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디매오: 연약한 자를 구원하시는 주님

새벽기도회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86 views
Notes
Transcript
성경본문: 마가복음 10:46-52(신약 73쪽)
설교제목: 바디매오: 연약한 자를 구원하시는 주님
46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반갑습니다.
오늘도 은혜의 자리에 나오신 분들을 축복합니다.
제가 설교했던 자료를 찾아보니까요. 지난 8월에 오늘 우리 읽은 성경 본문으로 수요예배 설교를 했더라고요. 그때에는 바디매오의 이야기를 하면서요. 바디매오의 신앙을 본받자는 것으로 얘기했는데요.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성경 본문을 연구하다보니까요. 또 다른 방식으로 바디매오의 신앙에 관해 생각하게 되었고요. 오히려 바디매오보다 예수님께 더 주목하게 되었어요.
결론부터 말하면요.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구절에서 주목할 것은 사실은 바디매오가 아니라요. 바디매오를 치유하신 예수님임을 깨닫게 되었어요. 왜냐하면, 알보고니 바디매오라는 인물이 이전에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긍정적이지 않고요. 오히려 부정적인 인물에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먼저 바디매오라는 이름은 디매오의 아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요. 여기서 디매오라는 말의 뿌리를 찾아보면 ‘불결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또한 이 말은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의 세상이 ‘혼돈하여 어지러운 상태’에 있는 단어와서 왔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바디매오라는 이름이 ‘불결의 아들’이라는 뜻의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더욱이 바디매오가 소경이며 거지였다고 말하고 있는데요. 여기서 거지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프로사이테스’인데요. 이 단어는 성경 전체에서 딱 두번 사용되었고요. 마가복음 전체에서 딱 1번 사용된 단어입니다. 더욱이 누가복음 16장 20절에 사용된 거지라는 단어는 헬라어 ‘프토코스’인데요. 이는 ‘가난한’이라는 말로 성경에서 여러번 사용되는데요. 이와 달리 바디매오에게 사용되는 ‘프로사이테스’는 그것과는 대조적으로 성경에서 딱 2번 사용되었어요. 이는 누가복음에 거지 나사로와는 대조되는 거지 바디매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쉽게 말해 바디매오는 나사로와 같이 긍정적인 모습으로 이해되어지지 않고 부정적인 모습으로 이해되어지고 있다는 것이죠.
마지막으로 그가 맹인이라고 얘기하는데요. 성경에서 맹인이라는 것은 단지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만을 뜻하지 않고요. 영적인 상태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결국 오늘 성경 본문에 나오는 바디매오는 마가복음에서 긍정적인 존재로 그려지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야기는 명예로운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의 최종 사역인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무리들 중에 마지막으로 합류한 사람입니다. 또한 성경에서 예수님께 고침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무명이었으나 놀랍게도 바디매오는 이름이 적혀 있다는 것입니다. 보다 정확하게는 그가 디매오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기록된 것이지만요.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이렇게 구체적으로 어떤 이름이 기록되거나 거론된 인물이 없다는 점에서 특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디매오가 앞서 제가 설명한 것처럼 부정적인 인물이었다면요. 왜 마가복음 이렇게 명예로운 자리에 그의 이야기를 위치시켰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그 인물보다 예수님께서 그를 치유하신 것과 그가 예수님을 따를수 있게 된 것에 있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가 잘 드러납니다. 특별히 앞서 젊은 부자 관원의 이야기를 했는데요. 그와 대조적인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다는 것을 통해서요.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못나고 어리석은 자도 구원하시는 참으로 위대하신 분임을 깨닫게 합니다.
