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오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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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오해했습니다
[서론]
질문 하나 던지겠습니다.
장로인 외과의사 선생님이 있습니다.
이 분은 새벽예배를 빠지지 않고 나오시며 주일 예배도 평생 빠진 적이 없습니다.
주일에도 늦게까지 교회봉사하느라 저녁 무렵에야 집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목회자뿐만 아니라 성도분들도 신뢰하고 좋아하는 분이셨습니다.
또 다른 한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은 시장에서 작은 구멍가게를 운영하시는 분입니다.
하루 종일 일하시느라 새벽예배에 나갈 시간이 없습니다.
토요일까지 일하다보니 주일예배도 오전 예배만 겨우 드리고 나머지 시간은 집에서 쉬시는 분이셨습니다.
누가 과연 천국에 갔을까요?
천국에 갔더니 시장에서 작은 구멍가게 운영하시는 분은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교회봉사하던 외과의사 장로님은 안 보이셨습니다.
사람들이 천국과 지옥에 가면 항상 놀라게 된다고 합니다.
천국에서는 “아니 이 사람이?”라며 놀라고, 지옥에서는 “아니 이 사람도”라며 놀란다는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의 운명을 가른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저 믿음의 고백이 부족해서 일까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많이 오해하고 있는 교리가 있습니다.
바로 ‘이신칭의’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구원은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얻는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 뒤에는 행위로 상급을 쌓을 일만 남았다고 여깁니다.
심지어 어떤 분들은 열심히 상급을 쌓은 사람은 스카이 캐슬에서 살고, 상급을 쌓지 않은 사람은 부끄러운 구원을 얻어 다리밑에서 거지처럼 살게 된다고 믿기도 합니다.
과연 다리밑이 천국일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분명 구원은 믿음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결코 그 구원은 완전하거나 완성된 상태가 아닙니다.
구원은 반드시 삶으로 증명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만약 구원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이기에 결코 구원받았다고 말할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고백때문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그 결과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진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고백이 아니라 우리의 삶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교회를 열심히 다녀도, 아무리 예배를 많이 드려도, 아무리 교회 봉사를 많이 해도, 아무리 믿음을 많이 고백해도 삶이 믿음을 증명하지 못하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볼 아모스서 4장 4절부터 13절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며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 가르쳐 줍니다.
[본론1]
오늘 말씀은 충격적인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아모스 4장 4-5절입니다.
“너희는 베델로 몰려가서 죄를 지어라. 길갈로 들어가서 더욱더 죄를 지어라. 아침마다 희생제물을 바치고, 사흘마다 십일조를 바쳐 보아라. 또 누룩넣은 빵을 감사제물로 불살라 바치고, 큰소리로 알리면서 자원예물을 드려 보아라. 이스라엘 자손아, 바로 이런 것들이 너희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냐?”주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다.
여기서 베델, 길갈은 당시 제사의 중심지 입니다.
이곳에 사람들이 모여 제사를 주로 드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곳에 가서 죄를 지으라고 하십니다.
아침마다 희생제물을 바치고, 사흘마다 십일조를 바치는게 왜 죄인가요?
매우 경건하고 헌신적인 행동으로 보입니다.
아침마다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새벽예배를 매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십일조를 한달도 아닌 사흘마다 바친다면 이는 엄청난 열심입니다.
감사제물, 자원예물 모두 정성과 헌신의 표시입니다.
이게 왜 죄입니까?
혹시 정성이나 마음이 부족해서 하나님이 화가 나신 것일까요?
아니면 형식적인 예배이기 때문일까요?
누군가 매일 새벽예배를 드린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매 예배마다 헌금을 드리고 십에 일조가 아니라 십의 오조를 드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그의 정성이 부족하다고 말할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하나님께 칭찬받을 일이 아닐까요?
그러나 하나님이 문제 삼으시는 것은 예배 자체가 아닙니다.
혹은 예배 방법이 잘못되어 죄를 짓게 된다는 말도 아닙니다.
그들의 정성이나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단서는 4절 뒷부분에 있습니다.
“너희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냐?
주어가 하나님이 아니라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좋아하고 만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의 문제는 예배 자체가 아닙니다
그들 자체가 문제입니다.
그들이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들 자체가 문제라서 그들이 드리는 어떤 예배나 헌신도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죄를 더하는 꼴이 되고 맙니다.
