게 다루고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해 볼만 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아 빌라도는 그래도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지는 않았구나’ 하는 표면적인 내용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이면에는 ‘세상이 무엇인가’라는 대표성으로 빌라도를 세우고 빌라도의 배경은 거대한 로마 제국을 염두해 두고 있다는 의미는 앞서 1장에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했을 때 왜 세상은 하나님을 향해 대적하는가? 하는 보다 큰 스케일의 질문으로 연결을 해 볼 수 있는 것이죠.
우리가 드러난 현상에 함몰되면 길의 방향을 정확히 살필 수 없습니다. 마치 깊은 산 속에서 길을 헤매는 것 처럼 말입니다. 요즘은 드론의 세상이죠. 드론을 높이 띄워 위에서 여러 방향의 길을 본다면 지금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세상이죠.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무대도 그렇게 드론을 띄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가요. 최근 뉴스에서 대통령 부인이 명리학자에게 ‘제가 감옥가나요?’라는 질문이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권력을 이용해 저지른 불법으로 인해 앞길의 두려움을 드러내는 우리 모두의 질문인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이 이런 세상으로 변질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는 죄가 갖는 부패성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패의 시작은 하나님의 세상에 거하면서 ‘나’를 중심에 두고 대상을 바라 보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그렇게 죄로 부패한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다는 ‘성육신 사건’을 통해서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12장 12절에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예수님은 수많은 군중으로부터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이스라엘의 왕’라고 불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체포 당하시고 빌라도에게 넘겨 졌을 때 빌라도는 세상의 높은 자리에 앉아서 예수를 대면합니다. 이때 왕이냐는 질문에서 첫 번째로 ‘나라는 어디인가?’라는 것이죠. 예수께서는 ‘내 나라는’하고 답을 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 ‘백성은 누구냐’는 의미입니다. 그러자 ‘세상에 오신 이유가 백성을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의 특징은 ‘진리에 속했고 그래서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는다’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은 로마라는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며 살아야 하지만 그들은 실패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거대한 성전에서 매일 같이 태워 바치는 재물은 쌓여 있지만 속에서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종교 집단으로 변질되었고 백성으로 살아야 할 율법은 수많은 가지들을 만들어 사람들을 옥죄기만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방인의 거주지인 로마의 관정에 들어가지 않는 ‘정결법’을 지키면서도 눈 앞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2장에서 가나 혼인잔치의 비유가 이것이죠. 잔치의 본질은 잊어 버린 형식만 남은 모습은 오늘 우리에게도 형식은 갖췄지만 진정으로 예배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고 4장에서 이제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이른다는 온전함의 성취가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작은 교회로 최소한의 형식은 갖추었지만 반면에 종교적인 형식으로 끝난다면 크기와 상관없이 종교적인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장소와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신령과 진정으로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너무 어려워 하지 마십시오. 작은 망원경으로 우주를 살피고 참여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차분하게 살피며 말씀을 통해 드러나신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계획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판결하는 위치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들은 이야기냐’는 질문을 통해 ‘진리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인간 내면 속에 창조주를 향한 남아 있는 질문이라는 것이죠. 하지만 세상의 방법으로 가는 그의 길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선택입니다. 굳이 선택이라고 할 것조차 없이 그 길로 들어 섰다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권력의 정점에서 폭력을 자유롭게 사용해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려 했지만 거센 유대인들의 ‘소리 지름’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예수 앞에서 ‘나는 그런 권한이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동등한 조건이 아닌 상하의 관계 아래에서 자신의 권력을 주장하는 모양새입니다. 9절에 그는 ‘너는 어디로부터냐’라고 묻지만 예수는 대답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아이에게 화가 나면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도대체 어디서 왔니’ 이런 유사한 말은 ‘존재에 대한 의심’입니다. 이런 질문은 빌라도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대표적으로 욥이 그랬습니다.
욥은 자신의 죄 없음을 죽어서도 증명하겠다고 말한 인물입니다. 욥23:10
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새번역> 하나님은 내가 발 한 번 옮기는 것을 다 알고 계실 터이니 나를 시험해 보시면 내게 흠이 없다는 것을 아실 수 있으련만!