현재 충남 아산에서 뿌리교회를 개척하셔서 담임목회를 하시는 김진혁 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 분이 목사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듣게 되었는데요. 이분은 어쩌면 목사랑 거리가 멀었거나 목사가 되기 쉽지 않았을 것 같은 분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아버지가 교회의 관리집사였는데요. 당시가 80년대였고 교회에서 관리집사로 일한다는 것이 매우 힘든 시절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어리석은 교인들 중에서는 관리집사를 하대하거나 함부로하는 이들이 있었고요. 심지어 당시 담임목사도 그런 잘못을 범했다고 하는데요. 그러한 어린 시절을 통해 이 목사님은 내면에 분노가 가득했고 목사가 되거나 교회에서 일하지 않을 것을 다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그렇게 다짐했던 어린 시절을 뒤로하고 현재는 형제들이 모두 목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특별히 김진혁 목사님이 목회자가 되는 것은 스스로가 고백하기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니면 불가능했을 거라고 하는데요. 왜냐하면, 어린 시절에 분노로 가득했던 마음은 학창시절에 늘 싸움하고 다니고 이른바 비행청소년의 길을 걷게 했는데요. 같이 놀던 친구의 뜻밖의 죽음으로 비행청소년의 길을 접고 공부를 하게 되었답니다. 그러던 중에 앞으로 어떻게 살까를 생각하면서 자기처럼 비행청소년들 그분 표현으로는 불량청소년들을 선도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요. 그 일을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하던 중에 당시 자기 생각에 교회에 전도사가 되는 것이 그것에 가장 잘 맞다는 생각을 하고요. 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답니다. 그러면서 실제로 이른바 불량청소년들을 모아서 캠프같은 것도 했는데요.
그러나 자신의 생각처럼 청소년들이 쉽게 변화되지 않더랍니다. 캠프 기간에는 변화활 것 같더니 캠프가 끝나고 나니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버리더랍니다. 그러면서 주변에 있던 선배 목사님 전도사님의 권유로 박영선 목사님의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는데요. 이를 통해 깨닫게 되었답니다. 이전까지 불량청소년을 개도하겠다고 설치고 다녔지만 사실은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고 우리를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되었답니다. 그러면서 성경말씀을 더욱 깊이 공부하게 되었고요. 그 과정을 통해 예배를 사모하게 되었답니다. 그러면서 더 이상 자신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을 통해 변화되는 자신을 만나게 되었답니다.
이러한 변화가 목사가 되지 안겠다던 또는 교회에서 일하지 않겠다던 그를 목사로 또 교회를 개척해서 사역하기에 이르게 했답니다. 도무지 자신의 생각으로는 목사로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인도하신 것은 아마도 세상 가운데 대단히 큰 비전이 있어서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셔서 교회를 떠날 것 같은 자신을 이렇게 붙드시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제가 시간 관계상 좀 생략한 얘기들이 있어요. 아버지가 관리집사였는데 관리집사를 하게 된 배경이 있고요. 이 배경 가운데 아버지가 월남전 참전용사여서 그 트라우마로 고통의 시간을 겪었던 시절있어요. 그 때문에 어린 시절에 엄마를 비롯한 가족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다고 했고요. 또 안타깝게도 선교사를 준비하던 동생이 2014년에 2월 16일에 이집트에서 있었던 이스람 무장세력의 폭탄테러로 사망하게 된 이야기도 있습니다. 제가 좀 단순화 해서 이분이 목사가 된 과정을 얘기했지만요. 참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을 통과하면서 지금의 목회의 길을 어렵게 갈 수 있었음을 알게되었는데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하나님이 참 놀라운 분이시다라는 생각이요. 어찌보면 교회의 어두운 면으로 불신자가 되거나 상처받아서 교회를 반대할 사람이 될 뻔한 한 사람을 구원하시고자 그를 목회자로 만들어가시는 과정이 너무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그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이야기 곧 바디매오의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해요. 어찌보면 바디매오가 그런 사람일 수 있죠. 맹인에다가 거지였던 그의 삶, 비천하다 못해 부정적으로 일그러진 그의 삶을 예수님이 구원해 주셨고 그를 통해 새로운 삶을 살게 해주셨으니 말입니다.
그러면서 깨닫게 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말입니다. 세상에 있는 훌륭한 사람들만 구원하시는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깨지고 상하여 울분에 차고 악해진 우리에게도 자비를 베푸시며 구원하시니 말입니다. 저는 우리가 이 사랑과 이 은혜를 기억하며 신앙생활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대단히 잘나고 믿음이 좋아서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에게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었겠지만요. 우리의 열심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과 사랑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 은혜를 깨닫고 산다면, 오늘 우리의 삶은 새로와 질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바라건대, 오늘 우리가 주님의 은혜 받은 자임을 기억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주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 이를 통해 깨닫고 주님의 길을 따를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합니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