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위한 지식인가

고린도전서 강해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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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421장 “내가 예수 믿고서”
고린도전서 8:1-13
“무엇을 위한 지식인가?”
2024. 10. 25
조 정 수
할렐루야. 오늘 본문을 놓고 “무엇을 위한 지식인가” 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지난 시간까지는 결혼문제에 대해서 답변한 내용이었다면, 오늘 본문부터는 이제 전혀 다른 문제에 대해서 다루기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의 문제는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되냐, 안 되냐의 문제예요.
여러분,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됩니까, 안 됩니까? 당연히 안 되죠. 이것은 사실 고민할 문제도 아니에요.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은 먹으면 안 됩니다. 사도행전 15장을 보면, 예루살렘 교회에서 회의를 통해, ‘우리가 우상의 제물을 먹지 말자’ 라고 결론을 내렸어요.
사도행전 15장은 바울과 형제들 사이에서 이방인의 할례 문제에 대하여 변론하는 내용이거든요. 이방인들도 할례를 해야 되냐, 말아야 되냐. 이 문제를 가지고 예루살렘 교회에서 회의를 한 거예요. 이 회의 결과,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하지 말자, 라고 했어요. 할례받는다고 구원 받는 게 아니니까, 굳이 할례 받을 필요 있냐는 거죠. 우리 유대인들이야 아브라함 때부터 할례가 전통이니까, 전통을 지키는 차원에서 할례를 하지만, 이방인들은 전통을 지킬 필요가 없잖아요. 그래서 이방인들은 할례 받을 필요가 없다고 결론을 내린 겁니다.
그리고 이때, 여기에 추가적으로 한 가지 규정을 내려요. 그게 바로 우상의 제물을 먹지 말자는 규정입니다. 이것이 사도행전 15장 20절 내용이에요. 사도행전 15장 20절에 보니까,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아멘.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하지 말자, 라고 결론을 내리면서 덧붙이는 거예요.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각 성읍에 편지를 보내자는 겁니다. 누구를 위해서? 이방인들을 위해서. 유대인들은 본래부터 이런 것은 안 먹거든요. 이방인들이 우상의 제물이며 피며 목 매어 죽인 것을 먹다보니까, 먹지 못하게 하는 거예요. 너희가 할례는 안 해도 되는데, 대신 먹는 것은 좀 분별해서 먹어라. 이런 겁니다.
자, 그렇기 때문에 고린도교회도 당연히 우상의 제물을 먹으면 안 돼요. 먹지 말자고 공식적으로 결정한 사항이기 때문에, 먹으면 교회법에 어긋나요. 그런데 고린도교회 안에, 이것을 어기고 우상의 제물을 먹는 자들이 있다는 겁니다.
분명히 이 사람들이 바울에게서 우상의 제물을 먹지 말라는 가르침을 들었을 텐데, 왜 먹을까?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고린도라는 도시의 배경을 생각해봐야 됩니다.
여러분, 고린도는요. 엄청나게 많은 신전들이 있습니다. 아프로디테, 포세이돈, 아폴로, 헤르메스, 제우스, 바커스, 아르테미스, 수많은 신의 신전이 고린도에 밀집되어 있어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들 중에, 이름값이 좀 있다 하는 신들은 다 신전이 있는 거예요.
이 신전들이 고린도의 시장 골목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장에서 파는 고기들은 거의 대부분이 먼저 신전에 바쳐져요. 왜냐하면, 먼저 신전에 바쳐서 신의 은총을 받게 하려고. 채소들은 그렇게 안 해요. 고기만 그렇게 하는 겁니다. 가축을 먼저 신전에 바쳐서 제사를 하고, 그 뒤에 고기를 시장에 유통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린도에서는, 고기를 먹으려면 어쩔 수 없이 신전에 한번 들어갔다 나온 고기를 먹을 수밖에 없어요. 그런 것밖에 안 파니까. 만약에 신전에 안 들어간 깨끗한 고기를 먹고 싶다, 그러면 자기가 직접 가축을 키워서 먹어야 돼요.
그렇다보니까, 고린도교인들이 시험이 드는 겁니다. 고기는 먹고 싶은데, 먹자니 신앙 양심에 걸려요. 또 안 먹자니, 고기맛이 그리워.
그런데 이때, 아무렇지 않게 고기를 먹는 사람들이 있더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그냥 막무가내로 먹는 게 아니에요. 나름대로 논리가 있어요. 오늘 본문 4절이 그 논리인데요. 4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다. 오직 신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 그러니까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것이 이 사람들의 주장이에요. 하나님 외에는 신이 없는데, 그러면 고기가 신전에 들어갔다 와도, 어차피 신전에 신이 없으니까 깨끗한 거 아니냐. 그냥 고기가 신전탐방 한번 하고 온 거니까, 먹어도 된다. 이런 말이에요.
말은 맞는 말이죠. 하나님 외에는 신이 없으니까, 내가 그렇게 믿고, 또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면, 먹을 수도 있어요. 바울도 그것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밑에 5절과 6절에서 그들의 의견에 동의를 해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상의 제물을 마음대로 먹어도 된다고는 하지 않습니다.
