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와 함께 온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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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12장 7~10절
419장/406장
인간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남이 모르는 한두 가지의 고통을 안고 삽니다. 심지어 가까운 부부 사이에도 서로 말하지 못하는 내면의 고통과 갈등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특별한 은혜를 받았던 사람이지만 남모르게 고통을 받았던 육체의 가시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 가시는 오랫동안 말하지 않던 자기만의 숨은 고통이었습니다.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러 학자들의 구구한 견해들이 있지만 어느 것 하나 결정적으로 이것이라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칼빈은 “바울 자신이 받았던 영적인 유혹, 즉 의심, 가책, 갈등 같은 것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루터는 “바울이 받았던 핍박이다”라고 해석했고, 로마 가톨릭에서는 “그가 독신 생활에서 자주 일어난 본능적인 충동”으로 보았습니다. 혹자는 “못생긴 바울의 외모에서 오는 콤플랙스였다”라고 하는가 하면, 교부 터툴리안은 “바울의 이유 없는 두통”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늘 고생하던 안질이었다”고 보는 견해를 고수하는 학자들도 많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바울을 장기적으로 끈질기게 괴롭히던 육체적인 고질병이었다는 것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가시는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작은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계속 고통과 불편을 주는 것입니다. 남이 보기에는 멀쩡한 것 같지만 속으로 앓는 것이 가시의 고통입니다.
우리 가운데에도 이런 가시를 가지고 있는 분이 많습니다. 외적인 여건으로 보아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은 분이데 항상 허약한 육체로 인하여 괴로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부모는 건강한데 자녀가 늘 병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행복해 보이는 부부 사이에도 수십 년 묵은 가시가 박혀 양편이 다 남모르게 한숨을 쉬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가시는 누구나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아마 자기 기만에 빠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지금 설교를 하는 본인에게도 이 가시가 있습니다.
가시가 주는 의미
물론 이런 가시의 고통 자체는 축복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도 그런 것을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인이 육체의 괴로움을 즐기라고 가르치는 성경 구절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가시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괴롭히기 좋아하는 사탄이 즐겨 사용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도구를 가지고 우리를 육체적으로 약하게 하여 영적으로 쓰러지게 만듭니다. 물론 하나님의 허락 안에서만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자기 영역 안에서 최대한의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우리를 시험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이 7절에서처럼 육체의 가시를 사탄의 사자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잘못하면 빠지기 쉬운 오해가 있습니다. 병은 모두 다 마귀나 귀신이 붙어서 생기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샤머니즘적인 교훈입니다. 우리 주변에 이런 잘못된 교훈을 가지고 유혹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 때문에 귀신이 붙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병든 자와 귀신 들린 자를 분명히 구별하셨습니다(막1:34).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탄이 병을 가지고 우리를 시험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누구나 병이 들면 하나님 앞에 엎드려 간구하게 됩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육체의 가시가 찌르는 아픔이 너무 괴로워서 세 번이나 특별히 기도했습니다. 아마 바울은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 번이나 하나님께 기도와 간구를 올렸던 예를 생각하고 세 번이나 진지하게 매달려서 나에게 있는 가시를 뽑아 달라고 부르짖은 것 같습니다.
기도는 정말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사랑하는 자의 기도이기 때문에 더 귀히 보십니다. 시편 저자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이 실로 들으셨음이여 내 기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셨도다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의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 (시66:19~20)
기도는 인격적인 관계를 말합니다. ‘하나님과 나’라는 두 인격이 서로 깊이 교제하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시기에 부자간의 사랑이 넘치는 교제에는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자녀는 아버지에게 자기가 원하는 것을 무엇이나 구할 자유가 있는 것이고, 아버지는 자녀의 요구를 들어줄 자유와 거절할 자유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프면 고쳐 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할 수 밖에 없습니다. 믿음이 좋은 바울 사도였지만 ,그도 육체의 고통에는 별 수가 없었습니다. 금식도 하고, 철야도 하며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는 많은 신유의 경험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병이라도 고쳐 주실 수 있다는 확신에는 전혀 흔들림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바울의 기도를 거절하셨습니다. 그에게 돌아온 것은 빈 그릇이었습니다. 만일 바울이 하나님을 자기 요구라면 무엇이나 들어주는 요술 방망이 같은 존재로만 믿었다면 빈 항아리를 안고 뒤로 자빠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빈 그릇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찾아보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빈 그릇 속을 유심히 살펴보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기도를 하는 신자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거절이 우리에게 황금의 응답이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거절하신 가운데 허락하신 하나님의 응답을 찾던 바울은 하나님의 놀라운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하나는 가시를 주신 이유와, 다른 하나는 약한 데서 강해지는 하나님의 능력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를 한 가지씩 생각해 봅시다.
