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124 주일오후예배: 고린도후서 3:6; 벨직 신앙고백서 31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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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시겠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3:6 입니다. 제가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벨직 신앙 고백서를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벨직 신앙고백서 31항입니다. 제가 제목을 읽으면 함께 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31항 목사, 장로, 그리고 집사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사역자들과 장로들과 집사들이 교회의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각자의 직무에 선출되어야 하며, 이 일이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질서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 가운데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부적절한 방법으로 밀고 들어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심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 그 부르심을 확신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그를 부르시기를 기뻐하실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사역자들은 모두 온 세상의 유일한 감독이자 교회의 유일한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속한 목사들이기 때문에 어느 위치에 있든지 동등한 권세와 권위를 지닙니다.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질서가 위반되거나 무시되지 않도록,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목사와 교회의 장로들을 그들의 사역으로 인해 특별히 존경해야 하며, 가능한 한 다툼과 논쟁 없이 그들과 화목해야 한다고 선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도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살필 수 있게 되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이 시간도 부족한 우리를 이 예배로 불러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신지 말씀을 통하여 알아감으로 주님께서 주신 이 교회를 든든히 함께 세워가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교회라는 주제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살피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까지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지키시는데, 어떤 것들을 사용하셔서 지키시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말씀과 성례, 그리고 권징이었습니다. 말씀과 성례를 이 교회 안에서 행하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믿음을 부여하시고 믿음을 강화하고 계시며, 그리고 권징을 통해 이 말씀과 성례가 죄로 인해 더럽혀지지 않고 죄인을 죄에서 돌이키도록 하셔서 우리의 믿음을 보호하시려는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지난 시간까지 살펴본 것에 이어서 직분에 대하여 살펴볼텐데요. 원래는 그리스도께서 직분자에게 말씀과 성례, 그리고 권징을 맡기셔서 교회를 어떻게 지키시는지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했지만, 오늘의 설교는 초점을 살짝 옮겨서 제목을 통해서도 나와있지만 직분자의 권위에 대하여 우리가 함께 살피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정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시대는 가히 반권위주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권위라는 말만 들어도 꺼려지는 느낌, 멀리하게 되는 느낌과 같이 부정적인 느낌부터 듭니다. 어떻게 보면 요즘 시대에 권위는 꼰대라는 말로 바꾸어도 무방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러한 시대적 사상이나 사조가 생기게 된 것은 과거 권위주의적이었던 시대에 반인권적이고 반인륜적인이라는 좋지 않은 모습들이 많이 부각되고 나타났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반권위적이라는 것은 인권이 중요시되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개인의 선택이나 개인의 생각을 굉장히 중요시하는 시대가 되었고, 자신의 어떠한 것을 타인이 터치하고 건드리는 것을 굉장히 몸서리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누가 자기를 혼내거나 뭐라 하기만해도 “아휴 꼰대야?”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는 이제 권위가 필요 없는 것일까요? 사람들은 권위를 찾지 않는 것일까요? 이에 대한 답변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이 시대에는 지금도 여전히 권위, 더 정확하게는 건강한 권위가 필요하며 사람들은 이것을 갈구하고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권위를 인정하기까지 합니다. 예를 들어 인기가 많았던 흑백요리사에서 전국 각지에서 음식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이 이 대회에 참석했습니다. 여기에 심사위원으로 그 유명한 백종원씨와 국내에서 유일한 미슐랭 쓰리 스타 셰프인 안성재씨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이 두 사람에게서 자신의 음식이 맛있다고, 너무 잘 만들었다고 인정받을 때의 표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감격하고 기뻐하는 표정이었습니다. 