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환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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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13 바리새인들이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언하니 네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도다
1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도 내 증언이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15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
16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17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언이 참되다 기록되었으니
18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느니라
19 이에 그들이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20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헌금함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서론
맹인모상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옛날 인도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옛날 한 왕이 진리에 대해 말하다가 신하를 시켜 코끼리를 한 마리 몰고 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눈이 보이지 않는 맹인들을 여섯 명을 불러 손으로 코끼를 만져 보고 각기 자기가 알고 있는 코끼리에 대해 말해 보도록 하였습니다. 먼저 코끼리의 상아를 만진 맹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폐하, 코끼리는 무같이 생긴 동물입니다.” 그러자 귀를 만졌던 맹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폐하 코끼리는 곡식을 까는 키같이 생겼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코끼리의 다리를 만진 맹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둘 다 틀렸습니다. 코끼리는 커다란 절구공이같이 생겼습니다.” 이 외에도 등을 만진 사람은 평상같다고 우기고, 배를 만진 사람은 장독같다 우기며, 꼬리를 만진 사람은 굵은 밧줄같이 생겼다고 외쳤습니다. 재밌지 않습니까? 눈이 보이는 사람은 코끼리의 모양을 알텐데 눈이 보이지 않는 이들은 코끼리의 모습을 알지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와 같은 이들이 등장합니다. 어떤 이들이 이런 맹인과 같은지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론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빛이십니다. 빛의 반대말은 무엇일까요? 바로 어둠입니다. 빛이 비추면 어둠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명확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빛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 자신이 LED가 되신다는 소리일까요?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후레쉬를 하나씩 주신다는 의미일까요?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빛은 생명을 뜻합니다.
빛이 생명이라… 잘 이해가 되지 않으실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태양빛으로 인해 식물들이 자리고 그것때문에 먹고 살기는 합니다. 빛이 없으면 지구가 차가워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태양빛으로 인한 부가적인 효과입니다. 여기서 빛이 없으면 죽으시는 분이 계십니까? 산소나 물과 같이 일주일 이상 빛을 안 받으면 죽으시는 분 있으시면 손을 들어주십시오. 그렇습니다. 아무도 없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빛이 생명이라는 뜻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제가 방금 말한 어둠과 같이 연결해서 생각해야 봐야 하는 것입니다. 자 빛은 생명입니다. 빛의 반대말은 어둠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생명의 반대말은 어둠이라는 것입니다. 생명의 반대말은 무엇이죠? 그렇습니다. 사망입니다. 죽음이죠. 어둠과 사망은 모두 생명의 반대말입니다. 즉, 오늘 본문에서 사망과 죽음은 어둠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말씀을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12절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세상의 생명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사망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즉, 예수님의 말씀을 무엇을 뜻하냐.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죽음에서 돌아다니지 않게 될 것이란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죽음에서 돌아다닌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영적 죽음을 의미합니다.
영적 죽음이란 무엇이냐? 말 그대로 내 영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내 영에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쓰시는 티비나 컴퓨터 혹은 냉장고 등을 생각해보십시오. 전기가 연결되지 않으면 쓸 수 없는 물건들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영은 심장이 뛰고 뇌가 생각을 한다고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어야 그 영이 살아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대해 아신다면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았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이자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죄란 하나님을 우리가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떠나는 것들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죄로인해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났고 모두 영이 죽은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냉장고와 같은 전자제품이 전기 코드를 뽑아벼려 멈춰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영적 죽음을 오늘 말씀은 어둠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왜 많은 비유 중에서 굳이 어둠이라는 비유를 사용한 것일까요? 그것은 오늘 말씀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하나님을 죄 가운데 거하는 사람들의 상태를 설명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영적 맹인이라는 사실을 말씀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어두우면 어떻습니까? 안 보입니다. 빛이 하나도 없으면 하나도 안 보입니다. 그것이 죄인의 상태입니다. 우리 몸의 눈으로는 보고 있어도 영의 눈으로는 하나도 못지 못합니다. 아무 것도 분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인들의 모습이 오늘 본문의 바리새인들의 모습입니다. 본문의 바리새인의 모습을 살펴봅시다.