첫째, 하나님이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를 남겨 두신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를 남겨 두신 이유는 너무 많은 은혜를 받은 바울이 교만의 죄에 빠지지 않도록 하신 하나님의 지혜로운 처리였습니다. 사도행전이나 서신서를 통해 보면 바울은 자아가 대단히 강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 어떤 행동을 한 사람이었는가를 보아도 알 수 있고, 믿은 후에도 교만의 티가 아직 남아 있어서 베드로를 사정없이 면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마가 요한이 저지른 단 한 번의 실수를 용서하지 못해 그의 선배요, 은인인 바나바와 결별을 선언할 정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 나오는 바울 자신의 변호 가운데 이런 강한 표현이 들어 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23절)
분명히 바울는 기질상 교만의 덫에 걸리기 쉬운 약점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는 바울의 뒤꿈치의 아킬레스였습니다. 더욱이 바울은 셋째 하늘을 다녀왔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영적 세계는 신비에 속한 곳입니다. 인간이 묘사할 다른 표현이 없어서 셋째 하늘이라는 표현을 하였습니다. 비몽사몽간에 그는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들림을 받아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은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신비한 체험 앞에는 약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자랑하게 되고 거만해집니다.
우리 주변을 한번 보십시오. 이상한 꿈만 하나 꾸어도 요란하게 떠들며 교만으로 눈빛이 번쩍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신비한 체험은 만일 그것이 건전한 것이라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속한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이나 요구에 의해서라기보다 주님 편에서 특별히 허락하시는 은혜입니다.
일반적으로 자신이 노력하지 않고 과분한 것을 얻으면 사람은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학교에서 가장 교만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머리가 좋아서 노력하지 않고 공부를 잘하는 학생입니다. 여자 중에 누가 교만한지 아십니까? 부모님 덕분에 어쩌다가 미인으로 태어난 자들입니다. 부자 가운데도 손이 못이 박히도록 노력해서 돈을 모은 사람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약함과 한계를 몸소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영적 세계에서도 이런 원리가 상통하고 있습니다. 노력 없이 은혜를 받으면 교만해지기 쉬운 것입니다. 설교자의 경우를 봅시다. 천부적으로 말 재주가 좋고 머리가 영리한 사람이 목사가 되어 사람들의 인기를 끌면 얼마 안 가서 그는 교만의 희생물이 되고 맙니다. 이런 사람은 설교 준비를 하기 위해서 땀과 눈물을 많이 흘리지 않습니다. 쉽게 준비해도 청중에게 감동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와 같이 설교 한 편 준비하는데 수 십 시간을 진통해야 끝나는 사람에게는 교만할 밑천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실 때 바울이 교만해질 위험을 사전에 막기 위해서 육체의 가시를 거두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교만은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악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고 했습니다. 단테는 그의 책 [신곡]에서 자기에게 가장 악한 죄 일곱 가지를 선정했습니다.