그리고 반대로 이 사람들이 음식에 대하여 아쉬움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을 표현할 때는 어떻겠습니까? 아쉬워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사람들이 자신의 음식에 대해 평가하는 것을 이해가 되진 않더라도 토를 달거나 반항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요리에 대한 이 두 사람의 권위가 있기 때문입니다. 백종원씨는 요식업계의 거장이며 안성재 셰프는 미슐랭 쓰리 스타라는 어마어마한 타이틀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리에 대한 이들의 권위가 있기 때문에 자신의 음식이 선택받았다는 것에 대한 기쁨과 그렇지 못했다는 슬픔, 때론 화남이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 시대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권위를 인정하고 있으며 심지어 그 권위를 갈망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언제나 어딘가에 의지하고 싶어하는 본성이 있어 자신을 지켜줄 권위자를 찾고자하는 갈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직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현대 교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어쩌면 직분자의 권위에 대한 반발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 과거만 봐도 직분자의 권위에 대하여 엄청난 반발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몸인 교회를 지키시기 위해 직분자를 주셨고, 그 직분자에게 권위를 주심으로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그 직분자에게 순종하게 하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바른 권위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바른 말씀을 가르쳐줄 목회자, 바른 신앙생활로 인도해줄 장로, 교회 내의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해줄 집사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어쩌면 앞에서도 말했듯이 반권위주의가 팽배한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굉장히 불편한 말씀으로 다가올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통해 왜 직분자에게 권위가 있는지, 우리가 왜 직분자의 권위를 인정하고 순종해야 하며 그것이 결국 우리에게 좋은 것이며 유익이라는 것을 그리스도께서 직분자에게 어떻게 권위를 주셨는지를 살피면서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의 배경을 아는 것이 본문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중요합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보낸 고린도 교회 내에서 거짓 교사가 생겼습니다. 이 거짓 교사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있었던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사도성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정말 사도가 맞는지, 하나님께서 보내신 직분자가 맞는지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을 향한 의심에는 그의 외적인 조건 때문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진정한 사도, 또는 직분자라면 교회 안으로 들어온 거짓 교사와 같이 고난이 없어 평안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을 보자 바울의 삶은 굉장히 어렵고 고난을 받는 외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사도직을 고린도 교회가 의심하기 시작하였고, 심지어 그가 가르친 복음을 거부하는 것에까지 이어졌습니다. 2장 17절을 보시면 고린도 교회로 들어온 거짓 교사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혼잡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고린도 교회의 상황을 들은 바울은 고린도전서에 이어서 두 번째 편지를 고린도 교회에 보낼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두 번째 편지인 고린도후서는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하기 위해 작성합니다. 바울이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한다는 것은 단순히 “나 인정해달라”라는 어떤 정치적인 목적이 아니라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의심이 곧 바울이 전한 복음을 거부하는 것에까지 이어졌기에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위해 고린도 교회로 보내신 사도, 또는 직분자가 자신임을 이야기함으로써 복음을 수호하는 것에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반드시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해야만 했습니다. 자신이 고린도 교회에게 전한 복음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사도 바울, 교회라는 이 연결점이 있는 겁니다. 2장 16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일에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바울이 자신의 사도직에 합당하지 않다고 한다면 그리스도, 사도, 교회라는 이 연결점이 끊어지게 되는 겁니다. 1장에서 바울은 우리의 고난과 위로, 즉 바울과 디모데라는 교회의 직분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고난과 위로가 고린도 교회에게도 있기를 바라면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사이를 고난과 위로라는 것 안에서 연결하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는데, 만일 바울이 이 일에 합당하지 않다면 헛된 것이 되어 버리기에 자신이 이 일에 합당한 자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바울이 이 일에 합당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래,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라는 자기 옹호라기보다는 그리스도와 사도와 교회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연결성을 이어가기 위해 자신이 이 일에 합당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고난과 위로라는 복음을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왜 이 일에 합당한지에 대한 이유를 말해주는데요. 