더러운 손에 오염된 음식은 어떤 값비싼 음식일지라도 먹을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본론2]
그럼 그들의 무엇이 문제일까요?
앞 단락을 봐야 합니다.
4장 1절입니다.
그들의 삶이 문제입니다.
그들을 바산의 암소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산 지역은 굉장히 풀이 잘 자라는 지역입니다.
그래서 그곳의 암소는 매우 기름지고 살쪄있습니다.
이런 기름지고 살찐 바산의 암소를 이스라엘 백성들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물질적 풍요와 번영으로 교만과 자만으로 가득찬 상태를 의미합니다.
단적으로 부유층 여성들의 삶이 그것을 대변합니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빈궁한 사람들을 짓밟습니다.
그런 그들이 베델과 길갈에서는 정성껏 예배를 드립니다.
그들은 예배에서 이렇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저희 가족이 이렇게 잘 먹고 잘 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높은 지위에 오르고 성공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엊그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무시했습니다.
회개합니다.
어떻습니까?
이런 기도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모습 아닙니까?
이런 정도의 기도는 하지 않습니까?
그럼 여기서 대체 무슨 문제가 있을까요?
이쯤되면 예배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한번 점검해봐야 합니다.
우리는 왜 예배를 드리는 것일까요?
예배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합당한 반응은 예배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예배는 단지 주일예배나 예배 의식만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삶 전체로 드리는 예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의식으로써의 예배가 삶의 예배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 예배는 실패한 예배입니다.
과녁을 맞추지 못한 화살과 같은 예배입니다.
그럼 우리가 드리는 주일예배는 어떻습니까?
과연 마음을 다해 정성을 다해 드리고 있습니까?
스스로 확신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삶의 예배는 어떨까요?
정말 삶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수 있을까요?
쉽게 말하기 어렵습니다.
항상 부족하다고 느끼기 마련입니다.
목사인 저도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예배도 하나님이 받지 않으실까요?
이스라엘의 예배와 우리의 예배는 무엇이 다를까요?
[본론3]
6-11절입니다.
여기에는 다양한 재앙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을 보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재앙이라는 것은 평소와 달리 갑자기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런 재앙들을 통해 돌이킬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첫번째 하나님은 먹거리를 떨어지게 하십니다.
잘먹고 잘살던 사람들에게 갑자기 기근이 닥친 것입니다.
이런 일이 갑자기 일어나면 뭔가 깨닫지 않을까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깨닫지 못합니다.
두번째 추수를 앞두고 비를 내리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 땅은 천수답입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수 없는 땅입니다.
그래서 비가 엄청 중요합니다.
항상 오던 비가 오지 않으면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깨닫지 못합니다.
세번째 잎마름병, 깜부기병, 메뚜기 등을 보내셨습니다.
한해 농사를 다 망치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깨닫지 못합니다.
네번째 전염병과 전쟁입니다.
앞서 일어난 일들은 자연적 재앙이라면 이제부터는 사회적 재앙입니다.
전염병과 전쟁은 구약에서 기근과 함께 3대 재앙으로 꼽힙니다.
전쟁이 일어나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죽고 말들이 약탈당합니다.
이와 함께 전염병도 발생합니다.
이스라엘 온 동네에 죽음의 냄새가 가득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깨닫지 못합니다.
마지막 다섯번째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입니다.
점점 재앙이 심해지더니 이제 절정에 달합니다.
소돔과 고모라처럼 불을 보내셔서 완전히 다 태워버리십니다.
그래서 마치 불구덩이에서 끄집어낸 나뭇조각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거의 망한 것입니다.
그러면 깨달을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닙니다.
어쩜 이렇게 어리석고 고집이 셀까요?
다섯번의 재앙들마다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어구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입니다.
재앙은 오히려 그들에게 기회였음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그들의 예배를 받지 않으시는 이유가 더욱 분명해 집니다.
단지 그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문제는 수많은 기회를 주었는데도 죄에서 돌이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눈과 귀를 가리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습니다.
입으로는 회개합니다.
그러나 실제 삶은 변화되지 않습니다.
회개는 단지 자신들의 죄책감을 털어내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예배는 어떻습니까?
삶이 온전하지 않다고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를 받지 않으시는게 아닙니다.
