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Notes
Transcript
<수요설교>
누가복음 5:27-39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2024. 11. 27
조 정 수
할렐루야. 오늘 본문을 놓고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4명의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신 이후에, 다섯번째 제자를 부르신 사건을 담고 있는데요. 바로 세리 마태를 다섯번째 제자로 부르셨어요.
자, 그런데 오늘 본문은 단순히 제자를 부르신 사건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뒤에 바리새인들과 논쟁이 벌어져요. 지난 시간에 중풍병자를 고치시던 현장에 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따라와서 예수님과 논쟁을 하는 겁니다.
제자를 부르신 은혜로운 사건에서 갑자기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완전히 분위기가 바껴버려요.
그래서 이것을 구조적으로 먼저 보면요. 크게 4개의 단락으로 나눠집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쉽게 화면을 보면서 해볼까요? 화면을 보면, 4개로 단락이 나눠지죠. 세 절, 세 절, 세 절, 마지막은 네 절.
먼저 첫 단락은 27, 28, 29절인데요. 오늘 사건의 배경을 설명하는 단락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30, 31, 32절입니다. 이 단락은 바리새인들과의 첫번째 논쟁에 대한 단락입니다. 논쟁 주제는 죄인들과 같이 밥을 먹는 문제. 그리고 세번째는 33, 34, 35절, 여기는 두번째 논쟁, 금식에 대한 논쟁이고요. 마지막 네번째는 마지막 네 절이에요. 여기서는 예수님이 2개의 비유로써 총정리를 하십니다.
이처럼, 네 개의 단락으로 나눠지는데요. 먼저 첫번째 단락, 오늘 본문의 배경에 대해서 살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27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후에,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고치신 후를 말하는 거죠. 중풍병자를 고치신 그 후에, 집 밖으로 나가신 겁니다. 그런데 나갔더니 근처에 세관이 있었고, 거기에 레위라 하는 세리가 앉아 있었어요. 레위, 이 사람이 바로 마탭니다. 레위는 본명이고요. 마태는 헬라식 이름이에요.
지중해 세계에서 헬라문화가 확산되고, 헬라어가 공용어가 되면서 헬라식 이름을 짓는 것이 유행했거든요. 그래서 외국에 흩어져 사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거의 대부분 헬라식 이름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본토에 사는 유대인들에게도 이 유행이 퍼졌어요. 그래서 마태에게도 본명이 따로 있고, 헬라식 이름이 따로 있는 거예요.
아마도 그의 아버지가 이름을 지어줬겠죠. 마태의 아버지는 이름이 “알패오”였어요. 알패오도 헬라식 이름이에요. 알패오가 그의 부모로부터 헬라식 이름을 받은 것처럼, 그도 자기 아들에게 마태라는 헬라식 이름을 지어준 겁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27절에 보면, 마태의 본명이 뭐였습니까? 레윕니다. 이름이 레위인 것을 보면, 그가 레위 지파의 자손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성경에 마태가 어느 지파 사람이라는 말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단정을 할 수는 없지만, 대체적으로 학자들은 마태가 레위 지파였을 것으로 봐요. 마태복음의 주석을 쓴 R.T.프랜스는 마태가 레위 지파 출신일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또 윌리엄 하워드 라고 하는 신학자도 마태가 레위 지파 출신이라는 의견을 지지해요. 뿐만 아니라 4세기 초, 교회 역사학자였던 유세비우스도 마태를 레위 지파의 후손으로 봤어요.
그러니까 이미 1,600년 전의 사람을 비롯해서 21세기까지, 수많은 학자들이 마태를 레위 지파로 본다는 겁니다. 우리나라 목사님들도 대부분 마태를 레위 지파로 봅니다.
자,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어쩌면 마태는 성전에서 복무할 수 있는 나이인 25세가 되면, 성전에 들어가 섬기는 일을 하게 됐을 수도 있어요.