그것이 2장 17절로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고 진리를 그대로 드러내는 순전함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또한 이 말은 4장 2절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낸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이렇게 바울에게 참된 진리가 있음을 논증하는데,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진리를 주신 그 과정을 동시에 말합니다. 그것이 2장 14절로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항상 승리로 이끄시는 분이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기게 하신다.”라는 것이 원어로는 “개선행진을 이끌다”입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승리”라는 개념을 말함으로써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로마 황제의 개선식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바로 로마 황제가 행하는 개선식이라는 그림 속에서 하나님께서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실 때 포로로 잡아온 패배자들을 앞세워서 개선식을 진행하시는 것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왕이신 하나님께서 전리품으로 잡아온 포로가 누구인지를 말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승리를 잘 증명해주는 것이 포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누가 포로냐고 했을 때 고린도 교회 안으로 들어온 “저 거짓 교사 나쁜 자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하나님께서 저 원수들을 대적하신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이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여기에서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개선식의 포로는 1차적으로 바울 자기 자신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항상 자기 머리 속에 가지고 있던 그림입니다. 바울은 주님을 만났던 다메섹 도상을 다메섹에서 그리스도께서 전향시킨 것을 자신을 사로잡아 포로로 잡아오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완전히 포로로 잡으셔서 패배시키셨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전쟁에서 패배한 포로는 어떻게 됩니까? 바로 종 또는 노예가 됩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종의 그림은 그냥 “그리스도를 내가 이전에는 대적했는데, 이제는 잘 섬겨야지”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완전히 굴복시켜서 패배자로 만드신 뒤에 종으로 삼으신 것으로 그립니다.
더 나아가 심지어 포로로 잡혀온 자들 중에는 종이 될 뿐만 아니라 개선식 이후에는 죽기까지 합니다.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이 사도됨을 입증하는 제일 중요한 단어가 “죽음”입니다. 1장 8절을 보시면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4장 10절 “예수의 죽음에 넘겨짐은”, 12장 9-10절에서도 자신의 약함과 죽음이 이르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이렇게 바울은 종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물리적으로 죽음에 이르는 길에까지 내몰리게 되었고, 실제로 로마로 간 바울이 죽음에 처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2장 14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승리의 개선식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이 승리하셨다는 개념보다는 1차적으로 말하는 것은 그 하나님의 승리에 가장 직접적인 포로가 바로 자신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각처에서 항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를 이끌고 계신데, 그 승리의 전리품이 자기 자신이라는 겁니다. 다메섹에서 패배하여 포로로 잡혀서 종이 되었고, 심지어 자신의 인생에서 죽음에까지 내몰리게 되는 자로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사람이 바울입니다.
또한 이 승리의 소식을 각처에서 전하는 사람이 바울 자신임을 여기에서 나타내고 있습니다. 복음을 뜻하는 헬라어 “유앙겔리온”은 원래 승리의 소식을 이야기합니다. 로마 제국에서의 복음은 승리의 소식입니다. 바로 이 하나님의 승리의 소식을 전하는 사람으로서 14절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낸다”, 바로 로마 황제가 개선식에서 꽃을 뿌려 꽃에서 내는 향기를 내듯이 자신이 그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2장 16절에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는 이 하나님의 승리를 전하는 일에 누가 합당하냐고 했을 때 바로 17절에서 말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고 진리를 드러내는 바울 자신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자신의 사도의 권위는 그저 자신이 사도라는 그 타이틀에 있거나 자신에게 이 일에 합당한 능력 또는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신을 패배시키시고 종으로 삼으신, 그리고 심지어는 자신을 죽음의 길로 그리스도께서 내몰고 계시기 때문에 이 일에 합당하며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의 권위가 있다는 겁니다. 