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어떻게 바뀔까요?
Notes
Transcript
제목: 사람은 어떻게 바뀔까요?
사람은 참 안바뀐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격도 그렇고, 가치관도 참 바뀌기 힘듭니다.
부부가 가장 많이 하는 불평도 그렇습니다.
‘참 내 남편은, 내 아내는 잘 안 바뀐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수없이 말해도 잘 안바뀐다는 말입니다.
그럼 하나님을 믿는다고 잘 바뀔까요?
사람들 보면 그렇지도 않는것 같습니다.
어떻게 교회를 그렇게 열심히 다니면서 저 모양이야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을 믿지만 삶의 방식은 그대로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결정적으로 바뀔 수있는 때가 있습니다.
삶의 고난이 찾아올 때입니다.
그냥 약간 힘든 것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내 힘으로 내 지혜로 아무 것도 할수 없는 때가 있습니다.
그때 사람은 변합니다.
스스로 지금이 바닥이라고 느낄때 마음이 가난해집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자기 고집을 꺾습니다.
누가복음에 나온 탕자를 생각해보십시오.
모든 것을 잃고 돼지 사료를 먹게 될때서야 아버지를 기억합니다.
인간이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그렇습니다.
인생에서 큰 고난을 만날때 사람은 변할 준비가 됩니다.
그때서야 하나님을 기억하게 됩니다.
그럼 하나님을 기억한다고 무조건 변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실까요?
[본론]
먼저 현재 이스라엘의 상태가 어떤지 알아봐야 합니다.
11장 12절입니다.
이스라엘의 특징을 묘사하는 두 단어가 등장합니다.
거짓말과 음모입니다.
이러한 그들의 모습을 잘 묘사한 단어가 있습니다.
7절의 ‘거짓 저울’입니다.
거짓 저울로 사람을 속여 착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이고 결국 하나님을 속이는 것입니다.
이 거짓 저울은 그 당시 사회가 얼마나 타락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거짓 저울처럼 기준이 무너진 사회였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수 없는 사회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 서로 속고 속이는 사회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신앙 양심도 팔아버리는 사회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뻔뻔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8절입니다.
‘아, 내가 정말 부자가 되었구나. 이제는 한 밑천 톡톡히 잡았다. 모두 내가 피땀을 흘려서 모은 재산이니, 누가 나더러 부정으로 재산을 모았다고 말하겠는가?’
그렇다고 그들이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았던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 엄청난 소와 양을 바치며 예배했습니다.
그러나 예배는 단지 종교적 형식일뿐 하나님은 그것을 밭에 놓인 돌무더기로 여기십니다.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힘과 지혜를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또다른 예가 있습니다.
호세아서에서 계속해서 등장하는 예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면서도 자꾸 다른 강대국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12장 1절입니다.
그 당시 강대국은 앗시리아와 이집트 입니다.
이스라엘은 그 두나라와 은밀히 손을 잡습니다.
앗시리아와는 동맹을 맺고, 동시에 이집트에게는 조공을 바친 것입니다.
세상적 관점에서 보자면 좋은 선택일수 있습니다.
작은 나라가 살아남기 위한 현실적인 방안일수 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가 미국과 중국이라는 강대국들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것과 비슷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적 관점에서 이것은 불순종입니다.
이스라엘이 언약을 맺은 대상은 앗시리아나 이집트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보호자이자 왕이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운명을 책임지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힘과 권력이 더 매력적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지혜와 남의 힘을 의지한 것입니다.
이것을 1절에서 바람을 먹고 살며, 열풍을 따라 달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강대국들의 힘은 바람같이 헛되고 붙잡을수 없는 것입니다.
강대국들은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기에 신뢰할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미련하게도 바람같은 그들의 힘을 의지한 것입니다.
또한 그들을 의지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열풍을 따라 달리는 것과 같습니다.
열풍은 팔레스타인 땅 동쪽에서 부는 바람으로 농작물을 파괴하는 뜨거운 바람입니다.
이스라엘은 강대국의 힘을 의지하는게 결국 자신을 파괴하는 행위인지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이 결국 누구에게 멸망합니까?
동맹을 맺고 그토록 신뢰하던 바로 앗시리아입니다.