그리고, 여러분 마태의 이름의 뜻을 보면요. 마태는 “여호와의 선물” 이라는 뜻입니다. 여호와의 선물. 성경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이름만 봐도 그 사람의 됨됨이를 대충이나마 알 수가 있거든요. 이름만 보면, 마태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이름이 레위인데다가 또 마태, 여호와의 선물. 그야말로 성전에서 하나님을 열심으로 섬기는 신실한 사람일 것 같잖아요.
그런데 정말 희한하게도, 지금 마태의 삶이 전혀 그렇지가 않아요. 레위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세리 일을 하고 있어요. 여러분, 이때 당시에 이스라엘에서 세리는 멸시의 대상이었습니다. 세리가 세금 징수원이거든요. 백성들에게서 세금을 걷는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이 세금이 어디로 보내지는가 하면, 로마로 보내져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로마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한을 로마가 갖고 있어요. 그래서 모든 세금이 로마로 가는 겁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세금을 거둬서 로마에 갖다 바치는 세리들이 어떻게 보였을까요? 매국노, 로마의 앞잡이, 천하의 죽일놈, 이렇게 보였겠죠.
그런데 세리들이 미움을 받는 이유가 이것만이 아니에요. 세리들은 로마에서 책정한 세금을 로마로 보내고 나면, 남는 돈은 자기들이 가지거든요. 그래서 정해진 세금보다 더 많은 돈을 거둬들입니다. 자기 배를 불리기 위해서, 거짓으로 더 많은 세금을 걷는 거예요.
누가복음 3장에 보면,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을 때, 세리들도 세례를 받으러 왔거든요. 그때 요한이 세리들에게 뭐라고 소리쳤습니까? 누가복음 3장 13절 말씀인데요.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부과된 것 외에는 세금을 더 거두지 말라. 세리들이 지금 부과된 것 외에 세금을 더 거두고 있다는 거죠. 그것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이렇게 공개적으로 책망을 할 정도로, 세리들의 부정이 심했습니다. 그래서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리들을 멸시하고, 배척한 겁니다.
뿐만 아니라. 세리들은요. 성전에 들어가지 못해요. 로마에 나라를 팔아먹는 이방인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성전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마태는 레위 지파의 후손이에요. 대대로 성전에서 섬기는 일을 해온 집안이에요. 그런데 그 후손인 마태는 성전에를 못 들어가요. 왜? 매국노라서. 민족보다 돈을 더 사랑해서. 배척을 받아 못 들어가는 겁니다.
자, 그런데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님이 레위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할렐루야. 모든 사람이 미워하는 세리에게 예수님은 아무 거리낌없이, 그를 보자마자 말씀하셨어요. 나를 따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차별이 없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고, 누구든지 부르십니다. 차별금지법이고 뭐고 다 필요없는 거예요. 애초에 하나님은 차별을 하지 않으셔요.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차별을 하는 거지,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으시고, 그 사람의 직업이 어떻든지, 그 사람의 외모가 어떻든지, 그 사람의 성품이 어떻든지, 차별없이 부르십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사람을 차별하셨다면, 마태는 제자가 될 수가 없어요. 모든 사람이 다 싫어하는 사람을 왜 뽑겠습니까? 기왕이면 명성도 있고, 인기 많은 사람을 뽑는 게 사역을 하는데 유리하잖아요. 왜 굳이 세리를 뽑냐고요.
하지만 예수님은 굳이 세리를 뽑으셨어요. 왜냐하면, 지금 예수님을 따라서 나온 사람들 중에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를 자가 없었거든요. 그리고 세리를 보셨을 때, 그 사람이야 말로 진정으로 나를 따를 자라는 것을 아신 겁니다.