더 나아가 여기서 추가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권위는 지금 고린도 교회로부터 칭송받거나 고린도 교회가 바울을 떠받들고 모시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자신을 패배시키시고 종으로 그리스도께서 삼으신 것에서 출발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고 진리를 그대로 드러내는 순전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2장 17절과 4장 2절에서 말하고 있고 그 사이에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인 3장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린도 교회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너가 너 자신을 추천하는 아니야?, 니가 니 스스로를 자천하는구나. 또 시작했네 또 시작했어”라고 결국 또 자신을 써달라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3장 1절에서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라면서 “누가 이 일에 합당하느냐?”에 대한 논의는 고린도 교회 너희가 싫어하듯이 어떤 정치적인 목적과 같이 자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추천서라는 것은 아주 유력한 사람으로부터 추천서를 받아서 가면 어떤 곳에 가더라도 그 지역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지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사람을 추천하는 후견인이 준 편지입니다. 그래서 추천서만 있으면 모든 편의를 제공받습니다. 이러한 개념을 지금 1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굳이 추천서를 통해 고린도 교회에서 편의를 받거나 고린도 교회가 추천서를 써줘서 다른 지역에서 편의를 받거나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자신을 꼭 추천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2절에서 자신을 추천하는 편지는 고린도 교회 “너희”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추천서는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하기 위한 것으로서의 추천서를 말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자신의 추천서라고 말하는 이유는 바로 편의를 받고자 위한 것이 아니라 직분자를 진정으로 추천하는 내용은 성도의 삶에 대한 관심과 그들을 위해 얼마나 기꺼이 희생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한 마디로 교회를 향한 관심과 사랑이 고린도 교회를 통해 나타나니 바울 자신이 고린도 교회를 위한 직분자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을 누가 고린도 교회에 추천하는 편지를 써줬는지를 3절에서 이야기하는데요. “그리스도”라고 이야가힙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믿는 자들의 마음에 쓰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제 구체적으로 그 편지에 자신이 써져있음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바울은 독특하게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구약의 한 인물을 가져오는데요. 바로 모세입니다. 3절을 보시면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라고 말하면서 이 “돌판”을 통해 모세와 자신을 평행선에 놓고 이야기합니다. 먼저 바울은 5-6절에서 “만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요. 여기서 “만족”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앞에서 살펴본 2장 16절의 “감당”과 같은 단어입니다. 다시 말해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직분자로서 목회할 수 있는 합당함, 자격, 또는 권위가 하나님에게서 났다고 말하면서 자신에게서 자격이나 권위가 나지 않았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고린도 교회로 보내시고 직분자로 세우시고 목회하게 하신 모든 자격, 만족은 하나님께로부터 났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하도록 바울을 하나님께서 고린도 교회로 보내셨느냐 했을 때 바울은 6절에서 “새 언약의 일꾼”이 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1차적으로 그리스도의 말씀 봉사를 뜻합니다. 일꾼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봉사자”, “하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왜 새 언약이 그리스도의 말씀이냐고 했을 때, 그리스도께서 새 언약을 세우실 때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제자들과 함께 한 식사에서였습니다. 그분은 식사를 하시면서 이것은 내 살과 피다라고 하시면서 새 언약을 세우리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새 언약은 성찬을 뜻하는 것 같은데 왜 그리스도 말씀일까요? 그 이유는 떡을 축복하시고 떼주시는데, 그 떡은 성찬에서의 떡이 아니라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을 말씀 속에서 주시는 사역을 계속하시겠다는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새 언약의 일꾼이라는 것은 1차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 즉 복음 사역에 대한 봉사를 뜻합니다. 그리고 구약에서도 마찬가지로 예레미야 31장에서 하나님께서 새 언약에 대한 약속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말씀 봉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6절에서 말씀에 대한 봉사를 할 수 있도록 자신에게 자격과 만족을 주셨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이 성찬상에 대한 봉사로 이어집니다.