자, 7절을 봐 볼까요? 7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아멘.
바울은 이 지식이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을 합니다. 이 지식, 이것은 하나님 외에는 신이 없고, 모든 우상은 다 아무 것도 아니라는 지식이죠. 이 지식을 가진 사람은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괜찮아요. 하지만 이 지식이 없는 사람은 신앙에 타격을 받는다는 겁니다.
고린도교인들은 대부분 고린도에서 태어나서 고린도에서 평생을 살았어요. 온갖 신전들이 둘러싸고 있는 곳에서 자연스럽게 신들의 존재를 믿으면서 자랐습니다. 그들이 지금은 크리스찬이 됐지만, 그들에게 저 신들이 다 가짜라고 말을 해도, 그 말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걸려요. ‘내가 어려서부터 제우스 신을 믿고, 해마다 신전에 가서 제사도 드리고 했는데, 이게 다 가짜라고?’ 쉽게 받아들여지지가 않습니다. 이것은 세계관이 통째로 뒤바뀌는 문제예요. 이게 바뀐다는 게 쉬운 게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나라도 보면요. 숫자 4를 불길하게 여기는 미신이 있죠. 숫자 4가 죽을 사 자를 연상시킨다고 해서, 건물 층수를 4층으로 안 써놓고, 알파벳 F를 써놔요. 영어 포의 앞글자 F를 써놉니다. 아니, 4라고 쓰면 건물이 무너집니까? 4를 4라고 못 쓰고 왜 F라고 써노냐고요.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날에도 이런 미신에 사로잡혀 있어요. 기가 막히죠. 여러분, 오늘날에도 이런데, 2천 년 전에는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평생동안 제우스가 있다고 믿고 살았는데, 어느날 갑자기 제우스가 가짜라고 배운다고 해서 그게 갑자기 믿어지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물론 하나님 외에 신이 없다는 것을 알기는 알아요. 하지만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른 문젭니다.
고린도교회 안에는 그것을 알고,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자들도 있지만,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자들이 훨씬 많아요. 그렇기 때문에 조심해야 됩니다. 신앙의 선배들이 하는 말 한 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후배들에게 영향을 끼칩니다.
아직까지 우상들의 존재를 믿는 후배들이 볼 때, 선배들이 아무렇지 않게 우상의 제물을 먹는 모습은 굉장히 위험해요.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을 수 있을까? 마치 두 주인을 섬기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여기다 대고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야. 이거 먹어도 괜찮아. 하나님 밖에는 신이 없어. 이거 다 깨끗한 거야. 너도 먹어.’ 아무리 이렇게 말해도 안 돼요. 그 사람들은 여전히 우상들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개념이 안 잡혔어요.
우리가 빨간색으로 이름을 쓰려고 하면 괜히 꺼림칙한 것처럼, 숫자 4를 보면 괜히 불길한 것처럼, 이 사람들도 우상의 제물을 먹으면 괜히 내 안에 우상의 기운이 들어오는 것 같은, 그런 꺼림칙함이 있단 말이에요. 이것은 배운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시간이 필요해요. 오랜 시간 신앙생활 하면서 성화되어 가다 보면, 어느 순간엔가 이런 미신과 미혹을 이겨낼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내공이 깊을 수록 조심해야 됩니다.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듯이, 신앙이 깊어질수록 겸손해야 돼요. 혹시 나 때문에 새신자들이 시험 들지 않도록, 말 조심, 행동 조심, 범사에 주의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3절에 바울이 이렇게 말을 하죠. 13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아멘.
혹시라도 나 때문에 실족하는 사람이 없도록,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는 것도 감수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믿음의 선배로서 책임감이 있다는 거예요. 우리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 자유를 스스로 제한하는 겁니다.
우리가 술 마실 수 있죠. 담배도 필 수 있죠. 술담배 한다고 천국 못 가는 거 아니잖아요. 그러나 그러한 행동 하나하나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치명적일 수 있어요. 여러분, 신앙생활은 나 혼자 하는 게 아닙니다. 함께 하는 거예요.
항상 공동체를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이 크든 작든 영향을 준다는 것을 기억하고, 신앙의 후배들이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본을 보여야 합니다.
바울은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각오까지 하잖아요. 우리도 각오하는 거예요. 내가 영원히 술을 먹지 않으리라. 내가 영원히 담배를 피지 않으리라.
내가 마시는 술 한 잔, 내가 피는 담배 한 대가 누군가의 신앙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뿐만 아니라 내가 하는 말 한 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지 않도록, 우리가 범사에 조심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 제목이 무엇이었습니까? “무엇을 위한 지식인가?” 우리가 가진 신앙 지식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교회의 덕을 세우는데 쓰여야 합니다. 결코 형제를 실족하게 하는데 쓰여서는 안 돼요.
우리는 오직 사랑으로서, 믿음의 후배들을 돌보고, 그들의 믿음이 자라도록 돕는 일에 지식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의 선배로서 내가 가진 자유를 스스로 절제하고, 범사에 조심하여서 아름다운 신앙의 본을 보이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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