그가 세리든 뭐든, 예수님께는 상관이 없어요. 예수님이 병자들을 고치실 때도, 그 사람이 나병환자든 중풍병자든 상관 없었던 것처럼, 마태가 세리든 뭐든 상관 없어요.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납니다. 그가 나를 따를 것이냐, 안 따를 것이냐. 예수님이 보셨을 때, 마태는 따를 사람이에요. 그래서 부르신 겁니다. “나를 따르라”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마태가 어떻게 행동합니까? 오늘 본문 28절에 보니까,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아멘. 본래는 세관에 앉아 있었던 마태가 부르심을 받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냥 일어난 게 아니죠.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났어요.
여기서 모든 것을 버렸다는 말이 앞에서 한번 나왔었죠. 누가복음 5장 11절에 보면, 어부들이 먼저 그렇게 했었습니다. 누가복음 5장 11절에 보니까,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아멘.
여러분, 이것이 부르심에 합당한 자의 모습입니다. 확실히 다른 사람과는 뭐가 달라도 달라요. 부르심 앞에서 망설임이 없고, 즉각적으로 결단합니다. 그 즉시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어요.
하지만,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죠. 이것은 곧 희생이에요. 마태가 세리를 하면서 욕은 많이 먹지만, 돈은 많이 벌 수 있거든요. 정말 돈에 미치지 않고서는 맨정신으로 세리를 할 수 없어요.
그런데 마태는 아무 거리낌 없이 당당히 세관에 앉아서 세리 일을 할 정도로, 돈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돈을 포기한 겁니다.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 희생이에요. 예수를 따르기 위해, 자기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기꺼이 희생한 겁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가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베풀 수가 있는 것이죠. 밑에 29절을 봐 볼까요? 29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아멘.
이전까지는 돈을 목숨처럼 여기고, 내 것을 남들과 나눈다는 것은 상상을 못할 일이었지만, 다 버리고 나니까,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졌어요. 그래서 기꺼이 지갑을 열어 큰 잔치를 베풀 수가 있는 겁니다. 그것도 그냥 잔치가 아닙니다. 큰 잔치예요. 여기서 크다는 말이 헬라어로 “메가스” 라는 말입니다.
앞에 누가복음 4장 38절에서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었죠. 이때 중하다는 말이 똑같이 헬라어로 “메가스”였어요. 도저히 사람이 고칠 수 없는, 엄청나게 큰 열병이었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레위가 베푼 잔치도, 엄청나게 큰 잔칩니다. 돈을 아낌없이 쓴 거죠.
그런데 그 잔치에 어떤 사람들이 왔어요? 세리와 다른 사람들이 왔어요. 일반 백성들은 세리들과 상종하지 않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은 안 오고, 마태와 같은 세리들과 또 그들과 어울리는 다른 사람들이 온 겁니다.
여러분, 세리들과 어울리는 사람들이 누굴까요? 세리만큼 백성들에게 멸시를 받는 사람들이죠. 밑에 30절에 보면, 이 사람들을 죄인으로 칭합니다. 30절에 보니까,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자, 여기서부터 두 번째 단락인데요. 두 번째 단락은 바리새인들과의 두가지 논쟁 중에 첫번째 논쟁 단락이라고 그랬죠. 죄인들과 같이 밥 먹는 문제에 대한 논쟁인데요. 지금 바리새인들이 뭐라고 비방을 하고 있습니까?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지금 마태의 집에 세리들이 와 있고, 또 그들과 어울리는 많은 사람들이 와 있어요. 여기서 세리들 옆에 같이 앉아 있는 사람들을 죄인들로 칭하고 있죠.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죄인은 어떤 사람들인가 하면, 크게 네 부류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는 율법을 어기는 사람들이고, 두번째는 부정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에요. 세리, 창녀, 목자, 상인, 술집 주인, 의사, 하인 등등 부정한 것을 만지거나 비율법적인 일을 행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을 죄인으로 여겼습니다. 또 세번째는 사회적 약자들입니다. 가난하고 병든 자들이죠.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죄 때문에 가난하고 병이 들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회적 약자들은 안 그래도 서러운데, 죄인으로 낙인이 찍히기까지 했어요. 그리고 마지막 네번째는 이방인들이에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지 못한 이방인들.