조공을 바친 이집트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이 강대국을 의지한 모습은 우리의 삶과 다르지 않습니다.
예배도 드리고 기도도 하고, 찬양도 합니다.
그 고백들을 들으면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사람같습니까?
그런데 교회 밖으로만 나오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됩니다.
세상 모드로 확 바꿔버립니다.
하나님은 잊어버리고, 세상 지혜와 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 안에 참된 성공이 있다면서도 직장에서는 좋은 라인을 타서 위로 올라가려고 합니다.
물질 우상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실제로는 돈을 많이 벌 기회가 생기면 불나방처럼 달려듭니다.
소명을 위해 기도한다면서도 세상 가치관따라 직업을 선택합니다.
결혼 상대자를 선택할때는 어떻습니까?
결혼 상대자를 위해 기도하며 신앙이 가장 중요하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정작 실제 선택은 직업, 외모, 경제력같은 세상적 조건에 따라 이루어질 때가 많습니다.
이런 모습들은 우리의 신뢰가 어디에 있는지 되돌아보게 합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상태를 좀 더 잘 묘사한 대상이 있습니다.
3절의 야곱입니다.
갑자기 야곱이 등장합니다.
왜 일까요?
거짓말과 속임수에 빠진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며 그들의 조상 야곱을 떠올리신 것입니다.
야곱과 이스라엘의 모습이 조금도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치 자식을 보며 ‘어찌 니 애비랑 똑같냐’고 한탄하시는 것입니다.
야곱이 어떤 사람입니까?
태어날때부터 형의 발 뒤꿈치를 움켜잡고 나온 자입니다.
‘야곱’이라는 이름 자체가 발 뒤꿈치를 움켜잡은 자, 다른 말로는 속이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그의 이름이 곧 그의 삶을 대변합니다.
그는 형의 장자권을 움켜잡기 위해 자신의 아버지와 형 에서에게 거짓말하고 속였습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삶이었습니다.
지고는 못사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형의 복수를 피하기 위해 하란에 있는 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칩니다.
그곳에서 20년의 세월을 보냅니다.
아내 라헬을 얻기 위해 삼촌에게 속아 무려 7년을 일합니다.
그리고 라반 밑에서 자신의 잇속을 챙기기 위해 끝없이 계산하고 꾀를 부렸습니다.
그러다가 얻을 거 다 얻어내고 라반에게서 도망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속고 속이는 인생, 쫓고 쫓기는 인생을 살며 악착같이 얻을 것 다 얻어내며 산 것입니다.
자기 힘과 지혜로 모든 것을 얻어내려 했지만 결국 고단하고, 피곤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자신이 속였던 형 에서가 자신을 만나러 온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형의 복수가 너무 두려워 얍복강에 홀로 남아 밤새도록 하나님께 씨름하며 기도합니다.
평생 쌓아온 자신의 부와 재산도 자기 목숨을 지켜줄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이때서야 야곱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매달린 것입니다.
그곳에서 야곱은 하나님과 싸워 이깁니다.
이때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꿔 주십니다.
더 이상 속이는 인생이 되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어떻게 전능하신 하나님이 야곱에게 지시겠습니까?
그에게 일부러 져주신 것입니다.
은혜를 베푸셔서 더이상 그렇게 살지말라고 일부러 져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어디 쉽게 바뀌나요?
여전히 그는 자신의 고집과 계산에 따라 고향이 아닌 세겜이란 곳에 머뭅니다.
형을 피해 세겜 땅에 머물렀지만 이는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입니다.
그러니 인생이 온전할리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시금 그의 인생을 뒤엎어 엎어버리십니다.
그곳에서 딸 디나가 세겜 부족장 아들에게 강간을 당하는 비극을 겪게 됩니다.
그 일때문에 야곱의 아들들은 화가 나서 그 부족을 전멸시켜버리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 모든 일이 있은후 야곱은 다른 부족들이 무서워 다시 베델로 도망칩니다.
베델은 과거 형 에서를 피해 아람으로 도망가던 중 하나님을 만난 곳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다시 그에게 나타나셔서 축복하시고 후손에 대한 약속을 주십니다.