죄를 짓는다고해서 우리의 예배를 거절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그 죄를 깨닫고 진실로 돌이키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입으로 회개는 하지만 삶에서 돌이키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뜻을 드러내십니다.
예배와 말씀 그리고 고난과 같은 도구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수단들은 마치 거울과 같아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합니다.
이를 통해 내 삶의 무너진 영역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그러나 죄에서 돌이키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가 없는 예배를 하나님은 받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본론4]
그럼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차례 재앙을 겪고도 깨닫지 못한 것일까요?
놀랍게도 그 이유는 그들의 종교적 열심 때문입니다.
수많은 예배와 종교적 헌신이 그들의 눈과 귀를 가린 것입니다.
그들을 착각에 빠지게 만든 것입니다.
이 상황을 비유로 설명하겠습니다.
음식이 상하기 가장 좋은 곳이 어디일까요?
사람들은 보통 습하고 더운 장소를 떠올립니다.
그러나 답은 냉장고 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음식이 상해 가장 많이 꺼내는 곳이 어디입니까?
바로 냉장고 입니다.
왜 그럴까요?
냉장고 안에 있는 음식은 상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냉장고 안이 안전한 장소라고 믿는 그 확신이 오히려 음식을 상하게 만드는 원인이 됩니다.
그래서 음식이 상했어도 우리는 쉽게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우리의 영적 상태도 그렇습니다.
열심히 예배드리고 헌신하면 그것이 우리를 구원해줄 것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점점 종교 중독에 빠져 그 열심 자체를 사랑하며 스스로 만족하게 됩니다.
결국 삶이 어떻든지 구원은 보장된 것이라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잘못된 믿음은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점점 멀어지게 만듭니다.
물론 열심히 예배드리고 헌신하는 것 자체가 문제인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진실하다면 왜 하나님이 그것을 싫어하시겠습니까?
그 진실함을 증명하는 게 바로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진실함과 변화가 없는 그 어떠한 예배도 무의미합니다.
단순한 종교적 행위일 뿐입니다.
실제 삶에서 돌이키지 않는다면 그 예배는 오히려 하나님을 거역하는 행위가 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끝까지 돌이키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12-13절입니다.
하나님의 최후 통첩입니다.
아무리 경고해도 말을 듣지 않으니 하나님이 직접 심판하십니다.
엄청난 재앙이 닥쳐올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그것은 나라의 멸망과 이방나라의 포로로 끌려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러한 일을 상상조차 하지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에 안주하며 하나님의 심판이 자신들에게 임할리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오해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도무지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에 신앙이 종교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마치 성전 안에만 계신 분으로 여겼습니다.
그 결과 신앙과 삶이 분리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참된 신앙이 아닌 종교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온 세상을 만드시고 통치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은 교회에만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내 집에도 계시고, 내 직장에도 계시고, 모든 삶의 자리에 함께 하십니다.
그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결코 종교적 행위로 스스로를 속이지 않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처음에 저는 장로인 외과의사와 작은 구멍가게 성도분을 비교했습니다.
그들의 운명이 엇갈린 이유는 단지 예배의 형식 때문이 아닙니다.
그 예배가 삶 속에서 어떤 열매를 맺었느냐의 차이 때문입니다.
장로인 분을 외과의사로 표현한 이유가 있습니다.
너무나 사람들을 섬길 좋은 달란트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돌팔이 의사였고, 환자들에게 더 많은 돈을 뜯어내는 의사였습니다.
교회에서는 존경받는 사람이었지만 그는 지옥에 떨어지고야 말았습니다.
반면 시장에서 장사하시는 성도분은 예배는 많이 드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평생 정직하게 장사를 하는 분이셨습니다.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빵과 과자를 정기적으로 고아원에 보내는 분이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과거 한국교회는 가난한 자들의 교회였습니다.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삶의 무게에 눌린 자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전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교회는 어떻습니까?
예배는 넘쳐납니다.
하지만 정작 예배의 열매로 나타나야 할 삶은 빈곤하고 황폐해졌습니다.
이신칭의의 교리에 갇혀 삶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삶이 없는 예배는 무의미합니다.
물론 예배없는 삶은 무기력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받으시는 예배는 삶이 되는 예배 그리고 예배가 되는 삶입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가 그런 예배가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삶 속에서 죄를 돌이켜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기뻐하시는 온전한 예배로 나아기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