이 말의 의미가 죽어서 심판을 받을 때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길에 대해서 즉 아무런 잘못이 없음을 아신다는 의미이고 그래서 그 후에 ‘순금’ 즉 나의 상태를 인정받는다는 자신에 찬 자기 항변입니다. 그랬던 그가 38장부터 하나님을 대면합니다. 첫 말씀이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라고 욥을 정의합니다. 그러다 42장에서 욥은 하나님께서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압니다’라고 태도를 바꿉니다. 유한한 인생은 이렇듯 자신의 옳음을 입증하려고 하나님께도 도전장을 던지는 존재입니다. 마치 자기가 다 아는 것처럼 말입니다.
빌라도 역시 10절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하자 어디서 부터냐는 말에 대답을 하지 않으셨던 예수께서는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이라고 대답하십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는 우연이 없으며 계획 하에 움직이는 과정임으로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욥의 말처럼 ‘못하실 일이 없으신 분,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분’이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저자 요한이 보여주는 예수님은 끌려 가는 분이 아니시고, 아픔과 고통을 가장 먼저 드러내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하나님의 아들이시니까 그런거지’ 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나라의 독립 운동으로 일제의 감옥에서 고문을 당하고 심한 고문으로 인해 죽거나 사형 당한 분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왜 이야기 중에 먼저 그분들이 당한 고통에 대한 이야기나 고문의 고통의 크기를 다룬 이야기를 찾기가 쉽지 않을까요?
독립을 위한 갈망 다시 말해서 아직은 오지 않은 나라에 대한 소망이 더 중요한 것이죠. 비록 몸은 구속되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모진 고문을 당했지만 그것과는 비교될 수 없다는 우리나라의 독립의 가치에 있기 때문이죠. 그렇게 요한이 집중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과정에 불과 합니다. 12절에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다’ 이제 더 이상 빌라도는 물러 설 곳이 없는 선동의 중심에 휩쌓이게 됩니다.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다’라는 자극적인 표현과 이어서 자기를 왕이라고 하는 말의 의미는 사라지고 ‘왕’이라는 단어만 선동됩니다. 그러니까 가이사가 왕인데 자기를 왕이라고 칭한다면 당연히 ‘반역’이라고 논리를 들어 선동하고 있습니다.
본래의 의미는 사라진채 예수를 죽이기 위한 목적 활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말을 들은 빌라도는 물러설 길도 선택할 길도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이제 돌을 깐 뜰로 나아가 ‘재판석에 앉았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언제든 돌아올 길이 있습니다.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 않더라고 그저 주저 앉아 고개를 돌리면 주님은 우리를 받아 주십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좌절의 문턱에서 자기를 놓지 못하고 죽음에 자신을 던지는 결정을 합니다. 시간도 더 이상 여유가 없는 ‘제육시라’ 다시말해서 유월절의 준비일이 시작되어도 빌라도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시간입니다. 그저 폭동이 생기지 않고 작년 이때처럼 지나가면 그뿐입니다.
하지만 예수를 죽이기로 한 유대인들의 무리를 물리칠 수 없는 그에게는 대제사장의 말처럼 백성을 위해 한 사람의 살인과 마찬가지로 예수로 인한 폭동이 아니라 대제사장이라는 고위직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서 일어난 폭동이야말로 자기의 커리어에 실제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빌라도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15절에 ‘그들이 소리 지르되’ 이는 관정에서 빌라도가 예수를 대면하는 사이에도 계속해서 관정 밖에서는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들은 여전히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라고 예수를 죽음으로 몰아 가는 자들입니다. 빌라도는 그들을 향해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빌라도 역시 대제사장들의 약점을 파고 들어 ‘신성모독’의 죄를 너희가 처벌하라는 의도로 말하지만 이제는 통하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빌라도는 세상이고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세상의 구주이십니다. 세상은 교묘합니다. 예수께서 시험받으시는 광야의 사건이 그것이죠. 세상은 자신을 드러내는 법이 없습니다. 여전히 우리 곁에서 그것이 교회를 위한 결정이다. 또는 신앙생활을 더 잘하는 결정이다. 아니면 주님을 위한 것이다고 속삭입니다. 이렇게도 말합니다. 네가 예수를 잘 믿으려면 지금 일해야 한다고 말하고 주일을 등한이 여기는 것도 나중에 잘되면 교회에서 큰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하합니다. 그렇게 자발적으로 도장을 찍게 만듭니다.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대제사장들의 외침은 그저 빌라도에게 도장을 찍게 만드는 정도가 아니라 세상의 방식을 선택한 이들은 하나님을 도전하는 배교 행위조차도 얼마나 쉽게 일어나는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권력자는 폭력을 정당하게 사용해 옳음으로 만들고 대제사장들은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다’는 배신을 통해서 예수님을 죽이려는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하는 방식이 세상의 방식입니다. 요즘 우리 정치 현실이 이렇지 않습니까? 도움을 받고도 정당한 대가를 치루지 않고 결국에 서로가 녹음 파일을 틀어 대면서 간 쓸개 다 빼줄 것 하다가 결국은 나만 살겠다는 연일되는 폭로가 그래도 엘리트들이라는 자들의 한심한 작태가 우리 현실의 적나라 모습이듯 예수를 죽음으로 몰고한 2천년 전의 어느 한 시점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16절 ‘이에’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는 미래를 예측하려고 애씁니다. 그래서 권력을 이용하고 선동을 이용하려는 세상에 여전히 살고 있고 사람들은 그 방향을 목표에 두고 살아 갑니다.
