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내 곁에(렘15:15-21)

예레미야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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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4년 12월 4일 수요일
제목 : 하나님 내 곁에
본문 : 예레미야 15:15-21
1. 자기연민에 빠져 살아가는 많은 크리스천들
1) 사소한 것으로부터 자기연민은 찾아올 수 있다
연말이 되면 다들 한 번씩은 해보실 겁니다. 바로 ‘한 해 되돌아보기’ 입니다. 저 역시 한 해를 되돌이켜 보며 어떤 추억들이 있었는지, 어떤 노력들을 해왔는지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툭 튀어나온 질문 하나가 꼬리에 꼬리를 물듯, 생각에 생각을 이어가게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 최선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 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면서 “나는 성장했나?” “나로 인해 마음이 어려운 사람은 없었는가?” 등등 여러 생각들이 파생되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분명 올 한해 최선을 다한 것 같고, 나름 발발거리며 뛰어다닌 것 같은데 이상하게 이룬 것 하나 없어보였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갑자기 튀어나온 이 생각 하나가 저를 공허하게 만들었고, 지치게 만들었고, 낙담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주변에서 들려오는 친구들의 소리에 마음 아파하기도 했습니다. 때론 그 말들에 마음의 상처가 생기기도 했고,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이기도 했습니다. 툭 나온 생각에 끝은 결국 “내 인생은 도대체 왜 이 모양이지?” 였습니다.
참 신기하지 않습니까? 그저 저는 올 한해를 돌이켜 보고 싶어서 기쁜 마음에 생각하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저는 자기연민에 빠져 원망과 적대감이 이루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 보니 자기연민이란건 어쩌면 특별한 트리거가 있어 시작되는 것이 아닌, 아주 사소한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어떠십니까? 자기연민에 있어 얼마나 자유하고 계십니까?
2. 자기연민에 빠진 예레미야
1) 예레미야의 상황은 결코 사소하지 않았다
오늘 본문은 예레미야의 고백이라 알려져 있지만, 사실 예레미야 입장에서 본문을 보면 탄식이나 절규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 예레미야는 지금 자기연민에 빠져있구나!’ 라는 사실도 곧장 알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도 저와 같이 사소한 것으로부터 자기연민에 빠지게 된 걸까요? 먼저는 그가 활동할 당시로 상황을 보아야 합니다. 그가 활동할 당시 남유다의 왕은 바로 ‘요시야 왕’ 이었습니다. 그는 어떤 왕 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며 율법에 순종하며 살아간 선한 왕 중 하나 아닙니까? 덕분에 백성들 역시 하나님을 찬양했고,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 살아냈습니다.
하지만 요시야 왕이 이른 나이에 죽자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은 거짓말같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있어야 할 자리에 우상들이 자리 잡았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선지자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그는 순종했습니다. 그들이 다시 하나님께 돌이키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비록 조롱과 핍박, 모진 고난에도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습니다. 때론 돌이키지 않는 백성들을 바라보며, 심판이 다가올 자신의 모국을 생각하며 예레미야는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선포는 끝내 백성들을 회개로 이끌어내지 못했습니다. 그저 돌아오는 것이라곤 조롱과 핍박, 폭력 뿐이었습니다. 기나긴 세월을 예언자로 살았지만 뚜렷한 성공 하나 없는 삶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삶은 외롭기까지 합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레미야 16장 1장과 2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 너는 이 땅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며 자녀를 두지 말지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더니 위로나 격려를 허락하시는 것이 아니라 결혼 금지령을 내리십니다. 이미 충분히 삶이 고달픈데도, 이미 충분히 외로운데도 하나님은 더 외롭고, 더 고독한 길로 예레미야를 내몰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15장 10절, “내게 재앙이로다 나의 어머니여 어머니께서 나를 온 세계에 다투는 자와 싸우는 자를 만날 자로 낳으셨도다 내가 꾸어주지도 아니하였고 사람이 내게 꾸이지도 아니하였건마는 다 나를 저주하는도다
이 모습을 보며 감히 어느 누가 예레미야 역시 사소한 것으로부터 자기연민에 빠졌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삶이 어찌 흔하고 사소한 삶입니까? 결국 자기연민은 사소한 것으로부터 빠지게 될 수 있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럼 도대체 왜 예레미야는 자기연민에 빠지게 되었을까요?
