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129 새벽기도회: 고린도후서 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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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하시겠습니다. 찬송가 321장 찬송하시겠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함께 읽을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7:2-4 입니다.
고린도후서 7:2–4 NKRV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는 아무에게도 불의를 행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서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를 정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너희가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나는 너희를 향하여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새벽기도회에 나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오늘도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오늘도 말씀을 기도제목으로 삼고 먼저 기도하면 좋겠는데요. 오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7장 말씀으로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하는 사도 바울의 마지막 말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하는 말을 마치면서 무슨 말을 했을까요? 자신의 사도성을 비난하고, 정죄하려고 했던 고린도교회를 꾸짖거나, 심지어 이들을 정죄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비록 자신의 사도직을 의심하고 비난하던 이 고린도 교회를 격려하는데요. 오늘 이 말씀을 함께 살피고 우리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얼마나 크신 지를 깨닫고 그 하나님을 오늘날 살아가는 우리가 영광을 돌리면서 기도제목으로 삼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바울은 2절에서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더 정확하게는 “마음에 공간을 만들어라”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를 위한 자리를 만들어라”라는 겁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 앞인 6장 13절에서 바울이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라는 말과 연관이 있습니다. 넓힌다는 것은 공간과 연관이 있는 단어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마음에 있는 공간에 목회자인 바울을 위한 공간을 만들라는 뜻입니다. 앞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믿지 않는 불신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라고 말하였습니다. 아마 고린도 교회 성도 중에는 우상을 섬기는 자들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과 함께 교제하고 심지어 우상을 이들과 숭배하게 되면서 거룩함을 상실하고 부정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우상도 섬기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마음에는 우상이 자리잡고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우상을 섬겨도 된다는 거짓 교사들을 위해 고린도 교회의 마음에 공간을 두었던 겁니다. 거짓 교사들을 위해 자신의 마음에 공간을 만들어주니 고린도 교회는 자연스레 더럽혀졌고, 바울을 향해 비난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참된 진리이신 그리스도께로 이 고린도 교회를 이끌기 위해 고린도 교회의 마음에 자신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줄 것을 요청합니다. 아니, 더 강력하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받아줄 것을 이렇게 요청한 뒤에 바울은 자신과 거짓 교사를 대조하면서 자신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줘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말합니다. 우선 바울은 “아무에게도 불의를 행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정말 불의를 행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거짓 교사로 인해 바울이 불의한 처사를 당하였습니다.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쫓겨나야 했고, 그의 사도직이 의심받고 비난 당해야 했습니다.
두 번째로 바울은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바울은 오히려 고린도 교회에게 유익을 전달하려고 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라는 유익을 말입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 내에 있는 거짓 교사들은 고린도 교회를 유익하게 만들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해롭게 만들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그리스도에게서 멀리 떠나게 만들고 있고, 더 나아가 우상을 숭배하도록 만들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바울은 “아무에게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다고 합니다. 나중에 뒤에 가서 12장 16절을 보면 고린도 교회가 바울이 교활한 방법으로 고린도 교회를 속여서 빼앗았다고 주장했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것에 대한 변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지 않았는데, 디도나 다른 대리자를 통해 지원을 받았다는 의심과 연관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오해로부터 벗어나고자 합니다. 오히려 바울은 고린도 교회 내의 거짓 교사들이 속여 빼앗았음을 지적합니다.
바울이 이처럼 자신과 거짓 교사들을 대조시킨 것을 요약하자면, 거짓 교사들은 언제나 오로지 이들의 이득만을 위해서 일했다는 겁니다. 거짓 교사들의 특징은 바로 교회를 전혀 위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만 일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에 비해 바울은 어떻습니까? 언제나 고린도 교회를 위해서만 일하였습니다. 특히나 자신의 봉사를 통해 고린도 교회에 그리스도만 드러나시길 바랐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자신과 거짓 교사를 대조하는 이유는 고린도 교회 안에서 바울이 유리한 위치를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정치적인 목적을 통해 거짓 교사들을 이기고 자신이 고린도 교회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고자 이렇게 대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고린도 교회를 위한 자신의 사역이 고린도 교회에게서 애정과 지지를 받기에 합당하다는 것을 알리고자 함입니다. 바로 주일에 제가 설교했듯이 바울이 전한 복음과 가르침이 고린도 교회를 위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임을 변호하고자 함입니다. 바울은 언제나 고린도 교회를 위한 목회자였습니다.