더 나아가서 이 성찬상에 바쳐진 연보가 있습니다. 그래서 뒤에 8장에서 연보에 대하여 바울이 말합니다. 여기에서 말씀 봉사가 1차적인 의미가 되고, 그 다음 성찬상이 이루어지는데, 그 성찬과 함께 이루어진 것이 연보입니다. 성찬을 준비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자신의 먹을 것을 들고 왔습니다. 그러다가 먹을 것 대신에 사람들은 물질 또는 돈을 들고와서 연보해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8장에서 바울이 연보에 대하여 말하는 이유가 성찬상의 봉사가 구체적으로 실행되는 것이 연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성찬상에 바쳐진 먹을 것 또는 돈이 이제 주님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떡과 잔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시듯이 성찬상에 바쳐진 먹을 것과 돈을 주님께서 나누어 주시는데, 이것을 실제적으로 주님께서 누구를 통하여 실행하시느냐? 그것이 바로 바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의 의해서 이 일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사도의 일을 하는 자신의 일이 진실되다고 바울이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바울은 절대 외적인 것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새 언약의 일꾼이라는 것은 마음 속에서 일하심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키시는 성령님의 사역에 대한 봉사, 즉 말씀과 성찬, 그리고 연보에 대한 봉사를 하는 자신이 합당하다고 말하면서 변호하고 있습니다. 바울에게 나타나는 유일한 외적인 모습은 오히려 죽음에 내몰리는, 살 소망까지 끊어지는 모습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이러한 외적인 모습을 보고 바울이 전혀 봉사를 실현하지 않는다는 착각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진정한 목회 또는 봉사가 바로 이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봉사를 실현하는 자가 진정한 직분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이것을 주실 때에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않고 오직 영으로” 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지만 영은 살리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아까 말했듯이 모세의 사역과 자신의 사역을 평행선상에서 놓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모세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아마 고린도 교회 안에서 유대인들이 교회를 모세 율법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하는 일들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들은 모세가 그리스도와 동등하다고 했으며 심지어 더 우월하다고 주장했을 겁니다. 또한 그리스도는 모세 언약의 일부일 뿐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했을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모세와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할 필요성이 있었기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만족”이라는 단어를 통해 모세를 떠오르게 만들기도 하는데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실 때 모세가 “이 일에 제가 합당합니까?”라고 계속 질문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7절에서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모세가 두 번째 돌판을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 받고 내려올 때 모세의 얼굴에서 빛이 나는데, 시내 산에서 내려오는 모세를 바라보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빛을 보고 반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두려워하며 떱니다. 왜냐하면 모세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영광을 만나지 못하고 사실상 그 영광을 만나는 순간 죽어야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려야만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실상 모세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이렇게 비록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적으로 보지 못하였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 모세의 직분에 영광이 있었는데, 바울은 8절에서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않겠느냐”라고 말합니다. 지금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모세를 폄하하고 낮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세를 훨씬 능가하는 직분이 등장했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6절에서 말했듯이 모세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고 죽이는 영광이었지만, 지금은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이들이 볼 수 있게 된 하나님의 영광을 통해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고 있지 않냐는 겁니다. 18절에서 말하듯이 바울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다 수건을 벗어서 주의 영광을 성령님을 통하여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사람에게 심판을 내리고 죽이는 이 모세의 직분도 영광이 있었는데, 성령님을 통해 사람을 살리는 직분에 더 큰 영광이 있다는 겁니다.