그 가운데 첫 번째가 교만이라고 했습니다. 교만은 자기 사랑의 다른 형태요, 자기 숭배의 다른 형태라고 했습니다. 분명히 교만은 하나님께 돌릴 영광을 자기가 취하는 자기 숭배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더 미워하고 대적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자신의 대적이 되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육체의 가시를 가지고 바울의 교만을 막으신 지혜가 얼마나 성공적이었는가를 보십시오. 14년 동안 셋째 하늘에 다녀온 이야기를 한마디도 입에 담지 않았습니다. 그가 부득이하여 고린도후서12장에서 그 이야기를 하게 되었을 때 3인칭을 써서 자신을 그늘에다 다 숨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통하여 오직 주님만을 자랑하는 겸손한 사람으로, “오늘의 나된 것은 오직 주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겸손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교만하기 쉬운 기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교만을 다루신 주님은 반드시 우리의 교만도 다스리실 것입니다. 우리의 교만을 꺾기 위해서 주신 가시는 무엇인지, 그것이 육체의 질병인지, 고부간의 갈등인지, 아니면 경제적인 압박인지를 잘 헤아려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날마다 엎드려 수없이 기도하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문제가 있다면 일단 하나님이 나의 겸손을 위해서 허락하신 하나님의 가시라는 것을 인정하셔야 합니다. 나 혼자서 가슴속에 깊이 안고 있는 내면의 뿌리 깊은 고통, 그것으로 인해 가슴 아파하고 실의에 빠지는 일이 자주 있다면 왜 그것이 계속 남아 있는지 하나님께 물어보셔야 합니다. 틀림없이 주님 앞에 겸손하고 온전히 순종할 수 있는 자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를 만들기 위해서라는 조용한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바울은 약한 데서 강해지는 하나님의 능력을 채득했습니다. 주님은 바울에게 이렇게 속삭여 주었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12:9).
이것은 바울에게 정말 놀라운 발견이었습니다. 평소에 바울은 육체의 가시가 자신을 영육 간에 약하게 만든다고 우려해 왔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음성을 듣자마자 자기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주저하지 않고 주님의 판단이 옳다고 승복했습니다. 그러자 그에게 놀라운 기쁨이 찾아들었습니다. 드디어 큰소리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라”(고후12:10)
하나님은 스스로 강하다고 자부하는 자를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는 독립자,/ 그는, 하나님의 눈에 가장 약한 자입니다. 하나님을 모신 의존자,/ 그는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강자인 것입니다. 우리의 가시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영적으로 잘 이용하면 하나님의 큰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육체의 가시가 나의 삶을 약하게 한다는 말을 입 밖에 내지 마십시오. 그것은 마귀의 소리이지 하나님의 소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능한 사람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바울의 생애를 살펴보면 “약한 데서 강해진다”는 주님의 말씀이 그대로 입증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강한 사람이었던지 보십시오.(가요?) 헬라와 라틴 문화권에 속한 수많은 사람들이 그가 전하는 복음 앞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에베소가 무너졌습니다. 빌립보가 항복했습니다. 고린도가 성문을 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로마가 쇠사슬에 묶인 초라한 바울 앞에 백기를 들었습니다.
비록 우리가 가시로 인해 한숨을 쉬고 눈물을 흘리는 날이 많다 할지라도 그것이 나를 강자로 만드는 하나님의 손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현실을 극복하는 초인적인 능력, 이것은 어디서 오겠습니까? 캄캄한 밤하늘의 별을 헤아리면서 낙망하지 않는 이 능력, 또한 어디서 오는 것이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능력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는 자와 함께 울며,/ 웃는 자와 함께 웃을 수 있습니다. 내 몫에 얹은 십자가도 가볍게 지고 갈 수 있습니다.
존 번연이 말하기를 “하나님이 덧셈을 하실 때는 뺄셈을 하시고, 뺄셈을 하실 때는 덧셈을 하신다.”고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는 마치 손해는 보는 것같아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더 많은 것으로 더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수학 공식은 우리의 것과 다릅니다. 물질계의 계산법은 영계의 계산법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더하는 것이 많아지는 것이요, 빼는 것이 줄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약한 데서 강해지는 능력을 만들어 내는 영계에서는 통하지 않는 법칙입니다. 우리의 고통, 문제, 실패 등은 우리에게 뺄셈같이 보이지만 하나님에게는 덧셈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주로 믿습니다.