이렇게 자신이 고린도 교회를 위한 목회자라는 것을 변호하고 있는 바울은 이제 자신의 말을 통해 고린도 교회가 가질 수 있는 오해에 대해서 말합니다. 바로 자신을 고린도 교회가 비난했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의 잘못을 지적함으로 고린도 교회를 바울이 정죄하고 있다는 오해입니다. 3절에서 바울은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를 정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왜 이 말을 하는 것일까요? 바로 뒤에서 말합니다. “내가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너희가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라고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함을 통해 간접적으로 고린도 교회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긴 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변호하고자 하는 이유는 고린도 교회가 바울의 마음에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바울이 전에 이것을 말했다고 하는데, 6장에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한 마음이 넓어졌다고 말했던 것을 뜻합니다. 바울은 여전히 비록 고린도 교회가 자신을 비난하고 사도직을 의심하였지만, 고린도 교회를 향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자신의 마음에 바울을 위한 공간을 만들지 않았음에도 바울은 여전히 고린도 교회를 마음을 품고 있었습니다.
왜 이토록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마음으로 품고 있었던 것일까요? 그 이유는 고린도 교회와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하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고자 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위한 참된 목회자라는 증거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오직 자신들의 유익만을 위해 일합니다. 그러나 참된 목회자는 언제나 자신은 비난받고 심지어 목회자가 맞냐고 의심을 받더라도 교회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자 합니다. 바울은 사적인 감정으로 고린도 교회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품을 수 있습니다.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자신을 비난하고 의심하니 억울할만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자신의 사적 감정과 교회를 향한 공적 감정을 분리시키고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바울의 모든 마음이 그리스도에게로 고린도 교회를 인도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을 바울이 가지고 있기에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마음이 열려 있을 뿐만 아니라 4절에서 이 고린도 교회를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자신을 비난하고 의심하는 교회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뛰어나서 가능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바울은 하지 못하나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통해 이 고린도 교회를 품고 계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이 바울을 통해 드러난 것은 바울의 뛰어남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 고린도 교회를 여전히 사랑하고 계시다는 겁니다. 사도 바울을 거부하고 내쫓는 것은 곧 왕이신 예수님께서 보내신 사자를 쫓아보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자를 보낸 왕을 거부하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사자 바울을 거부하여 사실상 그리스도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 고린도 교회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다시 바울을 통해 이 고린도 교회를 품고, 여전히 교회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교회가 못난 모습을 보이더라도 그리스도께서는 여전히 교회를 놓지 않으십니다. 교회를 책망하신다는 것 자체가 무엇입니까? 여전히 교회를 향한 관심이 있으시고, 교회를 품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그리스도께서 왜 아시아 일곱 교회에게 편지를 써 책망하십니까? 교회를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바른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처럼 교회의 존립은 교회의 어떠한 모습에 있지 않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고 바른 길로 가고 있을 때나 비록 그렇지 못하여 못난 모습을 보일 때라도 그리스도께서는 여전히 교회를 품고 계시고 인도하고 계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요. 그리고 자비인지요. 이처럼 오늘 말씀을 통해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마음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을 통해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메시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고린도 교회와 같이 넘어질 수 있습니다. 못난 모습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 교회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못난 모습을 보여 그리스도께서 슬퍼하지 않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시게 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을 꼭 기억하시면서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넓으신 마음을 품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는 교회가 아니라 시원하게 해드리는 우리 새순교회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놓고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무한한 은혜와 자비를 저희가 알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못난 모습을 보여도 언제나 교회를 품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희거 이 사실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는 교회가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교회가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언제나 이 교회가 그리스도를 드러내도록 하시고 부족하지만 이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 받아 주시옵소서. 오늘도 이 교회를 이끄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으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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