2) 도대체 왜? 예레미야는 이 상황을 견딜 힘이 없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부르시기로 작정하셨던 때로 돌아가봅시다. 1장 5절,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태초에 선지자로 부르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 역시 그 부르심에 순종하며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그는 알았습니다. 또 그렇게 살았습니다. 선지자로써의 삶을 말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레미야가 부르짖는 겁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존재 가치에 대한 부정이 일어난 겁니다. 태어나면서 맡겨진 그의 사역에 지금 환멸을 느끼고 있는거예요. 왜요? 내 사역에 돌아온 결과가 조롱이고 핍박이고 저주였기 때문입니다.
혹시 이 중에 조롱 한 번 안당해본 분 계십니까? 혹시 이 중에 누군가의 미움 한 번 받아본 적 없으신 분 계십니까?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조롱이든, 미움이든 이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니, 고작 미움과 조롱 좀 당했다고 저렇게까지 울부짖을 수가 있나?’ 라며 예레미야를 바라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레미야는 젊어서부터 선지자로서 부름 받아 사역의 길을 걸었고, 아무도 듣지 않고 오히려 조롱과 핍박으로 대응하는 메세지를 무려 30년을 전했습니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이들은 30년째 요지부동인 겁니다.
상상해 보십쇼. 우리가 무언가 일을 진행함에 있어 충분한 설명과 지원을 받아 시작했는데, 그 일이 30년간 발전이 없습니다. 주변의 시선도 곱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미련하다고 말합니다. 누군가는 실패한 인생이라 말합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어느 누가 맨정신에 이 어려움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절망 속 예레미야의 절규는 16절과 17절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 내가 기뻐하는 자의 모임 가운데 앉지 아니하며 즐거워하지도 아니하고 주의 손에 붙들려 홀로 앉았사오니 이는 주께서 분노로 내게 채우셨음이니이다
그도 압니다. 분명 하나님의 부르심이 자기에게 기쁨이었음을,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다하는 것이 분명 즐거움이었음을 그는 알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고백처럼 ‘만군의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일하실 것을 기대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 예레미야의 상황은 이 사명을 더이상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더이상 선포하는 것은 고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예레미야는 환멸에 빠지게 됩니다.
예레미야가 자기연민에 빠지게 된 것은 결국 이겁니다. ‘이 상황을 견딜 힘이 더이상 남지 않은’ 겁니다. 더이상 예레미야는 견딜 힘이 없습니다. 더이상 하나님의 메세지를 전하는 것은 치가 떨리는 고통이 되었습니다.
3. 회복하시는 하나님
1) 회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환멸과 자기연민에 마음 속 분노와 원망, 허망함이 가득한 예레미야에게 이제 하나님은 ‘회복’이라는 일을 진행하기로 하십니다. 19절 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이끌어 내 앞에 세울 것이며 ..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행한 첫번째 회복은 ‘회개’였습니다. 아주 당연한 겁니다. 어떤 문제든 하나님께 돌아가야 회복은 시작됩니다.
그런데 특이점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회개하라!’ 강하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만일’이라는 표현을 붙여 사용하셨다는 겁니다. 언뜻 보기엔 회개가 마치 선택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정말 회개는 선택일까요?
하나님은 뒤이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네가 만일 헛된 것을 버리고 귀한 것을 말한다면 너는 나의 입이 될 것이라 그들은 네게로 돌아오려니와 너는 그들에게로 돌아가지 말지니라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향해 ‘만일’이라는 부드러운 표현을 사용하셨지만, 사실 예레미야가 말한 모든 것을 헛된 것이라 말하며 돌이킬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드셨습니다. 다시 말해, 회개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는 겁니다.
예레미야가 돌이켜야 할, 그의 헛됨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선지자로 부르셨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다는 겁니다. 나의 30년은 헛되다 말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일하심에 헛됨이 어딨습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에 헛된 것이 어딨습니까? 5만번의 기도응답을 받은 조지 뮬러를 다들 잘 아실 겁니다. 저는 뮬러의 기도응답 중에 잊지 못할 기도응답이 있습니다.
그에겐 자신의 삶을 함께 한 다섯 명의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의 기도와 전도로 세 명의 친구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지만, 두 명의 친구는 끝까지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노년이 되어 병석에 누워있을 때, 그는 자신에게 곧 다가올 설교가 마지막임을 알았습니다. 주일이 되자 그는 강단에 섰고, 마침 한 친구가 교회를 지나다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그의 설교로 한 친구가 회개하고 예수를 믿기 시작합니다.
시간이 흘러 세상을 떠날 때, 끝내 남은 한 친구의 구원을 보지 못했지만 그의 마지막은 끝까지 기도응답이었습니다.
그러던 그 해, 남은 한 친구가 ‘날 위해 무려 52년간 뮬러가 기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운명의 장난일까요? 뮬러의 남은 마지막 기도응답은 그가 세상을 떠나자 이루어졌습니다.