바울이 육체의 가시를 가진 채 억누를 수 없는 기쁨을 맛보았던 일은 아무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체험하는 자만이 아는 하늘의 기쁨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기쁨은 고통이 물러가는 자리에 대신 들어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기쁨은 반드시 그렇지 않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수없이 발견하는 경건한 자들의 기쁨은 거의가 고통 대신에 얻은 대용품이 아니었습니다. 고통이 그대로 남아 있는 그 자리에 찾아온 기쁨이었습니다. 가시와 함께 온 기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경우를 보십시오. 십자가의 죽음을 불과 몇 시간 앞두고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15:11)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기쁨은 십자가의 죽음이 주는 고민과 두려움을 그대로 안고 유지한 기쁨이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길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뜻에 기꺼이 자기를 내맡겼습니다. 그의 기쁨은 이런 전적인 복종에서 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과 바울이 누렸던 기쁨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시를 안고 기뻐하는 여인
우리 주변에서 일어난 예를 하나 드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한 외국 잡지에 은혜로운 간증이 실렸습니다. 스튜어트 부인이 쓴 것입니다.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심장병이 있었습니다. 어릴 때 이미 내버려진 자식이나 다름없이 소망이 없는 아이였습니다. 부모가 이 병원 저 병원을 데리고 다니면서 온갖 치료를 다했지만 효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런대로 생명은 연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나중에 예수를 믿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그의 마음 속에는 계속 어떤 갈등이 있었습니다.
“인생이 참으로 누릴 수 있는 행복이 어떤 것일까? 사람이 정말 누릴 수 있는 기쁨은 어떤 것일까? 나에게는 기쁨도 없고 행복도 없어.” 항상 그녀의 내면에는 무엇인가를 찾는 갈등이 있었습니다.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릴 때 목사님이 “여러분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항상 기뻐하십시오” 하는 설교를 하면 속으로 반발이 일어났습니다.
“흥! 자기가 나처럼 심장병을 앓아 보라지. 나 같은 처지에 있으면 그런 설교를 절대로 못할 것이야.” 이렇게 항상 반항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춘기가 지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이상하게 병이 좀 호전되었습니다. 그래서 결혼을 하게 되고 아기를 둘이나 낳았습니다. 그런데 심장병이 재발했습니다. 병이 심해져서 절망적인 상황이 되었습니다.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병 고치는 집회라는 집회는 다 가보고, 안수 기도라는 기도는 다 받아 보았습니다.
그러나 몇 년을 쫓아다녔는데도 전혀 효력이 나타나질 않았습니다. 이런 상태로 캘리포니아의 오벨이라는 조그마한 마을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날마다 병상에 누워 있는데 그 마을에 사는 ‘리’라고 하는 성을 가진 믿음 좋은 부부가 그 가정을 찾아와서 사귀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믿음이 좋은 부부인지 그들의 눈동자는 맑았고 온화한 인품에 사랑이 넘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스튜어트 부인에게 신앙생활에 필요한 몇 가지 처방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처방은 먼저,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생활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부인에게 알맞은 성경구절을 매일 한 구절씩 주었습니다. 하루 종일 성경 구절을 외우며 묵상하게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주변에서 감사할 것을 자꾸 찾아보게 만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내키지 않았고, 도대체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 같았습니다. 그러나 스튜어트 부인은 정성을 다해 순종했습니다. 그랬더니 오래지 않아 쉽게 감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음으로 리 부부가 가르쳐 준 처방은 “스튜어트 부인!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양하십시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심장병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 아무리 주변이 아름답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습니다. 귀도, 눈도, 감각이 무디어진 지 오래였습니다. 아름다운 꽃을 보아도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라니 대단히 어색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순종하는 마음으로 창문을 열고 눈과 귀를 활짝 열었습니다. 아름다운 새 소리가 귀에 들려왔습니다. “하나님! 아름다운 새 소리 감사합니다.” 향기로운 꽃 내음이 코를 찌르면 “아! 하나님! 너무 향기롭군요!” 구름한 점이 눈에 들어와도 멋있다고 찬양했습니다.