이처럼 네 부류의 사람들이 바로 죄인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지금 마태의 잔치에 와 있는 거예요. 29절에 다시 보면, “세리와 사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많이. 죄인이 한두 명도 아니고, 떼거리로 몰려와 있어요.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볼 때 얼마나 끔찍했겠어요? 하도 기가 막혀서 비방을 하는 겁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그랬더니 예수께서 뭐라고 대답을 하십니까? 31절, 32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아멘.
왜 죄인들과 함께 밥을 먹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내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그들에게 온 것이다, 라고 답변을 하십니다. 의사가 병든 자를 고치기 위해 존재하듯이, 나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해 왔다는 겁니다.
의사는 건강한 자에게는 쓸 데가 없어요. 마찬가지로, 의인에게는 내가 필요 없어요. 여기서 의인은 정말로 신실하고 거룩한 의인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자칭 의인을 말하는 거예요. 율법을 지키면서, 자기 스스로 나는 의인이야, 라고 스스로 의인이라고 칭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죠.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대놓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나는 너희들을 위해서 온 게 아니야. 나는 너희가 멸시하는 이 죄인들을 위해서 온 거야. 그리고 나는 이 사람들을 회개시킬 거야.’
마치 의사가 환자를 고치듯이, 예수님은 죄인들을 회개시켜서 그들을 죄인에서 의인으로 회복시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죄인들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신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고, 나의 죄를 고백할 때,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회개의 영을 부어주십니다.
환자가 자기가 아프다는 것을 인정하고 의사에게 진단을 받아야만 병을 고칠 수가 있듯이, 죄인이 자기 죄를 인정하고, 주님께 나아갈 때에만, 죄사함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뜻이에요.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합죽이가 됐어요. 그래서 이번에는 전략을 바꿔서 다른 부분을 공격합니다. 세번째 단락, 두번째 논쟁이죠.
33절에 보니까, “그들이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처음에는 죄인들과 함께 먹는 문제를 공격했지만, 예수님이 완벽하게 해결을 하시니까, 이제는 아예 먹는 것 자체를 가지고 공격을 해요. 요한의 제자들이나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을 자주 하는데,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도 안 하고, 이렇게 먹기만 하느냐? 먹기만 잘 쳐먹고, 왜 금식을 안 하냐?
그러니까 예수님이 기다렸다는듯이, 대답을 하시죠. 34절, 35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아멘.
이번에는 예수님이 자신을 신랑에 비유를 하셨어요. 혼인 집에 신랑이 함께 있으면, 손님들은 즐거워하며 먹고 마시는 것이 당연한 겁니다. 금식을 할 이유가 없어요.
지금 바리새인들을 비롯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같이 메시야를 갈망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메시야가 속히 오실 것을 바라고 금식기도를 자주 했어요. 그런데 그 메시야가 이미 오셨잖아요. 예수님이 바로 그 메시야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더이상 금식을 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신랑이 이미 우리와 함께 있어요. 그러면 함께 즐거워하며 먹고 마시면 되는 겁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신랑을 빼앗기는 때가 오는데, 그 때는 다시 금식을 해야 돼요. 그 때가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때죠. 그 때 다시 금식을 하고, 그 전까지는 우리 곁에 있는 메시야를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리새인들은 왜 금식을 안 하냐고 공격했지만, 예수님은 금식을 할 이유가 없다, 라고 대답을 하신 겁니다. 금식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금식을 할 이유가 없는데 왜 하냐는 거예요. 그래서 또 바리새인들이 합죽이가 됐어요.