그에게 52년, 얼마나 길고 긴 싸움이었겠습니까? 그에게 52년이 헛된 시간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에게 52년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시간이었습니다. 뮬러는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반드시 들으시고 역사하시어 일하실 것이라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해 나아간 것입니다.
여러분, 예레미야의 30년이 헛된 시간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일어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런 시간을 예레미야는 헛되다 말하니, 하나님 입장에서 당연히 먼저 행해야 할 회복의 첫 걸음은 ‘회개’였습니다.
2) 사랑, 그들을 용서하라
회개로 하나님 앞에 나아간 예레미야를 향해 허락하신 회복의 두 번째 스텝은 ‘용서’ 입니다. 20절과 21절입니다. “내가 너로 이 백성 앞에 견고한 놋 성벽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너를 칠지라도 이기지 못할 것은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하여 건짐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내가 너를 악한 자의 손에서 건지며 무서운 자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하나님은 이제 예레미야에게 ‘너를 조롱하고 너를 핍박하는 자들을 용서하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예레미야를 위로하십니다. ‘그들이 너의 마음을 아무리 힘들게 해도, 너의 삶을 그들이 아무리 어렵게 해도 그들이 널 이길 수 없어. 왜냐하면 내가 너와 함께 하기 때문이야.’
구약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대적들을 향해 용서하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는 용서를 넘어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44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원수를 어떻게 하라 하십니까? 사랑하랍니다. 왜요? 나를 조롱하고, 나를 핍박하고, 나를 미워하는 저들을 우리가 왜 사랑해야 합니까? 왜긴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 아닙니까?
심지어 방법도 알려주십니다. 에베소서 4장 32절,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어떻게 사랑하라 하십니까? 하나님처럼 사랑하랍니다. 하나님이 하셨듯, 우리도 그렇게 하라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용서와 사랑은 선택사항이 아니에요. 필수입니다. 예수님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불의를 당하시면서도 이렇게 기도하셨어요.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예레미야의 원망과 적대감은 그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해결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회개로 하나님 앞에 정체성을 회복한 예레미야에게 그들을 용서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마지막 회복을 허락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첫 부르심, 사명으로의 회복입니다.
4. 하나님은 늘 내 곁에 계신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 속에서도 자기연민은 파괴적 감정이며, 교회 안에서는 너무 큰 장애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자기연민에 빠지는 크리스천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사역을 하면서도, 봉사를 하면서도 가정에서, 회사에서 최선을 다하면서도 ‘나는 왜 그럴까.’ ‘내 인생은 언제부터 이렇게 망가졌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자기연민에 빠지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어떠십니까? 지금 홀로 걷는 것 같으십니까? 비참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습니까? 절망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 같습니까? 잊지 마십시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은 여러분들과 함께 하십니다.
세상이 변하고,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 곁에 계십니다. 단 한 번도 우리를 떠난 적이 없으십니다.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날마다 회복을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결단찬양 및 기도]
1. 진리 D + 아 하나님의 은혜로 D(후렴)
- 아픔이 있습니다. 고난이 있습니다. 도대체 왜 내 삶은 다른 이들처럼 행복할 수 없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렇게 환멸과 원망과 자기연민에 빠진 우리의 삶을 주님 앞에 모두 고백하며 나아가길 소망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며 열심히 일하지만 병들어 허우적 거리는 우리의 삶이 아닌,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며 변치 않는 사랑으로 회복하시는 하나님 손 붙들고 나아가는 우리 되게 하소서. 주님! 진리되시는 하나님 손 붙들고, 그 은혜로 살아가는 우리 되게 하소서.
- 예레미야는 절망 중에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습니다. 어쩌면 그에게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희망의 끈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무언가’를 기대했는지도 모릅니다. 주님, 바라옵기로는 우리 또한 절망 속에서도 한 줌의 희망을 세상이 아닌 하나님께 두는 우리 되게 하소서. 우리의 가정이, 우리의 자녀가 어두워져 가는 이 세상을 살아가며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시어, ‘내가 너와 함께 한다.’ 말씀하시는 하나님만 의지하여 기도하는 우리 가정과 자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2. 그리스도의 계절
- 우리 나라를 위해 함께 마음모아 기도하길 소망합니다. 주님. 혼란스러운 때를 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참으로 복잡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 지금의 때를 외면하기보다 진심으로 기도하는 우리 되길 소망합니다. 위정자들의 잘잘못을 따지며 옳고 그름을 논하는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보호하심 가운데 이 나라가 회복되어지며 민족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갈등이 아닌 용서와 사랑이 임하는 나라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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