이처럼 사도직에 대한 논쟁의 핵심은 어디에 영광이 있는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바울에게는 영광이 없다는 것이 고린도 교회 내에 있는 바울 반대자들의 판단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아까도 말했듯이 바울의 외적인 조건이 오히려 고난이지 영광스러운 모습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느냐에 대한 문제를 따지면서 모세에게도 분명히 하나님의 영광이 비췄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지 못했으나 모세의 직분에도 분명히 영광이 있었는데, 그 영광과 비교했을 때 자신의 직분에는 더 영광이 넘친다는 겁니다. 이를 통해 바울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직분자가 자신임을 강력하게 논증하고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직분자, 사역자라는 사도로서의 증명은 그의 직무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와 성도를 향한 사랑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바로 말씀, 성찬, 연보에 대한 봉사, 그리고 자신의 사역을 통해 모세보다 더욱 넘치는 사람을 살리는 영광스러운 일을 수행하는 것이 바로 그가 가지고 있는 직분에 대한 권위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회는 이 사도 바울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직분자로 인정하고 그를 존경하면서 그가 가르치는 모든 가르침들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것이 고린도 교회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나타난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권위는 바울 자체에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의 뛰어남, 그의 통찰력 등등 바울 자신에게서 그 자격 요건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는 바울을 그리스도께서 종으로 삼으시고 그에게 많은 봉사들을 맡기셨고, 사람을 살리는 영광스러운 일을 맡기셨다는 것에 그의 권위가 있었습니다. 더욱이 바울은 뒤에 등장하는 4장에서 자신을 질그릇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을 고린도 교회가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가 지신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더욱 강력하게 말했습니다. 바로 자신은 질그릇 같지만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인 보배를 담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질그릇인 자신을 통해 그리스도가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오늘 이 말씀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반권위주의적인 이 시대에 우리가 직분자를 인정하고 존경해야 하는 이유는 그 직분자 자체에게 있지 않습니다. 직분자의 봉사, 그리고 사람을 살리는 영광스러운 일에 있습니다. 그 직무를 수행하는 자인 직분자를 존경하고 그에게 순종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벨직 신앙고백서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질서가 위반되거나 무시되지 않도록,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목사와 교회의 장로들을 그들의 사역으로 인해 특별히 존경해야 하며, 가능한 한 다툼과 논쟁 없이 그들과 화목해야 한다고 선언합니다.”
우리가 왜 직분자들을 존경해야 하고 화목해야 합니까? 이들의 사역 때문입니다. 이들의 사역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통치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까 말한 말씀, 성찬, 연보 이 세 가지의 봉사를 누가 실현합니까? 바로 목사, 장로, 집사가 실현합니다. 목사는 말씀을 선포하고, 장로는 말씀이 선포되는 강단을 치리를 통하여 지킵니다. 그리고 집사는 교회 내에 어려운 자가 없는지 돌아보며 구제로 연보를 나누어 줍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직분입니다. 이 사역을 행하는 직분자들의 권위를 우리는 존중해 주어야 하며 그들의 권위가 곧 그리스도의 권위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직분자들의 바른 권위에 순종할 때 우리는 평안함과 안정감을 느끼게 될 겁니다. 왜냐하면 이 직분자들이 바른 길로 인도해줄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제가 매번 말하듯이 직분자들이 연약할 수 있습니다. 직분자가 아닌 사람들보다 못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보다 연약하고 못난 직분자에게 순종하는 것이야 말로 그리스도의 권위 앞에 겸손해지는 것의 실천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직분자의 권위입니다. 교회와 성도를 향한 관심과 사랑의 마음을 가지는 직분자가 세워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기에 우리 교회에는 이 직무들을 수행할 수 있는 직분자들이 필요합니다. 바른 직분자들이 세워져서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올바른 권위로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해줄 수 있는 직분자가 필요합니다. 그런 직분자가 세워질 수 있도록 우리는 부단히 기도해야 하며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기억하시며 우리 교회의 직분자들의 권위를 그리스도께서 주셨기에 우리가 직분자들의 권위를 인정하고 존경하면서 그들의 인도를 올바르게 받을 수 있는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그리함으로 그리스도께서 이 교회를 통치하신다는 것이 무엇인지 직분자들을 통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이 놀라운 복을 누리는 우리 새순교회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기도하시겠습니다. 이 시간 한 가지 기도제목을 놓고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우리 교회에 그리스도의 사역을 실현할 수 있는 직분자들이 세워지도록 기도합시다. 지금 우리 교회가 장로를 세우기 위한 과정 중에 있습니다. 또한 나중에는 집사가 세워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 직분자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역이 이 교회에서 실현되도록 기도합시다. 그리고 그런 직분자들이 세워져서 모든 성도가 그 직분자를 존중하고 권위를 인정하는 성숙한 교회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이 시간 이 기도제목을 놓고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