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불순종과 앗수르의 팽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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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views이스라엘을 침공하면서, 앗수르는 한편으로 명분을 제시하고 다른 한편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기를 떨어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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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입
앗수르의 살만에셀 5세가 사마리아를 에워쌌다(9절). 삼 년이 지난 후 사마리아 성읍이 함락 되었다. 그 때가 유다의 히스기야 왕 6년, 이스라엘의 호세아 왕 9년이었다.
살만에셀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끌어다가 앗수르의 할라, 하볼 및 메대 사람의 여러 성읍에 강제로 이주시켰다. 그리고 살만에셀은 앗수르가 정복한 다른 나라 사람들을 이스라엘에 강제로 이주시켰다.
여기서 할라와 하볼은 하란 동편에 자리한 도시였다. 그 도시들은 사마리아에서 적어도 7백 km 이상 떨어진 곳이었다.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인도에 순종하여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라엘은 불순종의 결과로 가나안 땅에서 쫓겨나 하란보다 더 먼 곳까지 강제로 이동했던 것이다.
원점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그 이상 더 후퇴했다. 이는 그들의 신앙 상태가 얼마나 바닥을 치고 있었는지 짐작하게 해 준다. 심지어 메대 사람의 여러 성읍까지 쫓겨난 이들도 있었는데, 그곳은 사마리아에서 1500km 이상 떨어진 곳이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까지 쫓겨나게 된 것이다.
17장을 보면, 살만에셀은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 있던 사람들을 사마리아 성읍에 강제 이주시켰다. 그것이 앗수르의 정책이었다. 앗수르는 정복한 나라 백성들을 흩어놓았다. 사마리아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할라와 하볼, 그리고 메대인의 여러 성읍에 흩어 놓았고, 바벨론 지역인 바벨론과 구다에 있던 이들은 사마리아에 흩어 놓았다. 아와, 하맛, 스발와임은 이스라엘의 북쪽에 위치한 시리아의 도시들이다. 그곳 사람들도 사마리아에 흩어 놓은 것이다.
이방인들이 사마리아로 들어올 때 그들이 섬기던 신들도 함께 들어왔다. 우상을 섬기지 말고 여호와를 섬겨야 했던 이스라엘은 도리어 여호와께 등을 돌리고 우상을 섬겨 왔다. 그런 그들에게 아예 온 열방에 있던 우상들이 패키지로 다가왔다. 사마리아에 남은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인들이 가지고 온 우상들을 접하게 되었고, 이방 땅으로 강제 이주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곳에서 본토 우상들을 접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반복 된 우상 숭배를 보고 분노하신 하나님이 아예 그들을 우상의 웅덩이에 던져 버리신 것이다.
살만에셀 5세가 죽은 후 바로 그 달에 사르곤 2세가 앗수르의 왕좌에 올랐다.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사르곤이 선포했던 내용이 복원 되었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사마리아 성읍을 포위 공격하였고 정복하였다. 나는 그 안에 거주하던 27,290명을 노략물로 취하였다 … 나는 사마리아 성읍을 ‘재식민’하였으며 그곳을 이전보다 더 크게 만들었다. 내가 친히 정복한 땅의 거주민들을 나는 그곳에 정착시켰다. 나는 나의 환관을 그들 위에 총독으로 임명하였으며, 그들을 앗수르 사람들로 간주하였다.”
사르곤이 앗수르의 왕으로 있을 때 사마리아는 사실상 앗수르의 지방 도시였다. 사마리아는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들로 뒤섞여 있었고, 사르곤은 그들을 마치 앗수르의 백성인 것처럼 다루었다. 사르곤은 그들 위에 자신이 임명한 총독을 파견시켰다.
앗수르는 다른 나라를 침략해서 정복할 때 그곳 주민들에게 “이 전쟁은 너희의 신이 허락한 것이다”라는 식으로 선포함으로써 한편으로 전쟁을 정당화시켰고, 다른 한편으로 피정복민들의 사기를 떨어뜨림으로써 어떠한 저항도 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본문설명
오늘 본문에도 그러한 내용이 소개된다: “내가 어찌 여호와의 뜻이 아니고야 이제 이 곳을 멸하러 올라왔겠느냐 여호와께서 전에 내게 이르시기를 이 땅으로 올라와서 쳐서 멸하라 하셨느니라.”(25절)
앗수르에서 온 랍사게는 “히스기야에게 속지 말라”라는 말을 반복한다. 남유다 사람들이 영적으로 무장할 틈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것이었다.
앗수르에게 침략 당한 나라의 백성들은 앗수르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를 갈망했다. 하지만 앗수르의 막강한 힘과 잔인한 폭압에 아무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남유다의 히스기야 왕도 처음에는 앗수르 왕에게 조공을 바쳤다. 차라리 조공을 바치고 사는 것이 훨씬 안전하고 평안했다. 그런데 앗수르의 사르곤 왕이 죽었고, 사르곤의 시신이 명예롭게 장사 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자 히스기야는 생각을 바꾸었다. 히스기야 뿐 아니라, 앗수르의 지배를 받던 나라들이 이것을 앗수르를 향한 반역의 신호로 여겼다. 그래서 히스기야와 주변 나라의 왕들은 더 이상 앗수르에 조공을 바치지 않기로 했다.
18장 17절은 아마도 이러한 배경을 전제로 한다. 16절에서는 히스기야가 앗수르 왕에게 조공을 바치는 것으로 소개한다. 그런데 17절에서 앗수르 왕은 느닷없이 히스기야를 치러 온다. 16절과 17절 사이에는 상당한 시간적 간격이 있다.
애굽은 히스기야를 지원하며 반앗수르 정책에 합류하기로 했고, 페니키아와 블레셋의 도시 국가들, 그리고 암몬, 모압, 에돔 등 남유다의 주변 나라들이 앗수르에 반역하고 조공을 중단하기로 합의하였다.
앗수르의 사르곤 왕에게는 이들의 반역 이외에도 신경 써야할 일들이 많이 있었다.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는 데 많은 인력과 재정을 투입해야 했고, 심지어 전염병이 크게 돌아서 국가적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또한 지금까지 광범위하게 군사 원정을 추진해 왔기 때문에 경제적 소모와 군사적 피로감이 상당히 누적되어 있었다.
한편 히스기야에게도 생각이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있는 자원들을 활용해서 남유다에 있던 성읍들을 요새화하였고, 최신 무기들로 무장시켰다. 또한 남유다 전체에 흩어져 있던 요새들에는 충분한 식량을 비축해 놓았다.
히스기야가 했던 대비책 중 유명한 것은 요새화 된 도시들에 공급할 충분한 물을 확보한 것이었다. 특히 예루살렘 성 바깥에 있는 기혼 샘물을 끌어 성읍 사람들이 마시기에 충분한 물을 확보했는데, 그것이 그 유명한 히스기야 터널이다.
히스기야는 반앗수르 체제에 합류하지 않았던 블레셋의 도시 가사를 점령하기도 했다: “그가 블레셋 사람들을 쳐서 가사와 그 사방에 이르고 망대에서부터 견고한 성까지 이르렀더라.”(8절)
정리 및 적용
말씀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