그리고 이어서 곧바로, 예수님이 지금 이 모든 내용을 두 가지 비유를 사용해서 정리를 하시는데요. 이것이 바로 네번째 단락입니다. 먼저 첫번째 비유는 새 옷과 옷 조각에 대한 비윱니다. 오늘 본문 36절이죠. 36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 아멘.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새 것과 옛 것이 양립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새 옷은 그냥 새 옷 그대로 놔둬야 돼요. 괜히 내가 좋아하는 낡은 옷을 고쳐보겠다고, 새 옷에서 조각을 하나 찢어서 갖다 붙여봐야 아무 소용 없습니다. 새 옷은 새 옷대로 버리고, 낡은 옷도 낡은 옷대로 버리는 거예요. 어떻게 서로 조화를 시켜볼까 해도 안 돼요. 새 것은 새것이고, 옛 것은 옛 것입니다. 이것이 첫번째 비유의 의미예요.
그리고 이어서 곧바로 두번째 비유를 말씀하시는데요. 37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37절 시작,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아멘.
첫번째 비유하고 형식이 똑같죠. 새 것과 옛 것을 조화시킬 수가 없다는 겁니다. 괜히 그렇게 하려다가는 새 것도 망치고 옛 것도 망친다는 거예요. 오직 새 것은 새것끼리, 옛 것은 옛 것끼리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두 비유의 말씀을 정리를 하시면서 38절에 이렇게 말씀을 하셔요. 다함께 읽어볼까요? 38절 시작,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아멘.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오늘 말씀 제목이죠.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지, 옛 부대에 넣으면 안 돼요. 이것은 상식입니다. 왜냐하면, 새 포도주는 발효가 진행되는 동안에 가스가 생성이 되면서 부풀어 오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반드시 탄력이 있는 새 부대에 넣어야만 새 포도주를 감당할 수 있습니다. 탄력을 잃어버린 옛 부대에 넣었다가는 얼마 안 가서 터져버립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는 곧 예수님의 사역과 연결이 됩니다. 새 포도주는 예수님의 복음 사역을 의미해요. 지금까지 누구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말씀과 새로운 은혜가 임한 겁니다. 그런데 이것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요.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예수님이 지명하여 부르신, 마태와 같은 사람이죠. 자기가 앉아 있던 옛 사람의 자리에서 일어나 새 사람으로 나아가기로 결단할 수 있는, 그런 사람만이 예수님의 복음을 감당할 수 있어요.
반면에, 스스로 의롭다고 하면서 변화를 거부하고, 옛 전통을 고집하는 사람은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 자리에서 일어나야 하는데, 끝내 일어나지 않고 눌러앉아 있는다면, 조금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묵은 포도주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하셔요. 오늘 본문 3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아멘.
묵은 포도주에 익숙해진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묵은 포도주가 더 뛰어나서가 아니에요. 묵은 포도주가 익숙하기 때문에 익숙한 것만 찾는 겁니다. 지금 복음이라고 하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고 뛰어난 새 포도주가 왔는데도 불구하고, 맛을 보려고 하지 않아요. 익숙함에 젖어서, 새로운 모든 것을 거부합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돼요. 이미 이 땅에 메시야 그리스도가 오셨고, 완전히 새로운 시대가 열렸어요. 그토록 갈망하며 금식하며 기다렸던 그 분의 잔치에 참여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신랑 되신 주님과 함께 기뻐하며 그 분과 동행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모든 백성들에게 멸시천대를 받던 죄인들은 지금 함께 기뻐하며 먹고 마시고 있어요. 옛 것이 주지 못하던 참 기쁨을 새 것을 통해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그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우리가 앉아 있던 옛 사람의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서, 주님을 따라 그 은혜의 잔치에 참여하여, 참된 평안과 기쁨을 누리며, 새롭게 거듭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차별이 없으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요. 비록 부르신 그 길이 낯설고, 어렵고, 또 때로는 옛 것만 못한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직 그 길에 참된 평안과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소망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즉시 결단함으로, 옛 사람을 버리고 일어나 새 사람으로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새 포도주에 합당한 새 부대와 같은, 아름답고 신실한 삶을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참된 기쁨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