오늘 본문의 바리새인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거짓말을 말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이 맞다고 해줄 증인이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육체를 따라 판단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바리새인들이 영이 아닌 육체로만 보고 있음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누가 보내셨고 어디로 가셨습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영이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영의 눈으로 보지 못하고 육의 눈으로만 보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알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영으로 보지도 못하면서 예수님이 하시지 않는 판단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판단은 ‘크리노’로 재판에서 판결하다의 의미를 뜻합니다. 그들은 영으로 보지도 못하면서 남들의 죄를 지적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심판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판단하시지도 않지만 만약 판단하더라도 자신은 옳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항상 하나님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예수님과 함께 하시고 예수님의 말씀이 옳다 증언해주십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율법의 기준에서도 참되신 분이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죄로 인해 영의 눈이 단단히 닫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어디있느냐?라며 찾습니다. 즉, 영이신 하나님이 아닌 눈으로 보이는 사람을 찾은 것입니다. 이러한 이들에게 예수님은 “너희들이 하나님을 모른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빛인 것도 모르는 영적으로 눈이 안 보이는 맹인이 영이신 하나님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영적 맹인이 아닌가 볼아봐야 합니다. 아직도 죄 가운데 거허고 있지 않는지 돌이켜 봐야 합니다. 하나의 예외도 없이 온 세상은 죄라는 어둠으로 덮혀있습니다. 많이 공부한 사람, 착한 사람, 열심히 수련한 사람, 특별한 은사가 있는 사람 모두. 사람은 모두 죄로 눈이 가려져 있는 맹인입니다. 기껏해봐야 육체에 있는 눈으로만 볼 수 있고 영의 눈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은 어떤 결과를 낳느냐 바로 진리를 모르고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모르게 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무엇이 위험하고 무엇이 위험하지 않은지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지금 만지는 것이 위험한 고압 전선인지 허리띠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내가 지금 가는 길로 쭉가면 안전한 집이 나오는지 아니면 빠져죽을 수 있는 안양천이 나오는지 알 수 있습니까? 눈이 보이지 않으면 그것을 구별할 수 없습니다. 청각, 촉각, 후각으로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어도 결코 완전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영의 눈이 보이지 않는 것도 그러합니다. 무엇이 내 영혼을 죽이는지 무엇이 내 영혼을 살리는지 알 수 없습니다. 도덕과 양심이라는 것을 통해 어렴풋이는 알 수 있지만 결코 완전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내 영혼과 삶이 파멸과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지도 모르고 계속해서 그 모양, 모습 그대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따를 때는 달라집니다. 영의 눈이 열리고 죄로 덮힌 세상이 환하게 비추어집니다. 무엇이 나를 죽이고 무엇이 나를 살리는지 명확하게 알게 됩니다. 그래서 살 수 있는 길로 온전히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생명의 빛은 예수님을 따를 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배우는 자, 예수님께 헌금하는 자, 예수님께 기도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고 배우고 믿습니다. 그래서 왜 안 믿어질까만 고민합니다. 성경의 놀라운 기적이 그냥 철썩 같이 믿어지기만 하면 이루어지고 구원받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그래 그건 실제로 있는거야, 그 말이 맞아 그렇게 될거야”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어떠한 사실에 대한 머리로 동의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란 오늘 말씀처럼 예수님을 따라사는 순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46을 살펴볼까요?
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오늘 말씀과 비슷하죠? 그런데 차이점은 여기서는 ‘믿는 자’로 표시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오늘 본문에선 어떻죠? ‘따르는 자’로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계속해서 강조하는 사실이지만 믿음이란 곧 무엇이냐 실질적인 실천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간단합니다. 예수님처럼 사는 사람에게는 생명의 빛이 주어집니다. 내 영의 눈을 가리고 있는 죄의 어둠이 사라지고 활짝 열린 영의 눈으로 나를 죽일 만한 것을 피하고 살아갈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어떻게 살아야 예수님을 따라 사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많은 것을 예수님을 따라 살아야 하지만 오늘은 간단하게 한 가지만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6절에서도 그러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항상 하나님과 함께 하셨습니다.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그분께 순종하였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과 함께 하기 위해선 두 가지 실천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먼저 하나님 사랑이란 성령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성령님과 매일 매일, 매순간 대화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도와 예배, 말씀 묵상 등으로 이루어집니다. 단순히 기도하는 행동, 예배 시간 지켜서 앉아 있기, 그냥 성경 말씀 글씨만 아무 생각 없이 읽기, 설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기가 아니라 성령님과 그 시간에 대화를 해야 합니다. 대화란 무엇입니까? 양쪽의 의사소통입니다. 한쪽이 자기 말만 막하다가 끝내는 것은 대화가 아닙니다. 내 말을 하고 상대의 말을 듣는 것이 대화입니다. 기도와 예배와 말씀 묵상 중에 (마이크 가져다 대면서) ‘단이야~’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만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오늘 나에게 어떤 마음과 감동을 주실까? 내가 나를 열받게 하는 저 사람에게 어떻게 해야 할까? 내 생각에서 어떤 것을 고치시기를 바랄까?를 깨닫는 것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나머지 하나의 실천도 가능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기 위한 두 번째 실천은 바로 이웃 사랑입니다. 어찌보면 우리가 가장 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말씀만 가르치시지 않았습니다. 기도하고 예배만 드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 가난한 자, 마음이 상한 자들에게 다가가셔서 위로하시고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을 따라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제일 필요한 것이 첫 번째로 이야기한 성령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는 인간적인 마음으로 사랑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나한테 잘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시지 않았습니다. 원수, 꺼리는 사람을 예수님은 사랑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내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기준으로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람에게 가서 예수님처럼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들의 말을 들어주고, 마음을 이해해주고, 만약 물질적인 필요가 있다면 채워줘야 합니다. 그 사람이 그 과정에서 나를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하더라도 성령님이 시키실 때까지는 끝까지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런데 또 중요한 것은 성령님이 멈추라고 하실 때는 바로 멈춰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처음은 성령님의 인도로 시작했지만 어느 순간 내 인간적인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항상 첫 번째로 말한 것처럼 기도로 성령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그 인도를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여러분,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맹인으로 살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죄로 인해 자기도 모르게 영의 맹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보지도 못하면서 보고 있다고 착각하고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벗어나야 합니다. 오늘 말씀의 역사가 내게 있기를 바래야 합니다. 내가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따라서 생명의 빛을 얻어야 합니다. 죽음에서 벗어나고 내가 살아갈 길을 정확히 알고 선택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 사랑의 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축복교회 여러분. 이제는 보이지도 않으면서 본다고 착각하는 어리석은 삶에서 벗어나서 진정으로 영의 눈이 열리고 예수님을 따라사는 귀한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