그리고 또다시 그의 이름을 야곱이 아닌 이스라엘이라고 바꿔주십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라는 부르심인 것입니다.
야곱의 인생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그는 어떻게든 자기 꾀로 계산하며 원하는 것을 얻어내며 살아온 삶입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속고 속이며, 고달프고 피곤한 인생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현재 이스라엘의 모습이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거짓과 속임수, 세상 지혜와 힘을 의지한 게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나 야곱을 잘 보십시오.
하나님은 그가 자기 꾀로 살아갈 때에도 그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잘나서 그러신게 아닙니다.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와 맺은 약속을 따라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야곱처럼 살아온 피곤한 인생이 얼마나 많습니까?
악착같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표를 이루려는 피곤한 인생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자수성가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피곤한 인생일 뿐입니다.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그러나 사람 참 바뀌기 쉽지 않습니다.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고 나서도 잘 안 바뀐 것처럼 우리도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지만 세상 방식대로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우리는 변덕스럽지만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과연 야곱이 바뀐 것은 무엇때문일까요?
하나님이 어려울때마다 도와주셨기 때문일까요?
9절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시 광야시절로 되돌려 놓겠다고 경고하십니다.
그들이 의지하던 모든 것들을 다 제거하시고 그들이 처음 시작했던 자리로 돌려놓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시작은 이집트 노예살이하던 보잘것 없는 민족입니다.
그들의 시작은 아무 것도 없는 광야입니다.
그런 그들을 하나님이 구원하셔서 가나안땅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지만 그 사랑과 은혜는 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신뢰하고 의지하던 것들을 허무십니다.
다시 하나님 외에는 아무 것도 의지할수 없는 광야로 데려가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광야가 바로 그들이 앗시리아에게 멸망당해 포로로 끌려가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은 결코 파멸 그 자체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새로운 시작을 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려는 하나님의 큰 계획 속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야곱처럼 필요할때만 하나님을 찾는 그런 변덕쟁이가 아니십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방황할때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언자들을 통해 지속적으로 돌아오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들이 돌아오기를 눈물로 기다리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세상을 의지하며 살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은 고난을 받는다고해서 자동적으로 변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바뀌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변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은 그 변화의 시작일 뿐입니다.
이름이 바뀌었지만 그 속은 바뀌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다시 베델로 올라가 하나님을 만났을때 그는 진짜 변화되었습니다.
이름처럼 진짜 이스라엘이 된 것입니다.
그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창세기 35장 3절입니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우리도 얼마나 고집이 셉니까?
아무리 말씀을 들어도 예배를 드려도 잘 안 바뀝니다.
고집스럽게 내 힘과 방식으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때는 하나님의 사랑을 절대 깨닫지 못합니다.
고난과 시련이 찾아와 마음이 가난해지면 그때서야 하나님을 기억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로 우리 삶에 큰 시련을 허락하십니다.
그 시련이 찾아올때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미워하시는 것인가?”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설령 내 잘못으로 인한 시련일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미워하지 않으십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때 깨달은 하나님의 사랑은 단순히 나를 위로하는데 그치지 않습니다.
나를 뼈속까지 변화시킵니다.
꺾을수 없었던 그 고집을 꺾으셔서 나를 새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내가 죄인되었을때에도 나를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을 때 사람은 변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성격도, 가치관도, 삶의 방식도 고집스럽게 잘 안 바뀝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중요한 진리를 깨닫습니다.
우리의 변화는 고난 그 자체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 변함없는 신실하신 사랑을 깨달을 때 사람은 변하는 것입니다.
고난은 그 밑거름이 되어줄 뿐입니다.
야곱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꾀와 힘으로 살아가던 야곱은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씨름할 때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바뀐게 아닙니다.
실패와 고난을 반복하며 결국 그가 하나님을 만났던 자리 베델로 돌아갈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 야곱 아닐까요?
혹시 지금도 스스로의 지혜와 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뜻보다 세상의 방법을 쫓고 있지는 않습니까?
겉으로는 하나님을 예배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세상을 더 의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그 어떤 것도 나를 바꿀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이 나를 변화시킵니다.
야곱처럼 끈질기게 그 은혜를 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