지난주 교회는 ‘국경없는 의사회’에 후원을 시작했습니다. 교회는 월드비전과 세이브드 칠드런에도 후원을 하고 있지만 다른 의미에서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최근 의사들은 국가의 정책에 반하여 어려운 길을 가고 있는데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그들이 엘리트의 길을 가면서 사람을 살리는 고귀한 사명의 길보다는 자기의 이익 실현의 발판으로 삼는 길로 보기 때문이죠. 물론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게 의사가 된 분들이 이런 단체를 통해서 생명을 살리는 길에 자신을 헌신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결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이런 길을 염두한 분들도 있겠고, 의사가 되고 나서 여차한 이유로 참여한 분들도 있겠죠. 아무튼 그런 분들의 수고가 남다르게 여겨진 것입니다.
자기가 가진 것이 귀한 것이라면 그것을 내려 놓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비록 작은 부분이지만 후원을 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결과를 위해 권력과 힘을 쓰는 일이 세상의 특징이라면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무엇일가요? 사람을 고치고 약한 자를 돕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에 왜 중요한지는 잘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는 일을 ‘옳은 일’ 즉 의로운 것임을 배우는 길이고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잠시 있는 세상에서 살아 내기를 원하신다. 명령하셨다. 해야만 한다. 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말로는 ‘섬기는 삶’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렇게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 주니라’고 이어집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나고 다음주에 살펴 보겠지만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30절에 영혼이 떠나가셨다는 표현까지 꽤 긴 과정을 저자는 기록합니다.
우리가 착각하는 것 중 하나는 빌라도처럼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제까지 살았던 삶의 방향이 우리의 길을 정하는데 우리는 선택하는 것처럼 말합니다. 게으른 사람은 어제의 게으른 삶이 계속해서 게으른 삶으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선택이란 게으른 삶을 버리고 부지런한 삶으로 가는 것이 이라기 보다는 게으른 삶의 문제를 직시해서 그렇지 않는 쪽을 가는 것이 ‘선택’입니다. 그러기에 선택은 불편한 길입니다. 그래서 ‘선택한 사람들이’ 가장 쉬운 너의 주변부터 치워라고 말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쉬운데도 못하는 이유가 언제든 할 수 있다는 착각에 머물러 있는한 결코 바뀔 수 없는 것이죠.
예를 들어, 빌라도가 예수를 풀어 주는데 권력을 사용했다면 대제사장들은 로마로 사람을 파견해서 빌라도를 고발하고 어떤 역사가 펼쳐질지 모릅니다. 이것이 선택이죠. 세상은 우리에게 ‘어제의 길이 옳은 길이라면 오늘 하루 편해도 된다’고 하고, ‘어제의 길이 옳지 않은 길이라면 선택할 필요가 없고 잘하고 있다’고 말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짐해야 합니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은 내 자신이 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아멘.
권진원 - 살다보면 / 괜시리 외로우 날이 너무도 많아 나도 한번 꿈 같은 사랑 해봤으면 좋겠네. 수 많은 근심 걱정 멀리 던져 버리고 언제나 자유롭게 아름답게 그렇게
내일은 오늘보다 나으리라는 꿈으로 살지만 오늘도 맘껏 행복했으면 그랬으면 좋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