자꾸 이렇게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의 아름다움을 찾아서 감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무디어졌던 오관이 새로 제 기능을 발휘하게 되었습니다. 듣지 못하던 것을 듣게 되고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되고 냄새 맡지 못하던 것을 냄새 맡게 되어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계속 감사와 찬양이 이어지는데 하루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감사를 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 나에게 심장병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강하게 밀려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주여! 집안일만이라도 좀 할 수 있게 해 주옵소서.” 그런 다음 억지로 일어나서 손에 잡히는 것부터 시작하여 집안을 치우기 시작했습니다. 입으로는 계속 감사의 말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점점 힘든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그런데 이 리 부부가 또 찾아와서 한 가지를 더 요구했습니다. “스튜어트 부인! 이제는 이웃들을 불러서 하나님이 당신에게 얼마나 큰 은혜를 주시며 당신을 사랑하시는가를 고백하고 간증하세요.” 그러나 스튜어트 부인는 그것까지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것만은 못해요. 이런 처지에서 이웃을 불러 무슨 자랑을 한다는 거예요?” 그는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리 부부는 계속 격려하며 권유했습니다.
그래서 마지못해서 한 번은 전화로 이웃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간증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그들은 곧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힘을 얻은 스튜어트 부인은 간증하는 생활을 계속했습니다. 간증을 하는 도중에 마음속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덮였던 뚜껑이 활짝 열리고 그 속에서 생수가 뿜어져 올라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기쁨의 생수(가 넘쳐났습니다)! 지금까지 37년 동안 한 번도 체험하지 못했던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 찾아왔습니다)! 심장병이 고쳐진 것도 아니요, 가난에 찌든 경제 사정이 나아진 것도 아니요, 남편이 실직당한 후에 복직을 한 것도 아니요, 모든 여건이 하나도 기뻐할 것이 없는데도 가슴 깊은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기쁨의 샘이 얼마나 강한지 도무지 가만히 누르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고백하기를 “아, 하나님! 내가 37년 동안 찾던 행복이 바로 이것이로군요. 심장병이 있어도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녀의 얼굴이 밝아졌습니다. 마음 속에 있던 갈등이 사라졌습니다. 불안과 욕망 대신에 고요와 만족이 찾아왔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뀌었습니다.
신비스러운, 놀라운 능력이 자기 안에서 역사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오히려 건강하게 걸어 다니면서 영적으로 병든 자들을 보면 불쌍하게 생각되고, 그들을 붙들어 새사람을 만들어 주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처럼 가시를 안고 기뻐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가시 위에 장미꽃이 핀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하나님께서 드디어 지신의 심장병까지 고쳐 주시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메드슨은 이런 시를 썼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는 나의 가시에 대하여
결코 감사하지 못했습니다.
나의 장미꽃에 대해서는
수천 번이나 감사하였지만
주님이 나에게 지워 준
십자가에 대해서는
한 번도 감사하다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나의 인생행로를 완성하신
사랑의 주님이시여!
이제 저에게 이 가시의 가치를
가르쳐 주옵소서.
그리하여 나의 눈물이
무지개 됨을 알겠나이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말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이 메드슨의 기도가 우리 모두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평생 동안 모든 가시는 다 뽑기 원하지만, 한 두 가지의 가시는 뽑지 못하고 살아야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가시 위에 피는 장미꽃을 우리는 찾을 수 있습니다. 놀라운 기쁨과 평안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할 것입니다. 가시를 안고도 가시가 없는 사람보다 더 큰일을 할 수 있는 능력자가 되는 체험을 날마다 하면서 살게 될 것입니다.
절대로 우리의 가시를 가지고 불평하지 맙시다. 누구를 원망하지 맙시다. 우리의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저와여러분 모두에게 이와 같은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따라 하겠습니다.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라.”
기도하겠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삶의 가시가 주님 앞에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 가시를 뽑기 위해 기도하며 부단히도 노력해왔습니다. 그러나 주님, 이제는 이 가시조차 나의 삶에 감사로 바뀌게 도와 주옵시고 기쁨으로 변화되게 하옵소서. 그 가시로 인해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삶을 살아가도록 주여 인도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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